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데가르트 폰 빙엔

독일어: Hildegard von Bingen
라틴어: Sancta Hildegardis Bingensis

1 개요

한국 가톨릭에 의한 표기는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트. 독일어 표기법에 따르면 '힐데가르트 폰 빙겐' 이라고 써야 하지만 '빙엔' 표기로 더욱 잘 알려져 있고 독일어 발음으로도 '빙엔' 이 더 정확하다.[1]

1098년 여름에 베르메르스하임 포어 데어 회에에서 출생, 1179년 9월 17일 빙겐 암 라인[2]에서 선종.

독일 출신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장, 작곡가, 문학가, 언어학자, 과학자, 철학자, 의사, 예언가. 그리고 천재, 먼치킨, 엄친딸, 인류 역사상 최강의 사기 캐릭터 중 한 명. 통칭 라인강시빌라(Sibyl of the Rhine).

가톨릭성인으로 축일은 9월 17일. 가톨릭에서 인정한 기적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순교한 것도 아니라 공식적으로 시성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남긴 업적이 워낙 ㅎㄷㄷ한지라 1664년부터 독일 마인츠 교구를 중심으로 그녀가 선종한 9월 17일을 축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1940년에는 교황청에서 공식적인 성인들 이름만 올리는 로마 순교록에 힐데가르트의 이름을 넣어 시성은 안 됐지만 반쯤은 인정했다. 결국 사후 833년만인 2012년 5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정식으로 성인 반열에 올랐다. # 또한 동년 10월 7일 교회학자의 칭호를 받았다.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위대한 계시(VISION: The Life of Hildegard von Bingen, 2009)>가 2011년 11월 24일 국내에 개봉되었다.

2 생애

귀족 가문의 10번째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수도원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 수도원에 가게 된 이유로는 당시 여성이 제대로 학문을 익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가 수도원이었는지라 공부하기 위해서, 몸이 약해 요양하기 위해서. 부모가 10번째로 얻은 자식이니 십일조의 개념으로 바친 것이라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어쩌면 모두일 수도 있고.

어릴 적부터 하느님의 환영을 보았다고 하지만, 당시 소속되었던 원장 수녀의 충고로 이것을 철저히 숨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이야기를 잘못 꺼내면 이단으로 몰려 끔살당하기 십상인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30대까지는 딱히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지냈으며, 본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40대 이후의 일이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자신의 재능과 사상을 펼치는 데도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교황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이단이 아니라는 인증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40대 이후라는 천재치고는 좀 늦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한 번 두각을 나타낸 이후 힐데가르트가 쌓은 업적은 실로 믿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위키백과에서는 이 사람을 수녀, 예술가, 작가, 카운셀러, 언어학자, 자연학자, 과학자, 철학자, 의사, 약초학자, 시인, 운동가, 예언자, 작곡가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저 대부분의 분야에서 당대 최강급이었고 후세에까지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본격 인생 치트키

3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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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가르트가 성령을 받아 책을 저술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눈에서 빔 아니다 그의 저서 <Liber Scivias(길을 알라)>의 삽화이다.

힐데가르트의 업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음악 부문이다. 작곡가와 작곡한 음악이 현재까지 내려오는 인물 중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 또 그녀가 작곡한 전례극 <Ordo Virtutum>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덕극[3]이자 오페라의 기원[4]으로 불리우며, 그녀가 작곡한 각종 성가들은 당시 주류와 꽤 벗어난 물건이었으나 지금도 CD 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을 만큼 당시에도 유명했고 또 지금까지도 들려지고 있다.

그 외 부분에 남긴 업적도 실로 굉장한데 우선 신학서와 의학서, 식물학서 등을 저술하였다. 그녀가 쓴 신학서는 최근 굉장히 주목 받고 있는 생태신학의 원조로 불리고 있으며, 의학서는 이후 서양 의학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약초학과 보석 치료 같은 부분은 지금까지도 연구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물론 현재는 주류의학이 아닌 대체의학 같은 곳에서 주로 연구된다. 하지만 근 천 년 전 의술을 지금까지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다.

책 저술 과정도 굉장히 비범한 것이, 라틴어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직접 라틴어독일어를 결합한 문자를 만들어 썼다. 언어학에 굉장히 정통하지 않다면 학문을 저술하는 데 통용 가능한 수준의 문자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힐데가르트가 뛰어난 언어학자로 분류되는 이유. 물론 오늘날 말하는 이론언어학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론언어학이란 것 자체가 19세기에야 정립된 학문이니.

또한 직접 그린 각종 삽화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자신의 내용과 사상을 그림으로 잘 표현해낸 한 마디로 좋은 삽화가였다. 물론 이 정도 일도 당시 아무나 하는 건 아니었다. 힐데가르트가 저술한 책의 삽화는 직접 그렸다는 설도 있지만, 일종의 감독으로서 이렇게 저렇게 그릴 것을 세세히 주문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다. 혹은 둘 다라는 설도 있는 듯.

예언자이자 상담가로서도 활동하였는데, 이런 신비주의적 면모를 현대에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어려우나 최소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 못했다면 제 명에 죽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황제교황을 포함한 당대 유럽의 명사들이 힐데가르트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녀의 이야기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고 존중했음을 알 수 있다. 황제와 교황이 이랬을 정도니, 일반 귀족 혹은 평민 같은 사람들이 힐데가르트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 힐데가르트는 최초의 독립된 수녀원을 세운 인물이다. 이전까지의 수녀원은 전부 남성 수도원에 종속된 형태로만 존재했지만,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명성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최초의 여성들만을 위한 독립된 수녀원을 건설했다. 이 점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따지고 보면 당대의 여권운동가라 봐도 될 듯. 힐데가르트가 두 번째로 지은 수녀원은 아이빙엔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때부터 힐데가르트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 즉 '빙엔의 힐데가르트'로 불리기 시작했다.

즉 힐데가르트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 사상가, 음악가, 작가, 의학자, 식물학자, 언어학자, 예언가 및 기타 등등(…)이었다. 거기에다 저 대부분의 분야에서 당대에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저 중 한 분야에만 업적을 남겼어도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힐데가르트는 저 많은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한마디로 상식을 뛰어넘는 우주괴수였던 것이다.
  1. 독일어 ng은 무조건 /ŋ/으로 발음한다. /ŋg/으로 발음하는 경우는 없다.
  2. 출생지와 더불어 현 독일 라인란트팔츠 주 소재.
  3. 원시적인 연극의 한 형태.
  4. 그러나 이를 최초의 오페라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페라의 기원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귀족 바르디 백작의 후원을 받던 예술가 모임 '카메라타'의, 고대 그리스 희곡을 재현하자는 열망으로 인해 말들어진 '다프네'가 최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