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역사

크로아티아역사를 다루는 항목.

1 고대사

국토사의 측면에서는 이미 기원전 2세기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일리리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후 로마 속주로서 달마티아(Dalmatia)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현재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지중해에 면한 지역이다. 내륙지역은 판노니아(Panonia)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 유명한 달마시안의 원산지.

4세기 게르만족의 거센 침공에 시달렸으며,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로마가 패배한 뒤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여러 혼란한 상황을 거쳐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으나 8세기 슬라브족이 남하하여 차지했고, 이후 슬라브족의 영토로 계속 남는다. 그와 별개로 탈마티아 지역에서 라틴인들이 지속해서 살아왔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가 축소되어가면서 크로아티아인에게 동화되어나갔고.이들이 쓰던 언어인 달마티아어도 날이갈수록 세가 축소되어 19세기 이르러서는 사멸직전에까지 이르렀으며 마지막 화자인 Tuone Udaina이 1898년에 폭파사고로 숨짐에 따라 완전히 사멸하였다.

2 중세사

이 지역에 자리잡은 슬라브계 크로아티아족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서유럽의 풍습을 따랐기 때문에 같은 남슬라브계임에도 동방 정교로 개종한 불가리아나 세르비아와의 역사가 엇갈리게 되었다.

중세에 들어서면 계승 분쟁이 발생해 이웃 헝가리 국왕이 크로아티아 왕위를 강탈하고 크로아티아 국왕을 겸하면서 오랫동안 헝가리 왕국의 통치를 받았으나, 13세기 헝가리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완전히 무너지자 지역 영주들이 자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4세기에는 세르비아 제국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으나 헝가리가 다시 중흥을 맞이하고 세르비아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위협을 떨쳐냈다. 그러나 15세기 헝가리 국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당선되는 등 헝가리가 유럽 정세 한복판에 깊숙히 말려들기 시작하면서 베네치아가 달마치아를 탈취하는 등의 영토 상실이 있었고, 16세기모하치 전투 이후 헝가리 왕국이 사실상 멸망하자 크로아티아는 왕위를 옆동네 오스트리아에게 넘겼고 이후 크로아티아의 영토 대부분이 변경 지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으며 해적들이 들끓는 탓에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등 난장판이 되었다.

19세기나폴레옹 전쟁 이후 달마티아가 오스트리아 영토로 병합되었으며, 헝가리 민족 운동의 고조로 1867년 이중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수립되자 헝가리 왕국의 영토로 분할 설정되었다. 크로아티아를 완전 편입하려던 헝가리와 합스부르크에 충성한 대가로 받아낸 자치를 계속 유지하려던 크로아티아의 이해관계가 충돌했으나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의 빽을 등에 업은 덕분에 자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지역은 제국의 해양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크로아티아는 제국에겐 바다로 나갈 수 있는사실상 유일한 교두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제국의 해군 및 해양 정책에서 크로아티아의 비중은 매우 컸으며, 오스트리아 해군 내에도 실제 인구 비중에 비해 크로아티아계의 수가 더 많았다.

3 현대사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세르비아가 주도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원래 국명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일원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종족적으로는 같아도 문화, 풍습, 사회체계, 경제적 발전, 종교까지 다른 세르비아인의 주도적 지배를 거부한 크로아티아계는 점차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부에서 파탄을 일으켜, 국왕 암살을 자행하고 1941년 나치 독일의 침략 때는 병력 소집을 거부하여 유고슬라비아의 파탄에 일조했다. 독일의 후원 하에 크로아티아인은 1942년 이후 우스타샤라는 반세르비아 조직을 만들어 무자비한 인종청소를 벌였는데, 어찌나 잔혹했는지 천하의 독일군도 치를 떨었다고 한다. 이 때 죽은 세르비아인의 수는 30만 명에서 70만 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대부분의 학살이 저질러진 보스니아의 2차대전 직후 세르비아인이 100만여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거의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인구의 20%에서 40%가 죽은 격이었다. 이 비율이면 유대인 학살보다 더하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계의 체트니크라는 민족주의 저항군과 티토가 이끄는 공산주의 게릴라들 모두와 격렬히 충돌하였다. 90년대 이후 세르비아의 분열때 세르비아에게 대항한 나라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2차대전때의 행적은 크로아티아 근현대사 최대의 흑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1][2] 이 때문인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크로아티아가 인지도를 올렸을때, 일각에서는 크로아티아의 체크무늬 유니폼을 보면 나치가 생각난다면서 항의하는 목소리도 있었을 정도.

1945년 이후 크로아티아는 연방 공화국으로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으로 통합되어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렸으나, 1980년 티토가 죽은 뒤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대두되자 점차 분리의 길을 지향, 마침내 1991년 동구권의 붕괴를 계기로 슬로베니아와 함께 독립국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연방 붕괴를 거부한 세르비아계 연방군과 무력 충돌,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났으나, 국제사회의 중재와 압력으로 연방군이 철군함으로써 슬로베니아와 함께 독립을 달성하였다. 다만 밀로셰비치의 지원 아래 세르비아계가 다수이던 크로아티아 동부 크라이나 지방이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설립을 선포하여 1995년 여름까지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문제로 말썽이 일어나지만, 크로아티아 역사는 아니므로 패스.[3] 독립 이후 서방 세계로의 경제 통합을 지향하여 비교적 빠르게 성장하였다.
  1. 이런 친나치 경력 때문인지 대체역사 창작물인 겁스 무한세계에 나오는 추축군이 승리한 세계인 라이히-5에서는 파시스트 세계의 우주계획에 크로아티아 과학자가 포함되어있다는 언급이 있을 정도면 저쪽 세계에서는 제법 잘나가는 친독국가로 추정된다. 또한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는 크로아티아 지역의 벨리카에 게임의 무대중 하나로 나치 절멸수용소가 있다는 설정이다.
  2. 어찌보면 일본과 비슷한 대접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한게 나치 기준으로는 분명 '부적격'한 인종임에도(원칙적으로) 추축국 동맹의 일원으로서 명예 아리아인 인정을 받았다는 점이 그러하다.(출처: Honorary Aryans, Nevenko Bartulin 저)
  3. 단 헤르체고비나주는 크로아티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사실상 크로아티아 취급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