장홍(삼국지)

1 후한 말의 인물

위서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여포장홍

臧洪
(? ~ 196년)

으리으리한 인물

자는 자원(子源). 광릉군 사양현 사람이며, 그의 아버지 장민(臧旻)은 흉노중랑장과 중산태수, 태원태수 등을 역임한 유명인사였다.

일단 연의는 물론이고 게임 등 관련 매체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인물이지만 정사 삼국지의 열전에서 삼국지의 유명인 여포와 함께 여포장홍전으로 묶여 있는 인물이다. 아마 이 항목을 들어온 위키러들도 대부분은 여포 항목에서 도대체 장홍이 누군가 궁금하여 링크를 타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으며 그렇다고 여포만큼 굵직한 활동을 하거나 이름을 남긴 것도 아닌데 왜 묶여있는 지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1.1 생애

1.1.1 반동탁 연합군

즉구령을 지내다가 영제 말년에 그만두고 장초의 초청에 공조가 되었는데 동탁이 황제를 죽이고 난리를 피우자 장홍은 장초와 장막 형제가 모두 태수를 역임하고 있으니 의병을 모집해 동탁을 죽이자고 진언한다.

장초는 이를 듣고 진류에 있는 형에게 얘기했는데 장막도 평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 말을 따르기로 한다.

이에 장막 형제는 연주자사 유대와 예주자사 공주, 등 여러 태수,자사들과 함께 산조에 모여서 단을 만들고 맹세를 하려는데 맹주 역할을 자처할 사람이 나오지 않고 모두 장홍을 맹주로 지지해 그가 맹주가 되어 선언문을 읽었다. 장홍의 말을 듣고 격정된 기운이 흘렀고, 눈물이 좌우로 흘러내려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은 일개 병졸이든 잡부든 정서가 격앙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장홍이 맹주가 되었다는 점이 주목되어 일반적으로 알려진 원소가 맹주인 반동탁 연합군보다 먼저 일어난 1차 반동탁 연합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기술이 중구난방이라 그렇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반동탁 연합군이 맞다(...) 후한서, 정사 삼국지, 배송지 주석, 자치통감을 다보고 이상한 부분은 또 버려야 한다(…)

당시 반동탁 연합군은 연의에서처럼 17로 제후군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게 형태가 아니라 지역에 따라 크게 하북,중원,형초 의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는데, 연합군의 맹주였던 원소는 하북지역의 관리들과 함께 사예주 북부의 하내군에 주둔하고 있었다. 형초지역의 관리들은 원술을 중심으로 노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장막 형제와 유대, 공주, 교모, 원유 등등 중원지역의 관리들은 연주 진류군의 산조현에 주둔하고 있었고 조조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맹주인 원소가 멀리 황하 이북의 하내에 주둔하고 있는 데다, 산조에 집결한 관리들 중 딱히 두각을 드러내 전면에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장홍이 산조지부 대표로 나선 것에 가깝다.

하지만 산조에 주둔하던 관리들은 어느 누구도 솔선하여 동탁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기에 결국 군량이 다 떨어져서 흩어지고 만다.[1]

1.1.2 원소 밑에서

한편 장초는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기 위해 장홍을 파견했으나 를 중간에 공손찬의 군대에 막히면서 유주와 기주의 싸움으로 인해 오도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 장홍은 맹주였던 원소를 만났는데 그는 장홍을 매우 마음에 들어해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청주자사 초화가 죽자 장홍을 청주자사로 파견해 그 곳을 다스리게 했다. 장홍이 2년동안 청주를 다스리자 도적들이 모두 달아났으며,[2]원소는 그의 능력에 감탄하며 동군태수로 전임시켰다고 한다.[3]

이후 194년, 장초는 여포를 앞세워 도겸을 공격하던 조조의 후방을 급습했고 거의 연주 전지역을 석권하지만 조조에게 조금씩 반격당하다가 마침내 195년 하순에는 형세가 완전히 기울어 옹구에서 포위당하게 된다. 조조에게 포위당한 장초는

단지 장홍에게 의지하면 그는 당연히 와서 나를 구해줄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그가 조조와 동맹관계인 원소한테 중용되어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장초는

자원(子源:장홍의 자)은 천하의 정의로운 선비이므로 끝까지 근본을 배반하지 않겠지만 단지 원소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금해 이곳에 도달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라고 말했는데, 과연 장초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장홍은 맨발로 뛰어나와 통곡을 하면서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원소에게 병마를 요청하면서 길을 요청했다. 하지만 원소는 조조가 자신과 가까웠던 데다 장초 형제와는 이미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상황이었기에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길을 막아 버렸다. 결국 옹구가 함락되고 장초가 멸족을 당하자 이 일로 장홍은 원소에게 원한을 품어 완전히 관계를 끊고 서로 왕래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장연과 연대하려는 등 원소를 견제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결국 195년 12월에 원소는 장홍을 공격하여 포위했지만 이듬해 봄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원소는 장홍과 동향 사람이었던 진림에게 편지를 쓰게 시켜 저항할 경우와 귀순할 경우의 이해득실을 알려주며 은덕과 도의에 대해 장홍을 비난했다.[4] 장홍 또한 장문의 답장을 써서 이를 반박하였는데 이 문장은 삼국지 장홍전에 실려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진림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비난함과 동시에 원소에 대해선 황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이로 인한 내부의 동요를 막을 길이 없자 편집증적으로 숙청을 남발하는 미친 독재자로 비난하는 것으로 이에 더해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황실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고 이에 정면으로 대립하며 분리주의를 선동해 전국을 군벌 천하로 만들고 이 가운데서 연합군의 맹주라는 지위를 이용해 영향력을 넓혀 왔던 원소의 근본적인 치부를 건드린 것이다. 장홍의 답신을 본 원소는 그가 투항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맹공격을 했으며, 결국 성안의 양식이 다 떨어지면서 구원병조차 올 일이 없자 관리들과 병사들을 소집하면서 말했다.

원씨(袁氏 : 원소)는 도의가 없어 일을 도모함에 원칙도 없고, 또 나의 군(관릉)에 있는 장수(장초)를 구조해 주지도 않았다. 나 장홍은 대의를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죽으니, 여러분들은 일도 없이 공연히 이런 하를 만나게 되었음을 유념하라! 성이 함락되기 이전에 처자들을 데리고 탈출하라!

라고 말했는데, 오히려 그들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자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면서 쥐와 죽순을 찾아서 먹었다. 주부가 마지막 남은 쌀 서 말을 가져와서 먹으라고 하자 먹을 수 없다면서 죽을 끓여 모두에게 나누어 먹게 하자 자신의 애첩을 죽여 장수와 선비를 먹였으며, 그 후 남녀 7, 8천명이 서로를 베어 자살해 그 누구도 성을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았다.

원소는 장홍을 좋아했으므로 성이 함락되고 장홍이 사로잡히자 휘장을 성대하게 치면서 여러 장수들을 대대적으로 소집해 장홍을 만나서 항복하라고 설득하지만 원소가 왕실을 도우려는 뜻이 없어 기회를 이용해 분수에 맞지 않는 망상을 획책한 점[5]과 장막을 형장으로 삼았으니 장초는 아우일텐데 그를 도와주지 않아 죽게 놔둔 점을 얘기해 원소를 욕하면서 항복을 거부해 결국 원소는 장홍을 죽였다.

1.2 여포와 묶인 이유

지금까지 보면 도대체 여포와는 관계도 없거나 여포와도 묶일 정도로 큰일을 한게 아닌데 어째서 같이 묶였는지 의문점이 나올텐데, 친구의 뒤통수를 친 장막을 옹호하고 자신의 애첩을 죽여 장수들과 나눠먹는 식인 행위를 저지르며 애꿎은 백성들을 서로 죽이게 하는 미친 놈이라 여포만큼의 막장이라고 같이 묶어놨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맨 마지막에 진수의 평에 그 이유가 드러나 있다.

여포(呂布)는 사나운 호랑이 같이 용맹스러웠으나 뛰어난 재능이나 특이한 모략이 없었으며, 천박하고 교활하며 번복하기를 잘해 오직 이익만 보고 일을 도모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사람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옛날 전한(漢)의 광무제방맹에게 기만을 당했으며, 가까이로는 위나라 태조장막(張邈)에게 화를 입었다.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가능하고, 오직 황제라야만 어려움을 해결하니 정녕 옳도다! 진등(陳登)과 장홍(臧洪)은 모두 영웅의 기개와 장사의 절개가 있었으나 진등은 성년이 되어 세상을 떠나 공적을 세우지도 못했고, 장홍은 약소한 군대로서 강대한 적을 대하여 원대한 뜻을 세우지도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즉, 의리의 대명사인 장홍과 배신으로 유명한 여포를 붙여놓아서 비교 좀 해봐라 하면서 진수가 붙여 놓은 것.지금 기준으로 보면 자기 첩을 죽여서 먹고 괜히 애꿎은 백성들도 서로 죽이게 만드는 미친 놈이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자. 진수가 이것까지 의도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홍은 자기 첩을 죽여 수하 장수들을 먹인 반면 여포는 수하 장수들의 아내를 탐하였다. 비교 하나는 제대로 된 셈.

1.3 미디어 믹스

삼국지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13탄부터 등장한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72/81/65/24. 나름대로 군웅이고, 원소가 회유를 했던 덕분인지 무력이 높게 책정되었다. 실제 인물의 별 볼일 없는 행적치고는 상당히 고평가되었다. 더 하질없는 무장들도 저 정도 받는 삼국지 게임에선 되려 저평가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2 삼국시대의 인물

張弘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경례(敬禮).

오군 사람으로 배움에만 힘써 벼슬을 하지 않았고 항상 검은 두건을 써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장오건이라 불렸으며, 전서, 예서를 모두 잘 썼다.

비백서의 묘함은 당시에 뛰어나서 표연함은 마치 구름이 노니는 듯 하고 격렬함은 놀란 번개와 같아서 신선이 날고 학이 춤추는 자태와 비슷함이 있었다고 하며, 스스로 비백서세를 짓고 아름다움을 서술했다.

구양순은 장홍의 서체에 대해 비백은 장오건이 세상에서 으뜸이고 왕희지가 그 뒤를 잇고 왕헌지도 절묘하다고 했으며, 장회관이 펴낸 서단에서는 장홍의 비백은 묘품, 소전은 능품에 든다고 평가했다.

  1. 예외적으로 조조가 동탁군과 교전했으나 패하여 군세를 모두 잃었다. 패하고 돌아온 조조는 장막 등 다른 관리들을 설득했으나 이들이 영 의욕을 보이지 않자 아예 산조 연합군에서 이탈해 군사를 모으다가 곧 하내로 간다. 반동탁 연합 시절 조조가 원소를 만난건 이 때의 일이다.
  2. 청주자사로 장홍을 파견한 계기가 되는 초화의 사망과 청주의 혼란은 191년 무렵의 일인데 이때부터 2년동안 장홍이 다스렸다고 하고, 자치통감에서 193년에 원담이 청주자사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장홍이 원담의 전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을 수도 있는데, 초화의 사망과 맞물려서 공손찬 또한 전해를 청주자사로 파견하고 있었고, 장홍전에서야 장홍이 '도적'들을 모두 몰아내고 원소가 그 능력에 감탄했다고 하나, 후한서 공손찬전에서는 전해가 청주자사로 파견되자 원소도 군세를 보내 2년에 걸쳐서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는데 이후 원담이 파견되자 전해가 패했다고 적고 있고, 원소전에 주로 달린 구주춘추에서는 원담이 막 부임했을 당시 청주 내에서의 원소의 영역권이 극히 미미했다고 적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청주에 난립하던 소군벌이나 황건 잔당의 격퇴까지는 그럭저럭 성공적이었을지 몰라도 전해한테 계속 두들겨 맞던 것 같다....
  4. 관도전투 직전에 토조조서를 써서 조조의 두통마저 멎게 만들었다는 그 진림이다.
  5. 아이러니하게도 원소가 유우를 황제로 옹위하려고 했던 것도 이 기군망상에 해당하는 것인데, 장홍은 이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