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역사

1 삼한 ~ 후삼국시대

구 홍주군 지역은 마한 때는 감해바리국이라는 소국이었다. 마한이 백제에 복속되고 나서는 백제의 고막부리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지심주로 개칭되었다.

구 결성군 지역은 백제 때는 결기군이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결성으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 구 홍주군 지역인 지심주에서는 934년 운주 전투가 있었다. 934년 9월, 고려 태조 왕건운주(運州, 現 충청남도 홍성군)로 진출하자, 후백제견훤도 갑사(甲士) 5천 명을 직접 이끌고 달려왔다. 그러나 견훤은 굳이 왕건과 싸울 마음이 없었던지라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왕건도 처음엔 이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으나 유금필이 화친을 거절하고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자 이내 마음을 바꾸고 그에게 선제 공격을 명령했다. 유금필이 정예기병 수천을 이끌고 급습을 가하자, 견훤은 그 기세와 용맹에 눌려 달아나고 말았다. 유금필이 그 뒤를 쫓아 후백제군 3천 명을 죽이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백제의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리며 대승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왕건은 견훤과의 힘겨루기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며, 추후 견훤의 후백제는 왕자들의 후계다툼에서 골육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면서 자멸한다.[1]

2 고려

995년 지심주는 운주로 개편되고 도단련사를 두었다. 1018년 운주가 홍주로 개칭되고 결성은 홍주에 속하였다. 1371년 홍주가 홍주목으로 승격되었다.

3 조선

1413년 두 고을이 홍주목, 결성현으로 편성되었다. 홍주목은 한때 충청도가 청홍도, 충홍도, 홍공도라고 불렸을 만큼, 충청도 4대 도시(충주, 청주, 공주, 홍주) 중 하나였다.[2]

구한말 23부제가 실시되었을 때에도 충청도 서해안의 수많은 군들을 거느리는 홍주부(洪州府)가 설치되었을 정도였다. 즉, 충청도 서부권의 중심 도시였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 영향이 남아 있으며, 홍성읍의 시가지 규모는 충청남도 내 다른 읍들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다. 1896년 다시 홍주군으로 편성되었다.

한편, 구한말 홍주군에서 의병 항쟁이 유명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복한, 이설, 홍건 등의 전직고관들이 중심이 돼 지방유생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895년 12월 3일 홍주의병은 홍주관아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 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의병에 참여를 독려했으며 각 고을 대표들은 집을 방문해 노약자와 독자를 제외하고 각 호에 한사람 씩 응모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다음날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말았다. 의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민병세력들은 이승우를 만나 의리정신을 강조하며 여러 차례 뜻을 함께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이승우는 지역유생들의 권유와 협박에 마지못해 참여의사를 밝혔을 뿐 실패를 두려워 했다. 이승우의 배반으로 김복한을 비롯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 등 지도부 23명이 체포돼 서울로 이송됐으며 한성재판소로부터 김복한 유배 10년,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은 징역 3년, 이설은 곤장 60대에 처해졌으나 고종의 명령으로 전원 석방됐다. 이렇게 1차 의병은 끝이 났다.

2차 홍주의병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06년 일어났다. 1895년 1차 홍주의병을 일으켜세웠던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이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을미사변 후 관직을 떠나 은거하던 전 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봉기했다.

2차 의병은 1906년 3월 15일 현재의 예산군 광시면 광수장터에서 첫 발걸음을 떼고 홍주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관군의 저항에 홍주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전열을 재정비 해 의병을 일으킨 지 약 두 달 뒤인 5월 19일 홍성 시내에 진입한다. 의병들은 홍성으로 오는 길목에서 일본과의 전투에서 얻은 구식화포 2문을 앞세워 홍주성 공략을 시작했다. 거센 공격에 홍주성을 지키던 일본 헌병들은 동문을 통해 덕산방면으로 도주, 공략 하루가 지난 20일 아침 홍주성을 점령했다. 홍주성 점령 직후 민종식은 징병을 통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의병들에 의해 쫓겨난 일본군공주에 있던 병력을 지원받아 다시 홍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의병부대가 이를 물리치고 이후에도 몇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내쳤다. 이에 일본은 포병과 기병, 헌병 및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병해 경찰과 헌병들과 합세, 홍주성을 탈환할 것을 지시한다. 같은 달 30일 일본은 막대한 전력으로 홍주성을 둘러싸고 31일 오전 2시 30분 기마병의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키고 의병 제압에 나섰다. 기관총 등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동문이 폭발된 지 1시간 30분만에 홍주성을 점거 끝내 의병을 제압했다.
2차 홍주의병은 양민을 포함한 수 백 명의 사상자를 내며 단일전투로는 전국 최대의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2차 홍주의병은 전국 곳곳에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됐고 1910년대 독립전쟁과 3·1운동으로 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출처 《뉴시스》의 관련보도 관련 사진자료가 많은 웹페이지 문화재청 - 홍주의사총

4 일제강점기

1914년 조선총독부부군면 통폐합으로 인해 홍주군과 결성군(結城郡, 현 광천읍·결성면 등 홍성군 서남부 지역)을 통합하여 현재의 홍성군(洪城郡)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홍주가 결성보다 훨씬 큰 고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군에서 한 글자씩 따 '홍성'이란 이름을 새로 지었다.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 홍주의병 등 홍주(洪州)반일 분위기를 잠재우고[3], 같은 충남에 위치한 공주(公州)일본어의 발음구분이 어려워[4] 행정적 불편을 피하기 위한 것이 이유였다.[5] 홍성군의 중심지 역시 홍양면(洪陽面)으로 명명되었다가, 1917년 홍주면으로 개칭되어 일시적으로 홍주라는 이름이 부활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승격되면서, 홍주라는 이름은 더 이상 공식 지명으로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홍주여객이나 홍주초등·중·고등학교 등 곳곳에 옛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끔 '일제 잔재 청산'이나 '강원도 횡성군과 헷갈린다[6]'는 이유로 옛 지명을 되찾자는 이야기도 나오긴 하지만, 이미 굳어진 지명이라 바뀔 가능성은 희박했으나...[7] 2015년 홍성군이 홍주시 승격 원년을 선포함으로서 '홍주'라는 이름을 되찾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1942년 광천면이 광천읍으로 승격되었다.

5 대한민국

대전광역시에 있던 충남도청2012년 말에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 일대의 내포신도시로 이전해 오면서,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 박영규 著,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웅진닷컴, 2004)
  2. 이렇게 8도(道)의 이름에 들어갔거나 들어갔던 고을들 가운데 오늘날 시로 승격되지 못한 곳은 (남한 한정) 홍성이 유일하다. 참고로, 전라도의 '라'인 나주시는 시로 승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쇠퇴하여 2014년 현재 시가지 인구가 홍성 인구보다도 더 적어졌고, 아주 광주 위성도시가 되어버렸다. 나주안습
  3. 다만 한용운, 김좌진의 본격적인 활동은 홍성 개칭 이후이다.
  4. こうしゅう
  5. 출처 홍성군청 누리집
  6. 특히 로마자로 쓰면 각각 'Hongseong'과 'Hoengseong'으로 딱 한 글자(e) 차이라서 더 헷갈린다.
  7. 하지만 매번 군수·군의원 후보들은 '홍주 승격'을 내건다. 결과는 보다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