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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統治
1 개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3.1운동 이후 일본이 한국인들의 불만을 누그러 뜨리고자 실시한 정책. 이를 통하여 언론의 자유[1], 집회의 자유가 형식상으로만 보장됐으며 무단통치의 상징과도 같았던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고 일반 경찰제도가 도입된다.실제로는 경찰이 6~7배 늘어났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이 기간에 친일파가 된 사람이 가장 많이 나왔으며, 이광수를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가 전향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문화통치는 정확히 일제가 의도했던바대로 흘러갔으며[2] 민족주의 계열에서 문화통치를 부른 표현인 '민족분열통치'가 문화통치의 본질을 가장 간단히 설명해준다.
2 역사
2.1 배경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한국인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의식하여 '무단통치'라는 강경한 탄압 정책을 펼친다. 조선총독부의 주도 하에 총독부 기관지를 제외한 모든 언론들이 폐간됐으며 집회 역시 금지됐다. 또한 헌병을 경찰로 동원하여 치안을 유지하였으며 태형과 같은 전근대적인 처벌제도를 도입하면서 한국인들의 저항 역량을 약화시키는데 모든 힘을 기울인다.[3] 하지만 이런 일제의 강경책으로 쌓여있던 한국인들의 저항심리는 1919년 3.1 운동으로 대폭발을 일으켰고, 일본은 더 이상 무력에 의지해서만은 한국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4]
이런 상황에서 조선총독의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신임 조선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하면서 문화 통치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다.
2.2 정책
- 문관의 조선 총독 부임을 가능하게 함
그런 거 없다. 1945년 광복까지 조선 총독을 거친 10명의 인물들은 모두 군 출신이었다.[5]
- 보통 경찰 제도 실시
한국인들의 가장 심한 반발을 산 정책 중 하나였던 태형제도와 현병경찰제를 폐지하고 일반 경찰제도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경찰의 수는 1910년과 비교하여 세 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특히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복경찰까지 동원하였다. 즉 한국인을 훨씬 주도면밀하게 옥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도 악명을 떨치는 특별고등경찰 제도를 실시했다.
- 언론, 출판의 자유 보장
총독부에서 한국어로 된 언론 출간을 허용하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됐다. 물론 검열은 기본이었으며 총독부의 심기에 거슬리는 논조의 기사를 작성했다가는 기사 삭제는 기본이고 언제든지 정간명령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기자들도 많았기 때문에[6] 기자들이 코렁탕을 먹는다든지, 몇 주 동안 정간당한다는지 하는 일이 꽤 자주 있었다. 하지만 3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완벽히 친일노선으로 돌아선다는게 함정.
또한 이렇게 출판의 자유가 보장됨에 따라 억눌려있던 문인들의 창작활동도 무척 활발해져서 1920년대는 한국 문예사에서 리즈시절로 꼽히는 시기이다.[7] 안믿기면 고등학교때 공부한 문학작품을 생각해보자. 1920년대~1930년대 초기에 발표된 것 이외의 작품이 얼마나 되는가. 폐허, 백조, 개벽과 같은 문예동인지가 활발히 출판됐으며 시 분야에서는 서정주의가, 소설 분야에서는 리얼리즘이 두드러지는 성과를 보였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못 먹니
- 한국인의 참정권 부여
지방 행정 기관에 한하여 한국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할 것을 천명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기만책에 불과했다. 이때 조선인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고 하지만 25세 이상의 국세 5원 이상을 줄수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있는 성인 남성에 한해서만 주어졌고, 당연하게도 이때 투표권을 행사할수있는 사람은 친일파와 지주, 일본인 등 부유층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 절대 다수의 조선인들은 기본교육조차도 받을수없던 사람이 많았을 정도로 경제력이 열악했기에 투표권을 행사하고 싶어도 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25세 이상의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이 부여되었을때에도 조선 내에서 선거제도의 개편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지방의회는 그저 총독부의 들러리에 불과했을 뿐이며 그래서 실질적으로 부유한 몇몇 유지들만이 고문이라는 형식적인 명칭으로 지방 행정 기관에 부임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소수 기득권층의 이해를 보장하는 총독부의 정책은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기도 했는데, 친일파를 사회 곳곳에서 양성하여 한민족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여 독립운동의 추진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광수를 비롯한 몇몇 민족주의 세력이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투표할수없었던 상황임에도 여기에 파닥파닥 낚여서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주장[8]하면서 총독부의 높으신 분들을 므흣하게 해주었다.[9]
2.3 폐지
문화 통치는 1920년대 후반 접어들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붕괴되면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대공황의 크리가 겹치면서 일본 군부는 2.26 사건과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등 제멋대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기 시작한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군부가 정계를 장악한 일본은 이제 가면을 벗어던지고 창씨개명, 한국어 탄압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말살통치로 노선을 전환하고, 그에 따라 문화 통치는 사라지게 된다.- ↑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한국 신문계의 양대산맥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이다.
- ↑ 역사에 if는 없지만 만약 이 기간이 길었다면, 한국도 대만같은 친일국가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 여담으로 한국인이 일제강점기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 중 하나인 '칼 차고 수업 진행하는 교사' 역시 이 시기의 일이다.
- ↑ 또한 제암리 학살 사건과 같은 유혈진압으로 국제적인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있었다.
그나마 이때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무렵이었거든 - ↑ 대만에서는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 ↑ 특히나 이 시기 기자들중에는 막 한국에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이들이 꽤 많았다.
- ↑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나마 자유롭게 문학활동을 펼칠 수 있엇던게 1920년대~1930년대 초의 문화통치시기였다.
1910년대는 무단통치라 출간 자체가 허용이 안됐고 1930년대 중반 이후로는 민족말살통치라 한국어 작품을 쓰는거 조차 힘들어졌다. - ↑ 간단히 말해서 '한국인은 아직 독립할 역량이 안되니 일본의 영향력 아래서 자치권을 먼저 얻은 뒤 서서히 민족 성향을 개조하자!'라는 주장이다(...)
- ↑ 1920년대 이후 민족주의 세력은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자치를 주장하는 타협적 민족주의로 나뉘는데 이광수나 최린 등의 경우 타협적 민족주의자의 대표주자였다.
그리고 신간회한테 기회주의자라고 개까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