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체제

55年体制

1 개요

일본에서 1955년 자민당 창당을 기점으로 거대여당인 자유민주당과 제1야당인 일본 사회당의 양대 정당구조가 형성된 것을 가리키는 말. 참고로 55년 동안 이어졌다는게 아니라, 1955년이 기점이라 55년 체제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55년 체제로 인해 우파 자민당 우위 - 좌파 사회당 제1야당의 1.5당 체제가 형성되었으므로, 사실상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내의 파벌정치가 집권내각을 좌지우지하는 구조가 되었다. 참고로 이 체제는 1955년으로부터 38년만인 1993년 자민당이 과반에 실패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총리로 취임한 사건을 계기로 붕괴한다. 물론 사회당만 망하고 이후 자민당은 다시 부활한게 함정

2 배경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무산정당이 합법화되면서 일본 사회당이나 일본 공산당 등이 성립하는 한편, 보수정당도 난립하게 되었다. 일본 사회당은 1951년에 대일강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 안보에 대한 태도가 다른 좌파우파가 나뉘게 되면서 확장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들은 선거에 별도 출마해(!) 각각의 의석을 확보했다.(중선거구제였기에 따로 출마했어도 상당한 의석수를 확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사회당 좌우파는 보수정권의 역코스나 개헌 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호헌과 반안보라는 깃발 아래 1955년에 다시 합치었다. 이렇게 세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던 통일된 사회당 세력은 일본의 최대 정당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보수 정계의 두 축이었던 일본 자유당일본 민주당, 그리고 협동당 등 군소정당들이 통합하여 개헌·보수·안보수호를 내건 거대여당인 자유민주당이 출범한다. 이렇게 일본 자민당과 호헌·혁신·안보철폐를 내세운 일본 사회당의 양대 정당이 출범하면서, 일명 55년 체제가 탄생했다. 참고로 1955년에 성립한 체제이므로 이후 55년 체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자유민주당이 과반에 실패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총리로 취임하기 전까지, 즉 38년간 자유민주당은 줄곧 집권여당으로서 군림했다. 물론, 당내 파벌 다툼이 다른 나라의 정당간 갈등 못지 않게 상당했고, 이 때문에 내각에서는 각료를 적당히 모든 파벌에게 다 배분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탈당 도미노로 다시 과반이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들면, 역시 파벌이 정치를 하는 시스템인 중화인민공화국공산당이 있는데, 중국 공산당은 국민들에게 직접투표를 하지 않는 실질적 1당 독재체제라는 점에서 그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55년 체제는 민주주의 체제로 야당의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했다는 점과 파벌 위주로 운영하는 정치체제였지만 그래도 부정선거가 난립한 1당 독재정치체제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서구권으로 치자면 일종의 연립내각(파벌) 장기집권인 셈. 문젠 그 장기집권이 너무 길었고 앞으로도 길거 같다는게 문제

3 역사

1955년, 당내에서 좌우로 나뉘어 대립하던 일본 사회당[1] 내부 혼란이 종식되고 동시에 우파 정당이었던 자유당과 일본 민주당이 합당을 하여 자유민주당이 출범하였다. 이후 국회 의석수가 자민당 2 : 사회당 1에 가까우면서 자민당은 개헌선을 넘지 못하고 사회당 또한 정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체제가 지속되었다. 이른바 1.5 정당 체제. 1958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역대 최다의석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자민당이 287석(이후에 297석)을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1959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사회당이 부진하면서 내분이 벌어져 일부 계파가 민사당으로 분당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민당의 득표율은 줄어들고 사회당은 지지기반을 확대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지만, 이후 벌어진 안보투쟁침묵하는 다수에게 묻혔고, 되려 대도시 지역에서 공산당공명당에게 세를 넘겨주면서 득표율이 20%대 초반으로 떨어졌고, 특히 1968년 참의원 선거와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잇따라 참패를 거두며 대도시에서 우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다만 이후에는 야권연대로 혁신지자체 열풍이 불면서 사회당이 지방정부 상당수를 확보하고 후보자수 줄이기로 1971년 참의원 선거와 1972년 중의원 선거에서 상당히 세를 회복하긴 했지만 선거에서 자민당의 우위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 자민당이 오일쇼크와 록히드 사건 등의 여파로 중의원-참의원에서 과반확보에 실패하는 일이 벌어졌고 일부 계파가 신자유클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당은 의석을 크게 늘리지는 못했고,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예상보다 의석을 늘리지 못하면서 당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1977년 참의원-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며 오히려 의석이 줄었고, 1979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다시 보수파가 지방선거에서 우위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1980년 중/참의원 동시선거에서 사회당이 공명/민사당과 본격적으로 정권교체를 위해 제휴를 취하고 자민당내의 극단적인 계파 갈등(각복전쟁)이 벌어져서 자민당의 지지율이 급속히 하락하는 바람에 정권이 교체될 뻔 했으나...오히라 수상 사망의 여파로 오히려 자민당이 승리하면서 자민당 독주체제가 계속 이어졌다.

80년대 후반부터 자민당 체제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말기인 1987년 통일지방선거와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승리하면서 정권교체가 될 듯 했으나,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을 확보하며 불발되었다.

그러나 기어코 1993년 자유민주당에서 다수의 당원들이 탈당을 하고 신생당,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 등을 만들었다. 그해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 사회당, 신생당, 일본신당, 공명당, 민사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등의 8개 군소정당이 연립한 이른바 연립정권이 결성되면서 자민당 독주체제는 종말하였다. 그러나, 이 연립정권은 단 10개월만에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2번의 내각을 끝으로 내부의 분열로 인해 붕괴하였다.

결국, 자민당이 또 다시 사회당을 끌어들여서(!)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을 출범시켰다. 자유민주당이 잠시 일본 사회당(현 일본 사회민주당)과도 연정을 하더니 결국은 자민당이 공명당과의 연정을 하여 과반을 유지하는 체제로 정착되었다. 자민당은 1996년부터 수상을 배출했으나 단독 과반에는 미치지 못하여 줄곧 이합집산에 의한 연립정권형태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인 1994년 중선거구제 폐지를 골자로한 선거제도 변혁과 지지기반(노조)의 이탈[2]사회당도 몰락하였기 때문에 자민-사회당의 1.5 정당 체제였던 55년 체제는 끝났다.

한편, 신생당-일본신당-민사당-공명당-사회민주연합 등이 등이 뭉쳐 신진당이 결성되었으나 1996년 중의원 선거에서의 부진으로 신진당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결국 1997년에 신진당이 해산되면서 일본 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등극하였다. 이후 민주당이 자민당에 맞서는 체제가 되었다. 2009년에는 일본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가 수상이 되면서 자민당 정권은 다시 붕괴하여 양당제를 예고했고, 55년 체제의 잔재와 일당제적 정치는 일단 종식되었다.

그러나 자민당-공명당 연합이 2012년 12월 총선에서 다시 압승했고, 연립여당에서 아베 내각이 출범하고 민나노당이나 일본 유신회 등도 부상하여 일본의 정치 지형은 이전보다 더욱 우경화되었다. 이는 민주당이 지역기반이 희박했을 뿐더러 도호쿠 대지진 등으로 지지를 크게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민당의 일당체제가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일본의 정치가 그렇듯이, 파벌이 좌지우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얼마든지 파벌이 갈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4 부작용 - 정경관 유착

단순한 정치 분야를 넘어 이 55년 체제라는 용어는, 일본의 재계-정계의 긴밀한 협력 속에 구축된 일본식 사회구조를 말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주요 기업들은 '경단련'(일본판 전경련[3])을 통해서 자민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특혜를 보장았으며[4], 자민당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지역유권자들에게 각종 선심사업과 특혜를 제공하면서 지지를 확보하고, 이를 고시출신 고위관료 집단이 행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재·관의 철의 삼각동맹이 형성되었다.[5]

엘리트 관료들은 중도에 자민당 정치인으로 변신해서 자기 원소속 부처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명 ~~족 의원이 되었다. (예를 들어 우정성 출신 우정족 의원.) 정치권으로 가지 않은 관료들은 퇴임 이후 산하 공공기관, 공기업 낙하산을 보장받았다. 이 삼각체제가 형성되면서 서 정치권에 확실한 보호막을 가지게 된 정부의 각 부처들과 산하 공기업, 공공기관들은 아무런 견제도 받지않고 끝없이 비대해져서 국가예산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이는 지금도 사실상 현재 진행형이며, 파벌을 형성하게 되어 고질적인 부정부패를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심각한 퇴보로 보는 경우가 많다.

5 해외 유사 사례(?)

실은 민주국가 하에서 특정 정당의 장기집권 사례가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1932년에서 1976년까지 무려 44년 동안이나 장기집권하면서 스웨덴을 대표적인 강소국 및 복지국가로 개조시켰다. 게다가 자민당의 집권기간 동안 다수의 총리가 나왔던 일본의 사례와는 달리 당시 스웨덴에선 총리가 3명밖에 안나와 정말 이들 각각의 집권기간이 빵빵하다. 특히 타게 엘란데르란 총리는 민주국가에서 나온 총리 중 가장 오랜 집권기간을 자랑해 무려 23년 동안이나 총리직에 있었다. 다만 부정부패 같은 문제점은 없었다. 같은 장기집권인데 먼가 달라보이는 이유는 멀까

그외에도 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이탈리아)이 1945년에서 1981년까지 경제성장에 힘입어 장기집권에 성공해 총 36년간 총리를 배출했고, 사회당과의 연합으로[6] 연립정권에 참여한 기간까지 포함한다면 1994년까지로 올라간다. 그러나 이후 부패스캔들로 정당 자체는 처절하게 몰락했는데, 이때 주류파벌이 악명높은 베를루스코니파로 이적해서 이후 같이 부패를 저질렀다는건 함정.(...) 참고로 1992년 이후 기민당 포함 이탈리아 우익정당 정치인 전체 중 총리가 된 이는 베를루스코니 밖에 없다.

6 기타

광복 이후, 혼란스러웠던 한국의 정치가 오랜 독재 정치 시기 끝에 6월 항쟁을 거쳐 안정기에 도달한 시기가 1987년이라는 점에서, 이 55년 체제에 빗대 지금의 한국 정치를 1987년 체제, 87년 체제라고도 한다. 하지만 55년 체제와 그리 맞아떨어지는 말도 아니고 일단 2번의 수평적 무혈 정권교체가 이뤄졌으니, 이미 제6공화국이라는 명칭이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 분위기.
  1. 같은 당명을 쓰는 주제에 좌우파가 선거엔 따로 출마했을 정도로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2. 지지기반 대부분이 1996년 창당한 민주당으로 이적했다.
  3. 전경련 자체가 국내 재벌들이 일본의 경단련을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다.
  4. 가장 대표적인게 대규모 토목공사 발주. 일본은 선진국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건설업 비중이 큰 나라로 경제적 효용성이 떨어지는 토목공사를 경기 활성화란 명분하에 계속 시행하면서 국민의 세금이 여기에 빨려들어가는 토건국가이다. 이때문에 여타 선진국과 비교하면 정작 국민의 삶과 밀접한 교육,복지,환경 분야에는 투자가 소홀하며, 이런 것이 잃어버린 10년이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5. 관련성이 깊었던 기업들끼리는 계열(케이레츠)이라는 일종의 기업 연합을 형성한다.
  6. 이쪽은 이탈리아 공산당이 일본 사회당급의 포지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