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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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대 국왕
31대 의자왕 부여의자32대 풍왕 부여풍33대(?) 융왕 부여융
왕호풍왕(豊王) / 풍장왕(豊障王)
부여(扶餘)
풍(豊) / 풍장(豊璋)
생몰년도음력623? ~ ?
재위기간음력660년 ~ 663년 음력 9월 (3년)

1 생애

백제의 왕족. 휘는 풍(豊)이다. 풍장(豊璋),풍장왕(豊障王)이라고도 하며 보통 부여풍, 풍왕으로 알려져있다. 무왕의 아들이거나, 의자왕의 5남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의자왕의 다섯번째 아들설이 유력하다. 일본서기에 부여풍의 다른이름으로 추정되는 규해(糺解)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동일인물이 맞다면 그 이름이 초명(初名)이거나, 자(字), 호(號)로 추정된다.

1.1 백제부흥운동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660년 7월 18일 멸망하였고, 당시 31년간 (일본)에서 인질로 지내고 있던[1] 부여풍은 동생(혹은 아들?) 선광을 일본에 남겨두고 옛 백제 땅에 귀국, 이에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세력이었던 무왕의 조카이자 왕족인 귀실복신과 장수 흑치상지, 지수신, 사타상여, 승려 도침은 주류성을 근거지로 세력을 넓히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다만 이때 부터 내분의 조짐이 보였는데, 《일본서기》에는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 부터 내분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 12월 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이름이 빠져 있는데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를 가리킨다.】·에치하타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하타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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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8월,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백제부흥군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200여개의 성을 탈환[2]하며 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9월 23일 옛 도읍 사비성을 포위, 또한 웅진성도 공격하며 옛 백제 땅을 거의 되찾는 듯 했으나, 신라군의 급습으로 백제부흥군은 성 20여개를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3년(햇수론 4년)간 저항했으나 부흥군의 주 세력인 복신과 도침의 주도권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도침이 복신에 의해 살해되고 복신이 자신마저 죽이려하자 이를 눈치챈 풍왕은 선수를 쳐서 복신을 처형하였다.

“당시 복신이 그 병권을 오로지 한 뒤 부여풍과 점차 서로 시기하였다. 복신이 병이 들었다고 하고 굴실(窟室)에 누워 있으면서 장차 부여풍이 문병오면 습격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그가 믿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였다”

《신당서》 열전149 동이 백제조.

여름 5월 계축 초하루 이누카미노키미(犬上君)【성만 있고 이름은 빠져 있다】가 달려가 군사에 관한 일을 고려(高麗)에 알리고 돌아왔다. 석성(石城)[3]에서 규해(糺解)를 보았는데 규해가 복신의 죄를 말했다.

6월 전장군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 등이 신라(新羅)의 사비기노강(沙鼻岐奴江)[4] 2개의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이 때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워, 할 바를 알지 못했으므로 여러 신하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하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됩니다”고 하였다. 복신이 곧 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머리를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663년 결국 내분에 빠진 백제부흥군은 3만에 달하는 왜군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분위기를 쇄신하려 하였다. 그리고 백강에서 당 군과 대치하는데, 알고보니 당 군을 이끈 장수는 부여풍의 친형 부여융이었다.[5] 백제-왜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부여융을 포함한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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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전투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 등 학자에 따라선 백제부흥군+왜의 연합군이 백강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풍왕이 고구려로 도망간 시기를 백제라는 국가의 멸망으로 보기도 한다. 660년에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국왕 의자왕이 끌려갔지만 사실 2백년 전에도 국왕이 전사하고 수도가 털린 적이 있었고[6] 660년의 멸망은 두 번째, 풍왕의 몰락이 실질적인 멸망이라는 것.

참고로 일본에 남아 있던 부여선광은 일본 귀족으로 편입되었고(쿠다라노코니키시 요시미츠) 황족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1.2 고구려 망명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과 그를 돕던 왜병이 당의 수군에 그야말로 박살이 나자 부여풍은 자식들을 내버리고[7] 차고 다니던 보검도 떨군 채[8] 측근 몇 사람만을 거느린 채 이웃의 고구려로 도주, 663년 9월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운동이 사실상 끝났다. 고구려로 달아난 뒤의 행적은 당의 장군 유인궤의 상소문에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망가서 왜국에 있는 자기 동생 부여용과 내응하고 있다"고 한 것이 유일.[9] 5년 뒤 668년 9월 21일에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하는 바람에 결국 잡혀서 당나라에 압송, 유배를 갔다. 이후의 생애는 알 수가 없다.

1.3 일본 천황설?

백제부흥운동 이후 행적이 묘연한 부여풍이 사실은 일본 천황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백제 왕실과 일본 황실은 매우 긴밀한 사이이기 때문. 백제 왕족 중에서는 일본 황족과 같은 대우를 받는 일이 흔하였다.[10]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따르면 부여풍은 나당연합군에 패한 뒤 당나라로 끌려갔거나 혹은 도망쳐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 以高藏政非己出,赦以爲司平太常伯、員外同正.(중략)扶餘豐流嶺南. )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부여풍은 다른 사람을 대신 당나라로 유배를 보내거나 유배 도중 도망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는 부여풍을 아주 비중있게 다룬다. 그게 어느정도냐면 자기네들의 일본 역사는 쓰지는 않고 3년 간의 백제부흥운동만 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가 망했을 때 부여풍은 일본에 머물러 있었고,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의자왕의 측근 귀실복신은 일본의 사이메이 덴노(여왕)에게 "왕자 풍을 옛 백제 땅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11] 그러자 사이메이 덴노는 그 요청을 선뜻 받아들여 왕자 풍을 백제왕으로 즉위시키고 왕자 나카노 오에에게 군사 5,000명을 주고 한반도로 보냈다. 여기에서 왕자 풍 = 나카노 오에[12] 를 동일인물로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나카노 오에가 백제인이라는 증거도 있다!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나카노 오에는 일본으로 돌아가서 다이카 개신의 공신 가문인 소가씨[13]와 왕위를 두고 대립한다. 그 과정에서 나카노 오에는 라이벌인 소가노 이루카를 죽였는데, 나카노 오에의 형은 그를 보고 "한인이 이루카를 죽였다!"고 하였다. 이후 나카노 오에는 덴지 덴노로 등극한다. 이로써 나카노 오에 = 부여풍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재미있게도 일본 역사학계는 확답을 회피한다. 그들은 부여 풍 = 나카노 오에 = 덴지 덴노란 해석을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일본 역사학계의 행보로 보아, 부여풍 이후 일본천황 계보가 한국인의 혈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설이 정설로 보인다.

다만 위의 주장은 오류가 있는데, 소가노 이루카는 나카노 오에 왕자와 그 일당에게 645년에 죽었다. 즉 백제부흥 운동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제거당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카노 오에 왕자는 왕위에 오르지 않고 실권자로 20년 넘게 지냈다. 심지어 어머니인 사이메이 덴노가 661년 사망했는데도 나라사정이 워낙 안 좋아서 수년동안 백제 부흥운동과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대비하다가 668년에 즉위식을 올린 것이다. 참고로 나카노 오에와 왕위를 경합하던 왕자 후루히토노오는 소가노 이루카의 사촌형제였다[14].

이를 볼 때 부여풍이 일본 천황이 되었다는 것은 만들어진 설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때문에 부여풍 이후로 일본 황실이 100% 한국 핏줄이라는 주장은 솔직히 과장된 감이 있다. 다만 당대 일본국이 이전부터 백제와 가까운 사이였고, 망명한 백제인들과 섞이다 보니 일본 황가에 혈통이 섞였구나 정도로 보면 된다.[15]
  1. 삼국사기의 표현이다.
  2. 애초에 백제 지방병력은 의자왕이 항복을 하건, 백제가 멸망을 하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부여풍을 왕위에 올리는 과정에서야 합세했다는 견해도 많다. 지방 귀족세력의 병력 합류가 기록으로 나오지 않은 백제의 멸망과정을 보면 심히 설득력이 있다.
  3. 현재의 부여군 석성리로 추정
  4. 사비, 기노강인지, 사비기, 노강인지, 사비기노의 강이라는 뜻인지 학자마다 해석이 달라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
  5. 부여융은 660년에 사비성 함락으로 아버지 의자왕과 함께 붙잡힌 직후 당에 투항하여 당의 세력에 가담하였다.
  6. 일본서기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7. 부여풍의 두 아들은 당에 항복했다.
  8. 구당서 유인궤얼전에 백강 전투 이후 당병이 풍왕의 보검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9. 왜국에 있었다는 풍왕의 동생 부여용에 대해서는 부여선광(일본에서 백제 왕족에게 부여된 쿠다라노코니키시氏의 선조)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고, 혹은 일본에 머무는 백제 왕족이 여러 명이었을 수도 있다.
  10.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무령왕. 백제인으로 일본에서 태어나서 왕족으로 인정 받은 케이스. 이후에는 백제로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11.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항복한 의자왕과 태자, 왕자들까지 몽땅 당나라로 끌려가 버려 백제에 더 이상 왕위 계승에 적법한 왕족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
  12. 나카노 오에도 백제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해서 백강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하였다. 또한 덴지 덴노가 된 이후에도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유민들을 적극 받아들였다.
  13. 심지어 이 쪽도 백제인(도래인)들이 다수 참여해서 생긴 가문이다.
  14. 소가노 이루카의 아버지와 후루히토노오 왕자의 어머니가 남매였다.
  15. 실제로 아키히토 천황은 일본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였다고 인정한 적이 있었으며, 비밀리에 무령왕릉을 참배하러 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