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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les De Rais (1404~1440)
1 개요
본명은 질 드 몽모랑시 라발. 프랑스의 귀족, 군인. 원수 계급까지 오른 인물이자, '오를레앙의 성녀' 잔 다르크의 측근으로 유명하며, 전설적인 아동 연쇄살인마로 훨씬 더 유명하다.
샤를 페로가 지은 동화 푸른 수염의 등장인물인 의처증에 빠져 아내를 연쇄살인하는 귀족 푸른 수염의 모티브로 평가된다.
2 일대기
2.1 어린 시절
1404년 샹토세에서 기 드 레와 마리 드 크라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밑으로는 르네 드 레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부모는 재산가끼리 정략 결혼한 사이로 별로 화기애애한 가정은 아니었던 듯 하다. 다방면에 뛰어났으며 특히 천부적으로 무관의 재능이 있는 똑똑한 소년이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사교에는 서툴렀는데, 실제로 그는 평생동안 15세기 프랑스 귀족에게 필수적이었던 정치적 술수나 음모에는 능하지 못했다.
11살이 되던 1415년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도 사냥길에 멧돼지에 밟혀 죽는다. 그의 장인이자 세기의 악당으로 유명한 쟝 드 크라옹을 두려워했던 기 드 레는 자식들의 양육을 사촌인 쟝 투르미네에게 부탁하지만, 장 드 크라옹이 손자들의 막대한 재산을 포기할 리가 없었고 질 형제는 결국 외조부 밑에서 자라게 된다. 이 외조부란 사람이 질의 성장기에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16세 때 외조부의 지시 하에 질 드 레는 그의 영지에 인접한 프와토 가문의 딸인 사촌 카트린 드 투아르를 보쌈해온다(...) 카트린의 삼촌 등 3명이 그녀의 구출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붙잡혀서 감옥에 갇힌다. 정치적 협상 끝에 결혼이 정식 인정되고 구출대 3명은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고 한다. 지하감옥에 장기간 감금되었던 후유증으로 추정되는데 프와토 성의 지하감옥은 썩은 물이 발목까치 차는데다 간단한 침대도 없어서 갇힌 사람은 바닥에 누워 잘 수도 없었다고 한다. 1429년에는 질의 유일한 자식인 딸 마리 드 레가 태어난다.
2.2 전쟁
16세 때부터 전쟁에 참가한 질 드 레는 호전적이고 용맹한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브레통 승계 전쟁에서는 공작을 구출하고, 뤼드 성 전투에서는 영국군 대장 블랙번을 죽이는 등 활약했으며 백년전쟁에서는 잔 다르크 군대의 장군이자 그녀의 부관으로 싸운다. 잔 다르크가 한창 잘나가던 1429년, 그는 25세의 나이로 국왕 대관식 성유를 나르는 4명의 기사 중 한명으로 뽑히고 프랑스 원수의 호칭을 하사받는 등 군 경력의 정점을 찍는다. 이 즈음부터 그는 극심한 낭비벽이 생겨 돈을 물쓰듯 하기 시작하고 온갖 난행도 저지르는데 이것이 후일 죽음의 원인이 된다.
1431년, 잔 다르크가 영국군에 붙잡히자 잔다르크 구출을 위한 시도로 루앙을 공격하는등의 노력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잔 다르크가 화형당하면서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듬해인 1432년 외조부 장 드 크라옹이 사망했는데, 드 크라옹은 자신이 애써 모은 재산을 방탕하게 낭비하는 질 드 레에 대한 개무시의 의미로 자신의 칼과 갑옷을 르네 드 레에게 물려주었다. 한편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삶을 참회하고 그가 착취했던 농부들에게 돈을 주고 2개의 병원에 기부하는 등 마지막으로 선행을 했다고 한다.
2.3 체포
1435년 경 질 드 레는 공적인 자리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잔 다르크 사망에 이어 라 트레무아유마저 투옥되자 입지가 한층 불안해진 그는 샹토세로 돌아간다. 정치적으로도 무력해진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지나친 낭비로 인한 현금 부족에 시달리게 된 그는 절박한 상황에 빠진다. 이 기회를 틈타 질의 영지를 탐내던 브리타니 공작은 질과 오랫동안 사이가 안좋았던 낭트 주교 쟝 드 말레스트르와와 결탁하여 압박을 가하고 있었는데, 1440년 광기에 빠진 질 드 레가 브리타니 공작의 동생이 본당 신부로 있던 성 에티엔 성당을 습격, 자신의 영지에 대한 브리타니의 소유권 주장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질 드 레를 털기 위해 뒷조사를 하고 있던 말레스트르와는 7명의 영지 주민들을 증인으로 내세워 "질 드 레는 공범자와 함께 우리 관할의 많은 순진한 소년들의 목을 자르고 잔인무도하게 학살했으며, 부자연스러운 욕정에 사로잡혀 남색의 죄를 범했으며, 사람들을 사주하여 무시무시한 악마에게 기도를 올리고 제물을 바치고 맹세를 했으며, 그밖에 우리의 관할에서 숱한 범죄를 자행했고..."라는 주장이 담긴 서문을 발표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말레스트르와는 약탈 혐의로 질 드 레를 체포해서 낭트로 데려오라고 지시했고, 이튿날 브리타니 공작 수하들이 질 드 레를 붙잡아 감금한다. 낭트에 끌려온 질은 성 에티엔 성당 습격 혐의에 대해 사전 취조를 받았는데, 이 취조서에는 살인이나 초자연적인 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다.
2.4 범죄와 처형
낭트에서 브리타니 수석 재판관 피에르 드 로피탈을 비롯한 검찰관들이 심문관 대리인 등 교회의 유력자의 동석 하에 실종된 아이들의 가족에 대한 심리를 열었고, 그 결과 질 드 레는 살인, 남색, 이단, 교권 침해와 관련된 34개 항목으로 공식 기소된다.
재판에 따르면 질 드 레의 살인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미소년을 납치하여, 그에게 생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하였을 호강을 누리게 해준다. 좋은 옷을 입히고, 진미를 먹이며, 술을 먹인다. 그 뒤 소년을 내실로 데리고 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채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갔다. 그리고 그 숨이 다할 무렵, 아직 살아있을 무렵에 소년을 강간하는 것이었다. 살해 수법이나 고문 수법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모두 다 점잖은 자리에서 설명하기 힘든 것들 뿐이었다. 질 드 레는 강간하는 것 자체는 잊지 않았지만 강간보다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에 더욱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목적의식이 없는, 그저 끝간데 모를 파괴충동의 발산이었다. 목적 의식이 없는 살인에 목적을 부여한 건 프렐라티란 남자였다. 그는 미남에, 마술사[1]였으며, 수많은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화술의 달인이었다(아마도 사기꾼이었겠지만). 질 드 레는 그를 철석 같이 믿기 시작하였으며 그 뒤로는 악마에게 살해한 어린이들을 바치기로 하였다. 질 드 레와 악마의 추종자들은 프렐라티가 가르쳐준 대로 심장, 내장, 성기 등등을 적출하여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을 치렀지만 악마 자체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그 때마다 프렐라티는 더욱 잔인한 요구를 하였고 질 드 레는 무엇에 홀린 듯이 그 요구에 응하였다. 질 드 레의 악마 숭배와 희구는 광적인 수준조차도 뛰어넘고 있었다. |
재판 기록에 따르면 첫날 질 드 레는 혐의에 대한 답변을 요구받자 재판자들을 "잡것들, 성직매매꾼"이라고 욕하며 "네놈들한테 답변을 하느니 그냥 교수형을 당하고 말겠다"고 뻗대며 4번의 변론 기회를 모두 거부했다고 한다.
둘째 날이 되자, 여전히 영성체와 고해성사를 거부하면서도 재판정의 권위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시인하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한다. 그는 기소된 모든 범죄를 인정했으나 악마 소환만은 시인하지 않았는데,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재판정은 그의 공범자들을 대질시켜 심리하는데, 5일에 걸친 심리에도 질은 여전히 더이상 덧붙일 사실이 없다고 우겼다. 그러나 고문실을 보여주며 위협하자 결국 사실이라고 진술했다. 재판부가 그 말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2]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1440년 10월 26일 질 드 레와 공범자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 집행 전에 군중 앞에서 그의 무분별한 젊은 시절의 악행과 자신의 범죄에 대한 참회, 자녀들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게 키울 것을 당부하는 장문의 연설을 했다고 전해진다. 연설 내용은 남아있지 않지만, 기록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로서의 겸손과 참회가 담긴 모범적인 내용이었다고... 인간쓰레기도 혀는 번지르르하다.
추가로 여러 연구 중 하나는 질 드 레가 잔 다르크의 이단판결과 화형 후 정신병을 격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재로 질 드 레는 연금술과 마술에 빠져들어서 엄청난 재산을 탕진했었다.
2.5 범죄에 대한 반론
그가 악마 숭배와 아동 살해로 체포되어 재판 끝에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블라드 가시공이나 바토리 에르체베트처럼, 질 드 레가 전설처럼 실제로도 악마같은 인물이었는가 하는 부분은 오늘날 검증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지를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가 많이 개입되어 있었으며, 몰락해가는 귀족의 재산이나 영토를 빼앗기위해 체포하여 마녀&악마로 몰거나 원래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암묵적인 사안을 뒤늦게 범죄라고 내세우며 재판을 하는 일은 흔했다. 당장 영주가 소작농 혹은 휘하의 기사나 소영주가 반항한다고 죽인 것도 평소에는 별문제 안 되지만 교회에서 기록은 남겨놓을 테고 나중에 그 영주가 권력을 잃거나 정치적으로 숙청할 일이 생긴다면? 당장 그 기록을 기반으로 살인범이 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이다.
게다가 고문하겠다고 협박해서 받아낸 자백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뿐더러,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사실 이런 정치적 재판에 있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자백 안해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별의별 핑계를 대거나 과거의 행실이 뒤늦게 범죄가 되어 사형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결백을 주장하며 고문을 당하며 고통스럽게 죽느니 편하게 죽고 싶어서 죄목을 뒤집어쓰고 그냥 죽어주는 예는 별로 신기한 것이 아니다. [3][4]
질 드 레가 가족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곱게 죽기 위해서 일부러 악마숭배자를 자처하고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의 관례상 자백하고 회개하는 죄인으로 사형을 받는다면[5] 일단 사형 방법이 잔혹하지 않았던 데다 재산의 상당 부분은 물론 가능하면 지위까지도 자손들에게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예롭게 죽었다고 하여 시신도 모욕하지 않고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실제로 질 드 레의 가족들은 별다른 치욕을 당하지 않았고 지위도 유지한 건 물론 재산의 상당 부분이 가족들에게 그대로 남겨졌으며, 질 드 레의 가족중에는 왕의 대신이 된 사람도 있었다는 점에서 이런 관점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질 드 레가 그렇다고 하여 완벽한 무죄인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난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분명 나중에 걸릴 만한 짓을 많이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단지 악마숭배와 아동살해의 증거가 없었을 뿐, 기소된 범죄 중에는 유죄로 걸릴 만한 것들도 적지 않았다. 상술했지만 영주들은 나중에 몰락한 이후까지 생각한다면 절대로 통치를 멋대로 하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농민들을 마구잡이로 때리거나 죽일 수 없었다. 나중에 재판 등에 넘겨졌을 때 이런 게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질 드 레는 그걸 무시했고, 그 때문에 죽어야 했다면 크게 억울하다고 볼 수는 없다.
1992년에는 전직 성직자와 의원, 유네스코 전문가로 구성된 법정이 질 드 레의 판결을 재검토해서 무죄로 결론짓기도 했다.
3 잔 다르크와의 관계
그가 잔 다르크의 최측근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잔 다르크를 사랑했고 그녀의 죽음에 좌절해서 광기에 빠졌다는 것은 창작된 이미지이다. 그는 딸 하나가 있는 유부남이었고, 잔 다르크와 어떤 관계였는지 시사하는 어떤 기록도 없다. 심지어 그는 잔 다르크의 가장 큰 정적인 대시종장 라 트레무아유와도 결탁하고 있었다. 잔 다르크가 죽고 나서 방탕과 퇴폐에 빠진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방탕하고 퇴폐했으며 잔혹한 인물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예 없는 죄를 만들어낼 수는 없으므로 그에게 적용된 혐의 중 일부는 소위 숙청이 목적일 때만 꺼내드는 사소한 범죄 형태의 유죄였을 가능성이 높다.
- 연구결과 중 몇몇은 질 드 레가 잔 다르크의 사후 정신병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는거, 잔 다르크사후 프랑수와 프레라티라는 연금술사에게 거액을 투자하며 연금술과 마술에 매달리는등의 행적등은 물론 잔 다르크가 영국에 붙잡힌 초반에는 잔 다르크를 구출하겠다고 군대를 조직해 루앙을 공격하는등 잔 다르크가 질 드 레라는 한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라고 봐야한다.
기사가 성녀를 사랑했다가 성녀의 죽음과 동시에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 하느님에게 절망하여 악업으로 빠져들었다는 이야기가 가진 매력이 워낙 커서 대중 문화 상에서 둘을 엮는 작품이 많다. 신풍괴도 잔느의 노인 클로드도 질 드 레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
잔 다르크와 질 드 레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미셸 트루니에의 소설, <지독한 사랑>[6]을 읽어보도록 하자. 그러나 잔 다르크와 질 드 레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라기보단, 역사소설에 그런 소재를 가미한 것이니 둘의 로맨스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원하는 바를 보지 못할 것이다.
4 대중문화 속의 질 드 레
- ↑ 연금술사 혹은 흑마술사였다고도 한다.
- ↑ 다만 이런 자백은 처음부터 죄를 만들어 놓거나 증거를 확실하게 수집한 뒤 마지막으로 죄인을 곱겨 죽여줄까 말까 한번 떠보기만 하는 것이라 어지간해서는 그냥 자백하고 곱게 죽는 게 합리적이었다.
- ↑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레미지오 수사의 자백 장면에서 이러한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사실 그가 저지른 죄는 여자를 강간하려다가 실패한 것뿐이지만,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 사실까지 다 털어놓았다.
- ↑ 마녀재판 중에 유명한 것중 하나는, 사람을 물에 던져서 물에 뜨면 마녀, 안뜨면 사람이다. 즉, 물에 떠서 허우적거리면서 버티면 마녀로 처형, 물에 가라앉으면 익사. 어찌되든 죽는다.
- ↑ 동양의 경우는 자살을 했지만, 서양에서는 자살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대신 최대한 인간적으로 처형당하는 것이 일반적인 자살 방법이었다. 참고로 유럽에서 20세기 이후 사형 자체가 없어지는 데도 이런 관념이 상당한 기여를 했는데 어차피 자백하고 회개하는 죄인이라면 죽일 것 없이 평생 반성하도록 가둬두자는 것이다.
- ↑ 원제는 <질과 잔(Gilles et Jeanne)>, 이원복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