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昌公園
1 개요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시립공원. 지리적으로는 효창동 외에도 청파2가동, 마포구 공덕동과 신공덕동까지 영역이 있으며 일반적 공원과는 달리 호국보훈 관련 시설 및 유적지들이 있어 호국적, 역사적인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원래는 조선왕조 22대 임금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가 있는 자리라 하여 '효창원(孝昌園)'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 외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가 함께 있었다.
2 연혁
2.1 원소(園所)에서 숙영지로
조선왕조 때까지는 소나무숲이 우거진 곳으로 인적이 꽤 드물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고 묘역도 광활하여 음침한 분위기를 띄었던 곳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러한 효창원 분위기를 이용하여 일본군에 의해 '구용산고지'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당시 일본군은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물다는 점을 이용해 이 곳을 숙영지로 삼기도 했으며 동시에 비밀 병참기지로도 활용하여 숙적이었던 독립군 토벌 및 소탕작전을 비밀리에 펴기도 하였다. 해방 후 일본군이 사용했던 숙영지 및 병참기지는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모두 철군한 후 공식 철거되었다.
2.2 독립운동가의 묘소
1924년 경기도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가 효창원 일부를 공원으로 조성하여 순환도로, 공중변소까지 갖추면서 8월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다. 1944년 효창원이 경기도 고양으로 이장되면서 이름만이 남았다. 해방 후인 1946년에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지금의 중국 상하이 루쉰공원)에서 당시 일본왕 히로히토의 생일 행사 때 물통폭탄을 투척한 매헌 윤봉길 의사(義士)와 일본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폭사(爆死)시키려다가 미수에 그쳐 일본군에 의해 사형당했던 이봉창 의사,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주중(駐中) 일본 대사를 저격하려 했다가 실패하여 옥사(獄死)했던 구파 백정기 의사(義士)의 유해가 국내에 공식 운구되어 삼의사묘(三義士墓)에 안장되기도 했다.
실제 삼의사묘에 가보면 유골이 없는 가묘(假墓)가 있는데 그 묘소에는 1909년 중국 하얼빈 기차역에서 일본의 정치가이자 한국 침략의 원흉으로 불리웠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유골이 안장될 묘소라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되기 전 유언에서 "내가 죽으면 내 유골을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대한의 독립이 되거든 조국으로 나의 유골을 운구해달라" 라고 남겼지만...허나 순국한지 한 세기가 지나고 해방이 된 지 7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커녕 유골의 행방도 찾지 못하여 표류하고 있는 중.[1]
만약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찾게 되어 삼의사묘에 안장될 경우 묘소 명칭이 '사의사묘(四義士墓)' 로 바뀔 듯 싶다.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출신이었던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으며 역시 삼의사묘와 마찬가지로 3인의 유해와 이름을 새겨넣은 비석들이 있다. 다만, 삼의사묘와는 달리 별도의 가묘는 없다.
1949년에는 백범 김구가 서울특별시 경교장에서 암살됨에 따라 국민장을 통해 그의 시신이 운구되어 안장되기도 하였다. 2002년에는 백범 김구의 생애와 업적 등을 기념하는 백범 김구 기념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3 기타
공원 계단 위쪽으로는 신라의 고승(古僧)이었던 원효대사의 동상이 있었는데 오늘날 서울특별시 원효로의 '원효' 도 원효대사의 법명을 본따 지었다.
공원 옆에는 효창운동장이 위치해 있어 '공원 옆 운동장' 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조화로운 분위기를 보이기도 한다.
2000년 12월에는 서울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어 효창공원앞역이 신설되기도 했다. 허나 공원까지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단점.
현재 효창공원 내의 애국선열들의 묘소가 이장될 위기에 처해있다. 이유는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