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의미
팀의 경기 진행의 방향, 방식을 결정하는 형식. 구체적으로는 수비, 공격의 방식.
'수비를 두텁게 한다.','개인기를 적극 활용한다.','긴 패스로 빠르게 공격으로 전환한다.','크로스를 통해 헤딩슛 기회를 자주 가진다.','수비 위치를 위로 올린다.' 등이 축구 상의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치 위에서 선수의 위치는 유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일정선하의 통제가 없으면 팀 전체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포메이션이 활용된다. 전술을 사용하기 위하여 선수들을 배치한 기본적인 틀이 포메이션인 셈이다.따라서 포메이션과 전술은 다른 개념이나 따로 떨어져서 설명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후의 설명도 포메이션에 기반한 전술설명이다.
물론 같은 포메이션에서도 전혀 다른 전술이 가능하다. 실제로 어떤 두 개의 팀이 같은 포메이션을 쓰더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운용 방식이 전혀 다를 수 있다. 각 선수의 능력과 성향 및 경기마다 발생하기 마련인 여러 외부 요인들 때문인데 예를 들어 플레이메이킹을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미드필더 중 어떤 선수에게 맡길지, 혹은 뻥축구를 쓰느냐 짧은 패스를 쓰느냐 등등 같은 포메이션에서도 많은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전술개념을 텍스트로 전달하는데 포메이션은 가장 유용한 도구이다.
최근의 포메이션은 좌우가 불균형하거나 적극적인 스위칭을 통해 변칙적인 포메이션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섣불리 포메이션을 판단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전술을 파악할 때는 포메이션에 얽매이기보다는 전체적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경기를 읽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축구 경기장은 세로 방향이 가로 방향보다 비교적 길기 때문에 긴 방향을 기준으로 하여 수비 -> 공격 방향으로 포메이션을 설정한다. 기본적으로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의 3선 포메이션.
현대축구에 와서 숫자로 파악하는 포메이션 개념은 많이 흐려졌다. 같은 4-4-2, 4-3-3, 4-5-1에도 팀마다 각자의 스타일, 플레이하는 선수에게 주어지는 임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같은 포메이션이라도 전혀 다른 경기 스타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단 공격과 수비시에 서로 다른 형태를 띄게 되는 경우도 있고 애초에 공격을 할때는 포메이션대로 움직이지않고 어느정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해서 거스 히딩크는 자서전을 통해 "한국기자들은 3-4-3이니, 4-4-2이 포메이션에 왜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축구에서 포메이션은 공을 잡고 있을때와 잡고있지 않을때, 두가지로 나뉜다."라고 쓴 바가 있고, 주제 무리뉴도 비슷한 뉘앙스의 발언을 한 바가 있다.
'따라서 숫자로 구분하는 포메이션은 전술을 파악하는데 단순한 참고정도가 될 지언정, 절대적인 요소는 결코 아니다.'
2 축구 전술의 역사
2.1 메토도 시스템
초기엔 여러 규정이 추가되기 전이었고 골을 많이 넣으면 이기는 게임이라는 생각이 전반적이어서 2-3-5같은 피라미드 전술이라는 극단적인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구역별로 선수들 수차이가 심했고 허리가 약하기 때문에 중원에서 공격진으로 연결이 좋지 않을 경우 그대로 수비가 붕괴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월드컵 2연패를 이끈 명장 비토리오 포쪼 감독이 이 전술을 변형해서 하프라인 근처에 위치하는 3명의 하프백과 3명의 포워드들 사이에 2명의 인사이드 포워드를 배치하는 2-3-2-3 전술을 시도했다. 이 전술로 하프백은 좀 더 수비적인 역할에 집중할 수 있게됐고 중원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 등 공수밸런스가 잘 맞게 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1]
3 WM 포메이션
지금과 비슷한 기틀을 다진 근대 축구가 태동했을 때 가장 유행하던 전술은 2-3-5 포메이션 같은 극단적인 공격 전술이었다. 하지만 1925년 오프사이드 룰이 골키퍼 포함 3명에서 지금과 같은 2명으로 바뀌게 되자 저런 극단적인 공격 전술로는 제대로 된 수비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WM 포메이션이다.
WM 포메이션을 최초로 사용한 팀은 1920년대 후반의 아스날 FC로서, 허버트 채프먼과 팀의 핵심 선수 찰리 버칸은 오프사이드 전술로 인해 수비가 어렵게 되자 차라리 수비를 한 명 더 늘리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WM의 탄생이었다.
WM 포메이션은 골키퍼를 제외한 10명을 공격 5명, 수비 5명으로 나누어 WM 형태로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저히 공격과 수비의 역할을 분담하고, 그런 역할 분배를 통해 팀의 밸런스를 잡는 이 전술은 1920년대에 탄생해 1950년대까지 축구계의 상식으로 여겨졌다.
이 WM 포메이션 시절 최강이었던 팀은 지금도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로 회자되는 1950년대 헝가리 국가 대표팀 매직 마자르 군단. 당시 헝가리는 푸스카스, 히데쿠티,[2] 코츠시스[3] 등 전설적인 선수들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철저한 역할 분담과 1대 1 대응이 기본이던 그 시절 중앙 공격수였던 히데쿠티가 섀도우의 움직임을 보이고 그 빈틈을 양 측면의 푸스카스, 코츠시스가 파고드는 포지션 체인지를 구사하여 WM을 쓰던 다른 팀들을 박살내곤 했다.[4]
3.1 4-2-4와 카테나치오
지금도 쓰이는 전술이다 하지만 엔진 업데이트 이후로 사용 빈도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요즘 다시 쓰인다
195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지휘하고 있던 비센테 페올라 감독은 포 백과 지역 수비를 쓰는 4-2-4 시스템을 들고 나왔고 당시 17세였던 펠레 등의 활약에 힘입어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58년 브라질의 4-2-4는 그때까지 상식이었던 1대 1 대인 마크가 아닌 지역 방어를 기본으로 하는 팀이었고, 4명의 수비수와 4명의 공격수 사이에 낀 2명의 미드필더는 현대 축구의 중미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등 70년대에 탄생할 토탈 풋볼의 씨앗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반면 이탈리아의 엘레니오 에레라는 브라질과는 정반대의 방식을 취했는데 4명의 수비수에게 여전히 대인 마크를 주문하고 그들의 뒷선에 또 한 명의 수비수를 두어 커버 플레이 및 협력 수비를 하게 함으로써 수비력을 강화했다. 이는 펠레 등 소위 '클래스가 다른' 브라질 선수들을 이탈리아 수비진이 잘 막아내지 못하자 그러면 상대하는 머릿수를 늘려 막자는 전략이고 사실상의 5-3-2 포메이션이었다.
물론 대인 마크라고 해서 WM 시절처럼 무조건 마크할 상대를 쫓아다니는 것은 아니었고 일정한 범위 내에선 대인 마크를 하되 그 범위를 벗어나면 자기 지역으로 돌아오는 대인 마크와 지역 방어의 혼합 체제라고 할 수 있었다.
58년, 62년 월드컵을 재패한 브라질의 4-2-4와 68년 유로 우승, 70년 월드컵 준우승을 이룩한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는 WM의 시대를 이어 새로운 대세가 되었다.
3.2 토탈 풋볼의 탄생
브라질의 4-2-4와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가 축구계를 이끌어가던 시절, 잭 레이놀즈라는 잉글랜드인이 당시 축구 변방이었던 네덜란드에서 아약스라는 클럽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레이놀즈는 떼 공격, 떼 수비라는 토털 풋볼의 기본 원리를 전술에 운용하였고, 레이놀즈의 제자로 이후 아약스의 지휘봉을 잡은 리누스 미헬스에 의해 토털 풋볼은 현대 축구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수비 시엔 잉여 전력이 되는 공격수들이 전방에서부터 강하게 압박하고, 수비하기 위해 최후방까지 내려가는 대신 오프사이드 룰을 이용해 전진 배치된 수비수들이 공격에 가담하는 토털 풋볼은 그야말로 축구의 혁명이었고, 당시 축구 변방이었던 네덜란드는 일약 세계 축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이라 불리는 리누스 미헬스와[5] 요한 크루이프, 네스켄스 등의 선수들이 버티고 있던 네덜란드 국가 대표팀은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변방의 약체 팀이라는 평가가 무색하게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결승에 오른다.
결승전 상대는 개최국인 서독이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네덜란드가 4-2-4의 정신을 계승했다면 서독은 카테나치오를 계승한 리베로 시스템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네덜란드가 4-2-4를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개량을 거쳐 토털 풋볼을 만든 것처럼 서독도 수비시에 빈 공간을 청소하는 역할을 하던 리베로가 공격시엔 노 마크 상태가 된다는 점을 이용해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수비적인 카테나치오의 약점을 커버했다. 그렇기에 카테나치오 시스템과 스위퍼를 만든 것은 이탈리아지만 리베로를 완성시킨 것은 독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이 슈퍼 스타이자 중원의 지휘자인 요한 크루이프가 있었기에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당시 독일에겐 불세출의 리베로 프란츠 베켄바워가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 수비수였던 포그츠가 크루이프를 완전히 봉쇄하는 데 성공하면서[6]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승리는 독일이 가져갔다.
하지만 74년 월드컵의 주인공은 우승자인 독일과 베켄바워가 아니라 네덜란드와 요한 크루이프였고 네덜란드와 미헬스의 토털 풋볼은 세계 축구계에 큰 충격을 남기게 된다. 우승은 독일이 했지만, 대회 MVP는 크루이프에게 돌아갔다. 또한 유럽 축구 연맹은 1974년 올해의 축구 선수(지금의 발롱도르)로 크루이프를 선정했다. 베켄바워는 FC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으로 분데스리가 우승,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서독 국가 대표팀 주장으로 월드컵을 우승하고도 밀렸다.
3.3 압박 축구의 등장
1970년대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은 아름답고, 강했으나 그것을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계속해서 압박할 수 있는 강인한 체력, 상대에게 볼 소유권을 넘기지 않고 템포를 조절하기 위한 개인기와 패싱, 특정 포지션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센스 등이 필요했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크루이프 같은 특별한 자들뿐이었다.
반면 독일의 리베로 시스템은 상대적으로 따라하기 수월했으며 특별한 팀이었던 네덜란드를 2-1로 제압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기에 80년대에 접어든 후에도 바로 토털 풋볼이 주류가 되진 않았고 독일의 3백 시스템을 골자로 한 3-5-2 포메이션이 대세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미헬스의 토털 풋볼을 현대 축구로 완성시켰다는 평을 듣는 아리고 사키 감독이다. 아리고 사키는 토털 풋볼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공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조직적, 체계적으로 압박하는 전술을 탄생시켰고,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AC 밀란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유럽 무대를 지배했다.
사키의 압박 전술이 등장한 후 상대를 압박하는 것은 선택받은 자들만의 장기가 아니라 체계적인 훈련과 전술을 통해 조직할 수 있는 것이 되었고 이후 압박은 현대 축구의 대세를 넘어 기초가 되었다.[7]
4 현대 축구의 기본 시스템
크게 수비수 숫자에 따라서 스리백 시스템, 포백 시스템으로 나뉜다.
4.1 3백
가장 아름다운 축구는 0:0의 축구다.- 이탈리아 축구 명언
고전적인 의미의 스리백은 카테나치오에서 출발한다. 공격 가담이 적은 포백. 거기에 포백과 골키퍼의 사이에 또다른 방어선인 스위퍼(축구), 말 그대로 공을 청소해 버리는 최종 수비수를 두고 적극적인 오프사이드 트랩 보다는 박스 근처에 공간을 두지 않는 밀집수비. 그리고 카테나치오의 핵심인 공간과, 협력수비를 실천하면서 패하지 않는 축구를 실현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여기에서 스위퍼 역할을 맡은 선수들은 대부분 최종 수비수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수비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중심이 되었다. 거칠게 상대를 마킹해 짓밟아 버린다거나, 공을 걷어차 필드 바깥으로 날려 보내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고 당연히 그에 걸맞는 능력이 필요했다.
헌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 스위퍼 자리에 위치하는 인물에게 지성을 더하고, 전진해서 패싱을 통해 게임을 풀어나가는 역할을 맡기게 된다. 이러한 역할을 리베로라고 한다. Libero란 자유인을 의미하고 엄밀하게 말해서 스위퍼와는 다른 개념이다. 스위퍼의 개념이 현대 축구의 센터백을 구분할때 스토퍼에 가깝다면, 리베로란 어느 수준까지의 오버래핑이 허용 된 앵커맨에 가깝다. 즉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는 빌드업이라 불리는 행위를 허락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허나 이러한 스리백은 토탈 풋볼의 등장과 함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토탈풋볼의 핵심은 공수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있다. 공격할 때는 한꺼번에 올라가고, 수비할 때는 한꺼번에 내려가면서 최전방부터 최후방까지 마치 한몸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일체화된 움직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공격을 할 때는 오프사이드 라인을 끌어 올리는 전술을 사용해 상대 공격수들이 하프라인 밑에서 쉽게 내려와 공을 받도록 할 수 없도록 만들고 미드필더 진의 패스를 수비진이 한번 받아 쉽게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 있다.
그러나 스리백 전술을 사용하게 되면 토탈사커의 핵심인 중원의 인원이 한명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고, 특히 스위퍼라는 존재는 오프사이드 트랩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약점으로 지적받게 된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리누스 미헬스의 토탈풋볼 역시도 기본은 스리백에서 출발했다. 요한 크루이프에 가려져 있었으나, 사실상 오렌지 군단의 뛰어난 결과는 수비진을 지휘하고, 여러 위치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였던 루드 크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팀들이 크롤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현대 축구의 전술은 안정적인 포백 라인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미드필더진의 구성. 윙백이 아닌 풀백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4-4-2를 기본 전술로 채택하게 되고, 그러면서 스리백과 윙백이라는 개념은 사양세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중앙 수비수들을 보호하는 플레이어라는 개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또다시 상대의 역습에 대항하고, 좌우 풀백의 적극적인 오버래핑을 통한 측면공격이 중요시 됨에 따라 부활하게 되고, 이는 수비수들의 후방에 서서 커버를 치는 플레이가 아니라, 오히려 수비수들 앞에 서서 적극적으로 또다른 수비 라인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로 수비형 미드필더의 개념이다. 이중 수비 역할에 집중하며, 역습시 1차 방어선을 형성한다거나, 풀백의 오버래핑으로 인해 빈 공간을 커버하는 것에 주력하는 스위퍼와 유사한 개념은 단순히 수비형 미드필더로, 여기에 더 나아가 리베로처럼 빌드업 과정에서 패싱 플레이를 통해 공격을 풀어나가는 선수는 딥 라잉 플레이메이커라는 개념으로 부활하게 된다.
4-1-2-3, 또는 4-3-3 전술에서 역삼각형 미드필더진을 구성하는 전술이 이 개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비록 사양세라고 하더라도 스리백이 수비전술로서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약팀이 강팀을 상대하기 위한 전술로 스리백은 여전히 환영받았으며, 특히 월드컵 무대에서 꼬박꼬박 한팀 정도는 스리백을 기본으로 하는 팀들이 존재했다.
그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스리백이 재 조명받기 시작하게 된다. 축구의 전술이 발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축구 선수들의 능력 역시 진화하면서, 특히 선수들의 발밑 기술이 꾸준히 발전해 나가고, 체력적인 측면에서도 90분을 활발하게 누빌 수 있는 기본이 되자 스리백의 부족한 부분. 즉 공격을 나가게 되면 수비숫자가 부족하고, 수비를 하게 되면 공격 숫자가 부족한 문제를 활발한 활동량으로 커버하는 전술이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술적 시도가 꽃을 피우게 된 것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었고, 특히 4-2-3-1에 최적화된 팀이라 주목받던 스페인을 박살낸 반 할 감독의 네덜란드와, 대회 내내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다가 브라질을 상대로 아깝게 16강에서 패한 칠레가 이러한 전술을 통해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4.2 4백
현대 축구의 기본 전술
포백시스템은 4명의 수비수에게 지역을 분할시키며 효과적으로 공간을 커버하는 지역방어를 주로 하고 대인 마크를 보완적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대인 마크를 주로 수행하는 것은 발이 빠른 좌우 풀백, 또는 윙백들이며, 상황에 따라 중앙 미드필더들이 수비형 미드필더의 형태로 대인마크의 일부분을 수행하기도 한다.
크게는 4-4-2와 4-2-3-1 로 나뉘며, 팀에 따라 다이아몬드 미들, 또는 4-3-3 제로톱 전술과 같은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
4.3 기타
3백이나 4백에 속하지 않는 시스템도 있기는 있지만, 과거와 달리 현대축구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스템들은 아니다. 참고로 2백도 이론상 가능하긴 하지만 축구 특성상 수비에 가장 많은 인원이 필요하므로 시도된 적은 없는듯.
- 5-3-2 : 3-5-2 시스템을 사용하는 팀들이 수비적 대형을 취할 때 자주 펼쳐지는 그림으로 3백을 구사하는 팀들이 플랜B나 C로 구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 1998년 월드컵 대표팀은 3-5-2 전술을 구사했지만, 당시 해외언론들은 한국의 포메이션을 5-3-2로 보기도 했다.
뭐 구사하려고 구사하기보다는 하도 밀리니 자연스럽게 그랬던 거지만(...)참고로 5백하면 3백만큼이나 굉장히 구시대적 전술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5백의 선구자이며 전통적으로 3백을 잘 구사하는 이탈리아 대표팀이 은근 자주 사용하는 포메이션이기도 하다.
- 5-4-1 :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코스타리카가 주로 사용한 포메이션이며, 대한민국의 1994년 월드컵 대표팀의 전술도 바로 5-4-1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1-4-4-1이라고 호명. 참고로 저 맨앞과 뒤의 1-1이 바로 H-H, 황선홍과 홍명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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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일명 텐백, 빗장수비, 침대축구. 단 이런 극단적인 수비전술과 침대축구는 엄밀하게는 별개의 개념인데 텐백을 쓰는 팀 중에 침대축구도 사용하는 팀들이 많은 편이다. 가끔 중동의 어느 국가가 구사하는 극단적 수비전술.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한때 바르셀로나가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 대다수의 상대팀들은 10백으로 상대했다. 10백으로 유명한 감독으로는 무리뉴 감독이 있다. 그리고 10백을 잘 쓰는 유명한 팀은 무리뉴 감독의 첼시다.
4.4 개별의 이름이 있는 전술
- ↑ 전방과 미드필드의 다양한 포지션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조반니 페라리, 탁월한 득점력과 테크닉,뛰어난 찬스메이킹 능력을 가진 원조 판타지스타 주세페 메아차가 뛰어난 대활약을 해 줘서 크게 기여했다
- ↑ 제로 톱을 수행할 수 있었던 공격수로 평가되나, 그를 제로 톱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도 존재한다.
- ↑ 1954년 월드컵에서 세 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다시 말하지만, 월드컵 통산이 아니라 한 대회에서만이다!
- ↑ 헝가리는 우승을 차지한 1952년 헬싱키 올림픽부터 1954년 스위스 월드컵까지 무려 A매치 34연승을 달렸다. 그러나 35번째 경기였던 월드컵 결승전에서 서독에게 패배하면서 콩라인 입성. 이후 헝가리는 매직 마자르 세대가 은퇴한 이후 지금까지도 유럽 축구의 변방에 머무르고 있다.
- ↑ 미헬스보다 많은 트로피를 든 감독도 있고, 미헬스보다 세밀한 전술을 짜는 데 능한 감독도 있지만 축구계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사람은 미헬스 말고는 없기에 축구계에선 그 누구도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미헬스를 뽑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 ↑ 크루이프의 완패에는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준결승이 끝난 후 한 기레기 매체에서 크루이프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확인되지 않은 기사를 보낸 탓에, 결승전 전날 내내 크루이프가 집에다 전화를 걸어 해명을 하느라 결승전 당일에는 당시 동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미 컨디션이 '너덜너덜한 걸레짝' 같았다고 한다.
- ↑ 이런 모습이 처음 등장한 것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이다. 아리고 사키의 AC밀란이 유럽 축구를 휩쓸면서 당대의 축구선진국들은 공수간격 유지와 압박을 기초로 전술을 혁신했으나, 당시 세계축구계의 변방이었던 대한민국은 압박이란 개념조차 몰랐다. 문제는 이러고도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은 1실점 무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선에선 상대팀들의 거센 압박에 쩔쩔매다가 조별예선 3전 전패로 광탈했다. 당시 선수들이 나중에 인터뷰하길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중원부터 압박해오는데, 듣도보도 못한 축구라서 당황했다고 한다. 아시아 지역예선 무패 통과로 자신감에 차있던 축구인들은 본선의 처참한 결과에 망연자실했고, 스스로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해외축구를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