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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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군 컬러 영상

1 개요

이탈리아 왕국군(Royal Italian Army)은 사르데냐 왕국,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 1861년 부터 1946년까지 존재했던 이탈리아 왕국의 군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군의 한 축을 담당하였고 1943년 이탈리아 항복후 이탈리아 왕국군은 연합군과 추축군으로 나뉘어 살로 공화국이탈리아 공화국으로 분리된후 전쟁이 끝나고 이탈리아군으로 재통합된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독일 국방군일본군에 비해서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고 오히려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을 쓰면서 주위에 민폐나 끼치는 쓰레기 수준에 군대 취급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이 신뢰성이 부족한 이야기들뿐이고 과장되거나 변질된 이야기가 대다수이다. 이 문서는 객관적인 문서로서 이탈리아 왕국군을 서술한 것이다. 근데 도시전설을 제외하더라도 진짜 못싸우긴 했다 NCR 군인이라 카더라. 물론 매우 닮았다

2 이탈리아 왕국군의 제식병기

2.1 육군

이탈리아군 보병장비 선전영상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이탈리아군 보병장비
개인화기소총볼트액션 소총카르카노 M91/M38
반자동소총아르마구에라 M39, 브레다 M1935
기관단총MAB 18, MAB 38
권총이탈리아제보데오 M1889, 리센티 M1910, 베레타 M15/17, 베레타 M23/31/32, 베레타 M34/35
오스트리아제로트-슈타이어 M1907, 슈타이어 M1912
지원화기기관총피아트-레벨리 M1914/35, 브레다 M30, 브레다 M37/38, 브레다-SAFAT
대전차화기기병총/대전차용 총 "S", 판처파우스트, 라케텐판처뷕세(판처슈렉)
화염방사기란차피암메 M35/40, 란차피암메 M41
박격포브릭시아 M35, 81mm 박격포 M35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이탈리아군 기갑장비
장갑차장륜 장갑차Lancia 1ZM, Fiat 611, AB40/41, AB43, S.37, SPA Dovunque 35, AS.42, Lince
반궤도 장갑차Breda 61, 피아트 727
전차경전차피아트 3000, L 2/29, L3/33, L3/35, L3/38 , L6/40
중형전차M11/39, M13/40, M14/41, M15/42, 사하리아노
중전차P26/40, P43
노획 전차T-34, 르노 R-35/40, 소뮤아 S-35
자주포/대전차 자주포세모벤테 L40, 세모벤테 75/18, 세모벤테 75/34 , 세모벤테 75/46, 세모벤테 105/25,
세모벤테 90/53, 세모벤테 149/40, 기타
차량Breda 32, SPA 38R, 피아트 618, 피아트 626, 피아트 666, Lancia Ro, TL 37, 피아트 508
모터사이클Guzzi Alce 500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이탈리아군 화포
곡사포105/28 Mod. 1916, 149/19 Mod. 37, 149/35 Mod. 1901. 안살도 149/40 Mod. 1935, 안살도 210/22 Mod. 1935
보병포65/17 Mod. 1908/1913, 75/27 Mod. 1911, Obice da 75/13, 75/18 Mod. 34/35, 75/27 Mod. 1906, 100/17 Mod. 14
대전차포블레르 47mm 대전차포, 75/32 Mod 37, 75/34 Mod. S.F.
대공포브레다 20/65, 브레다 37/54, 75/27 C.K, 75/46 C.A. Mod 34, 90/53 Mod.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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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공군

제2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군 항공기
전투기복엽기CR. 32, CR. 42 파르코
단엽기C. 20x 시리즈, Re. 200x 시리즈, G.50 프레치아, G.55 첸타우로, D.520F, Bf109G
폭격기中폭격기BR.20 시코그나, SM. 79 스파르피에로, SM.84, SM.81 피피스트렐로
重폭격기피아지오 P.108
급강하 폭격기Ju87G
수송기SM. 79, Ju 52G
※ 비고 F:프랑스기체, G:독일기체

2.3 해군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이탈리아 왕립 해군 군함
어뢰정M,A,S 어뢰정
구축함팔레스트로급, 제네랄리급, 쿠르타토네급, 레오네급, 셀라급, 사우로급, 투르비네급, 나비가토리급, 다르도급, 폴고레급, 마에스트랄레급, 오리아니급, 솔다티급(*), 메다글리에 드'오로급(*)
잠수함
경순양함콘도티에리급, 카피타니 로마니급(*), 타란토급
중순양함트렌토급, 차라급, 볼차노
항공모함아퀼라(*), 스파르비에로(*)
수상기모함주세페 미라글리아
전함콘테 디 카보우르급, 카이오 두일리오급, 리토리오급(*)
포획함구축함 프레무다, 베오그라드급 구축함, 기타 2차대전기 이탈리아 포획 함선
(*) 표기: 해당 함급의 일부 또는 전부가 건조 중단된 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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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립 육군 (Regio Esercito)

3.1 이탈리아 독립전쟁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격돌하는 사르데냐 왕국군

이탈리아는 여전히 통일되지 않은 상태로 오스트리아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에 많은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에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자유주의 정부를 원하고 있었고 1848년 피에몬테 주에서 반오스트리아 혁명이 발생하였고 베네치아, 롬바르디아 왕국의 밀라노에서 연속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북부 이탈리아에 단결을 외치며 오스트리아 제국에 선전포고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사르데냐 군은 12,000명으로 구성된 군단으로 롬바르디아 지역의 혁명을 지원하였지만, 예상외로 혁명을 지원해주는 세력이 없었고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진압되어 패배를 인정하고 롬바르디아 지역에 간섭하지 않기로 서명한다.

제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이후 사르데냐 정부는 자신들과 싸워줄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다. 유럽과의 관계 형성을 위하여 크림전쟁 에 참여 이후 파리 평화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의 간섭행위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줄것을 호소하였고 두 국가가 이탈리아 반도에 관심을 두는데 성공한다 1858년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와 비밀협약을 맺는다. 조약은 니스와 사보이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대신에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 그 후 오스트리아 정부를 자극하여 그들이 사르데냐 군대를 해산하라고 압력을 행사하자 그것을 무시하였고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170,000명 사르데냐군. 70,000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220,000명의 오스트리군과 전투를 하게 된다 연합군은 철도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피에몬테 지역에 소집된 연합군은 롬바르디아 지역의 오스트리아군을 진입하기 위해서 타치노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홍수가 발생하여 행군 속도는 둔화하였고 오스트리아군이 토리노 지역에 먼저 진입 연합군을 압박하게 된다 연합군은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 지역으로 이동하여 포 강에서 도하작전을 하여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 피해를 입자 밀라노의 사각 요새로 후퇴하게 된다. 연합군은 솔페리노 전투 산마르티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지만, 프로이센군의 전쟁 참여를 두려워한 프랑스는 단독으로 협상하여 사르데냐에 파비아 롬바르디아 대부분에 지역을 양도하는 것으로 끝내버리자 이탈리아 통일을 원하던 사르데냐 정부는 항의하였지만 결국 굴복하고 협상에 수락하게 되었고 원래 약속대로 니스와 사보이 지역을 양도한다.

칼라타피미 전투에서 시칠리아 저항군과 전투를 하는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프랑스의 독자적인 협상으로 통일의 꿈이 물 건너가고 니스와 사보이 지역 양도 되자 분노한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 하여 프랑스를 공격하려고 준비하였지만 카밀로 카보우르가 설득을 통하여 남이탈리아로 가도록 유도 하였고 때마침 시칠리아 왕국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양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한다.아에 상륙한 가리발디 군은 양 시칠리아 군과 시칠리아 인들의 저항을 받지만 칼라타피미 전투에서 저항군이 분쇄 도고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 단의 활약 이후 양 시칠리아 군은 붕괴하였고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역을 점령하였고 사르데냐 왕국은 그가 자신의 왕국은 건설하는것이 아닌가 불안해했지만 가리발디는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왕국에 양도하게 된다. [1]

시칠리아 지역까지 손에 넣은 사르데냐는 1861년 토리노에서 대의회를 소집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제 베네치아와 로마만을 남겨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제국의 소유였고 로마에는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통일은 또다시 지지부진해졌다. 통일이 느려지자 가리발디는 또다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를 공격하였지만 패배하여 카프레라 섬에 구금된다. 이탈리아는 안전하게 로마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1864년 프랑스와 협상하여 2년 내에 로마에서 철수한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교황청은 부랴부랴 군대를 확장하였고 로마를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1866년 프랑스군은 로마에서 철수한다.

제 3차 이탈리아 통일전쟁 -작성중-


사르데냐 원정군의 양 시칠리아 점령 이후 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통일을 발표, 직후 육군을 통합하여 이탈리아 왕국군을 편성하였다. 하지만 통일이후 이탈리아의 불안정한 상황때문에 산적들과 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로 인해서 막심한 피해를 보고 새로운 육군 편제를 조직, 각각 보병, 기병, 포병으로 나누고 이탈리아 육군 설립 첫날에 32만 명의 병사와 장교 1만으로 구성된 18개 사단을 편성한다.

3.2 20세기 초반

아두아 전투에서 고전하는 이탈리아 왕국군

20세기 초반에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식민지가 되지 않고 남아있던 에티오피아에 눈독을 들인다. 이탈리아군이 에리트레아에 1,000명에 군대를 상륙 시키면서 1885년 5월에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군의 전력을 무시하고 있었고 소수의 군대만으로도 에티오피아를 쉽게 점령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이후 1896년 아두와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로 에리트레아소말릴란드 지역을 얻는 조건으로 에티오피아를 포기하게 되고 대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린다.

눈길은 돌린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만 제국이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 눈독을 들인다. 1897년 4월 25에 크레타에 상륙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1900년 7월 14일에 중국에서 벌어진 의화단 운동에 진압군으로 참여하면서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1911년 9월 29일에 이탈리아-터키 전쟁이 시작된다. 내부에서 천천히 붕괴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를 막을 힘이 없었고 10월에 트리폴리를 점령, 1912년에는 오스만제국과 강화 협상을 통해서 리비아 지역을 습득한다.

3.3 제 1차 세계대전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향해서 포격하는 이탈리아 포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1915년 5월 24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넘어 전진했다. 이탈리아에서 전투기탱크가 전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16년의 여름에 고리치아 전투중에 사보티노(Sabotino)산에 전투에서 피에트로 바도기오(Pietro Badoglio) 장군이 지휘하는 4사단의 활약으로 고리 치아 지역을 점령하여 이탈리아 왕국군은 유리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17년 10월 24일, 카포레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독일 부대의 맹공에 군단이 분쇄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이탈리아는 전술을 방어전으로 전환한다. 1918년 춘계 대공세를 위해서 독일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빠져나가고 이탈리아 왕국군은 카포레토 전투에서에 치욕을 갚기위해서 피아베 강에서의 방어전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게 몇배로 갚아줌으로써 복수에 성공했고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에 전쟁에서 승자가 될수 있었다.

1918년에 왕립 군대는 해외로 원정군을 보냈으며 프랑스와 알바니아에서 일어나는 전투에 참여하였고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에 이탈리아 군대를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왕국은 전사자 60만 명에 부상자 90만 명 이라는 막심한 피해로 인해서 이탈리아 왕국군을 현재 편제로는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방위군 수준으로 군대를 재편성한다.

3.4 전간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승리를 자축하는 이탈리아의 신문

제1차 세계대전이 승리로 끝난 후 이탈리아 육군은 최소 인력만을 남기고서 규모를 대폭 축소한다. 그 후 전간기 동안에 1922년 리비아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 리비아 반군과 전투를 하였고 그과정에서 많은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여 국제사회로 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이탈리아는 여전히 동아프리카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국민에게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계획을 세운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대규모 부대와 많은 수의 장비를 에리트레아와 소말린란드 지역에 배치한다

이탈리아 동아프리카 부대는 소말리아 점령을 목표로 모가디슈와 소말리아 해안을 따라서 군병력을 이동, 배치하였다. 1935년 이탈리아 왕국의 군사적 행동에 에티오피아 왕은 전쟁을 개시하였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 10월에 말레브 강을 건너 에티오피아 왕국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압력을 가하면서 전쟁은 이탈리아의 승리로 끝난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탈리아 왕국군은 프랑코의 민족주의자들에게 많은 수의 무기와 병력을 파견하면서 내전 기간 동안 자신들의 무기에 대해서 실전 테스트를 한다. 1939년 4월 이탈리아군은 그리스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한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불가침을 선언했다. 에티오피아와 스페인에서의 전쟁으로 군의 현대화가 완료되지 못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판단과는 달리 전쟁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이탈리아도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75개에 사단을 편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단 편성도 뻥튀기 수준이었고[2] 다른 심각한 문제점들이 속속 드러났다. 기갑 장비들은 탱켓이나 경전차가 주류였고 트럭, 기관총, 군복은 품질 불량이었고 장비 수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3.5 제 2차 세계대전

3.5.1 프랑스 침공

알프스 산맥을 오르는 이탈리아 알피니 사단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대전이 발발한 후 한동안 중립적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영국에게 연합군 쪽으로 참전할 의사가 있음을 타진한 적도 있는데 이 때 요구한 조건이 지나치게 무리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낫질작전으로 전세가 독일 쪽으로 유리해지자 독일과 프랑스와 함께 전쟁을 들어갔다.

이 전투는 서부 알프스의 전투로도 알려져 있으며 1940년 6월 10일에서 1940년 6월 25일까지 총 15일이라는 잛은 시간 동안 전투를 하였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실패 전투로 프랑스군은 이탈리아군에 참전을 이미 예상하였기 때문에 알프스 요새에 대해서 이미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또한 알프스 산맥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곳이며 도로 시설도 잘 정비되지 않은 편이라 산악병을 이용해서 진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

프랑스 항복으로 영토와 이익을 얻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631명의 사망자 616명의 실종자 2631명의 부상자 및 동상 자가 발생하면서 짧은 전쟁을 위해서 사용된 인력손실과 작전에 동원된 장비들을 너무 큰 대가였다.

3.5.2 아프리카

3.5.2.1 동아프리카 전역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희생된 이탈리아군을 기리는 프로파간다

이탈리아 왕국은, 1940년 6월 10일 전쟁을 선포했으나 동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에는 장기전을 준비할 병력이 없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집트, 수단, 케냐 지방을 걸친 일부분의 점령 공격을 명령하였고 장갑차와 전차 항공지원 등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소말릴란드 주둔 영국군은 현지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전부였고 무기는 구식이었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점령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정복의 성공 하였지만 영국군은 동아프리카를 포기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동아프리카 해안을 포위 하는것을 시작으로 동아프리카 주둔군과 본국에 보급망을 끊어 버리고 수단, 케냐에서의 공격과 그리고 에티오피아 내부 저항세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이탈리아에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앰바 알라지 전투에서의 패배와 곤다르 전투에서의 저항을 끝으로 1941년 11월에 마지막 수비대의 항복으로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3.5.2.2 북아프리카 전역

북아프리카 이탈리아군의 세모벤테 75/18 자주포와 지휘차량에 앉아 있는 롬멜

1940년 8월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의 패배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무솔리니는 이집트로의 전진을 명령한다 하지만 군 지휘부는 보급상에게 문제를 거론하여 작전 수행을 거부했지만 무솔리니는 이집트에 정복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리비아에 파견된 25만에 군대를 동원하여 이집트를 공격하지만 우려하였던데로 보급선이 길어지자 130km 지점에서 더는 전진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 본토에 상황이 나아지면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였고 이탈리아는 10주만에 800km이나 전선이 밀려버렸다 바르디아 요새와 토브룩 요새 등 중요한 군사적 거점을 잃어버렸고 많은 수에 장비와 인력을 잃으면서 이탈리아군의 사기는 바닥인 상태였다.

이런 이탈리아군에 상태를본 히틀러는 북아프리카에 독일군 파병을 결정했고 에르빈 롬멜 중장을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군을 돕게 하였다 롬멜의 지휘 아래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선전하며 배틀액스 작전은 성공하였고 영국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면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을 목표로 전진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의 패배로 더는 전진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미군이 횃불 작전에 성공하면서 아프리카 군단은 위축되었고 튀니지 전투에서 저항하지만 탈출로가 없어서 항복하게 된다.

3.5.3 발칸반도

3.5.3.1 알바니아 침공

이탈리아를 뱀 알바니아를 토끼로 묘사하여 이탈리아 왕국의 침략 야욕을 풍자화한 소련 신문

이탈리아 왕국군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인 알바니아를 무력 침공한 사건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이전부터 이탈리아는 1925년부터 광물 자원 채굴 조약을 시작으로 알바니아 왕국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1931년 알바니아 왕국은 이탈리아에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서 조약 갱신을 거부하였고 1934년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그리스와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영향력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1939년 독일이 체코 슬로바키아를 합병하면서 이탈리아 또한 알바니아 합병할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합병이 불필요하다고 반대 하였지만 무솔리니는 왕의 의견을 무시하고 알바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내지만 알바니아는 거절한다 이탈리아군은 22,000명에 군을 동원하여 알바니아에 상륙한다 알바니아군은 14,500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탈리아 장교에 명령을 받는 상태였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대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 항복을 받아내고 알바니아의 왕 조구 1세를 해외로 추방한다.

이후 이탈리아는 동군연합 형식에 알바니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설립한다 몇몇 탈영한 알바니아군과 알바니아 애국자들은 파르티잔을 조직하여 이탈리아군에 대항하였다.

3.5.3.2 그리스 침공

그리스 내부로 진군하는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병

1940년 10월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를 교두보로 하여 그리스 침공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면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준비도 이미 다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탈리아군은 그리스에 험준한 산악지형과 그리스인들에 저항으로 인해서 이탈리아군은 그리스 내부로 더는 진격할 수 없었고 영국군이 참전하면서 상황은 약화하여 알바니아까지 밀려난다 그 이후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1941년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그리스에 개입할것을 요청하였고 독일은 개입하기로 하였다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이 연합하여 그리스를 합병하는 데 성공한다 그 이후 그리스를 해방하기 위해서 연합군이 그리스에 상륙하지만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저항을 계속하였고 1945년이 돼서야 그리스를 해방할수 있었다.

3.5.3.3 유고슬라비아 침공

유고슬라비아에서 도로 검문을 하는 이탈리아군

유고슬라비아가 연합군 편으로 돌아서 버리자 이탈리아군은 독일군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감행하고 짧은 시간 동안 전쟁을 수행한다 그 이후 이탈리아군은 30사단을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배치하여 치안유지를 담당한다 하지만 30사단이나 되는 이탈리아군을 유고슬라비아에 주둔시킨 것은 이탈리아에게 도움이 안 되는 전력 낭비였고 [3]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들은 이탈리아군에 계속해서 피해를 강요하였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이탈리아군은 많이 와해된 상태였고 1943년 네레트바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탈리아 주둔군은 분쇄되어 버리고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간섭은 끝나버린다.

3.5.4 동부전선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SIR)에 관한 다큐멘터리
812 시베리아보병연대에 돌격을 감행하는 사보이 기병연대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이탈리아군에 참여를 요청한다 하지만 이탈리아군 지휘부는 이탈리아는 현재 많은 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중이며 러시아 원정이 이탈리아의 산업력에 많은 부담이 될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무솔리니는 지휘부에 의견을 무시하고 원정군에 편성을 명령한다.

신속하게 3 개의 사단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 군단 CSIR(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가 편성되었다 동부 전선에 1941 년 7 월 중순에 도착하였고 처음에는 독일 육군에 제1 기갑사단과 함께 활동하였고 두 개의 다른 이탈리아 원정부대는 이탈리아 제8군 ARMIR(Armata Italiana in Russia)으로 재편성후 1942 년 4 월에 다시 참가 했다 돈 강의 지역에서 헝가리군 및 루마니아 제 3군과 함께 스탈린 그라드를 향해 전진 하였고 스탈린 그라드 전투가 시작되고 독일 지휘부는 이탈리아군을 루마니아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북부에 배치되어 돈 강 방어선을 구축한다.

소련군에 공세이후 후퇴하는 이탈리아 원정군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중 소련군이 천왕성 작전(Operation Uranus)이 시작되면서 독일 제6군은 포위되고 루마니아군이 분쇄 돼버리자 이탈리아 원정군은 독일군에 퇴각을 요청하였지만, 독일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1942년 12월 11일 이탈리아가 예상했던 대로 이탈리아군을 소멸시키기 위한 소(小) 토성 작전이 시작된다

이탈리아군은 소련군에 공세에 맞서서 처절하게 저항하였지만 기갑전력은 경전차세모벤테 구축전차 그리고 대전차무기는 소구경 대전차포산악포가 전부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리아군이 전멸하는것은 당연한 결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독일군도 지원물자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몇정에 노획전차를 주는것이 전부였다.

1943년 1월 14일 이탈리아 군의 실질적 전력인 이탈리아 알피니 산악 군단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산악병 군단은 엘리트 사단이였지만 그들이 싸우는곳은 평원이었고....[4] 무기또한 빠르게 분해 조립이 가능한 65mm 산악포가 전부였고 1월말까지 저항했지만 전멸하게된다.

이후 1942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마저 소련군에게 항복하였고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제6군 전체와 제 4기갑군의 대부분, 루마니아군 5개 사단. 이탈리아군 제8군이 괴멸당했고 이탈리아 군은 87,795명(장교 3,168명, 부사관 및 사병 84,627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34,47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며 전체 235,000명의 병력 중 114,520명을 손실했으며 대부분의 차량과 장비 역시 상실하였고 함께 원정온 공군 전력 또한 괴멸되었다.

3.5.5 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독일 공수부대

1943 년 7 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을 시작하고 한 달 후 섬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고 연합군은 이탈리아 본토에 진입하게 된다. 그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원로원 투표에 의해서 무솔리니가 실각하여 구금되고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는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연합군에 항복 서명을 하게 된다.

하지만 휴전의 발표 이후 히틀러는 격분하여 독일군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이탈리아군을 장악하기로 결정하였고, 휴전도 개전만큼이나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었기에 휴전은 발표되었지만 상부로부터 아무런 명령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군은 부대에 그냥 대기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빠르게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북부의 이탈리아군을 장악한다. 독일군은 독일에 협력하지 않는 이탈리아인군은 사살했고, 해산되거나 탈영한 이탈리아군은 파시스트 정권에 반대하는 민중들과 결합하여 독일군에 저항하는 파르티지아노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북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에 있는 산장에 연금되어 있던 무솔리니를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군 특수부대가 구출하였고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의 살로에 무솔리니를 지도자로 세운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통칭 살로 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만든다. 한편 남부의 바돌리오 정부는 연합군과 함께 싸울 병력을 모집하였고 5사단을 신설하여 연합군과 함께 밀라노와 베니스를 향해서 전진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은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은데다 독일군이 적극적으로 방어전을 펼쳐 진격이 어려웠고 이탈리아 끝까지 올라가봤자 알프스 산맥 때문에 독일 본토로는 갈 수 없어 전략적 중요성도 높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서부전선이 개막되자 모두의 관심에서 잊혀졌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양쪽 이탈리아군의 역할은 굉장히 미미했으며 사실상 이는 독일군과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의 전쟁이었다. 1945년 초 빨치산에 의해 무솔리니가 잡혀 처형된 후에 살로 공화국도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이탈리아의 전쟁은 끝나게 된다.

제 2 차 세계 대전 동안 왕립 육군은 161,729명이 항복이후에는 73,277명이 사망하였고 12000여 명이 실종되었으며 60000여 명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 하였다.

3.6 이탈리아군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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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공화국군의 M60 패튼 전차

1945년 11월 14일 연합군의 파리 조약 이후 이탈리아는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고 새로운 이탈리아 육군을 설립하기로 하였고 기존에 존재하던 이탈리아 왕국군(남부 이탈리아군)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북부 이탈리아군)을 해산 시킨 후 제통합하였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의 차기 지도자인 움베르토 2세의 결정으로 이탈리아군으로 이름을 변경한다. 이탈리아군은 지역에 따라서 각각 4개의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총 9만 명의 군인이 모집되었고 국토 안보를 위해서 3개의 사단이 신설된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여전히 입헌 군주제 상태였고 움베르토 2세 또한 이탈리아를 입헌 군주제 국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46년 6월 2일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입헌군주정 유지 국민투표에서 46%의 지지밖에 얻지 못하여 움베르토 2세는 이탈리아를 떠나게되고 공화국이 되었으며 1948년 1월 1일 새 헌법이 제정되었고 새 헌법에 따라 엔리코 데 니콜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이 탄생한다 공화국이된 이탈리아는 1949년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면서 이탈리아군은 다시 유럽 국방에 한축을 담당하게 된다.

4 왕립 공군 (Regia Aeronautica)

5 왕립 해군 (Regia Marina)

Decima Flottiglia MAS - 유명한 유인어뢰 마이알레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두척을 대파시킨 해군 휘하 특수 부대. 41년부터 43년말까지 다양한 작전을 펼쳤다.

-작성중-
  1. 하지만 무력으로 점령하였기 때문에 시칠리아 인들이 애국심을 가지기는 힘들었고 남이탈리아와 북이탈리아의 지역감정으로 남아있다.
  2. 이탈리아 보병사단을 예로들면 보병연대 2개, 포병연대 1개, 야포 36문, 대전차포 24문, 정원 14600명 수준이고 동맹국 독일은 보병연대 3개, 포병연대 1개, 야포 72문, 대전차포 36문, 총원 18,500명으로 수적으로도 병력 차이가 나지만 야포나 대전차포 등 화포에 숫자도 더욱 적었기 때문에 전투력에 심한 차이가 났다.
  3. 뒤에 서술하는 러시아 파병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은 귀중한 전략적 자원들을 낭비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전력을 북아프리카와 그리스 방면에 투자하였다면 더좋겠지만 이탈리아가 파병을 한 이유는 무솔리니의 허영심에 의한 행동에서 나온것도 있었지만 독일의 요구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탈리아는 독일에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독일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없었다.
  4. 원정군을 급하게 편성하다보니 산악병하고 전혀 상관없는 러시아 평원에 보내지게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