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고 헤이하치로

도고 헤이하치로
東郷 平八郎(とうごう へいはちろう)
생몰1848년 1월 27일 ~ 1934년 5월 30일
출생지일본 사쓰마 번 가고시마가고시마가자야
사망지일본제국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 판초(현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복무일본제국 해군
복무기간1863년~1913년
최종계급대장
주요참전청일전쟁
러일전쟁
서훈내역국화장菊花章(きっかしょう)

[1]
금치훈장金鵄勲章(きんしくんしょう)

국화장菊花章(きっかしょう)
(훈1등급)[2]
금치훈장金鵄勲章(きんしくんしょう)

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だいくんい きっか だいじゅしょう)

대훈위 국화장경식大勲位菊花章頸飾(だいくんい きっかしょう けいしょく)


로열 빅토리아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 폴란드 재건국 훈장
상트안나 훈장

1 생애

도고 헤이하치로 일본의 현재 가고시마현인 당시 사쓰마 번의 작은 마을인 '가노야'에 있는 무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13세기부터 무사 집안이었으며, 이런 전통의 영향으로 도고 헤아하치로도 무예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에게서 '반항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반항이 잦았다. 도고 헤아하치로는 이후 자신의 능력을 더는 반항으로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발휘하려고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워서 '사쓰마' 지역의 다이묘시마즈 다다요시의 휘하 사무라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63년 어느 날, "앞으로 있을 외세의 침략에서 조국 일본을 수호하려면 먼저 막강한 해군력을 육성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2 업적

일본 제국해군 제독. 러일전쟁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다.

규슈 가고시마 현에서 태어났으며[3] 원래 어렸을 때 이름은 '쥬고로(仲五郎)'였으나, 성인이 되면서 '헤이하치로'로 이름을 바꿨다. 젊은 시절에는 사쓰마번의 사무라이로서 대포 다루는 기술을 배워 군인 생활을 했고 사쓰에이 전쟁에도 참전했었던 전력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해군 사관으로 임관해 1871년부터 1878년까지 동료 11명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8년간의 유학 생활에서 돌아온 1878년 7월에 중위, 12월에 대위, 그 다음해 12월에 소좌가 되는 등 빠르게 승진을 계속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순양함 '나니와'의 함장을 맡아 풍도 해전, 황해 해전, 웨이하이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그 후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에 올라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이 자랑하는 발틱 함대를 함선의 성능과 진형, 그리고 러시아 함대의 약점을 정확히 찔러서 완전히 박살냄으로써 그때까지 육군이 삽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기 측면에서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 가던 전세를 완전히 굳혔다. 반면 당시 육군은 203고지에서…. 시간이 흐른 2차대전 때에도 일본 해군이 막장의 극치를 달렸던 일본 육군에 비교해서 나름 개념이 있었던 것은 도고가 남긴 영향력 때문이라는 카더라도.

비록 영국을 비롯한 반러시아 성향의 서구 열강들의 지원으로 득을 본 측면이 있었다지만, 어쨌든 당시 해전의 승리 덕분에 일본은 세계에서 그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는데 성공하며, 명실상부한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경제불황을 겪고, 제국주의의 광풍에 휩쓸린 나머지 군국주의 노선을 걸으며 멸망의 로 달려가 버렸다.

3 인품과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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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와 함께. 외모 하극상1933년 사진(86세)

20세기 초반 열강 대부분이 인종차별주의나 선민사상 등 그릇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고는 몇 안되는 진짜 군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뤼순 요새를 봉쇄하다가 전함 2척이 기뢰에 접촉하는 바람에 침몰되는 대참사 후에 함장들이 보고하러 와서 눈치만 살피자 오히려 따스하게 격려를 했다거나, 발트 함대 격파 이후에는 부상당하고 포로가 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직접 문병을 가는 등, 부하나 패자에게 너그러웠다. 이런 고매한 인품과 행동으로 생전에 전 일본 국민으로부터 추앙받았다.

군인으로서의 빛나는 업적 외에도 무사도(그냥 멋내려고 갖다붙인 게 아니라)를 숭상하는 사람으로서 절도를 지켰다고 한다. 혹자는 영국이 정립한 근대 해군 정신의 정수라고도 하며, 그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퇴역 이후에는 지나치게 주변에서 추앙한 탓인지 여러 가지로 독선적인 인물이 되었고, 결국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불황기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체결 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본 해군의 체질 개선을 가로막은 원흉이 되고 말았다. 당장 12인치 포를 12문 탑재한 카와치급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되지 못한 것은 적어도 주포 중 일부는 적함보다 강력한 것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한 도고 헤이하치로의 실책이 컸다. 덕분에 카와치급은 12인치 45구경과 12인치 50구경을 혼용하는 바람에 일제사격협차같은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사용하는 함포사격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영국에서 기술을 수입할 목적으로 공고급 순양전함을 도입하게 된다. 문제는 쓰시마 해전에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낸 제독이 도고 헤이하치로라는 것이며, 따라서 동일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

게다가 본인이 의도한 결과야 아니었겠지만. 덤으로 복장개선을 막음으로서 일본 해군 장교들이 열대의 바다에서도 목을 꽉 조이는 군복을 입고 싸우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1920년대에 해군 장교복을 당시의 영국 및 미국처럼 목이 트인 것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도고에게 의견을 묻자 도고는 딱 잘라서 "이 옷은 쓰시마 해전 승리의 정수다."라는 말로 반대 의견을 밝혀 결국 1943년까지 새로운 복장이 제정되지 못하게 막았다.

그의 큰아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관료로 살다가 1969년에 사망, 둘째 아들은 해군 소장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싸우고 1962년에 죽었다.

4 트리비아

  • 젊었을 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보면 지금 관점에서도 미남. 위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늙기도 훌륭히 늙은 듯. 키는 작다 허나 성격은 좀 예민했는지 저 시기에 어느 신문기자가 가족 인터뷰를 할 때 부인이 "내가 부업을 좀 해서 살림에 보태야 했다"라고 웃으며 농담을 하자 난 내 가족 굶긴 적 없어!라면서 버럭 화를 내서 기자를 겁먹게 한 일화도 있다. 의외로 소심한 남자. 젊을 적 치기어림 때문일 가능성이 높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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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89세까지 장수를 누린[4] 어머니 도고 마사코 東郷益子.
  • 일반적으로 과묵하고 위엄있는 인상이지만 한없이 가벼운 모습도 종종 보였다. 만년에 가쿠슈인에 초대되었을 때 강연 중에 학생들에게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고 한 질문에 "군인이 되고 싶다."고 대답한 학생에 "군인이 되면 죽는거야.", "정 되고 싶다면 육군 말고 해군에 넣어. 해군에 들어오면 죽지 않는다." 라고 발언하여 육군 대장이자 철혈장군으로 명성이 높았던 노기 마레스케[5]를 격노케 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나이로도 기수로도 한참 선배인 도고를 깔 수 있을 리가… 노기 : ㅂㄷㅂㄷ
  • 쓰시마 해전 당시 도고 제독의 함대에서는 그의 전술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한명의 사관후보생이 있었다. 그가 바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당시 야마모토는 대포를 조작하던 도중 두 손가락을 잃었다고 한다. 사실 야마모토가 받은 감명은 어쩌면 전술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도고의 사후, 그의 이름을 딴 신사가 지어지자 "성가신 일(군축조약)을 해준 대가로 신이 되었으니, 가서 절을 해주면 뭔가 얻을 일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며 비웃었다는 말이 있다. 야마모토는 그의 동료가 추방당한 일도 있고, 군축조약체결의 책임자가 도고였던 까닭에 감정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야마모토 사후 신사가 지어지려는 움직임을 지인들이 막아선 것도 그래서였다.
  • 쓰시마 해전 당시 한 대사인 皇国の興廃この一戦にあり。各員一層奮励努力せよ(황국의 흥망은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 인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는 그를 대표하는 명언이다.
  • 쓰시마 해전이 벌어진 1904년에 창업한 어느 사케 양조회사는 이 승리를 기념해 회사 이름을 아예 '도고 주조'로 지었다.
  • 쓰시마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가 황거에서 열렸을 때 일본에는 미 해군의 전함 오하이오[6]가 정박 중이었다. 일본 측에서는 이 미 해군 장교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는데, 당시 선임 장교들은 자기들끼리 노느라 제의를 거절하고 미국해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장교후보생[7] 몇명을 보냈다. 도고는 이들을 환대했고 이들 중 한 장교후보생은 도고에 대한 빠심을 갖게 되어 평생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된다. 그 인물은 바로 체스터 니미츠였다.그리고 몆십년 후에 존경하는 분이 죽어라 키운 해군을 묵사발냈다

  • 핀란드에서는 '도고 맥주'가 판매되고 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식민 치하에 있던 핀란드 입장에서 러시아를 작살내 독립유공자가 된 도고를 기념하기 위해 출시했다고 알고 있는 일본인들이 많다고 하지만...사실은 "Amiraali[8]맥주"라는 전 세계 명제독들의 초상이 레이블 된 맥주 중의 하나다. 어찌됐든 그 덕분에 일본에서 많이 수입해 간다고 한다.
  • 영국 유학 당시 먹었던 비프 스튜의 맛을 못 잊어서 함선 요리사에게 비슷한 요리를 만든게 한 것이 전후 민간에 퍼져 니쿠쟈가[9]로 변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국 요리를 못 잊다니... 사실 영국 요리라고 전부 맛없는 건 아니긴 하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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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묘지는 일본 도쿄의 명사들이 다수 안장되어 있는 다마레이엔(多磨霊園)에 있다. 바로 옆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주만 공습을 지휘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나란히 묻혀있다. 그리고 임팔작전의 졸전으로 유명한 무다구치 렌야도 이 곳에 묻혀있다.
  1. 욱일소수장
  2. 욱일대수장
  3. 그래서 가고시마시 기온노스에 기념 공원이 있다.
  4. 1812~1901년으로 지금 시각으로 봐도 꽤나 장수한 편이다.
  5. 러일전쟁 중 203고지의 삽질로 잘 알려진 인물. 이 전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비난을 퍼부었으나, 그 역시 아들을 전투에서 잃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유가족들은 그만 노기와 함께 얼싸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노기는 두 아들 모두 뤼순 공방전에서 잃어서 가문의 대가 끊겼다. 책임지고 할복하려 했으나 메이지 덴노가 허락하지 않아서 메이지 덴노 사후에 겨우 아내와 함께 자결했다.
  6. 메인급 전함 3번함으로 이 이름은 나중에 페이퍼 플랜이 된 몬태나급의 2번함 (BB-67)로 계승된다
  7. 이 신분은 준사관 계급에 상당하는 위치인데,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준사관으로 2년쯤 복무하다가 소위 임관시험을 통과해야 정식 장교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했다.
  8. 핀란드어로 '제독'
  9. 한국에서 번역할 때는 주로 고기감자조림으로 표기된다.
  10. 우리가 즐겨먹는 샌드위치도 영국 요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