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통령 | |||||||
20대 | → | 21대 | → | 22대 | |||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 → | 프랑수아 미테랑 | → | 자크 시라크 |
1980년대 유럽을 함께 이끌었던 영국의 마가렛 대처(왼쪽), 독일(당시 서독)의 헬무트 콜(가운데) 수상과 함께
이름 | 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프랑수아 모리스 아드리앵 마리 미테랑) |
생일 | 1916년 10월 26일 |
사망일 | 1996년 1월 8일 (향년 80세) |
재임 기간 | 1981년 5월 21일 ~ 1995년 5월 17일 |
당적 | 사회당(프랑스) |
종교 | 가톨릭→무신론 |
목차
1 개요
프랑스의 정치가, 제21대 대통령. 프랑스의 김대중[1].
프랑스 제5공화국 역사상 사회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2]이자 역대 프랑스 대통령 중 최장기간 재임한 대통령이기도 하다.[3]
2 정치인이 되기 전
샤랑트 주에서 철도기관사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였는데,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학창시절에 유대인 추방, 부르봉 왕조 복원을 주장하는 극우단체 크루아 드 푀의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던 흑역사가 있다. 1930년대에도 부르봉 왕조 복원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나 대다수 인간들은 젊어서는 급진 좌파였다가 나이를 먹으며 우경화되는게 보통인데 이 양반은 정 반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시 프랑스 정부 초기에 하급 관료로서 협력했었던 전력이 있다. 그러나 후에 전향하여 좌파 계열 레지스탕스에 합류하여 활동하게 된다.
3 사회당의 기린아
자유 프랑스의 파리 탈환 이후 사회당의 전신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에 입당, 1946년 11월 총선에서 부르고뉴 지역에서 하원의원에 출마, 2위로 당선된다. 이 후 1958년까지 계속된 제4공화국 내각에서 제대군인부, 해외영토부, 내무부, 법무부 장관을 차례로 역임하며 대중들에게 젊은 행정전문가로 인정받았고, 윈스턴 처칠, 콘라드 아데나워, 엘리자베스 2세 등 듣기만 해도 후덜덜해지는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미테랑의 정치적 성공과 별개로 프랑스 제4공화국은 각 정파의 난립, 식민지 정책에서의 혼선, 군부의 쿠데타 협박 등으로 민심을 잃고 있었고, 그 틈을 타 샤를 드 골이 정치에 복귀하면서 4공화국 체제는 막을 내리고 5공화국 시대가 막을 올린다.
4 프랑스의 콩라인
1965년 프랑스 대선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은 애시당초 희망이 없는 선거에서 좌파의 단일화를 주장하며 선거에 나서, 1차 투표에서 31%의 득표를 얻어 돌풍을 일으켰고 2차 투표에서 45%의 득표를 올리며 선전하였다. 덕분에 좌파의 대표주자로 우뚝서게 되었고, 이어 1967년 총선에서 미테랑이 이끈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는 선거에서 선전하여 1차투표에서 드골이 이끄는 여당이 압승할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2차투표까지 끌고 가는 등 선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기침체와 전후 내재되어있던 사회문제가 폭발하면서 68운동이 터지자, 드골은 이를 정치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여 총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당초 68운동으로 좌파가 선전할 것이 예상되었으나, 좌파의 분열과 드골의 반공주의 정서 자극으로 오히려 좌파는 의석이 대폭 줄어드는 참패를 거뒀고, 미테랑은 1969년 대선에 불출마한다. 미테랑 대신 출마한 가스통 뒤페르는 5%의 득표율로 탈락하는 수모를 겪고 공산당 등 다른 좌파 후보들도 중도성향의 알랭 포에르에게 패배하며 1차 투표에서 모두 낙선했다. 2차 투표에서도 공산당이 중도파인 알랭 포에르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결국엔 투표율 저조로 인해 드골파의 조르주 퐁피두가 당선되면서, 프랑스 좌파는 급속히 침체되었다.
대선 참패 후 미테랑은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좌파를 재조직하는 데 나섰다. 1973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49.2%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두 차례의 참패를 만회하는 성적을 거두는데 성공한다. 1974년 퐁피두가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미테랑은 좌파 단일후보로 출마, 43%의 득표율을 얻으며 1위로 결선에 진출하였지만, 지스카르 데스탱에게 밀려 49.1%로 석패하고 말았다.
- 1977년 지방선거에서 좌파가 압승을 거두었고, 여세를 몰아 1978년 총선에서도 20년 만의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실제로는 예상을 뒤엎고 우파가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사회당은 선전하였지만, 좌파 연합을 구성한 공산당이 부진했던 탓. 1979년에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의견 대립이 발생하면서 공산당과의 연합이 깨지는 이중고를 겪었다. 그러나 미테랑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80년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여 또다시 압승을 거두었다.
5 1981년: 콩라인 탈출
1981년 5월 대통령 당선 직후의 모습[5] 사진 속에서 들고 있는 장미꽃은 사회당의 상징이기도 하다.
1981년 대선을 앞두고, 미테랑의 지지율은 현직 대통령인 데스탱에게 지속적으로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데스탱이 자크 시라크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면서 미테랑의 지지율은 상승세를 탄다. 미테랑은 공산당과의 선거연합이 해소된 상황에서 28%의 득표를 얻어 2위로 결선에 다시 진출하였다. 미테랑은 7년전과 달리 토론회에서 데스탱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그 결과 결선에서 51.7%의 득표율을 얻어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미테랑의 선거운동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자크 아탈리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통령 선거운동의 요소를 모두 갖춘 현대적 대통령 선거운동이 바로 이때 시작되었다." 라고 말했다.
미테랑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의회를 해산한 가운데서 치러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두었고, 공산당은 각료자리를 얻기위해서 반쯤 울며겨자먹기로 사회당과의 연정에 합의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미테랑은 의욕있게 개혁정책을 펼치며 사형제도를 폐지하였고, 주 39시간 노동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국유화 정책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민영방송도 개국하였으며[6], 정보화 사회 구축을 위해서 미니텔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작업에도 착수하였다[7].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기업들이 기술경쟁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라 국유화 정책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각종 개혁정책도 생각보다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재정적자만 급속히 늘어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미테랑은 연립정당인 공산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긴축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경기침체는 계속되었고 긴축정책의 부작용으로 실업률이 늘어나면서, 지방선거에 연이어 참패하는 상황이 되었다. 1985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핵실험을 강행하고 그린피스 선박을 폭파(...)하는 상황이 널리 보도되면서 사회주의자로써의 미테랑의 이미지도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결국 1986년 총선에서는 우파에게 원내 다수를 내주면서[8] 자크 시라크를 총리에 임명해야 했다. 미테랑은 시라크에게 군사.외교 분야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넘겨주면서 실권을 잃었다[9].
그러나 자크 시라크는 무리한 민영화와 긴축정책을 밀어붙여 이에 반발한 노조가 대대적으로 파업을 벌이면서 지지율이 급락하였고, 미테랑은 이 틈을 타서 외교에서 상당한 활약을 보이며 1기 집권 당시의 실책을 만회하고 지지율을 끌어올렸다[10].
6 1988년: 재선
그리하여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1차 투표에서 무려 34%를 얻는 저력을 과시했고 결선투표에서도 54.02%의 여유있는 득표로 재선에 성공한다.[11] 그리고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렀는데, 사회당은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다른 좌파정당과의 연정을 통해 안정적인 정국운영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1기 집권 초기와 다르게 민영화된 기업을 다시 국유화 시키지 않는 등 비교적 보수적인 정책을 집행하였다.[12] 이후에는 유럽통합에 매진하였으며 걸프전에 프랑스군을 파병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초 들어 각료들의 비리와 경기침체로 미테랑 대통령의 지지율도 다시 떨어졌고 결국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단 53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아 미테랑은 다시 실권을 잃게 되었다.[13][14]거기다 총선 몇 달 뒤에 피에르 베레고부아[15]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지켜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총선 이후 에두아르 발라뒤르 를 총리로 한 동거정부가 형성되었지만 큰 마찰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다가 1995년에 퇴임하였다.
(1995년 퇴임 당시의 모습. 후임자 자크 시라크와 함께)
7 사망
미테랑의 타계를 보도한 1996년 1월 22일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
퇴임한지 불과 8개월 후인 1996년 1월 8일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전립선암이었는데, 대통령 시절부터 이미 증상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재임 중에는 비밀에 부쳐졌다.
죽음을 불과 며칠 앞두고서 주치의에게 "항암제 투약을 중지하면 난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고 묻자, "곧 돌아가실 겁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에 미테랑은 "그럼 투약을 중지해 주시오"라고 요청했다. 의연하게 자신의 최후를 맞이한 셈.[16]
8 종합적 평가
프랑스 좌파의 상징
프랑스 정치사, 특히 제5공화국 이후의 현대 정치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견될 정도로 크다. 두 사람 모두 선거를 통해 보수 우파의 장기 집권을 종식시킨 '수평적 정권교체'를 처음 실현해냈으며, 그것도 수차례의 낙선을 딛고 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또한 두 지도자는 정치 활동 중에 여러 번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면서 투쟁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17]
여기에 김대중과 미테랑은 자국에서 보수 우파의 상징격인 박정희, 드골과 대통령 선거에서 직접 대결하기까지 했다. 비록 모두 패배였지만 박빙의 승부를 겨루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자국 정치계에서 사회자유주의 진영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8.1 긍정적
일단은 현 사회당(프랑스)의 아버지격이자 샤를 드 골과 함께 프랑스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며, 프랑스 최초로 지속적이고 안정된 합법 좌파정부를 이끈 대통령이기도 하다[18]사형제도를 폐지하는 등 인권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았으며 수십억 유로를 들여 미테랑 도서관을 만들고 영화 산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문화사업에도 상당히 관심을 들이기도 하였다.하지만 천조국의 돈지랄를 이기진 못했지
8.2 부정적
그가 펼치고자 했던 사회주의적인 정책은 몇년 못가서 재정적자로 접고 긴축정책을 시행하여 지지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19]사후에 르완다 내전에서 정부군의 학살에 무기를 지원한 것으로 드러나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20]
9 기타
-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한 프랑스 대통령이다. 1993년 9월에 방한했는데 이 때 유명 여배우 소피 마르소랑 함께 오는 바람에 한국인들이 소피 마르소한테만 관심을 가졌다고...
안습하지만 이 때 우리나라에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했으며 이를 반대하던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과 대판 싸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미테랑이 반환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문화재 반환의 물꼬를 터주었다.오오 미테랑 오오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중 하나가 TGV를 사는 조건으로 직지심체요절을 반환받는다는 조건으로 빅딜을 했다가 증거가 없니 뭐네해서 결국 아까운 돈만 날렸다 하지만..... 사실무근이며, 실상은 정 반대였다. 인터넷상으로 잘못 퍼져있는 반프랑스 성향의 루머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일단 YS에게 그런 빅딜을 제시했다간 싸가지없는 불란서놈들이라고 엄청 까였을 것이다.
- 1960년대부터 안 팽조와 만나면서 두 집 살림을 시작했고, 마자린이라는 혼외딸도 두었다. 이 스캔들은 1994년에 <파리 마치>지를 통해 폭로되면서 드러나게 된다. 영미권 같았으면 엄청난 공격거리가 되었겠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좌우가릴것 없이 대통령 정무와 관계도 없는 사생활 문제를 끄집어내서 선정적 보도나 하고 있다고 <파리마치>를 실컷 까댔고, 당시 프랑스 여론도 <파리마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21][22]
- 미테랑의 장례식에 참석한 혼외 딸 마자린(가운데).뒤쪽에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마자린의 어머니(즉, 미테랑의 내연녀) 안 팽조. 그리고 사진 맨 왼쪽의 여인은 미테랑의
정실부인영부인 다니엘 여사다.남편의 내연녀와 그 딸을 장례식에서 받아준 대인배 본처
-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해인 1982년, 우파는 그와 좌파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좌파는 이에 대해 크게 반격하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미테랑은 정치소설을 쓴 유머 작가 앙드레 베르코프에게 "우파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에 대해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해인 83년 베르코프는 ‘카통’ 이라는 가명으로 우파를 비판하는 책 《탈환》을 출간했고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 카통이 누군지에 대해 한참 화제가 되었다. 미테랑의 측근인 자크 아탈리는 이것을 “가면무도회” 라고 표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카통은 목소리를 변조해서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프랑수아 올랑드 현 프랑스 대통령. [23]
- 후임 대통령 이었던 자크 시라크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1988년 대선후보 토론방송을 할 당시에 시라크가 미테랑에게 지금 우리는 대통령과 총리가 아니오. 당신과 나는 대등한 후보로 이 자리에 나왔소.라고 선빵을 날리자, 미테랑이 당신 말이 맞소, 총리!(Vous avez tout à fait raison M. le Premier Ministre)라며 단숨에 반격했다.
넌 총리고 난 대통령이야이 대화로 선거의 승부가 정해졌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도 있을 정도. [24]
- 1994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맞아서 독일군 부대를 초청해서 파리 시내를 행진하게 한 적이 있다.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50년 만에 독일군이 그것도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에 파리 시내에서 행진한 역사적인 사건. 이 일은 프랑스와 독일이 완전한 협력 관계를 맺었음을 상징하게 되었다.[25]
- 한국에서 90년대에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가 높아지자 YS는 잘맞춰 라는 게임도 등장할 정도였는데, 여기서 YS가 일명 YS파를 쏘며 세계 각국 지도자와 대결을 펼치는....... 게임이었다. 여기서 마가렛 대처.빌 클린턴.덩샤오핑과 함께 미테랑 대통령도 나왔다.....[26]
이게 무슨 지거리야
무슈 미테랑 니는 내 상대가 못된다카이!!!
- 프랑스는 미테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국에서 발행하는 2유로 동전에 그의 초상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