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기

洪璡基
1917년 3월 13일 ~ 1986년 7월 13일

1 소개

한국의 관료, 법조인, 언론인으로서 중앙일보의 초대 회장이다. 호는 유민(維民)이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당홍계(唐洪系) 남양군파(南陽君派)로 잘 알려져 있다[1].

2 일생

1917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는데 그 어머니가 왕십리에서 채소장사를 하면서 홍진기를 뒷바라지해 그를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보냈고, 그 뒤 홍진기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진학한 후에는 그 어머니가 학교 근처인 청량리로 이사하여 거기서 하숙을 치면서 홍진기의 학비를 댔다고 한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일본국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이른바 개천룡, 즉 신분수직상승의 예가 일제 하에서도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발령받기 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의 조수(조교)로 일하였는데 이 시기에 쓴 논문은 일본 학자의 호평을 받았다. 그가 쓴 논문 "주식회사의 합병에서의 교부금(株式會社の合併における交付金)"은 창씨명인 토쿠야마 신이치(德山進一) 명의로 경성제국대학 법학회 논집 제 13책 1호에 게재되었다.

이는 경성제대에서 발행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단 2명의 조선인 중 한 사례다. 나머지 1명은 경성대학 교수를 하다가 월북한 이종갑으로, 그 역시 창씨명인 토요카와 쇼코(豐川鐘甲) 명의로 게재되어 있다. 이후 1943년 전주지방법원 판사로서 법조계에 몸담았다.

8.15 광복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에 협력하여 법무부 소속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958년 법무부장관으로 승진하였다.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강제로 폐간조치하고, 이승만의 라이벌이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을 이적행위자와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때 창랑 장택상조봉암의 석방, 구명운동을 폈고, 홍진기의 법무장관 집무실에 찾아가 도움을 약속 받았으며, 법정에서 조봉암을 변호하기도 했는데, 결국 조봉암이 처형되자 홍진기에 대해 대단히 분개했다고 한다.

1960년 내무부장관으로 재직하던 중 4.19 혁명을 맞았다. 이 때 시위대에 서슴지 않고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5.16 군사정변 이후 재판을 받아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감형되었고, 박정희의 특사로 소리소문없이 석방되었다.

3.15 부정선거의 실행, 선거 당일의 마산 시위에 대한 경찰 발포 등의 혐의로 함께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던 홍진기의 전임내무장관 최인규는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 홍진기는 풀려났다.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언론인이 되었으며 1965년 중앙일보의 창간을 진두지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일보 핵심 기자들을 대거 빼오는 바람에 한국일보는 그 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이유다. 그리고 홍진기는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전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역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1968년에는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고, 1971년에는 주식회사 동양방송의 대표이사까지 겸임하였으며, 1980년 중앙일보 회장으로 취임하여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3 자녀들

자녀들이 다들 용모도 수려하고, 학벌이 뛰어나서 그런지 막강한 혼맥을 구성했다.

장녀 홍라희삼성그룹의 회장이 되는 이건희에게 시집 보냈고 이건희 자식들의 외모가 빼어난 게 홍진기-홍라희의 유전자 덕분이라고 한다.

장남 홍석현[2]신직수의 딸인 신연균과 결혼을 시켰다.

신직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단장을 맡던 시절에 법무참모였고, 박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한 직후 36세의 젊은 나이로 검찰총장이 되어 8년 동안 검찰을 장악했다. 그 후 3년 동안 법무부 장관을 하고, 그 후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그 유명한 1,2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 신직수였다.

그리고 막내딸 홍라영 역시 노신영의 아들과 결혼을 시켰다.

노신영은 군사정권 시절 외무부 장관과 국가안전기획부장, 그리고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외무부 장관 시절 직원숙정을 할 때 정통 외교관료들을 많이 보호해서 외무부 내에서 신망이 높았다. 국가안전기획부장 시절에 천안 독립기념관 건립사업을 추진해서 결국 성공시키기도 하고, 대학 졸업정원제 폐지를 주장하여 결국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 신한민주당의 돌풍 등의 악재가 발생하여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서의 입지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대통령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도리어 국무총리로 영전했다. 국무총리 시절에는 전두환의 후계자로 물망에 올라 노태우와 경쟁하기도 했다.

차남인 홍석조는 공부를 아주 잘 하여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법대를 거쳤다. 서울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찰에서 고검장까지 올라갔는데, 광주고검장까지 역임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서 JD 학위를 받았고, 검찰총장도 유력했다고 한다.] 삼성 도청 테이프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검사직에서 물러나며 법조계에서 은퇴했다.

일설에 의하면 홍석조는 검찰 내부에 삼성 돈을 뿌리고 다니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고검장에서 물러난 계기가 되었던 그 도청 테이프 내용에 보면,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삼성 이학수 부회장을 만나 이건희 회장의 지시를 받는데, 거기서 이번 명절에 홍석조더러 검찰 안에 똑똑한 쥬니어들에게 돈 좀 주라고 하는 말이 나온다. 그 후 검찰총장이 된 임채진은 인사청문회에서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건 대략 다음과 같다.

임채진에게 노회찬 의원이 삼성 베네스토 골프장에서 삼성 사장들하고 골프치면서 로비받은 적 있느냐고 질문하자, 임채진이 거기에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가 삼성장학생이라는 뒷소문은 김용철 변호사가 기자회견을 열어 폭로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때부터 이미 검찰은 삼성에 의해 완벽하게 장악되어 그 후 검찰에 뭔가 아쉬운 일이 있는 재벌들은 검찰이나 국회의원이 아니라 삼성에게 청탁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4남인 홍석규는 범 삼성계 기업집단인 보광그룹의 회장이다.

4 기타

2003년 서울대는 새로 단장한 법학동 로비(15동 1층)를 '유민홀'이라 명명했는데, 물론 여기서 '유민'은 홍진기의 호다.[3]

2016년 7월 홍석조를 이사장으로 하여 재단법인 홍진기법률연구재단이 설립되었다.
  1. 이 남양군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던 홍순목, 사대당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홍영식,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홍만식 등이 바로 남양군파 벌족이었다.
  2. 중앙일보 회장.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그 후 홍진기의 뒤를 이어 중앙일보의 회장에 취임했으며, 주미 대사를 역임하였다. 삼성그룹 차원에서 UN 사무총장까지 밀려고 했는데, 비리 탈세 혐의가 드러나서 3달 감옥살이를 한 후에 꿈을 접어야 했다. 윤전 부문 계열사 (주) 중앙기획을 위장 폐업하고 노동자 123명을 불법으로 내쫓아 물의를 빚기도 했다.
  3. 홍진기의 아들인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과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의 지원으로 조성되었기 때문. 리모델링 전에는 강의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