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isho Democracy
간단하게 보면 해외의 대세를 타고 뭔가 희망고문을 하다가 결국은 말짱 도루묵이 된 시기.
그러나 이 시기에 일본 리버럴, 좌파 등의 세력들이 기지개를 켜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 근대 사상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 개요
일본에서 1910년대 부터 20년대 사이에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사조, 운동들을 일컫는 명칭. [1] 대체로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부터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진 1925년까지를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풍미했던 시절로 본다.
2 배경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외 정세가 안정을 찾고,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쑨원을 후원하는 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2] 한편으로 일본이 근대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급속도의 발전 가운데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획득을 주장하는 흐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일본 군부에서는 이때를 중국 침략의 호기로 판단하고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가 내각에 식민 통치 중이던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하는 안을 건의했다. 그러나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은 러일전쟁 이후의 재정난이나 국제관계 등의 문제를 들어 이를 거절했다. 그러지 우에하라는 군부대신 현역무관제[3]를 이용해 사이온지 내각을 실각시키려 했다.
결국 사이온지 내각이 실각하고 육군의 입김이 강한 가츠라 타로[4]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민들은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중의원 오자키 유키오나 이누카이 츠요시 등이 가츠라 타로 내각 출범을 번의 파벌정치[5]라고 주장하며 가츠라 내각을 비판해 1912년 벌족타파, 헌정옹호를 외치며 호헌운동을 전개했다(제1차 호헌운동).
이에 가츠라 타로 내각은 당시 야당으로 반정우회의 기치를 세우고 있던 입헌국민당 의원들을 회유하여 입헌동지회라는 신당을 발족하는 등 정우회나 반정우회 세력으로부터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애썼으나, 끝내 출범 53일만에 총사퇴하고(다이쇼 정변) 입헌 정우회를 여당으로 하는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출범했다. 야마모토 내각은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폐지하여 군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지만 지멘스사의 해군 뇌물공여 사건(지멘스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의 분노를 샀고 결국 야마모토 내각도 실각하고 만다.
3 진행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야마모토 내각을 뒤이어 출범한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은 영일동맹에 따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국제협조의 흐름이 강화되면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운동이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일본 내에서는 민본주의[6]를 주창하는 학자, 저널리스트들의 활동이 나타났는데 미노베 다츠키치는 국가가 통치의 주체이고 덴노는 하나의 국가 기관에 불과하다는 덴노기관설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조선 총독으로도 유명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시베리아로 출병(적백내전)하겠다고 선언했고 미곡상들이 쌀을 사재기하면서 쌀가격이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토야마현에서 쌀도매상과 주민들간에 쌀을 둘러싸고 소동이 벌어지면서(쌀 소동) 쌀도매상을 파괴하거나 불태우는 사태가 벌어졌다.[7] 데라우치 내각은 강경하게 맞섰지만 전 국민적인 반발로 결국 사퇴하고 일본 국민들 사이에 "평민 총리"로 불리며 신망이 높았던 하라 타카시가 수상에 임명되어 하라 내각이 출범했다.[8]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인 1923년, 난바 다이스케가 당시 황태자였던 히로히토, 훗날의 쇼와 덴노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총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이던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기요우라 내각은 추밀원의 귀족의원들 중심으로 이뤄진 탓에 국민들에게서는 헌정 요구가 빗발쳤다.(제2차 호헌운동) 이때 입헌정우회 내에서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을 지지하는 세력이 탈당하여 정우본당이라는 신당을 만들었고, 세력이 약화된 입헌정우회는 제1차 호헌운동을 불러일으켰던 가츠라 타로 계열의 입헌동지회의 후신 정당인 헌정회와 입헌국민당의 후신 정당인 혁신클럽으로 구성된 이른바 '호헌3파' 연정을 발족하였고 총선에서 이들이 기요우라 내각 지지당인 정우본당을 누르고 과반수의 의석을 획득하면서 기요우라 내각은 퇴진하고 전전 역사에서 가장 민주적 내각이라는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출범했다.
게다가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타고 일본의 사회주의 단체와 좌파 정당, 무산정당이라 불리는 합법 사회주의 정당의 건설도 활기를 띄게 된다. 1906년 사회당(일본)이 해산된 이후 일명 "겨울의 시대"라고 불리는 오랜 폭정이 지속되었는데, 러시아 혁명 성공 후,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 지면서 일본 사회주의자 동맹이 결성된다. 결국 이 흐름은 1925년 노동농민당 결성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이 시기에 심지어 지하에서는 일본 공산당도 결성된다.[9][10]
1925년 가토 다카아키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선거법'을 제정하여 기존 '1년 이상 일본 본토에 거주하고 15엔 이상의 직접 국세를 내는 25세 이상의 성인 남자'에서 '재산과 관계없이 25세 이상의 성인남자'로 확대하여 선거권을 부여했다. ('보통선거의 실시') 이를 두고 대국민 회유책으로 평가하기도 하나, 선거권의 확대는 전세계으로 보편적인 분위기였고 제2차 호헌운동도 보통선거 약속을 통해 성공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이러한 평가는 다소 부적합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가토 다카아키는 치안유지법을 통해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렸다. 다만 치안유지법이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고 노동운동과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을 탄압하기 위한 법률이었지만, 해당 법률의 조항을 다소 모호한데다가 처벌 규정도 군국주의 시절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하여 치안유지법과 그 법률을 통과시킨 가토 다카아키가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무너뜨린 근본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11][12]
1926년 1월과 12월에 각각 가토 다카아키와 다이쇼 천황이 세상을 뜨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막을 내린다.
4 입헌 양당정치와 몰락
다이쇼 시대 이후로 약 6년 동안 잠시 입헌 정우회(보호무역 지지)와 입헌 민정당[13](자유무역 지지)의 양당제가 실시될 거라는 희망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1928년 선거에서는 양당의 의석이 고작 2석 차이(총 466석 중 218:216) 나면서 정권이 요동쳤으며, 민정당으로 정권이 넘어온 뒤 하마구치 오사치[14]의 죽음과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의 도각[15]으로 민정당 정권이 무너졌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최후의 보루격으로 정우회의 이누카이 츠요시가 군을 통제하려고 했으나, 그도 역시 암살당해버린다(...)
이런 참극 끝에 일본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무너졌고,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는 덴노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언행이라도 했다가는 바로 치안유지법에 적용되어 끌려갔던 광기의 전시 체제기가 열렸다.
5 의의
일본에서는 전후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고 높이 평가하는 편이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 통치'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당시 주요 양당 중 하나인 헌정회가 이른바 '동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던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딱히 근본적인 변화까지 일어났던건 아니었다. 이 시기에 보통선거 개념이 도입되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본토에 살던 남성들에 한해서였고, 여성들이나 조선인을 비롯한 식민지 주민들에게 여전히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16] 여하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흐름속에서 여러 일본 지식인들이 식민통치를 받던 조선의 상황을 돕는 등의 일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일본제국이라는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한계 때문에 일본과 식민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6 여담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용어는 역사학자 시노부 세이사부로(信夫清三郎) 가 1954년 자신의 저서에서 이 시대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명명해서 이후 이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로 고착되었다.- ↑ 다이쇼(大正)는 당시 덴노 요시히토(嘉仁) 재위(1912년 7월 30일 ~ 1926년 12월 25일) 시기의 연호.
- ↑ 이게 이 당시로는 매우 충격이었다. 청 왕조가 무너지고, 중국이 공화국이 되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아직 미개(...)한 동아시아인들은 공화정을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등, 전제왕권 하의 입법 청원으로만 근대에 도달할 수 있다는등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날 드디어
동아병부중국인들이 전제왕정을 무너트리고 삼민주의라는 쌈빡한 모토까지 갖춘 공화국을 만들었다는 것은 탈아입구를 먼저 이루겠다던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큰 숙제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중국동맹회를 비롯한 정파 초월적 단체에 일본인들이 많이 협력했던 것도 작용했다.그리고 이 충격파를 타고 인천의 한 짜장면 집은 공화춘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 ↑ 육군 대신이나 해군 대신은 현역 군인만이 보임될 수 있도록 규정한 제도. 문관이나 퇴역 군인, 예비역 군인 등도 보임 자격이 없게 된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마음에 들지 않는 내각이 있으면 군부가 장관 후보자를 내보내지 않아 수립 단계에서 무산시킬 수 있기 때문. 내각이 사실상 군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기형적인 제도로, 일본 민주주의의 붕괴와 군국주의의 발호로 이어진다.
- ↑ 가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 ↑ 가츠라 타로는 조슈번 출신이고 육군은 죠슈번 출신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죠슈번의 파벌 정치라는 비판이 나왔다.
- ↑ 민주주의가 아닌 이유는 골때리게도 '국민이 주인이면 덴노는 뭐가 되느냐?'였다...
- ↑ 이 쌀소동에 대한 대책으로 나온게 바로 국사시간에 배우는 산미증식계획이다. 본토에 쌀이 없으면, 식민지에서 뺏어오면 된다는 발상...
- ↑ 일반적으로 하라 내각이 일본 역사 최초의 정당 내각으로 인정된다.
- ↑ 물론 이들은 1945년이 되어서야 합법정당으로 인정받는다.
- ↑ 역시 1925년 조선공산당도 창당한다. 물론 지하혁명정당으로.
- ↑ 그러한 평가에 따르면 치안유지법 통과 이후에도 무산계급 정당들이 일본 내에도 여전히 존재했다고 한다. 한편 1930년대에 이 법률을 적용하려 했던 일본 정부는 '일부러 모호하게 만든 법률 때문에 탄압하고 싶은 세력을 탄압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에 부딪혔다.
- ↑ 한편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지식인 중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지식인들이 많았고, 그 와중에 조선인들, 특히 조선인 독립운동가 및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이 치안유지법을 악용되었다.
- ↑ 1차 와카츠키 내각이 무너지고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들어서자 헌정회와 앞서서 제2차 호헌운동 당시 기요우라 내각을 지지했던 정우본당의 합당으로 결성. 창당 당시 의회주의, 인종-빈부격차 해소, 국제적인 평화와 협조주의, 국민 자유의 옹호를 주장했으며, 군축 실현을 주장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여당에 가까웠던 정우회에 비교한다면 리버럴 격.
- ↑ 군축정책을 바탕으로 1930년 선거에서 승리(민정 273 : 정우 174)했으나 런던 해군군축조약 체결로 군부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세계 대공황에 제대로 대처하기 못하여 발생한 경제 위기 도중 우익에게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으나 국난 극복을 위해 병상을 나와 의회에 출석하는 등 무리를 하다가 끝내 병환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 ↑ 군부의 통제를 위해 정우회와의 대연정을 추진했다가 도리어 민정당 내에서 결사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와카츠키는 연정 포기로 돌아섰으나 이번에는 내각 안에 있던 찬성파 장관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내각을 사직해야했다.
- ↑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기 조선에도 지방선거가 치러졌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특혜나 마찬가지인것이 국세 5원이상을 낼수있는 25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투표권을 주었기 때문에 성인인구의 절대다수는 돈이 없어서 투표를 할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