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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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에 대해서는 아래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야외 공격대 우두머리 - 파멸의 군주 카자크
  • RTS 게임 코삭(cossacks) 시리즈 - 코삭(게임)
  • NATO 코드명 '코사크(Cossack)'라고도 불리는 세계 최대의 항공기 - An-225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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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스러운 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사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한 카자크 기병의 사진을 컬러 복원한 것. 소련에서는 전통적으로, 파란색은 `내무인민위원부(НКБД), 국가안보총국(ОГПУ)등의 딱히 사람 죽이는 게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닌 기관의 상징 색이었다. 후에 이들을 계승한 KGB의 상징색도 파란색이다. 그런데 기병의 병과색도 파란색이었다는 함정. 결국 1935년 이후로는 이러한 의도치 않은 지림을 줄이기위해서인지 기병대 모자는 밴드 부분만 파란색을 사용했다. 사실 더 큰 함정은 모자가 적백내전 당시 백군의 모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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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백내전당시 백군의 카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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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군대의 카자키 예식복. 제식복장이다.


독일군 측에 붙은 해로운 카자크인들. 털모자, 기마복은 위의 붉은 군대 복식과 같지만 나치나 독일군 마크가 붙어 있다.

러시아어로는 Казаки(카자키)라고 부르고, 원조인 우크라이나어로는 Козак(코자크), 폴란드어로는 Kozacy(코자치). 영어로는 Cossack(코삭, 코사크)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카자크에 대한 어원은 튀르크어로 '얽매이지 않은 자들'이라는 뜻의 카자크(Qazaq)라고 본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설이 있다. 이를테면 유명한 사전 편찬자인 'В. 달리'는 '방랑하다', '떠돌아다니다'를 의미하는 중앙아시아의 '카즈마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유목 생활을 한 키르기스인들은 자신을 '카즈마크'라고 불렀다고 하는 것을 그 근거로 삼는다. 골루봅스키와 같은 사학자들은 폴로베츠인들 사이에서 '수호자', '경비원'으로 사용되었던 '카자크'라는 단어가 러시아어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미하일 숄로호프(2008), 숄로호프 단편선』 이항재(역), 민음사 268p~269p) 폴란드에서는 그들을 염소를 뜻하는 자신들의 말인 코자(koza)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카자크와 오랜 세월 동안 대립을 해왔던 폴란드인들이 카자크를 깎아내리기 위하여 억지로 끼워 맞춘 것으로 보인다.

2 역사

2.1 기원

카자크의 형성 과정은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섞여 들어갔고, 형성 시기도 특정한 시기로 단순화하기는 어렵다. 그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나왔는데, 가장 이른 시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바실리 글라즈코프'로, 동로마, 이란, 아랍의 문헌에서 10세기에도 카자크가 우크라이나 스텝 지역에 존재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사학자 카람진도 1223년 몽골군의 동유럽 침략 이전에도 존재하였다고 언급하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본격적으로 카자크가 역사 속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5세기이다. 이 시기를 보통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시대', '카자크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이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은 14세기 즈음에 형성이 되었다고 추측된다. 13세기에 파도처럼 밀려온 강력한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과 여러 제후국이 갈려나가고 몇몇 슬라브 인들이 남부 러시아 스텝 지역으로 흘러들어 가 반유목화가 된 것을 그 기원으로 잡기도 하고, 몽골군에서 떨어져 나간 몽골인들과 튀르크계 유목민족의 일부가 이 시기에 슬라브화가 되어 카자크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아마 카자크 집단의 기초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의 민족 그룹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에서 동부 우크라이나를 개척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과 모스크바 대공국폴란드에서 지주의 억압에서 피하고자 목숨 걸고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스텝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카자크 형성 과정에서 무시할 수가 없다. 이러한 여러 민족,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자유인 그룹'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드네프르 강과 돈 강으로 하류로 내려가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곳에서 반유목 생활을 하였다. 14세기 말엽, 자포로제 카자크와 돈 카자크의 모태가 되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1380년, 이들 카자크들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에게 돈 강의 성모 이콘을 바치고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에게 대항하여 함께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타타르에 대항한 슬라브족의 본격적인 첫 번째 반기라고 할 수 있는 쿨리코보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이들 자유인 집단은 드네프르 강에서 더 남쪽에 있는 크림 반도의 크림 타타르(크림 칸국)의 위협에 직접 노출되어 있었다. 킵차크 한국은 돈스코이 대공이 쿨리코보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이반 3세모스크바 대공국의 독립을 선언한 때부터 세력이 상당히 약화 되어 있었지만 오스만 튀르크의 보호국이 되기도 한 크림 한국은 18세기 이전까지 러시아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남부에서 계속하여 이들이 위협을 가하자, 이들 '자유인 집단'은 자체적인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전에는 농노의 의식이 머리에 들어 있던 자들 대신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인 의식을 갖춘 세대가 이들 집단의 지도 세대로 떠오르게 되고, 이 세대교체는 독자적인 카자크 집단의 형성을 가속했다.

이들은 그 후 국경 지대 마을에서 반 자치 조직을 유지하며 정부의 통제를 받는 '국경 지대 카자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에서 용병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거나(일반적으로 '등록 카자크'라고 부른다. 1590년, 약 3,000명의 등록 카자크가 존재했다. 이들 중 소수는 폴란드뿐만이 아니라 모스크바 대공국을 위해서도 봉사하기도 했다.) 요새화된 그들만의 수도, 드네프르 강 유역의 자포로제 세치에서 경제적으로는 등록 카자크보다 궁핍하지만 자유롭고 독자적인 집단을 만들어 그들만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세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되었다.

물론 자포로제 카자크가 폴란드군을 돕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스만 튀르크우크라이나를 점령할 경우, 이들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지기에 이들은 자발적으로 폴란드와 튀르크간의 전쟁에서 폴란드를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포로제 카자크는 바다에서도 유명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건조한 작은 배로 흑해의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했었다. 용병 카자크는 비록 그들의 정교회 신앙과는 다른 가톨릭을 신봉하는 폴란드 정부의 통제를 받기는 하였으나 카자크 최대의 위협을 타타르오스만 튀르크로 생각하였기에 그렇게 큰 불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공생 관계가 폴란드 정부와 등록 카자크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될 것이다. 또한, 서로의 가치관과 사회가 달랐기에 이들 세 카자크 집단은 자주 반목을 했다고 한다.

당시 카자크의 이미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자포로제 카자크는 세치(Sicz)라는 요새화된 마을에 거주했으며 게트만(Getman), 또는 헤트만(러시아어 알파벳 Г는 'ㄱ'발음과 비슷하지만 우크라이나어Г는 'ㅎ'발음)이라 불리는 단장 아래 일치단결한 공동체를 갖고 있었다. 카자크는 기본적으로 평등사회였기에 단장은 많은 카자크들에게 존경을 받는 원로들 중 선출되었다. 평시에는 단장에게 농담따먹기를 하기도 하고, 공개적으로 모욕하기도 했지만 전시에는 단장이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무지막지하면서도 재미있는 법으로도 유명했다. 빚을 갚지 못한 자에게는 누군가 대신 빚을 갚아줄 때까지 대포에 얼굴을 마주한 채 묶어둔다는 것이나, 물건을 훔친 자가 잡히면 마을 한복판에 묶어놓고 옆에 몽둥이를 놓아두는 형을 선고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대씩 치고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족 중 누군가가 노예로 끌려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가지고 있었다.

타타르튀르크에 대한 위협이 많이 줄어들자, 폴란드는 카자크를 종교적 문제로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폴란드는 가톨릭을 믿고 카자크는 동방정교회를 믿었기 때문. 이러한 박해에 자유가 상징인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은 폴란드에 대한 거대한 투쟁을 시작했으며, 이 시기 카자크들과 모스크바 차르 정권과의 연결성이 강화되었다.

그 투쟁은 마침내 모스크바이반 뇌제의 사망 이후 시작이 된 동란의 시대가 종료된 후 동부 우크라이나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을 때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지도자인 보흐단 지노비 미하일로비치 흐멜니츠키가 모스크바로 귀순하면서 체결한 페레야슬라프 회의 덕분에 종식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혼란에서 벗어난 로마노프 왕조가 우크라이나 카자크를 본격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흐멜니츠키가 카자크를 지도하는 짧은 시기, 그리고 그 이후로도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에 대한 자치를 상당수 인정해주고 대신 몇 가지 의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모든 카자크의 통솔권이(제약이 많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차르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비록 자유를 일정 부분 제한 받았음에도 폴란드와는 달리 종교가 같았기에 카자크의 반감이 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흐멜니츠키의 귀순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국가적인 영웅으로 존경받는다. 지폐에도 있다.(하지만 현대엔 그렇지도 않다. 소련으로 부터 독립한 뒤 독립국가로서의 정신을 고무 시키는 의미에서 우크라이나 지식계층에 의해 그 성격이 재평가 됨은 물론, 특히 러시아와의 관계가 극히 나빠진 요즘 흐멜니츠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새로운 반역자계의 핫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러시아에 종속되게되어 현재에 이르렀다는것.) 반면 폴란드의 입장에선 원수가 따로 없다고...

모스크바 차르 정권은 카자크 민족의 강력한 군사력을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카자크는 러시아 제국을 위하여 군사력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해주는 대신, 세금이나 부역, 농노제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러한 혜택에 힘입어 1651년에 2만 명에 불과했던 러시아 제국의 카자크 병사는 18세기에 약 8만 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2.2 근대

근대에 들어서 몇몇 카자크들은 러시아군에 합류해서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에 앞장서 토착민들과 전투를 벌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이 시기 이반 뇌제 시기에 이루어진 '예르마크'의 동방 원정으로, 시비르 칸국은 수도도 잃고 싸그리 털렸다(...). 이들의 광속과 같은 확장은 러시아 제국이 편하게 시베리아 개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굳이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이루어진 카자크의 야쿠츠크 개척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야쿠츠크의 연교차는 약 섭씨 100도. 야쿠츠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헬게이트다. 표트르 이바노비치 베케토프와 그의 동료 카자크 30명은 현재 서유럽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그보다 훨씬 혹독한 야쿠츠크 지역을 미국 개척자들의 약 6배 속도로 개척하였다고 한다. 또한, 포야르코프, 데지뇨프, 아르라소프 등 다른 카자크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사할린, 오호츠크해, 서태평양 연안 등이 러시아 제국의 지도에 추가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에게 개척의 대가로 선물, , 무기, 을 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지간스크, 베르호얀스크, 자시베르스크, 스렛네콜릠스크와 같은 도시들이 생겼다. 현지 박물관에서는 이러한 문건이 있다.

"12월 25일, 위대한 황제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온 나라에 선포하노니, 짐은 위대한 황자와 국가를 위해 종 된 이들과 함께 레나 강가에 도시를 세웠다. 짐이 오기 전, 레나 강과 야쿠츠크 땅에는 다른 도시가 없었다. 나 표트르는 야쿠츠크의 왕 마미코프의 진영 앞에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와도 전투를 벌이고 조선 효종나선정벌에서 조선군과 맞붙기도 했다. 그러나 나선 정벌에 맞붙은 러시아 탐험대가 카자크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물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그리고 여건상 기마병인 카자크기병들을 배를 태워서 싸우려고 한 것을 보면 아닐 확률도 높다...고 하지만 실제로 카자크는 배도 잘 탄다(!). 흑해에서 배를 타고 오스만 투르크 해안을 약탈하러 다녔을 정도다.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 에서도 배를 건조하며 원정을 준비 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다.

이전 시기에는 우크라이나 지역에만 카자크가 분포하였지만, 이 시기 변방을 개척하고 정복하면서, 그리고 카자크의 중심이었던 자포로제 세치가 예카테리나 대제의 명령으로 해체되면서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많은 카자크 집단이 만들어졌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 초창기에는 볼가 강 강가에 볼가 카자크가 생성되었으며 후에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18세기부터 캅카스의 테레크 카자크, 우랄의 야이크 카자크, 바이칼 카자크, 우수리 카자크, 시베리아 카자크 등이 더 형성되었다. 아조프 카자크, 쿠반 카자크와 같이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에도 카자크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 중 캅카스나 더 밖의 지역으로 진출한 카자크들은 그곳의 타민족, 특히 캅카스의 산사람들이나 여타 모슬렘들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톨스토이의 '카자크인들'의 '테레크 카자크'가 대표적.

한편 정부와의 협력이 더 많아지는 동시에 정부와의 갈등도 심해져 갔다. 폴란드와의 관계처럼 종교 문제로 갈등이 있지는 않았지만, 자유의 제약이 점점 강해지고, 농노들이 계속 카자크 마을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하자 카자크의 특권 중 몇 가지가 박탈되는 가운데 러시아 제국이 더 많은 봉사와 의무 이행을 요구하면서 자유로운 생활, 관습과 그 의무가 충돌하며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터키와의 관계도 갈등의 핵심 요소였다. 러시아 정부는 튀르크와 분쟁을 겪고 싶지 않았지만, 자치를 준 카자크들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튀르크 국경 지대를 침범하고 약탈하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유에 제약이 계속 심해지자, 많은 봉기가 일어났다. 특히 정부와의 협력이 본격화되는 17세기와 18세기 러시아 역사에서 거대한 봉기는 카자크 주도하에 일어난 봉기에 농민 봉기나 다른 봉기가 함께 엮이면서 거대화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스테판 라진(스텐카 라진이라고도 한다.), 불라빈, 그리고 황제를 참칭했던 예밀리얀 푸가초프가 있겠다. 푸가초프의 난을 배경으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대위의 딸'을 집필했다.

또한 표트르 대제 시절에는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의 칼 12세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 때 카자크의 지도자는 '이반 마제파'인데 흐멜니츠키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화폐에 그 얼굴이 새겨져 있다. 바이런은 마제파라는 시에서 그를 칭송했고 러시아인 푸시킨은 이에 반발해 폴타바라는 그의 서사시에서 마제파를 폭풍 디스한다.

어쨌든 많은 저항이 러시아 정부에 의하여 진압됨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카자크는 러시아 사회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카자크의 자유는 계속 축소되었다. 불라빈의 봉기 이후 돈 카자크의 자치는 소멸되었고 푸가초프의 난으로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중심지 자포로제 세치가 해체되었으며, 반란의 주역이던 야이크 카자크는 우랄 카자크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많은 전쟁에 동원되어 그 용맹성을 떨쳤다. 러시아 차르의 근위대로도 활약하기도 했을 정도. 러시아 차르는 카자크에게 '카자크의 대족장' 칭호를 받아 겸임했다. 고용된 카자크는 그 대가로 황제의 친위세력으로 많은 혜택을 받아 그 숫자도 120만까지 늘어났다. 이런 배경으로 황제의 명령을 받아 체첸까지 달려가기도.

다른 열강과의 싸움에서도 카자크는 그 진가를 발휘했다.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 그리고 특히 1812년, 러시아를 침략한 나폴레옹에 맞서 조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카자크의 용맹성과 잔혹성은 같은 대불 동맹 연합군의 지휘관들도 학을 떼게 할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카자크는 존재하는 모든 경기병 중에서 최고이다. 내가 그들을 우리 군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에 맞선 1812년의 조국 전쟁 시기에 카자크들이 유럽을 휩쓸며 카자크는 도나우를 넘었다(Їхав козак за Дунай)와 같은 카자크 민요들이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유럽으로 많이 전파가 되었다. 카자크는 도나우를 넘었다의 경우에는 폴란드의 송골매라는 민요로 바뀌었고 독일에서는 많은 고전파 음악가(대표적으로 루트비히 베토벤)들이 편곡하기도 하였다. 러시아 제국 내외에서도, 심지어 그들과 접촉이 거의 없었던 서유럽에서도 카자크는 용맹과 잔혹함의 상징, 강대한 러시아 제국의 스팀롤러-고통을 모르는 듯 묵묵히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진군하는-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3 19세기 중엽에~20세기 초반

1800년대 중엽을 지나면서 카자크간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원래 카자크는 모두가 평등하게 땅을 경작하였고, 누가 더 높은 계급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이 없이 모든 구성원이 평등했다. 아타만과 같은 직책도 선출직이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하였던 여러 차례의 농민 봉기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는 카자크의 자유로운 기질을 억누르기 위하여 그들을 군대식으로 서열화하였고(1775년 예카테리나 대제의 자포로제 세치 해체도 이러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여러 특권을 박탈하는 대신 카자크의 상층부를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카자크들이 황제의 호위병 역할을 해주고, 많은 전쟁과 전역에 꾸준히 참여하자 카자크들에게 주어지는 토지가 급격히 늘어남과 동시에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이 발표되면서 계층 분화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토지를 넓게 경작하는 부유한 카자크들과 적은 토지를 경작하거나 토지가 없는 가난한 카자크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카자크 촌으로 과거 농노였던 사람들이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몰려오자 비 카자크 농민도 카자크 마을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이 되었을 때, 카자크 마을에는 이미 카자크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나 바쉬키르, 타타르와 같은 여타 민족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이들은 상층 카자크의 토지를 경작하며 하층 카자크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하여 카자크를 충분히 통제하고 이용할 수가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 내에서 민중들의 항거가 계속되고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 운동, 반봉건 운동이 널리 퍼지게 되자 카자크는 시위 진압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떠올랐다. 특히 1905년의 1차 러시아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말을 타고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러시아 민중들에게 각인되었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의 카자크들이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으로 그려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에 볼셰비키 지지파인 적군과 황제, 멘셰비키, 입헌민주당 지지파인 백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카자크들도 둘 중 하나의 세력을 선택해야만 했다. 원래 공동생활을 하던 카자크 족도 이때 쯤이면 계급분화가 어느 정도 벌어졌고, 일반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귀족계급 및 고위계층 카자크인은 반혁명군 편에, 빈민 카자크인들은 소비에트 편에 선다.

그래서 대추장 아타만을 비롯한 여러 상층부는 백군 기병대로 활약, 계층 분화로 인하여 하층민에 속하던 카자크도 많은 수가 세묜 부됸늬 원수 휘하의 적군 기병대로 들어가 활약했다. 이 시기에 러시아인뿐만이 아니라 카자크간의 동족상잔이 자행되었다. 적백내전의 연장 선상에서 발발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는 카자크의 오랜 숙적이자 카자크와 함께 기병대의 투톱을 자랑하던, 폴란드 기병대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적백내전은 끝내 소비에트 정권의 승리로 끝났고, 패배한 백군 측의 카자크는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이 미국의 '돈 카자크 합창단'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좌우 갈등으로 쉴새없이 죽어나가는 카자크인들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고요한 돈강'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멜레호프는 카자크족 빈민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이 벌어지자 계속 반혁명군과 붉은 군대를 오락가락하면서 좌우 갈짓자 행보를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혁명에 휘말린 카자크족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이 책의 저자 '미하일 숄로호프'는 노벨상을 받았고 이 작품은 50년대에 컬러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냉전 말기에 소련 영화 수입금지가 풀리자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사람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소련에서 만든 영화답게 크고 웅장한 스케일에 CG 없이 그냥 사람들을 동원했다. 참고로 이 책은 서슬이 퍼렇던 스탈린 시절에도 높이 평가받았는데, 주인공의 갈짓자 행보때문에 공산당 측에서 많은 비판을 했음에도 워낙 문학성이 뛰어나서 숄로호프는 무사했다고 한다.

카자크족은 신앙심이 깊은데다가 반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소비에트 정권은 이들을 불온시하였다. 이전 문서에는 어떤 일본 책에서 인용된 레닌이 서명했다는 카자크 사회 말살 명령문이 있었는데 사실 근거가 희박하다. 일단 내전기 카자크는 굉장히 복합적으로 다뤄야할 문제다. 레닌이 진짜로 카자크 사회에 대한 말살을 명령했다면 붉은 군대의 편에 섰던 수많은 카자크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기들을 절멸시키라고 한 지도자들을 따랐을까? 또한 존 리드라는 미국인이 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러시아 혁명 르포에서 레닌이 보여준 카자크관과도 너무 다르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따르면 당시 레닌과 트로츠키는 "토지 없는 카자크들"이 자신들의 소비에트를 만들어 볼셰비키에 합류하라고 했다.

1932년 소련에 대기근이 닥쳤는데, 불행히도 이 기근이 카자크들에게 직격탄을 먹여 그 지역 인구의 2~30%가 사망했다. 이 기근은 사실 카자크족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근방과 캅카즈 지역 전체를 덮친 것으로 그 원인에 대해서는 분분하다. (홀로도모르 참조) 서방측이나 반공적인 소스에서는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기근을 조장했다고 주장하나, 러시아 측에서는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의 부작용+자연재해를 원인으로 들고 있다. 다만 의도적이었든지 아니었든지간에 이 재해는 우크라이나인이나 그밖의 소련 시절 피해를 당한 민족이 주장하듯이 특정 민족을 겨냥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민족이 기근으로 피해를 입었다.

어쨌든 소련 정부는 이 기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얼마 없는 곡식들을 빼앗아 카자크족을 죽게 내버려 뿐만 아니라 겨울에 많은 카자크족들의 집을 부수고 협동농장에 부역하도록 했고, 이는 많은 카자크족들이 겨울에 아사하거나 얼어죽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의 상황이 너무 참혹하여 소련의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는 스탈린에게 상황개선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강철의 대원수께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레전설 작가의 청원을 어엿비 여겨 들어주는 척 하긴 했지만...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참고로 같은 시기 수 백년 동안 우크라이나 스텝 평원을 두고 이를 갈며 서로 치열하게 싸워 왔으며, 정교도 신앙의 반유목 군사 공동체로서 카자크를 탄생하게 했던 숙적, 크림 한국의 후예인 크림 타타르 또한 대규모 인종 청소 정책에 시베리아 복판으로 민족 째로 끌려가 대략 반은 죽고, 반은 소련이 망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6세기 이후 우크라이나 역사를 형성해 온 굵직한 두 반유목 전투민족 집단이 스탈린 한 사람 손에 싸그리 청소당한 셈이며,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홀로코스트 크리까지 맞아 그 일대 도시 문화를 주도했던 폴란드인, 유대인 엘리트 집단까지 쓸려나가면서 현대 우크라이나의 인구 구성, 특히 코사크와 타타르족이 활약했던 남부 평원은 전통적인 모습과 큰 차이가 있으며, 이에 따라 당연히 역사적 소유권 분쟁은 2014년 중반 현재 볼 수 있듯이 안드로메다로 빠질 수 밖에 없다. 참 여기저기서 가지가지로 한 양반이다.

카자크족은 군대의 불순요소가 될까봐 처음에 붉은 군대의 입대가 거절되었으나, 하도 입대 허가 청원이 빗발치듯 하니 1936년 전격적으로 허용된다. 이에 따라 붉은 군대에는 카자크족 기병부대가 편성되기 시작했다. 군인의 용맹성을 제일로 치는 카자크족의 전통상 많은 카자크족들이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리고 카자크 관련 군가도 많이 작곡되기 시작한다. 카자크, 우리 카자크베를린의 카자크 등.

2.4 그런데 카자크만 콕 찝어서 탄압했는가?

카자크족이 소련 체제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서방측에 망명한 카자크족(이들은 대부분 적백내전이래 공산정권과는 원수지간이고, 대부분 지배층-지주 출신이다.)과 러시아에 남은 카자크족간의 이야기가 매우 다르다. 특히 서방측 카자크 소스는 반공주의와 결합되어 마치 카자크족이 특정하게 지목되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방으로 망명했던 지배층은 후에 나치에 부역했다가 소련이 승전하자 대대적인 보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소련체제관은 좋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가려 들어야 한다.

이런 서방 카자크측 소스에 의하면 소비에트 정부 수립 직후부터 카자크의 민족성과 종교를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수만명을 아무 이유 없이 강제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였고, 스탈린 치하에는 반유목생활을 하는 이들을 억지로 잡아다가 콜호즈등의 협동농장에 부역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강압정책으로 사망한 카자크들은 약 30만 정도로 추정되며 이래서 소련 당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서방측 소스와는 달리 러시아에 남았던 카자크족들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 탄압에 의한 사망이라는 것도 사실은 홀로도모르와 같이 기아에 의한 것으로서 카자크 뿐만 아니라 일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도 모두를 덮쳤다는 점에서 카자크만 특정하게 탄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카자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았다.)

그리고 스탈린 시대에 이전 적백 내전기 도중에 벌어진 카자크에 대한 탄압은 단순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볼 수 없다. 당장 위에 차르 정권은 역사적으로 코사크들을 러시아 내부의 소수 민족이나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탄압에 특화된 내부 치안 부대로 중용했다고 나와 있는데, 설마 이걸 두고 아무 이유 없이 저질러진 탄압이라 할 수 있을까? 적백 내전 시기 백군이 행한 테러와 학살 행위도 적군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했다고 할 수 없고, 이 와중에 많은 수의 카자크가 특히 돈 강과 우크라이나 유역의 데니킨에서 시베리아의 콜차크까지 백군의 중심에 있었다. 오히려 그나마 적군이 사 년 가까이 질질 끌면서라도 전직 전문 군인들로 구성된 백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요소가 당시 러시아 농촌들이 그나마 적군을 차악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백 내전기의 코사크는 결코 일방적인 피해자적 입장에서 볼 수 없다.

또한 서방측 카자크족 주장에 의하면 약 1930년대 중반부터 카자크 부족들 사이에 반소련정서가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카자크족들의 국가를 세우자는 독립사상으로까지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카자크족이 불온한 상태였다면 1936년에 카자크족의 전면적인 입대(이런 입대는 개별적 입대가 아니라 부족 전체가 한개 부대로 재편되는 것이다.)가 과연 허용되었을까? 당시에는 불온한 민족들(고려인, 체첸인)이 강제이주가 실시되던 시기였는데, 불온집단 전체를 한 부대로 개편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카자크족은 스스로 러시아인임을 부정한 적이 단 한번도 없으며, 독립을 주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소수민족들의 탄압의 선봉에 섰다. 차르 시절부터 카자크는 러시아 군인으로서 복무해 왔으며, 1936년의 카자크족의 붉은군대 입대 허용조치도 카자크족의 내부의 계속된 청원에 의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서방측 카자크족 이야기는 이들의 반소련 정서를 감안해서 상당히 가려들어야 한다.

2.5 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때는 말에게 초가지붕의 지푸라기를 먹여가면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허둥지둥 내빼는 독일군칼로 도륙하는 용맹함으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질리게 했다고도 한다.

1936년부터 입대가 허용됨에 따라, 소련군 기병부대에는 카자크족 출신이 많았으며, 기병 총감인 세묜 부됸늬 원수부터가 카자크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사실은 카자크족 마을에서 자란 러시아인). 많은 카자크족들이 나폴레옹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붉은 군대에 복무해서 침략자와 싸웠다. 여기서 잠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리 카자크가 소련 체제에서 탄압을 받았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카자크는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자신들은 러시아의 일부라는 것을 한번도 부정한 적이 없으며, 마찬가지로 대다수는 소련으로 대표되는 러시아를 조국으로 삼았다. 그래서 독일에 포섭된 서방 망명자 출신의 카자크족 추장의 호소에 응해 독일측으로 간 이들도 꽤 되었지만, 카자크 대부분은 "어머니 러시아"를 위해 독일에 맞서 싸웠다.

산하에 카자크 기병을 부대로 둔 소련군의 이반 코네프 원수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카자크족의 용맹을 묘사하면서 "걔네들은 항복하겠다고 든 독일군의 두 손까지 잘라버리더군..."이라고 이들의 용맹성을 묘사했다. 물론 덕분에 독일군도 카자크들에게 항복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고 있었기에 카자크들을 사로잡으면 대부분 사살했다.물론 카자크가 아니어도 소련인이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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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독소전쟁 승리 기념 퍼레이드에서 붉은 광장을 행진하는 카자크족 부대. 위와 같은 제복은 분명한 소련의 제식복장이다.

물론 이 때도 많은 소련 내부의 적이 독일 편에 붙은 만큼, 독일군에도 카자크가 있었다. 다만 나치 독일이 2개 사단을 만드는 시점에서 소련 카자크는 이미 17개 사단. 대다수 카자크는 혁명 이후 공산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했다가 후에 독일측에 붙은 카자크족 출신 러시아군 장군들에 호응하여 독일 편에 붙은 것이었다. 이들은 여러가지로 독일측에 부역했는데, 독일측은 이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군에 대한 작전보다는 후방의 파르티잔을 진압하는데 자주 동원하였다. 이들의 잔혹함은 동유럽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종류의 작전이 대체로 그렇지만 민간인과 빨치산이 잘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민간인도 한뭉텅이로 처리했고, 이런 잔혹행위들은 친서방적인 티토측의 선전에 의해 연합국측에 대대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 영내로 진입했고, 독일이 항복하자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영/미군에 항복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자크들은 연합군에게 항복했으니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다. 히틀러의 후임으로 독일 대통령이 된 칼 되니츠도 이런 기대를 하고, 독일이 영/미군과 강화를 맺으면 그나마 소련에게 넘겨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전에 소련과 협의가 되어 있던 영국군은 이들을 몽땅 스탈린에게 넘겨버렸다. 사실 이들은 독일에서 부역했고, 동유럽에서의 잔인한 행위로 너무나 악명이 자자했기 때문에 서방 연합국들은 이들에 대해 전혀 동정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에 연합군은 소련 시민이 아니었던, 혁명 당시 난민으로서 이주하여 한 세대가 넘은 카자크들까지 전부 다 넘겼다! 민간인 포함 5만명이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엄밀히 말해서 독일측에 협력했기 때문에 전쟁범죄에서 무죄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혁명 때 이주한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는 무죄다.

이들은 결국 넘겨지자마자, 혐의가 큰 이들은 바로 처형당하고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끌려 갔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시대에 사면되었다.

이 사건을 "카자크 송환"(Repatriation of Cossacks), "카자크 배신"(Betrayal of the Cossacks), "린츠의 카자크 학살"(Massacre of Cossacks at Lienz) 등으로 부른다. 사실 이 사건은 소련의 입장에서는 조국을 배신한 반혁명분자를 처단한 셈이라서 뭐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거기다가 이들은 유고슬라비아의 대빨치산전에서 활약하면서 일본군의 삼광작전 뺨치는 전술로 유고슬라비아 민간인 마을들을 도륙하고 다녔기 때문에 전쟁범죄에서 자유롭기도 힘든 처지이다. 이들중 상당히 억울한 부류는 서방에 망명했던 백군출신 카자크족들의 가족들인데, 이들중 상당수는 혁명 이후 태어나 러시아인이라고 보기도 힘든 일인데, 부모나 친지의 독일 부역혐의 때문에 생전 가보지도 못한 "조국"에 대한 반역혐의로 몰려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끌려간 이들이다.

이들에 대해 동정적인 (대부분 반공주의자)서구인들은 사실상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죽인 셈이라고 주장했다. 한 영국 장교는 "영국 장교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당신들은 스탈린과 협상하러 가는 것이다."라고 이들을 속였다. 그걸 믿으면 제대로 병신 인증 카자크들은 "소련 비밀 경찰과 독일 게슈타포는 우릴 몽둥이로 죽였고, 영국군은 명예를 가장하여 우릴 죽인다."고 했다나. 미국도 카자크들을 소련에 넘겼다. 소련행 배를 안 타려고 발악하는 걸 수면제 커피로 재웠다고. 흠좀...

그러나 독일군에 부역한 카자크는 소련 입장에선 조국을 배신하고 침략자에 부역한 배신자들이다. 후에 소련을 악마시한 냉전의 영향 때문에 동정을 사기도 했고, 이것 때문에 그들이 피해자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들은 소련 입장에서는 용서하기 힘들었음에 틀림없다. 소련인 약 2000만 명이 독소전쟁에서 사망했음을 생각해보면 소련의 입장이 이해가 갈 듯. 더구나 소련은 카자크족에만 이렇게 가혹했던 것이 이런 게 아니라 독일군에 부역한 러시아인들조차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해졌기 때문에 이들만이 그렇게 소련에 당한 것도 아니다.

물론 독일에 부역한 카자크들도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위에 서술되어 있듯이 스탈린은 순응하지 않는 카자크족들을 매우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이로 인해 죽은 카자크들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만이 넘는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 탄압하던 공산당원들을 무찌르고 좋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들었으니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손잡은 대상은 인류 역사에 유래가 없는 악마들이었고 본인들도 그 아래서 적지 않은 살육을 자행했으니 동정의 여지는 없다.

007 골든 아이가 바로 이 때 배신당한 카자크족의 아들인 006 요원(숀 빈 役)이 소련과 영국을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을 다루고 있다.[1]

2.6 2차대전 이후

카자크족은 2차대전 때의 용맹으로 전투종족의 명성을 회복했지만, 붉은 군대가 전후 대대적으로 기계화를 추진하자 기병 담당 카자크족은 또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고, 카자크족 부대는 해체되었다. 이와 함께 카자크족 자치공화국도 폐지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저 이후 농민이나 일반 시민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 공화국 전역에서 카자크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989년 소련 정부가 약소민족에 대한 탄압을 인정하고 92년 러시아에서 억압받은 민족에 대한 복권을 보장하는 법이 제정되자 카자크 부흥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카자크에 대한 일련의 법들이 제정됨은 물론이고 96년에서 98년 2년 동안 10개의 보이스코(1만명 이상일 경우)와 3개의 관구(2천명 이상), 4개의 개별 집단이 등록되었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4만명이 러시아에 살고 있으며 95% 이상이 러시아 남부 관구에 살고 있다.

카자크는 또한 그들의 단합과 문화 복원, 전통전승 등을 위해 TV 채널을 개통하거나 인터넷 TV를 만들고 자체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하여 활발한 복원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문화센터는 물론이고 카자크 자체 미인대회도 열리고 있을 정도. 이러한 카자크 문화 강조 노력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쿠반 카자크 합창단이다. 유튜브에 동영상이 많으니 관심이 많으면 보도록 하자.

하지만 현재 러시아에서 이러한 카자크의 민족 부흥 운동은 그릇된 민족주의로 번지기도 한다고 한다. 원래 카자크의 호전성과 자부심은 러시아인들도 학을 뗄 정도였는데 수십년 동안 억압받다가 드디어 자유를 받게 되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특히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부 관구는 캅카스 계통의 비슬라브 거주민이 상당히 많은 지역인데 공격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고. 사실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체첸인들은 소련시절부터 깡패민족으로 악명이 높았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도 같은 처지로 그곳으로 끌려온 체첸인들에게 크게 학을 떼었다. 그런데 이런 체첸인들이 유일하게 겁내는 사람들이 바로 카자크족들이라고...

러시아군에서의 대우 또한 매우 좋아졌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족 대추장(아타만)에게는 원수의 계급을 수여했고, 군인의 용맹을 제일로 치는 카자크족들은 다시 군대로 들어가서 러시아가 벌이는 전쟁들의 선봉에 서고 있다. 물론 이젠 기병이 아니라 특수부대의 일원으로 싸운다. 체첸 전쟁이나, 남오세티야 전쟁 에서 이들은 신러시아제국 제1대 차르의 명을 받고 러시아의 적과 싸웠다. 그리하여 전투민족의 명성을 되찾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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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크림 위기 당시 러시아군 소속의 카자크 병사들.

3 전투종족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의 위대함은 시베리아정ㅋ벅ㅋ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16세기 이후 몽골로부터 독립한 러시아가 이들을 앞세워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있던 몽골계 유목민족들을 모두 떡실신시키고 시베리아 동쪽 끝까지 정복해 나간 것. 예니세이스크, 하바로프스크, 토볼스크 등의 시베리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이들이 요새화한 정착지에서 기원하며 '예르마크(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가 이끄는 카자크 부대는 1581년 사설원정대 주제에 시비르 한국의 수도까지 정복해 시비르 영주로 인정받기도 했다. 더군다나 유목민족답지 않게 해적질에 나선 적도 있다. 사하이다치니가 수령으로 있던 17세기 초에는 차이키(러시아 어로 바다갈매기란 뜻)란 소형선박을 300척 가량 건조한 후 그 선박을 가지고 흑해를 휩쓸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근교지역까지 약탈하고 크림 반도의 노예시장을 털고 그 곳을 지키던 14,000명의 병력을 몰살시켜버릴 정도로 활약하는 통에 흑해는 한때 '카자크 해'로 불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메흐메트 4세가 보낸 오스만 제국 원정군을 떡실신 시키고, 그가 항복을 권고하자 어마어마한 욕설이 담긴 편지를 보내 보복했다. 다만 이들이 보냈다는 편지의 원본이 남아있지 않고 18세기에 만들어진 사본만 현재 남아있어 그 사본이 원본을 얼마나 정확히 필사한 것인지를 따지고 들어가면 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며, 현재는 민간에서 전승되는 과정에서 과장되었거나 창작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떻게 되었든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일리야 레핀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 그림을 그린 덕에, 이야기 자체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보낸 편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술탄이자, 무함마드의 아들, 해와 달의 형제, 하느님의 손자이자 총독으로, 마케도니아와 바빌론, 예루살렘, 상하이집트 왕국의 지배자, 황제 중의 황제, 군주 중의 군주, 패배할 줄 모르는 훌륭한 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그리스도교의 확고한 방어자로써 짐은 그대들 자포로제 카자크인들이 어떠한 저항 없이 자발적으로 짐에게 복종할 것과 무의미한 공격으로 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것을 명하노라." [2]

이에 카자크족은 정성과 마음과 혼을 담은 답장을 보내주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Reply of the Zaporozhian Cossacks to Sultan Mehmed IV of the Ottoman Empire
- 일리야 레핀(Ilya Repin) 그림 참고 항목 - 위키피디아 사전[3]


자포로제 카자크들이 술탄에게 말한다!

"오 술탄, 터키의 악마이며 빌어먹을 마귀들의 형제이자 친구, 사탄의 하수인 같은 놈아.
너는 대체 어느 정도로 극악한 기사이길래 자기 헐벗은 엉덩이에 달라붙은 고슴도치 하나 죽이지 못하느냐?
악마의 똥이자 네 졸개들이 처먹는 짬밥같은 놈. 너 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아들들을 상대하지 못한다.
우리는 결코 네 군대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땅 위에서나 물 위에서나 승리해서 네놈의 애미를 따먹고야 말테다.

너는 바빌론의 설거지꾼, 마케도니아의 바퀴 제작자, 예루살렘의 양조꾼, 알렉산드리아의 염소랑 비역질 하는 놈, 상하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남창, 카먀니츠의 망나니, 그리고 이 세상과 저승을 통틀어 가장 멍청한 놈이다. 주님 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 거시기의 경련, 돼지코, 암컷 당나귀의 엉덩이,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 대가리, 네 에미나 실컷 따먹어라!

이것이 자포로제 분들께서 너같이 미천한 놈에게 하사하는 답장이다. 너는 그리스도교인의 돼지를 몰 자격조차 못 된다.
이제 우린 끝을 맺고자 하는데, 우린 날짜를 알지 못하고 달력도 갖고 있지 않다.
달은 하늘에 떠 있고, 년도는 책에 쓰여있고, 날짜는 네 놈이 있는 곳의 날과 똑같다.
그러니 우리의 엉덩짝에 입이나 맞추시지!"

- 코쇼비 오타만 이반 시르코와 자포로제의 형제들이 [4]

위의 그림이 움직이는(...)버전

( 영어 자막 )

O Sultan, Turkish devil, secretary to Lucifer himself.
You demand our surrender that we turn our back on a noble Christian King who has given us dominion over the steppes and recognized our power.
We give him our horses out of loyalty, for he has honored us.
We do not fear him.
and we do not fear you.
Babylonian scullion.
We can concede to you the respect you deserve - that of a horse's ass, a lowlife scoundrel, and dog.
For they are your peers in battle, and equals as rulers.
We, the Cossacks, defy you and your army.
We will battle you on land and sea.
May whatever god you worship have mercy on you.
We will have none.

( 자막 번역 )
오 술탄, 터키의 악마이자 루시퍼의 개인비서여.
그대는 우리에게 항복을 요구해, 우리의 힘을 인정해주고 대초원의 통치권을 부여한 고귀한 기독교의 왕에게 등을 돌리라고 했소. 우리는 그에게 말을 주었고, 그는 우리를 명예롭게 해주었소.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소, 그리고 우리는 그대도 두렵지 않소.
바빌론의 설거지꾼이여.
우리는 그대에게 그대가 받아야할 마땅한 대접을 해줄 것이오 - 쓸모없는 아둔한 멍텅구리, 비열한 악당, 몹쓸 개처럼 말이오.
이제 우리는 그대들의 친구들과 함께 같은 통치자로서 전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오.
우리 코사크는 그대와 그대의 군대에 감히 맞설 것이오. 우리는 땅과 바다에서 당신과 싸울 것이오.
그대가 섬기는 신이 무엇이건 간에, 그대에게 자비를 베풀기만 바랄 뿐이오.
우리는 결코 베풀지 않을 것이니 말이오.

위의 그림과 편지 내용을 토대로 만든 게임 유로파 유니버설리즈 4의 DLC 트레일러. 간지나는 목소리가 일품이다.
자막 번역에 대해서는 의역 및 오역이 상당한 듯 하니, 여러모로 수정 및 추가바람.


카자크의 이런 악명(?)은 대한제국에서도 유명했다.

아라사의 서북부에 가살극(코사크)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사납고도 악독하여 유럽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와전되어, '가살극 사람들은 퇴화되지 않은 꼬리가 있으며, 사람 고기를 식량으로 삼는다'고 소문났는데, 그들이 요즘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토를 짓밟으며 남하하였다. 안주의 어느 백성이 암말을 잡아매고 편자를 박다가 갑자기 돌아다니던 아라사 병사를 만나자 말을 미처 풀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아라사 병사들이 이 암말을 보더니 돌아가며 음란한 짓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들이 가살극인데 성품이 가장 음탕해서, 부녀자를 만나면 늙었는지 젊었는지도 묻지 않고 문득 범한다.
숫양처럼 하루에 수십 번이나 교합하므로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부녀자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들은 또한 의심이 많아서, 늘 약탈하다가도 네댓 명이 모여있는 것을 보면 침입하지 못하며, 먹을 것을 보면 소나 말처럼 반드시 생채로 씹어먹었다. 그들은 말도 잘 타서 한번 휘파람을 불며 달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리를 달렸다. 용모가 비록 사납게 생겼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만나도 죽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부드러운 빛을 보였다. 그들을 볼 때마다 이를 가는 자는 오직 왜놈 뿐이었다.
이때 왜군은 황해에 퍼져 있으면서 자기 나라의 식량과 기계 운반 말고는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배를 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분장하여 평안도 지방을 드나들며 아라사를 정탐했는데, 아라사가 그것을 알고 엄히 수색하여 머리 깎은 자를 보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래서 스님들 가운데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5]
날씨가 추워서 사람들이 방한모를 썼는데, 아라사 군사들이 사람들을 만나면 칼 끝으로 모자를 벗겨 머리를 깎았는지 아닌 지를 조사했다.

-매천야록, 황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 문화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혹은 대장 불리바)에 의하면, 어린아이같은 식성을 가지고 있었다. 메밀죽을 얼마를 쑤든간에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먹고, 남아돌면 남아도는 만큼 몽땅 먹어치워버린 것. 게다가 도 무진장 퍼마신다. <타라스 불바>에서는 두꺼운 코트를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한 카자크 남자가 나온다. 타라스 불바가 "왜 더운데 그렇게 옷을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나? 꼭 삶은 문어 같군"이라고 한마디 하자, 그 남자의 대답이 가관이다. "벗을 수가 없어요! 이 옷마저 벗었다간 당장에 술로 둔갑해 마셔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특히 고골은 우크라이나와 관련이 깊은 작가인지라, 우크라이나 카자크가 소설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비이(Вий)'라는 꽤 복잡한 소설이 있다. 대부분은 당시 부패하고 세속화된 정교회를 까는 내용으로, 호마가 마녀와 만나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는 단편소설이다. 또한 호마가 기도해줘야 하는 시체가 밤만 되면 살아난다. 이 '비이(Вий)'에서도 주인공 수도사 '호마 부르투스'가 코자크 족장의 마을에서 기도를 하게 되는 상황이 등장하는데, 이 때 호마가 도망치려고 하자 족장이 "이 친구들, 보드카만 주면 네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두들겨 팰텐데? 성공하면 금화 천 개, 실패하면 빠따 천 대야."라고 정중히 협박한다.

상술한 페레야슬라블 회의와 본격적으로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인 정교회만 해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1620년, 카톨릭 측의 정교회에 대한 공세가 절정에 달해 우크라이나 현지에는 신자들은 아직 많이 있어도 교회 구조와 주교좌는 텅텅 비었던 시절에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테오파네스 3세가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선출 된 필라렛 로마노프의 주교 임명을 축성하러 모스크바 까지 가던 중, 키예프 근처에서 자포로제 코사크 한 일당에게 붙들렸다. 테오파네스 총대주교에게 코사크들이 루테니아 정교회 조직을 다시 만들고 사제들을 다시 축성해 달라면서 부탁(...)하며 하는 말이, "목자를 필요로하는 양때가 여기 있는데 이들을 버리고 가는건 기독교인 답지 못합니다. 하물며 이런 위험천만한 지방을 총대주교 성하께서 여행하시데 중간에 맹수나 도적때의 습격을 당하실 수 있어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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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파리에 들어온 카자크들은 파리의 카페란 카페는 온통 전세를 내서 당시 프랑스에는 없던 보드카를 달라고 난리를 피우는가 하면, 성질도 급해서 "빨리빨리!"를 외치면서 음식을 재촉하곤 했다고 한다. 러시아어로 '(더)빨리!'를 브이스뜨러!(Быстро)라고 하는데, 여기서 간단한 식사를 빨리 할 수 있는, 카페와 식당의 중간 정도 성격을 가진 프랑스 식당이라는 뜻의 '비스트로(Bistro)'가 탄생했다. 스탈 부인충격과 공포"(파리에) 카자흐 기병이라니!" 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때 카자크 민요인 카자크는 도나우를 넘었다도 서유럽에 알려져서 베토벤 등 몇몇 작곡가들이 이를 모티브로 작곡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카자크족하면 머리꽁지만 남겨놓고 박박 민 머리와 긴 콧수염, 테트리스에서도 등장하는 따라하기 힘든 춤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보드카! 전통의상으로 루바슈카(лубашка)라는 품이 넓은 셔츠와 파자마 비슷한 바지를 입는데 이건 말 타기에 특화된 복장이다. 카자크들은 오늘날에도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실제로도 자주 타고 다닌다. 또 쿠반카(кубанка)라 불리는 털모자를 쓴다. 특히 '쿠반카'는 샤슈카(шашка)라 불리는 기병도와 함께 카자크군의 상징으로 여겨져 오늘날까지도 의장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의외로 카자크들은 전통민요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폴란드우크라이나에서는 '반두라'라고 부르는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카자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에서 카자크들이 등장하지만, 특히 추천할만한 작품은 역시 고골의 <대장 불리바>(원제: 타라스 불바. 영화 버전에서는 율 브리너가 불바 역을 맡았다.), 그리고 폴란드의 예르지 호프만 감독의 영화 <불과 칼로써 - Ogniem i Mieczem)>가 있다. 본래 '헨릭 시엥키에비치'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국에도 개봉되었고, <007 골든 아이>와 <엑소시스트>에도 출연한 적 있는 여배우 '이자벨라 스코룹코(Izabella Skorupko)'가 주연을 맡은데다 고증까지 거의 완벽해서 대히트를 쳤지만 180분이나 되는 영화분량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선 영화의 거의 1/3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잘려나간 버전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다. 몇몇 우크라이나측 비평가들과 여론은 흐멜니츠키를 비롯한 카자크 지도자들과 자포로제 카자크의 반란을 일차원적으로 나쁘게 묘사하고 모멸했다고 이 영화를 비난했는데, 애초에 영화를 눈 뜨고 제대로 봤다면 나올 수가 없는 평이다. 비록 주인공측은 한 결혼식을 앞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병대원을 중심으로 한 폴란드쪽으로 나오지만, 흐멜니츠키는 나름 명분이나 인망도 있고, 카리스마도 대빵이며, 머리도 좋은 간지폭발 적군 두목으로 나오고, 폴란드 대영주들의 카자크들에 대한 오만과 잔인함 또한 제대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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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악기 반두라(Bandura)를 연주하는 카자크족의 모습.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크림 반도에서 산다.[6]이름은 Ostap Kindrachuk. 아내가 집을 보는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며 악사 일로 돈을 번다. 몇몇 위키백과에는 반두라 소개용으로 사진이 실려있기도 하다.



본격 카자크 B-BOY 배틀


끝으로 자포로제 카자크들의 민요를 소개한다.

Наливаймо, браття

Наливаймо, браття,
Кришталеві чаші,
Щоб шаблі не брали,
Щоб кулі минали
Голівоньки наші.

Щоби Україна
Повік не плакала,
Щоби наша слава,
Козацькая слава,
Повік не пропала.

А козацька слава кровію полита,
Січена шаблями, рубана мечами,
Ще й сльозами вмита.

Наливаймо, браття, поки ще є сили,
Поки до схід сонця, поки до походу
Сурми не сурмили.

잔을 들어라, 형제들아
크리스탈 잔으로
우리들의 심장을,
칼이 찌르지 못하도록
총알이 궤뚫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우크라이나여
결코 울지 마라
우리들의 영광은
카자크들의 영광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

※마지막 두 문단은 번역되지 않았으며 우크라이나어 전공지분의 번역을 기다립니다.

5 각종 매체의 카자크

러시아 및 동유럽 일대의 기병유닛으로 등장한다.

5.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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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가능 시대: 식민지 시대
인구수: 1
비용: 식량 75, 금 75
HP: 225(기본)
이동 속도: 6.8
방어: 원거리 방어 30%
공격(공성): 데미지 16, 사거리 6, 공속 3
공격(근접): 데미지 26, 공속 1.5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에 등장하는 국가인 러시아의 기본 중기병으로, 유럽의 후사르를 대체하는 고유유닛.

성능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절반수준의 가격, 절반수준의 인구수, 그리고 절반수준의 성능을 지닌 유닛으로 저글링처럼 찍어내는데 특화되어 있다. 1:1로는 오프리치니크, 유목민 기병과 같은 테러기병 말고는 상대하면 진다. 그래도 후사르보다 공격력이 4 밖에 떨어지지 않았고 원거리 방어력이 높아져서 본업인 척후병과 포병사냥, 그리고 게릴라를 하는데에는 큰 지장이 없다. 덤으로 보조 카드를 모두 받는다면 성능이 상당히 준수해져 일반 후사르 상대로는 1:1로 이길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간다. 그래도 후사르가 특화유닛라든가 카드라도 붙인다면 어려우니 무리하지 말자. 그래도 특별한 변수 없이 인구수1이라는 점이나 값싼 가격에서 나오는 뛰어난 생산력으로 소모전을 하면서 상대의 중기병을 깎아가다 보면 결국은 러시아가 이기게 된다.

기병은 기병이다보니 카드로 인구수를 줄여서 1이 되는 맨틀리트를 제외하면 인구 1 유닛 중에는 최고의 체력과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 유닛. 이때문에 대기병전에 약한 국가들은 다수 코사크 소모전에 대처하기 어려워한다. 그런데 정작 러시아 자신도 대기병전에 약한 국가라 러시아 vs 러시아 미러전 들어가면 코사크 맞소모전이 펼처진다.

관련 카드로는 체력 10%, 시야를 4.00만큼 늘려주는 팀 카드정찰 기병(1시대), 체력, 공격력을 각각 15%씩 올려주는 기병 전투력(3시대), 체력과 공격력을 각각 15% 올려주는 보야르(2시대, 홈시티 레벨 25)카드가 있다. 보야르 카드는 러시아 고유유닛인 스트렐치, 오프리치니크에도 적용되는 국가별 고유 카드의 성격을 지니는 카드로, 홈시티 레벨 25가 넘어야 고를 수 있다.

5.2 나폴레옹: 토탈 워

러시아의 고유 창기병인데 취급이 영 좋지 않다.[7] 울란보다 모든 능력치가 약간 낮은 대신에 유지비도 적어서 거의 울란의 하위호환 유닛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유지비도 기병 치곤 적게 들고 기병종류 중 제일 싼 가격으로 훈련시킬 수 있기 기병대 물량으로 오스만을 쓸어버리거나 돈 없을 때 기병 수 채우기 좋다. 사실 약해도 할 역할은 충분히 한다.

잘 훈련되지 않은 약한 보병진에 후방에서 박으면 충분히 적 보병진을 분쇄할 수 있다. 또 적들의 경보병, 경기병들에게 꽤나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 중기병처럼 방어 수치가 높은 유닛에게는 초반 돌격을 제외하고는 이득을 보기 힘들다. 아니, 볼 수 없다. 그냥 돌격력만 믿고 쓰는 기병이다. 또 다른 창기병들과도 싸우는건 좋지 않다.

근접공격이 겨우 4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전략적으론 정말 요긴하게 쓰인다. 기병으로만 병력을 구성할 경우 상당한 기동력을 보이고, 자동전투 시 기병들은 높은 전투력 수치가 부여되어[8] 있어 이기는 전투만 하게되는 이러한 부대에게 큰 시너지를 주지만 비싼 가격과 유지비로 망설여 지는데 코사크는 가격과 유지비가 값싸 손쉽게 부담없이 뽑아내 정찰, 증원병력 잘라먹기, 패퇴한 병력 끝장내기, 후방의 빈 도시 털기[9] 및 견제로 적 본대의 시선 돌리기, 아군 본대의 유연하고 빠른 병력 회전 돕기, 임시 치안유지 대타로 빠른 진군 돕기 등등 중반까지 여러 방법으로 적을 괴롭힌다.
  1. " 부모님은 등산 사고로 사망하였지만, 나의 부모님은 배신자 영국과 도살자 스탈린 사이에서 살아 남으셨다. 결국은 수치심 속에서 함께 자살하셨다.
  2. 사실 패배했으면서 항복을 권고한 술탄이, 편지까지 이리 썼으니 욕먹을 짓을 하긴 했다. 술탄이 예수와 기독교를 언급한 것은 술탄은 어찌되었든 간에 '예루살렘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나마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직위를 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사건보다는 좀더 후대의 일이지만, 18-19세기 오스만 제국과 유럽 열강사이에 맺은 조약들을 보면, 항상 "오스만 제국내의 기독교인의 권리 보호의 보장"이 명시되어 있는걸 볼 수 있는데, 이걸 내건 유럽열강의 명분은, "예루살렘도 니들거고, 니네 황제는 로마 황제이자 예루살렘의 수호자기도 하지? 그럼 너네 기독교인 신민들의 권리도 지켜줘야지?"였다. 물론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이후 프랑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내 기독교인들의 처우를 문제삼아 시시때때로 내정간섭을 벌여왔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내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마론파 기독교인의 봉기를 뒤에서 부추기고, 지원하는 등으로 오스만 제국을 와해시키는 공작을 했다.
  3. 후에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3만 5천 루블을 주고 이 그림을 구입하는데, 이는 당시까지 러시아 화가가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린 것이라고 한다.
  4. 오타만(Otaman)은 카자크 지도자의 호칭. 지역에 따라 Ataman, Wataman, Vataman 등으로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이 카자크의 편지는 네티즌 'jager'가 번역한 것과 '골리앗'이 번역한 것이 있다([1]). jager의 번역본은 의도적으로 욕을 생략, 순화한게 많지만 골리앗의 번역본은 이러한 욕을 대체적으로 충실히 반영한 편이라 인터넷 상에서는 이쪽이 더 널리 퍼져있다. 현재 이 항목에 올라온 것 역시 골리앗이 번역한 것을 퍼와서 약간 순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하지 않을 지도 모르니 맹신하지는 말자.
  5. 일본군은 모두 머리를 박박 깎았다.
  6. 크림 사랑이 정말 각별하다. 비록 자신이 외국인일지라도,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이 "아, 아름다운 크림이여!"(о, наш прекрасный Крим!) 일 거라고.
  7. 사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이들에 대한 평이 대체로 좋지 못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후퇴 중이던 나폴레옹의 입장에서는 아픈데를 찔러대는 이들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겠지만, 정작 이들과 한편이었던 러시아, 프로이센 장군들의 입장에선 "전황이 불리할 때는 제대로 싸우지 않고 꽁무니나 빼는 주제에, 아군이 고생해서 승리하면 그제서야 돌격해서 전리품이나 챙기는 도적놈들"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8. 자동전투 시엔 적에 카운터칠 유닛이 있어도 전투력만으로 일괄적인 채점을 해 비교하여 승률을 정하고 주사위를 던진다.
  9. 털어놓곤 적 군대가 앞에 도달할 즈음에 그냥 다른 나라에 팔아버리면 적군은 이미 발목은 잡혔는데 탈환도 못해 영토에 구멍이 송송 난 상태가 된다. 어느 나라에 어느 도시를 팔 지는 신중히 선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