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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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淵珠

1946년 11월 22일 ~

1 개요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KBS 사장(2003-2008). 개그맨 누구랑 얼굴이 닮아 '이홍렬'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2 생애

1946년 11월 22일 경상북도 경주군에서 태어났다. 경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70년에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가[1] 1974년에 자유언론실천선언 운동에 참여했다. 그로 인해 1975년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에서 짤렸다. 이후 재야에서 활동을 하면서 때로는 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씨앗의 소리 편집장을 맡았고, 1982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미국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간에 참여하였다. 워싱턴 특파원직을 맡으면서 칼럼을 썼고, 이후로 논설위원직을 맡으면서 조선일보중앙일보, 동아일보등을 비판했다. '조폭언론'이라는 용어도 그때 직접 만든 용어였다.[2]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이후 박권상 사장이 퇴임하면서 KBS 노조와 시민사회단체에 의해 KBS 사장직에 추천되었다. 처음에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서동구 사장이 임명 9일만에 낙하산 논란으로 노조가 반발하여 낙마하면서 대체후보로 나서게 되었다.[3] 이후에 반 정연주 성향의 노조위원장이 선출되면서 적으로 돌아서다시피했지만 당시에는 KBS 노조에서 정연주를 사장으로 내세우는 데 호의적이었고, 노무현 대통령과도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게 있어서 무난하게 KBS 사장에 취임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사퇴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일단 2000년대 중반부터 한나라당에서 방송을 한번 손봐야한다는 얘기가 있었고 이때는 청와대에서 장관 선임관련해서 홍역을 치르고있었을때문에 별 다른 압박을 가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KBS 내에서 일부 직원들이 이명박 정부에 줄을 서는 광경이 벌어지면서 정연주에게 사실상의 사퇴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하다시피했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4] 그래서 결국에는 정연주가 못 버티고 KBS 사장직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지만,[5] 정연주 자신은 이전에 KBS 사장으로 재임했던 홍두표[6]박권상과는 다르게 6년 임기를 다 마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시기에 KBS 이사장 강제 교체와 배임혐의 고발[7] 등의 과정을 걸쳐서 2008년 9월에 불법적으로 해임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KBS는 급속하게 보수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때 KBS 사장 해임은 법원에서 결국 불법으로 판결이 났고, 정연주 자신도 잔여임기는 수행해야 한다는 의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권이 교체되기 전에는 사장직에 복귀하기가 힘들 듯하다. 여하튼 사장 해임 이후에 한겨레에 가끔씩 칼럼을 내거나 책을 내고 있고, 노무현 재단 이사와 리영희 재단 이사도 맡았으며[8] KBS 재임 당시의 일화나 권력-언론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강의하고는 있다. 다만 동아투위 관련 활동은 하기는 하나 보수언론과의 적대적인 관계인지는 적극적인 활동은 꺼려하는 편.

2014년에 길환영 사장이 강제 해임 되기전까지는 KBS 사장 중 유일하게 해임되었던 사장이였다.

3 KBS 사장 시절의 논란

3.1 노조와의 불화

애초에 사장에 오른 계기가 계기다 보니 사장 재임 초기에는 노조와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임기 초반에 무리하게 제2TV 공익성 강화 프로젝트를 내세우면서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의 인기코너들을 무리하게 교체하여 비판을 받았다. 그 후 장정진 질식사망사건 등의 악재가 있었고 2005년을 전후하며 지방 방송사의 구조조정 작업을 주도하면서 기술직이 대거 정연주에 반발하면서 반 정연주 성향의 노조위원장이 선출되었고 이후로는 노조와의 관계가 급속히 나빠졌다. 정연주 사장이 해임되는 과정에서 노조가 방관했던 것도 이와 연계가 깊었다. 그 후 정연주가 KBS를 강제적으로 떠난지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KBS 구 노조와의 관계는 그리 안풀려서인지 2015년에도 KBS 구 노조에서 정연주를 까는 자보가 나올 정도다.

3.2 경영 악화

2004년 평일 2TV 드라마의 부진으로 인해 대규모 적자가 발생했다. 특히 '4월의 키스'는 조한선, 이정진, 수애 등 인기 스타들을 전면에 내세웠으나 전형적인 삼각 멜로인 데다가, 극을 끌고 가는 캐릭터가 약했던 점, 느슨한 전개 등으로 한자릿수 시청률에 머물러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는 데 그쳤다.

2005년과 2006년도에는 '스펀지'와 '상상플러스'가 연이어서 대박을치고 2TV의 평일 드라마도 그럭저럭 시청률이 잘 나오면서 경영면에서 그럭저럭 성과를 올렸지만, 2007년도에는 제2TV 드라마들이 연이어서 부진하는 바람에 광고가 잘 안 팔려서 다시 적자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수목드라마로 '마왕', '경성스캔들', '사육신', '인순이는 예쁘다'가 모두 한자릿수 시청률로 폭망했다.[9]

여하튼 정연주 자신도 이에 대한 문제의석을 가지고 있던지라 2000년대 중반에 수신료 인상을 한 차례 시도해봤지만 수신료 인상을 시도했을때가 2006년도인지라 당연히 빠꾸가 나버렸고 그 지지율 높다던 문민정부 초기때도 못한게 수신료 인상이다 2008년 상반기에 기존의 편성조치를 뒤엎는 개편안을 내놓기도 했다.[10][11]

3.3 프로그램 제작에 대한 개입과 자율성 상승

1980년 8월부터 1985년 2월까지 KBS 사장을 지냈던 이원홍과 함께 역대 KBS 사장들 중 '왕PD' 양대산맥으로 통했다. # 사장이면 사장답게 경영에만 힘써야 하는데, 프로그램 제작에 깊이 관여하며 PD 지휘까지 하려 했다는 것.

특히 문제가 불거진 것은 2008년의 인기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연장 방영과 제작비 증가분 협상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었다. 이때 해당 드라마 외주제작사 대표와 직접 만났는데, 그 직후 드라마 제작비가 당초 2100만원에서 2600만원으로 늘어났다. 당시 K모 제작본부장이 팀장회의에서 정 사장이 상대 외주 제작사 대표를 만났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인상폭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당시 KBS 노조는 이에 대해 2008년 5월 15일자 노보에서 "계약 대상자와 만난 후 일방적으로 지침을 내린 것은 윤리를 뛰어넘어 정 사장이 과연 공영방송 사장으로서 최소한의 도덕성과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고 밝혔다. 그리고 5월 22일자 '정연주와 K 본부장은 진상을 밝히라'는 내용의 제2탄 성명서에서는 "실무진이 한창 힘겨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공영방송의 사장이 상대 외주 제작사 대표를 만난 것은 매우 부적절하고 비도덕적인 행동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며 정사장이 외주제작사 대표와 왜 만났는지를 물었다.

여담이지만 무인시대를 끝으로 고려사 계획을 끝낸 게 정연주 자신의 성향때문이라는 카더라가 돌아다닌다. 원래는 '북벌영웅' '무인시대2' '삼별초' '망국'까지 고려시대를 무대로 한 정통사극이 계속 이어질 계획이었는데, 정연주 사장 시절 그 계획이 갑자기 중단되었다는 것. 그런데 사실 고려사 계획을 입안했을 당시 KBS 사장이 홍두표라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라 동아일보 선배인 박권상이 고려사 계획을 입안했다는 점에서 볼 때, 고려사 계획의 중단이 정연주의 성향 때문이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고, 다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봤을때 2004년 당시 KBS가 1000억원대 적자를 봐서 장연주 자신의 입지에 큰 타격을 입은데다가[12], 무인시대의 시청률이 호평에도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았다는 점[13] 때문에[14] 일종의 타개책으로 불멸의 이순신의 제작안을 승인했다는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오히려 시사 프로그램과 보도 프로그램의 자율성은 정연주 사장 치하에서 더 잘 보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5][16] 시사 프로그램과 탐사보도, 제2 TV의 보도프로그램이 강화된것도 바로 정연주 사장 재임시기였다.[17] 정연주는 의외로 드라마 덕후였나? 그 밖에 프로그램 아이템 선정이나 편성에 대해서도 대체로 내부 구성원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편이었던지라 정연주 퇴임 후 KBS 내 보도국 기자들이나 일선 제작진 가운데서 정연주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꽤 높다는 후문도 있다.[18] 실제로 2008년 9월에 정연주가 불법적으로 해임되었을 때 KBS 노조에서 철저하게 방관하는 입장으로 시위대를 막을려햇던 행동을 보였던 데 반해 기자협회와 PD협회에서는 정연주의 강제해임만은 어떻게든 막을려고 했고 이때의 갈등으로인해 기자와 PD를 중심으로 KBS 제2노조가 창설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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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은 상상도 못할일이지만 당시에는 동아일보가 야당지였다. 지금처럼 우경화된 것은 1975년 동아일보 해직사태 이후. 정연주 이전에 사장직을 역임했던 박권상도 동아일보 출신이다.
  2. 덕택에 정연주가 사장에 재임했을때 조중동에서 정연주를 까대는 기사를 꽤나 냈다는 후문이고 사장직 해임을 도발하기도 했다고.
  3. 엄밀히 말하자면 KBS 노조와 시민단체들이 정연주를 단독으로 추천한건 아니고 이형모, 성유보와 동시 추천된 형태였다.
  4. 고대영 현 KBS 사장이 이 움직임과 관련되어있다고 전해지며, 또한 이들 직원들중에서 이병순-김인규-길환영 사장 시절에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간부자리에 앉아있는 경우도 태반이라고 전해진다 2010년대 KBS 뉴스의 논조가 보수화된것도 이들이 보도국 간부로 있는것과 연관이 있다고
  5.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정권교체되면 한나라당에서 방송을 손봐줘야 한다느니 했다는 썰이 흘러나왔고,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MBC 민영화론이나 KBS 2TV 재분리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실제로 KBS 제2 TV의 재분리나 MBC의 재민영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KBS와 MBC, YTN 이사진 교체와 사장해임, 종편 설립으로 어느정도 현실화 되었다는게 중론.
  6. 다만 홍두표는 단순히 사장직을 사퇴했다기보다는 한국관광공사로 이직한것에 가까운 형태기는 했다. 물론 1년만에 비리혐의로 콩밥먹는 신세가 되었기는 해서 경력상으로 흑역사로 남게 되었지만(...)
  7. 세금을 탈세해서가 아니라 세금을 잘내서 KBS에 손해를 끼쳤다는 명목으로 검찰에서 고발한것이다. 당연하게도 세금을 성실납부했다고 고발까지하는 건 아무리봐도 이상한 일수밖에 없기에 법원에서 무죄판결 받았다.
  8. 정작 노무현을 만난적은 몇번 없다고 한다.(노무현이 대통령 되기전에 정연주 칼럼을 꽤 봤다지만 그와 별개로 사적인 친분은 없다시피 했다.) 다만 사장해임후에 동질감이 들다보니 노무현 재단 이사를 맡게 된것이라고, .[1]
  9. 하지만 길환영-조대현 사장 임기 때로 와서는 이보다 더 심하게 주말 드라마를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이 대부분 시청률이 부진에 빠지게 된다. 특히 월화 드라마동네변호사 조들호구르미 그린 달빛를 제외한 전부다 평균 10%에도 못미치는 한자리 시청률를 기록하고 있으며 예능 프로그램도 해피선데이 빼고는 전부다 한자리 시청률를 기록하고 있다.
  10. 이 개편안 중에서는 대하 드라마2TV로 이동하는 내용도 있었다.
  11. 하지만 아이러니한건 정연주 이후의 사장들 중에서 정연주보다 광고수익을 잘냈다고 볼수있는 사장이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다.(그나마 경영잘했다고 볼수있는 사장이 김인규 정도다.) 그나마 KBS의 광고액수가 6000억을 넘었을때가 2012년뿐이었고, 그 이후에는 5000억대에 머물고 있을 지경이니 말 다한 셈
  12. 이게 왜 타격을 받을일이냐면 한창 시청료 거부운동으로 시청료 징수율이 40-50%대에 불과했던 시절에도 수백억대 적자를 본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3. 다만 이건 공익성을 강화하겠다고 원래 대하사극 뒷 부분에 편성되었던 시사프로그램을 9시 뉴스 뒷시간대에 편성하고, 대하사극 시간대를 10시대로 잠깐 옮긴것도 영향이 꽤 크기는 했다.
  14. 물론 2010년대 기준으로 본다면 넘사벽급으로 잘 나온거지만 용의 눈물 방영시기부터 대왕 세종 방영 초기까지는 기본 20%는 넘게 나오던게 보통이었다. 만약에 1TV에 광고가 지속적으로 편성되었으면 KBS에게 그야말로 노다지 프로그램이 될판이었다
  15. KBS 전직 보도국장이었던 김시곤도 보도국장에서 해임당한 후에자폭하는 김에 자기 혼자 못 죽겠다고 직접 증언한 내용이다. 그 만큼 뉴스프로그램에 별로 간섭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16. 실제 한미FTA 관련해서 KBS 프로그램에서 한미 FTA에 대해 대놓고 까댄덕에 참여정부 인사들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17. 2TV시간대에 KBS 8 아침뉴스타임이라는 나름대로 규모있는 뉴스프로그램이 신설된것도 정연주 사장 시기였다.. 물론 이전에도 뉴스를 아주 편성 안 한 건 아니지만 제2 TV 아침 교양프로그램의 코너로 편성되거나 2, 3부 사이에 짤막하게 삽입된 수준이었다. 또한 심야시간대에 편성했던 기존의 생방송 '세계는 지금'을 확대해서 재편성한 시사프로그램 '생방송 시사투나잇'은 경쟁프로그램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KBS 뉴스라인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다만 KBS 8 뉴스타임은 광고가 잘 안 팔려서 애물단지 신세였다. 2000년대 초반 뉴스투데이(KBS) 수준으로만 팔렸어도 애물단지 취급은 안 당했을 터
  18. 이러한 이유는 정연주 이후의 사장의 경영수완이 영 좋지않고 그러면서도 안전빵에나 신경쓴다는 점도 한 몫한다. KBS 드라마 PD들과 예능PD들이 상당수가 JTBC나 CJ로 이직할 정도면 말 다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