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

위서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환계진군진교서선위진노육

衛臻
(? ~ ?)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로 자는 공진(公振).

진류 양읍현 사람으로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해서 그에 대비한 계책을 세우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 위자는 삼공의 초빙을 거절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하후돈이 진류태수가 되었을 때 하후돈은 위진을 계리로 추천하고 그의 부인에게 연회에 참석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위진은

말세의 풍속이야. 바른 예절이 아니오.

라는 대답을 하니 하후돈이 노해 위진을 붙잡는데, 하지만 하후돈 자신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알았는지 얼마 안되어 그를 풀어준다.

후에 한나라의 황문시랑이 되는데, 동군의 주월이 모반을 하고 위진을 부르지만 위진이 따르지 않으니 조조가 위진에게 말하길

나의 그대의 부친은 함께 대사를 일으켰소. 그래서 그대를 존경하며 묻는 것이요. 처음 주월의 말을 들었을 때 본래는 믿지 않았소. 순영군(순욱)의 편지를 받고서야 당신의 충성심과 정직함을 분명히 알게 되었소.

그리고 때마침 황제가 위진에게 조서를 내려 귀인을 맞이해 위나라로 찾아오게 하니 조조가 표를 올려 위진을 승상군사에 참여하도록 한다. 또 위자의 공훈을 추도해 위진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리고 호조의 속관으로 전임시켰는데, 이 때 조식파인 정의 등이 위진에게 자신과 결탁할 것을 청하나 위진은 대의에 입각해 거절한다.

220년에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에 오르자 산기상시로 임명되고 얼마 안되어 조비가 황제가 되자 안국정후로 봉해졌는데, 그는 다른 신하들이 모두 위나라의 덕을 칭송하고, 전 왕조를 폄하 할 때 홀로 한나라의 헌제가 제위를 선양해준 의미를 분명히 하고 한대의 미덕을 칭송하니 그런 위진을 보고 조비는

천하의 진주이니 마땅히 산양공[1]과 함께 대해야 되겠구나.

라며 그를 상서로 승진시키고 시중리부상서로 전임시킨다.

조비는 조림을 총애했는데 조비가 평원후가 어떻냐고 위진에게 물어보자 위진은 덕행이 아름답다고 칭찬했을 뿐이며, 끝까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조비가 광릉으로 갔을 때 조휴가 항복한 적의 자백을 통해 손권이 유수구에 이르었다는 보고를 했는데, 하지만 위진은 이것을 보고

손권은 장강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감히 우리들에게 저항하며 충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두려워 거짓으로 자백한 것일 뿐입니다.

이 말에 항복한 자들에게 다시 자세히 물어보니 과연 그의 말대로 그것은 적의 수비대장이 거짓으로 꾸민 것임이 밝혀졌다.

224년에 조비포훈을 억울하게 죽이려고 하자 위진은 종요, 화흠, 신비, 진군, 고유와 함께 표를 올려 이를 말리나 실패하고 포훈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26년에 조예가 즉위하자 강향후로 승진하고 유엽이 선조를 추존하는 예의는 조등과 일치하면 된다고 말할 때 위진 또한 똑같은 상조문을 올려 조예는 이 말에 따르게 만들었으며, 후에 우복야로 전임되어 관리 선발을 관장하고 시중의 관직을 더하게 되자 이 때 장제가 편지를 보내 과거제도에 불만을 표한다.

고조는 도망친 죄인(한신)을 상장으로 삼았고, 주무왕은 어부(태공망)를 발탁해 대사로 삼았습니다. 평민이나 노비도 왕공으로 등용될 수 있는데, 하필 과거의 제도를 지켜 시험해 본 후에 기용하겠습니까?

이에 위진이 편지를 보내 답하길

옛 사람들은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제도에 의거해 관리를 선발했으며, 반드시 업적을 살핀 후에 직책의 승진과 낮춤을 결정했습니다. 현재 당신은 성왕, 강왕의 시대를 목야[2]의 시대와 혼동하고, 문제와 경제 시대에 만일 제도에 따라 천거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여 마음대로 관리를 발탁하는 선례를 연다면 천하 사람들이 다투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제갈량이 천수로 친입하자 위진은 기병을 보내 보급로를 끊을 것을 건의하는데, 그 말에 조예는 그를 정촉장군, 가절도독제군사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가게 했지만 그가 장안에 도착했을 때 제갈량은 이미 퇴각한 뒤였다. 위진은 수도로 돌아와 복직해 광록대부의 관직이 더해졌으며, 이 때 위진은 궁궐 건축에 열중하는 조예를 말리기 위해 수 차례 간언한다.

한 번은 전중감이 독단으로 난대영사를 체포한 사건이 있어 위진이 그 일을 조사할 것을 상주하는데, 이걸 보고 조예가

궁궐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대는 그를 어떻게 조사한다는 것인가? 흔한 조예의 뒤끝

위진이 조서를 올려 답하길

고대에 관리의 월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것은 관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싫어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유익한 점이 적고, 병폐가 크기 때문입니다. 신이 매번 교사[3]를 관찰해보니 그 유형이 대부분 이와 같았습니다. 저는 직무를 맡은 자들이 직권을 넘어 정치가 쇠미해질까봐 두렵습니다.

한편 제갈량이 다시 한 번 사곡으로 출진하고 정남장군은 오나라에서는 주연이 형성을 지나 진격하고 있다고 표가 올라오자 위진은

주연은 오나라의 용맹한 장수이므로 반드시 손권을 따라 싸울 것입니다. 세력을 보여 정남장군을 공격하는 것 뿐입니다.

라고 하니 과연 주연은 손권을 따라 거소로 들어가 합비를 공격한다. 조예가 직접 이를 구원하려 하자 위진은

손권은 겉으로는 제갈량에 호응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관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합비성은 견고하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정벌해 육군의 비용을 줄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예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출병하는데, 과연 조예가 심양에 도착했을 때 손권군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한 번은 관구검이 상소를 올려 유주의 군대를 이용해 요동의 공손연을 공격할 것을 청한다. 이 말을 듣고 위진은

관구검이 진술한 것은 전국시대 때 사용하던 자잘한 기교이지, 왕 노릇하는 자의 일이 아닙니다. 오나라가 해를 이어 군대를 사용하고 변방 지역에 침입해 소란스럽게 했으며, 군대를 주둔시키고 병사를 양성하나 즉시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백성들이 피곤해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손연은 바다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정권은 삼대에 걸쳐 이어졌고, 밖으로는 융이를 진무하고 안으로는 병사들의 무예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구검은 군대를 편성해서 멀리 달려 아침에 도착해 저녁에 펴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매우 허황된 것입니다.

하지만 조예는 이번에도 듣지 않고 공격했다가 관구검은 패하고 돌아온다.

237년 6월 3일에 사공으로 임명되어 삼공의 일원이 되고 얼마 후에는 사도로 바꿔 봉해졌으며, 정시 연간[4]에 승진해 장환후가 되어 식읍이 천여 호로 늘어나고 한 아들은 열후에 봉해진다.

조상이 권력을 잡은 뒤 하후현을 통해 위진을 불러 상서랑을 맡게 하고 동생을 위해 결혼을 구하지만 위진은 이를 모두 거절하고 관직을 떠나기를 강력히 소망하는데, 결국 248년 8월 1일에 이런 조서를 받아 위진은 관직에서 물러나 후작의 신분으로 집 한채를 받고 사저로 돌아가면서 특진에 임명되어 삼공의 은혜를 받게 한다.

옛날 간목(단간목)은 관직에 있지 않았지만 도의는 강력한 진나라를 굴복시켰고, 유후(장량)는 정신을 쉬게 했어도 초나라의 일을 잊지 않았다. 당신이 바른 말과 좋은 계책이 있다면 아끼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가 죽자 태위의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경후라 하였다.

진수는 오랜 기간 자리에 있으면서 간언을 잘하고 사리를 분명히 했으니 직책에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평했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하료초로 패러디 되었으나 나오자마자 죽었다(...)
  1. 헌제는 황위에서 물러난 뒤에 산양공으로 봉해졌다.
  2. 牧野 : 은과 주가 결전하던 전쟁터
  3. 校事 : 신하들을 감찰하는 자
  4. 240 ~ 249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