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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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도교 5대 총대주교 관구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
안티오키아에 있는 신도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사도행전 11장 26절

현재 '안티오키아와 전 중근동의 총대주교'를 자처하는 사람은 5명이다. 로마 총대주교는 1명(=교황), 콘스탄티노플은 2명,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은 각각 3명인 것을 생각하면 좀 비범하다 생각될 정도로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이 중 세 명이 동방 가톨릭 교회 소속이다. 세 동방 가톨릭 교회들은 가톨릭의 수위권을 따르지만, 분열되어나온 시점도, 경위도, 교단조직도, 무엇보다도 전례양식이 완전히 별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이 5명 중 현재 안티오키아(안타키아)에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안타키아 자체가 인구 수 20만의 황량한 소도시로 몰락한 만큼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교부 오리게네스의 기록에 의하면 안티오키아의 초대 주교는 사도 베드로라 하며, 아래의 다섯 교파가 모두 이 기록을 따라 사도 베드로를 기원으로 두고 있다. 베드로가 안티오키아로 떠나 로마로 가면서 주교직은 에보디오스가 계승했는데, 로마 제국의 박해 시기에 순교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이그나티오스 역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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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멜키트-그리스 가톨릭, 동방정교회, 마론파 가톨릭, 시리아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 시리아 가톨릭이다. 그 밑은 네스토리우스파의 분열사.

이 문서에서는 편의상 가장 비중이 높은 동방 정교회를 맨 위에 두었고 나머지는 저 순서대로 배치했다.

2 역사

초창기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의 탄압을 피해 안티오키아로 대거 유입된 것이 안티오키아 교회이며, 한동안은 도시 자체의 성장세를 타고 순항하였다.

그러나 4세기 초 아리우스파가 등장하면서 슬슬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아리우스의 주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이 바로 안티오키아였기 때문. 아리우스의 주장을 추종하는 주교들도 몇몇 나타나고 그 와중에 몇 명이 파문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그저 서막에 불과했다. 360년 멜레티우스가 안티오키아 교회의 수장이 되었는데, 취임 설교 때 아리우스파에 반대되는 의견을 냈다가 추방당했다. 이에 아리우스파 및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한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유스타티우스파, 그리고 중립파인 멜레티우스파와 또다른 반아리우스파인 아폴리나리우스파[1], 이렇게 네 개의 파벌로 나뉘어 각 파벌에서 따로따로 주교를 내는 등, 그야말로 전례없는 막장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 혼란은 5세기에 가서야 수습되기는 개뿔(...), 그 문제의 칼케돈 공의회가 열리며 다시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가 극심하게 대립하였으며, 결국 황제권을 동원하여 비칼케돈파를 교회에서 축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칼케돈파는 시리아 정교회라는 살림을 따로 차리게 된다.

이후 1098년에는 십자군의 침략으로 100년 넘게 정교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난가기도 했다. 1270년대 들어 다시 안티오키아로 귀환했으나 안티오키아가 온갖 전쟁과 사막화로 인해 이전의 위용을 잃자 결국 14세기 들어 다마스쿠스로 총대주교좌를 옮겼다. 그 후 1724년에는 치릴로 6세가 총대주교로 선출됐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쪽에서 치릴로 6세의 친로마적 성향 때문에 선출을 불인정-파문 콤보를 때리고 친콘스탄티노폴리스 성향의 수도사를 총대주교로 서임하는 바람에, 치릴로 6세를 지지하는 파벌은 진짜로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면서 멜키트[2]-그리스 가톨릭으로 떨어져나갔다. 이후 초대 교회로부터의 연속성을 지니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는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에 각각 하나씩 남게 됐다.

3 정교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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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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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직함은 '안티오키아와 전 동방의 총대주교'. 때때로 다른 교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들과의 구분을 위해 '안티오키아의 그리스 총대주교'라고 불린다. 아랍어 호칭을 직역하자면, "안티오키아와 전 동방의 로마(Rüm) 정교회 총대주교"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로마(Rüm)는 로마가 아니라 그리스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랍인들과 터키인들은 그리스 정교회를 가리켜 로마(Rüm)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스스로를 로마인들(Romioi)이라고 지칭했기 때문이다. 아랍어 "Rum"은 그리스어 "Romioi"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 총대주교는 시리아 태생의 요한 10세(재임 2012–)이다. 정교회의 신학과 전례에 관해 많은 책을 집필하였다. 총대주교좌는 1342년 이후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성모 마리아(Mariamite) 대성당에 위치해 있다. 현재 시리아에 1,100,000명의 신자가 있고, 레바논에는 400,000 가량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3.1 관할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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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중근동 지역만을 두고 있을 것 같지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에서 관할하는 지역은 상당히 넓다.

명시된 관할 구역은 시리아, 레바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오만, 카타르, 터키 동남부 일부 지역, 미국, 캐나다,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오세아니아, 영국, 서유럽에 걸쳐 있다. 다만 중근동 바깥으로 나가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관하와 겹치는 지역이 꽤 되는 편이다. 키프로스도 431년 자치 교회가 되기 전까지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관할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관하의 신자는 2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4 멜키트-그리스 가톨릭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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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직함은 '안티오키아와 전 아시아 중근동과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현 총대주교는 멜키트-그리스 가톨릭의 수장인 그레고리오 3세 라함이다.

총대주교좌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있다. 마론파와 마찬가지로 총대주교는 투표를 거쳐 선출된 후 교황에게 책봉받는 형식으로 착좌한다.

5 마론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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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직함은 '안티오키아와 전 레반트의 총대주교'. 현 총대주교는 마론파의 수장인 베차라 부트로스 알-라히이다. 총대주교좌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근교의 브케르케에 있다. 총대주교는 마론파 내에서의 투표를 거쳐 선출된 후 교황에게 책봉받는 형식으로 착좌한다.

자세한 역사는 마론파 참고.

6 시리아 정교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공식 직함은 '안티오키아와 전 아시아 중근동의 총대주교'. 현 총대주교는 시리아 정교회의 수장인 이그나티우스 아프렘 2세이다. 총대주교좌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있다.

7 시리아 가톨릭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공식 직함은 '안티오키아와 전 아시아 중근동의 총대주교'.

현 총대주교는 시리아 가톨릭의 수장인 이냐시오 요셉 3세이다. 총대주교좌는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다. 위의 두 교파와 마찬가지로 투표를 거쳐 교황에게 추인되는 형식으로 임명된다.
  1. 아폴리나리우스는 라오디게아의 주교로서 니케아 공의회 당시 아리우스파에 맞섰으나, 자신 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을 경시하는 엇나간 주장을 펼치게 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2. 시리아어로 '왕'을 뜻하는 malkoyo에서 유래한 말로, 왕당파란 뜻. 칼케돈파 기독교인들에 대한 멸칭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일반용어가 됐다. 1724년의 분리 이후로는 가톨릭쪽 분파에 대해서만 이 용어가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