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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신 체제 몰락의 도화선
1978년 12월 12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10월 유신 이후 유신헌법에 의해 치러졌다. 투표율은 77.1%를 기록했다. 154석의 지역구를 선출했으며 77석의 유신정우회가 별개로 있었다. 1선거구당 2석의 중선거구제였다.
78년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해였는데 72년 10월 유신으로 임기 6년의 유신체제 1기가 마무리 되는 해이자 총선이 있는 해였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민주화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총선에서의 압승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박정희 정권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엄청난 악재의 쓰나미가 몰아닥쳤던것. 78년 6월에 각종 생필품의 품귀 현상이 일어나 서민들의 생활이 팍팍해졌고 소위 78년 3대 부정사건이라 부르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다. 6월에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이 터졌다. 8월에는 경북도교육위원회가 교사자격을 부정발급해 파문을 일으켰고 같은 달에 민주공화당 성낙현 의원이 가난한 여고생을 추행한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다음달에는 중동붐이 서서히 꺼지던김에 증권거래세가 신설되는 등의 정책으로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고(건설주 파동) 그 결과로 율산그룹과 원그룹이 순식간에 부도처리 되어버리고 말았다.
2 결과
사실 민주공화당이 모든 선거구에 한 명 씩 만 공천하였기에 77개 선거구 가운데 한 곳이라도 당선자가 없으면 50%가 무너지는 상황어차피 유신정우회가 있는데, 민주공화당이 50% 안 돼도 상관없잖아?이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결과는 박정희 정권에게 충격적이게도 야당의 득표율이 여당을 앞섰다.[1]
당선인수는 공화당 68석, 신민당 61석, 민주통일당 3석, 무소속 22석. 민주공화당이 득표는 더 적었으나 유리한 선거제도에 따라 1당이 되었고, 신민당은 더 많이 득표했으나 의석이 조금 뒤져 제1야당이 되었다. 원인은 극심한 민생고였다. 2차 오일 쇼크로 도시민의 삶이 어려워지고 농촌에서는 노풍벼 파동으로 삶이 어려워진데다가, 부가가치세에 대한 반감이 결정타가 되었다.
비록 집권 여당이 유신정우회 의석덕택에 과반은 확보했다지만 득표율에서 야당에게 뒤졌다는건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2] 따라서 박정희 정권은 1979년에 초강경한 입장을 내세우게 된다. 이에맞서 제1야당 신민당은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 온건한 입장이었던 이철승계가 퇴조하고 김영삼계가 당권을 잡으면서 박정희 정권과 각을 세우게 되었다.[3] 결국 이는 YH 사건과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유신공화국의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6년 뒤 제5공화국에서도 이 선거와 판박이인 선거가 나타났는데 바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