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조항목 : 일본/왕실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 후시미노미야(伏見宮)의 문장 |
伏見宮 博恭王
1875~1946
일본의 황족이자 해군제독.
4친왕가의 필두인 후시미노미야의 23대 당주이다.
1 개요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伏見宮貞愛親王)의 서장자로 태어나 원수해군대장 계급으로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군령부총장을 지냈다. 본래 이름은 나루카타(愛賢)였으나 카쵸노미야(華頂宮)를 계승하면서 히로야스(博恭)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러일전쟁때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三笠)의 분대장으로서 참전한 황해해전에서 부상을 입었다. 또한 함장이나 함대사령장관직을 맡는 등, 여타 황족들이 명예직에 그쳤던 것과는 달리 실전경험이 풍부해서 해군 내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다.
2 후시미노미야의 서장자로서
후시미노미야의 22대 당주 사다나루(貞愛) 친왕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사다나루의 측실이었던 가와노 치요코(河野千代子)가 낳은 서자였던 탓에 후시미노미야의 후계자 서열에서 일찌감치 밀려났다. 이 때문에 나루카타의 장래는 불확실했고, 당시의 일본 황실에 대한 태정관포고(太政官布告)에 의하면 머지않아 신적강하하여 화족이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1876년 나루카타(愛賢)의 큰아버지인 카쵸노미야 히로츠네 친왕(華頂宮 博経親王)이 26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본래 신적강하대상이던 카쵸노미야를 덴노의 특지로 세습궁가로 승격하면서 그의 아들 히로아츠(博厚)가 계승했지만 8살의 어린나이로 죽어서 당주자리가 비는 일이 생겼다. 이에 카쵸노미야의 본가인 후시미노미야에서 후계자를 들이기로 하면서 나루카타로 하여금 카쵸노미야를 계승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나루카타는 카쵸노미야의 통자(通字)인 히로(博)를 넣어서 히로야스(博恭)로 개명한다.
카쵸노미야를 계승하고 3년이 지난 1886년 4월 5일, 히로야스는 해군병학교 16기 예과에 입학하면서 해군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3년 뒤 해군병학교를 중퇴하고 독일 유학길에 올라, 독일해군사관학교 및 독일해군대학에서 1895년까지 수학했다. 이 사이인 1894년에 일본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해군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귀족원의 황족의원이 된다.
귀국 후에는 순양함이나 전함에서 함대근무를 거듭하면서 다른 황족과 다른 생활방식을 몸에 익히게 된다. 1897년에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9녀 츠네코(経子)와 결혼하였고, 1903년에는 해군 소령으로 승진했다. 이듬해인 1904년에 본가인 후시미노미야(伏見宮)로 전격적으로 복적하면서 카쵸노미야(華頂宮)는 그의 2살짜리 아들 히로타다(博忠)가 계승하게 된다. 당초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하기로 되어있던 적자 구니카(邦芳)가 정신박약자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후시미노미야로 복적한 뒤에도 함대근무를 계속하여 1913년에는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요코스카 진수부 함대사령관(横須賀鎮守府艦隊司令官)으로 취임한다. 나아가 해군대학 교장과 제2함대사령장관 등을 역임하고 1923년에는 아버지 사다나루 친왕의 별세로 후시미노미야(伏見宮)의 23대 당주가 된다.
3 일본 해군의 수장
1931년 말 육군참모총장에 황족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 載仁親王)이 취임한데 대항하여 1932년 2월에는 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히로야스를 해군최고의 군령권자인 군령부장(軍令部長)에 취임시켰다. 해군의 군령부장을 육군참모총장에 대응하여 군령부총장[1]이 된 것은 히로야스 시절의 일이다. 또한 히로야스를 찬양하는 노래[2]까지 만들어졌다.
그가 군령부총장으로 있던 시절은 군령부(軍令部)가 권한강화를 위해 움직이던 때로 히로야스 자신도 육군과 달리 전통적으로 해군성이 우위를 점한데 대해 군령부의 권한강화를 위해 군령부령(軍令部令) 및 성부호섭규정개정안(省部互渉規定改正案)에 대해 “내가 재임하고 있을 때가 아니면 안 된다. 꼭 해내라.”고 다카하시 산키치(高橋三吉), 시마다 한타로(嶋田繁太郎) 군령부차장에게 지시하여 함대파견 정책을 추진, 결국 해군군령부(海軍軍令部)의 호칭을 군령부(軍令部)로 해군군령부장의 호칭을 군령부총장으로 변경하였고 나아가 병력량의 결정권을 해군성에서 군령부로 이관하여 군령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해군성의 기능을 제도상, 인사상 약체화 하는데 성공하여 군령부는 해군성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리하여 독이일 삼국동맹 및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해군 최고실력자로서 커다란 발언권을 가졌다. 태평양 전쟁 중에도 각 장관, 총장급 인사에도 히로야스의 양해를 얻는게 불문율이었다. 2.26 사건 때는 사건발생일 아침 가토 간지(加藤寛治), 마사키 진자부로(真崎甚三郎)와 협의한 뒤 덴노를 예방했다. 이때 쇼와 덴노의 심기를 건드려서 이후 반란진압 쪽으로 선회한다.
1944년 6월 25일 사이판 섬의 포기를 결정한 어전회의에서 “육해군 모두 뭔가 특수한 병기를 고안해내어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대책은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전황이 이처럼 곤란하게 된 이상 항공기, 군함, 소함정 모두 특수한 것을 고안하여 신속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다. 이들 특수한 병기들은 특공병기를 가리키는 것이란 주장도 있다.
4 만년
1938년 10월 장남 히로요시(博義)가 수면제남용으로 사망했다. 1943년 8월에는 신적강하한 4남 후시미 히로히데(伏見博英)가 전사했다. 한동안 뇌출혈로 인한 우반신마비 및 심장병으로 인해 아타미(熱海)의 별장에서 요양생활을 했다. 패전직후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도쿄로 돌아왔지만 후시미노미야의 본 저택이 전쟁중에 소실되어 부근의 료칸에서 기거하다가 1946년 8월 16일에 사망했다.
5 가족관계
부친 :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伏見宮 貞愛) 친왕
모친 : 사다나루 친왕비 도시코(利子) 여왕[3], 생모 : 가와노 치요코(河野千代子)
배우자 : 도쿠가와 츠네코(徳川経子)[4]
장남 : 히로요시(博義) 왕(1897 - 1938) 해군 대령. 이치조 사네테루(一条実輝) 공작의 딸 도키코(朝子)와 결혼해서 후시미노미야의 마지막 당주 히로아키(博明)를 낳았다.
장녀 : 야스코(恭子) 여왕(1898~1919) 아사노(浅野) 후작 가문으로 시집감.
2남 : 히로타다(博忠) 왕(1902~1924) 히로야스의 뒤를 이어 카쵸노미야(華頂宮)를 상속받았으나 요절했다. 그의 죽음으로 카쵸노미야는 단절한다.
3남 : 히로노부(博信) 왕(1905~1970) 신적강하하여 카쵸(華頂) 백작가문을 세웠으나, 전후 오쟁이를 지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다 죽었다
2녀 : 아츠코(敦子) 여왕(1907~1936) 키요스(清棲) 백작가문으로 시집감.
3녀 : 도모코(知子) 여왕(1907~1947) 구니노미야 아사아키라(久邇宮 朝融) 왕비. 고준황후의 올케.
4남 : 히로히데(博英) 왕(1912~1943) 2차대전 중에 해군 소령으로 참전하여 전사했다.
6 평가
당시의 황족은 군인으로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명예직에 머무는 것이 관례였으나, 실전, 실무경험이 풍부한 히로야스는 실제 권력을 행사했다는 특징이 있다. 솔선수범하는 자세 및 난코스로 유명한 칸몬해협(関門海峡)에서의 능수능란한 조타실력은 해군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왕자라기보다는 군인의 풍모가 돋보였다고.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와 함께 왕자님과 하느님(宮様と神様)으로 불리면서 해군 내에서 신격화 되었다. 히로야스는 대함거포주의자여서 그의 위세를 등에 업은 함대파가 대두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는 황족이 총장직에 오르면서 의견의 경직화를 부른 것을 두고서 메이지(明治)시대의 머리로 쇼와(昭和)시대의 전쟁을 했다고 비판했다. 히로야스의 총장퇴임때 오이카와 고시로(及川古志郎) 해군상에게 의견을 요청받은 이노우에는 '원래 황족들은 이런 중대사에 총장이 되도록 교육받지 않았다. 왕자님이 총장이라면 차장이 총장과 같은 권력을 갖게 되는 거'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해군 내에서 조약파를 추방하는 등, 미일 개전의 원흉 가운데의 하나로 전후(戰後)에는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해군반성회에서도 히로야스의 전쟁책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황족이라는 존재의 무게 때문인지 깊게 논의되지는 않았다.
반면에 히로야스 자신은 미일개전에 대해 일본에서 화평을 구하려고 해도 미국은 응할 일이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조기에 미국과의 전쟁을 개시해서 어떻게든 최소한의 희생으로 미국에 손해를 끼쳐서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조기화평을 맺어야 할 것이라는 조기결전 조기화평(早期決戦・早期和平)이라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함대파의 중진이었던 히로야스와는 반대의 입장에 섰던 구미협조파 또는 조약파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와는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들 말한다.
군령부의 권한강화를 노리고 히로야스가 주도한 군령부령 및 성부호섭규정개정안(軍令部令及び省部互渉規定改正案)에 대해 이노우에 시게요시는 자신의 직책을 걸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짤렸고, 요코하마 진수부(横須賀鎮守府)에서 예비역 편입을 기다리는 처지에 몰렸다. 그러나 대령 승진 후 5년째에 전함 히에이(比叡)의 함장에 보하여 통상 1년 근무하는 함장 직을 2년 근무한 뒤 소장으로 승진했다. 이는 히로야스에게 있어서 이노우에는 비록 적대세력이었지만 그의 사나이 군인으로서 모습을 높이 사서 그렇게 된 것.
해군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은지라 왕자라기보다는 군인에 가까웠던 그의 모습을 전하는 일화들이 있다. 황족들은 목욕을 하고 난 뒤 유카타를 여러번 갈아입는 식으로 물기를 제거하지만 히로야스만큼은 일반 서민들이 하는 식으로 몸을 닦았다고 한다. 속옷 세탁쯤은 본인이 알아서 했기에 주위에서는 '언제부터 그런 것까지 하십니까?'라고 물으면 '해군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라고 대답했다고. 옛 측근들에 의하면 함내에서는 주먹밥과 야채절임과 같은 간단한 식사를 선호했고, 해군성 식당에서의 점심식사로는 덴푸라우동을 즐겼다고 한다. 또한 군령부총장으로 오래 재임한 것도 있고, 그의 얼굴이 길쭉했던 걸 빗대서 쵸멘쿤(長面君길쭉이 왕자님)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히로야스의 장인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였는데, 어느날 함내 장교들이 에도 막부 말기에 대해 의론이 오가던 중 누군가가 요시노부를 격렬하게 비난한 적이 있었다. 히로야스는 말없이 자리를 떴고, 후에 그 장교가 사죄하러 오자 “아니다. 신경 쓸 것 없다. 공부가 됐다”고 대꾸했다. 또한 신적강하한 4남 후시미 히로히데가 1943년에 전사했을 무렵 전사자합동장례식때 히로히데의 위패를 가장 윗자리에 놓으려 한 해군의 움직임을 만류하였고, 결국 계급순으로 놓았다.
종가인 후시미노미야의 당주로서 방계 미야케에도 관심을 쏟았다. 히로야스의 4촌 형제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 邦彦) 왕[5]이 장남인 아사아키라(朝融)와 사카이 키쿠코(酒井菊子)와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무산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구니요시는 이전에 자신의 장녀 나가코(良子) 여왕과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에 관해서는 주위의 반대를 누르고 밀어붙이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러한 와중에 히로야스는 자신의 딸 토모코(知子)를 구니노미야에 시집보내면서 황실 내의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후 아사아키라는 시녀와 사통하는 식으로 처와 장인을 배반해서, 히로야스는 구니노미야의 대에 걸친 거듭된 부정(不貞)에 상당히 맘이 상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