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니노미야 아사히코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久邇宮 朝彦親王[1][2]
1824~1891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살았던 일본황족.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4남이며, 이방자 비와 고준황후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못지않은 정력가.[3]

1 생애

1824년 생. 아명은 도미노미야(富宮). 초명(初名)은 '나루노리'(成憲)이었으나, 후에 아사히코로 고쳤다.

20대 중반에 가마쿠라 막부 시대 말기에 건립되어 대대로 왕족이 주지스님[4]을 맡았던 교토 쇼렌인(青蓮院)[5]의 주지스님이 되었으며, 새파란 녀석이 벌써 주지스님?? 법명은 손유우(尊融)로 명명받았다. 그래서 처음의 궁호(宮號)는 구니노미야가 아니라 쇼렌인노미야(青蓮院宮)이다.

일단 여느 왕족들처럼 스님이 되긴 하였지만, 원체 경건한 사원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많은 말썽을 일으켰다고 한다. 맏형과 똑같다. 단 맏형은 대상이 고모(...)고 이 사람은 대상이 사원에서 봉사하던 무녀(...)다. 이거나 저거나 도토리 키재기, 매한가지다.

미국의 흑선(黑船, 구로부네)이 일본에 내항했을 때, 에도 막부는 교토 조정에 이를 알리지도 않은 채 미일조약을 일방적으로 체결해버렸다. 그래서 교토 조정의 수많은 보수, 수구꼴통적인 성격을 지닌 왕족, 구게(公家)들이 조약 체결에 반대하고 항의했으며, 이 흐름의 중심에 바로 아사히코 친왕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에도 막부의 13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가 죽었기 때문에 후임 쇼군을 선출해야 했는데, 막부의 다이로(大老)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를 비롯해 그 외 막부의 여러 인사들은 기슈 번(紀州藩)의 도쿠가와 요시토미(德川慶福)를 지지했고, 아사히코 친왕을 비롯한 여러 존왕양이(尊王讓夷)파들은 미토 번(水戶藩)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지지했다.

이 와중에 막부의 실세였던 이이 나오스케는 아직도 교토 조정에 비해 강하기 그지없었던[6] 막부의 권력을 이용, 요시토미를 밀어붙여 14대 쇼군으로 만들고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인 '家' 자를 써서 이름을 '이에모치'(家茂)로 바꿨다.</ref> '안세이(安政)의 대옥(大獄)' 사건을 일으켜 조정의 구게들, 강력한 존왕양이를 주장했던 조슈 번(長州藩)의 여러 무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존왕양이파들이 처형, 투옥, 유배형에 처해졌다.[7] 아사히코 친왕도 이 피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방계 왕족이라는 신분을 참작하여, 조정에서의 발언권을 박탈당하고 은거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1860년에 이이 나오스케의 폭정에 강한 불만을 품은 존왕양이파들이 사쿠라다 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을 일으켜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함으로써 아사히코 친왕도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궁호를 나카가와노미야(中川宮), 가야노미야(賀陽宮)[8]를 거쳐, 1875년 최종적으로 구니노미야로 고쳤다. 그 후 덴노의 조언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격동의 인생 고준황후(나가코)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은 그의 3남, 이방자 여사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梨本宮守正王)은 그의 4남, 후에 총리를 지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그의 9남이다.

2 많은 자식들

부친 구니이에 친왕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정력가였다. 젊었을때는 신사(神社)의 무녀(巫女)를 임신시킨 일화도 있을 정도. 당연히 환속해서도 자식을 많이 낳았다. 그는 고준황후의 할아버지인 관계로 현재의 황족들 가운데 미카사노미야 계통을 제외한 황족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기도 하다.

아래는 9남 9녀 가운데서 성년까지 살아남은 아들만 들었다. 웃기는 건, 정작 그는 정식으로 결혼을 한 적이 없어서 슬하의 9남 9녀 모두 서자라는 것. 홍길동

2.1 2남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賀陽宮 邦憲王
1867~1909
상술했듯이 실질적인 장남이었으나 병약한 고로 구니노미야의 후계자가 되지는 못했다.
다만 그가 따로 창설한 가야노미야는 구니노미야의 옛 이름.

2.2 3남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久邇宮 邦彦王
1873~1929
구니노미야의 2대 당주. 무엇보다도 그는 고준황후의 부친으로 히로히토의 장인이다. 1928년 대만에서 조명하 의사의 칼을 맞았고 이듬해 사망한다. 화족 시마즈 치카코(島津俔子)와 결혼, 고준황후를 포함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구니노미야의 당주자리는 장남 아사아키라(朝融)가 이었다.

2.3 4남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梨本宮 守正王
1874~1951
영친왕비 이방자의 부친. 영친왕의 장인이다. 본래 이름은 다다(多田)였으나, 그의 작은할아버지 모리오사(守脩) 친왕이 창설한 나시모토노미야를 계승하면서 모리마사(守正)로 개명했다. 화족 가문의 딸 나베시마 이츠코(鍋島伊都子)와 결혼하여 이방자 비와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를 낳았다. 2차대전 패전 후, 황족 가운데서 유일하게 전범으로 기소받았다.

2.4 5남 다카

多嘉王
1875~1937
독자적인 궁호도 받지 않고, 신적강하도 않은 희한한 경우였다. 니시쿠니노미야(西久邇宮)를 창설하기 위해 그랬다는 썰이 있긴 하다. 1947년 신적강하할 때까지 그의 가족들은 모두 본가인 구니노미야의 일원으로 보았다.

2.5 8남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朝香宮 鳩彦王
1887~1981
링크를 타고 가면 알겠지만 천하의 개쌍놈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작자다.

2.6 9남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東久邇宮 稔彦王
1887~1990)
훗날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나루히코 본인이 100살 넘도록 장수하기도 했고, 구황족 가운데서 그의 가문이 가장 번창했다. 지금도 황적복귀를 논할 때면 가장 먼저 오르내릴 정도. 특히 그의 장남 모리히로(盛厚)는 히로히토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적장계 자손들은 히로히토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3 일화

  • 죽을 때까지 서양 문물과 거의 접촉하지 않으며 살았다. 동시대의 다른 황족과 달리 양복을 입은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 메이지 유신 전후의 일들 때문에 신정부의 중심에는 들지 못하고 도쿄로 이주하는 일도 없었다. 이러한 사연 및 그가 받은 푸대접은 훗날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 邦彦),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 稔彦)와 같은 그의 자식들이 왕족으로서는 별스런 행위를 하는 등 정서적 영향을 끼친 원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 훗날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제주(祭主)로 근무하면서 신토불교 양쪽의 요직을 거치는 흔치 않은 사례를 만들어 냈다. 드물게도 신직(神職)을 육성하는 황학관대학(皇學館大学)의 창건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가 남긴 일기는 <아사히코 친왕 일기(朝彦親王日記)>로, 당시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다.
  1. 朝彦이란 한자를 아사히코 대신 토모요시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2. 일본어는 한자 한 글자에도 읽는 방법이 많게는 십 여개다. 예를 들어 '옳을 의'(義) 자를 이름에 쓰면 읽는 방법이 아키(あき), 이사(いさ), 시게(しげ), 타케(たけ), 타다시(ただし), 치카(ちか), 쓰토무(つとむ), 토모(とも), 노리(のり), 미치(みち), 요시(よし), 요리(より)까지, 총 12가지에 달한다. 이름이 한 글자인 경우에 주로 쓰는 세 글자의 타다시, 쓰토무를 제외해도 10가지다. 그래서 일본인은 '타로'(太郞)같은 읽는 방법이 거의 정해져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밝힐 때 한자 뿐만 아니라 읽는 방법(요미가타, 読み方)도 가르쳐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한국인의 이름은 한글로 쓰기 때문에 읽는 방법이 항상 한 가지라 문제될 일이 없다. 가끔 이름을 한자로 쓰면 '흰 백'(白) 같이 음이 '백'도 있지만 '배'로도 읽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적어도 통성명을 하는 상황에서는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더 수월할 것이다. 일본어를 사용하는 데 큰 불편한 점 중 하나.
  3. 무녀(巫女)와 검열삭제해서 임신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4. 스님이라지만 모두 대처승이라, 아내와 자녀를 둘 수 있다.
  5. 하필 많고 많은 교토들 중에서 왜 쇼렌인인가 하면, 사실 이 쇼렌인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사람그 당시 주지스님은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다이 바로 아사히코 친왕의 외할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아사히코 친왕의 어머니는 구니이에 친왕의 첩 노부코(信子)였으며 쇼렌인의 관리자 도리이코지 쓰네치카(鳥居小路経親)의 딸이었다. 외할아버지의 후광
  6.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막부의 쇼군 허락 없이 덴노가 혼자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119대 덴노였던 고카쿠 덴노는 덴노의 자식이 아닌 방계 황족(간인노미야閑院宮)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스케히토(典仁) 친왕에게 덴노의 칭호를 추존(追尊)하려고 했으나, 막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카쿠 덴노는 칭호를 올리지 못했고 결국 죽었다. 이는 막부가 없어진 후인 증손자인 메이지 덴노 시기에 스케히토 친왕에게 '게이코(慶光) 덴노'라는 칭호를 올림으로써 이루어졌다. 이처럼 덴노는 막부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마치 허수아비 같았다.
  7. 존왕양이파의 사상적 지도자, 일본 우익사관의 창시자라고도 할 수 있는 조슈 번의 무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이 때 막부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8. 거처 주위에 비자나무(榧)가 많이 자라서 '榧'의 독음인 'かや'를 음독으로 바꿔서 길한 말인 '賀陽'으로 바꿨다고 한다. 뒤에 구니노미야로 바꾼 후 차남인(장남은 요절) 구니노리(邦憲) 왕이 궁호를 가야노미야로 칭했다. 이때 왜 실질적으로 장남인 구니노리 왕이 구니노미야의 차대 당주가 되지 못했냐면, 그는 건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40대에 죽었다. 그래서 바로 아래의 이복 남동생인 구니요시(邦彦) 왕이 구니노미야의 차대 당주가 되었다. 양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