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내각총리대신 | ||||
78대 | → | 79대 | → | 80대 |
미야자와 기이치 | → | 호소카와 모리히로 | → | 하타 쓰토무 |
1 소개
총리 시절.
2014년 도쿄 도지사 후보 당시 완벽하게 변희봉으로 전직.
細川護煕 세천호희
1938년 1월 14일 ~
재임 기간 1993년 8월 9일 ~ 1994년 4월 28일
제 79대 일본 총리이자, 55년 체제 이후 최초의 비 자민당 출신 총리.
2 배경
구마모토 번의 영주였던 히고 호소카와 가문(肥後細川家)의 제18대 당주. 외할아버지는 그 고노에 후미마로이다. 호소카와 가문은 1633년부터 12대 238년을 구마모토 번의 영주로 지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후작에 봉하여졌다. 근세 호소카와 가는 호소카와 유사이부터 시작된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실이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가라샤이므로 미츠히데의 후손이기도 하다. 다만 도중에 타다오키의 서자의 후손을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직계로 따지면 직접 이어지지는 않는다. 꽤나 유서 깊은 가문이라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아버지 호소카와 모리사다는 "호소카와 가문에는 옛날에는 더 좋은 보물들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거의 불탔습니다. 아, 태평양 전쟁이 아니라 오닌의 난 때."라는 조크를 하기도 했다. 이 조크는 후에 모리히로가 한 것으로 와전된다.
가문은 빵빵하지만 무려 55세에 참의원 재선(1971~83), 중의원 초선이라는 짧은 경력으로 총리가 되었다. (8년 간 구마모토 현 지사(83~91)로 있기도 했다.) 죠치대학 법학과에 아사히 신문 기자였으니 이 쪽 방면에서도 주류는 아니었던 셈이다. 호소카와 가문과 할아버지의 후광 등이 짧은 정치 경력을 충분히 메꾸고도 남았다는 평이 많다.
3 정치 활동
1992년 일본신당 대표로, 93년 8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을 이루지 못하자 야7당 연립정권을 만들어 총리가 되었다. 38년만의 비(非) 자민당 총리로 최초엔 지지율이 74%에 달았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라든가, 한국 경주시를 방문하여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드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94년 5월에는 니시신주쿠 게이오플라자호텔에서 암살미수 사건을 겪었다. 범인은 송혼숙(松魂熟)이라는 일본 우익단체의 회원인 52살의 노조에 마사카츠. 흉기는 38구경 리볼버 권총이었으며, "호소카와 전 총리가 국회에서 태평양전쟁은 침략행위라고 한 발언과, 예산안 통과 전 사퇴한 것에 불만을 품어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여러 모로 일본 극우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994년 4월 28일 정치자금 문제(사가와규빈이라는 기업으로부터 1억 엔을 빌렸다)로 돌연 사퇴했다. 하지만 이미 연립정권의 붕괴는 1월부터 그가 염원하던 정치개혁 법안이 사회당의 비토로 저지되면서 시작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후임인 하타 쓰토무 총리는 두 달 만에 사임하며 반자민당 연립은 1년도 못가 붕괴되고 만다.
"잎이 흩어짐은 때를 아는 것, 이 세상 꽃은 꽃대로 사람도 사람대로"라며 1998년 환갑과 함께 중의원을 사퇴했다. 이 말은 먼 선조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실인 가라샤의 사세구를 인용한 말이다. 가라샤의 원 사세구는 "질 때를 알았을 때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요, 사람도 사람이리라(散りぬべき 時知りてこそ 世の中の 花も花なれ 人も人なれ)."
4 깜짝 출마
2007년에 도예가로 전직하며 일선 정치에서는 물러난 것으로 보였지만, 2014년 1월 돌연 도쿄도(都)지사 보궐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1월 14일 출마선언장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자민당) 전 총리가 전격 참석, 그 자리에서 탈원전을 추구하는 호소카와 후보를 지지하기로 선언하였다.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고이즈미 극장 부활 살다살다 고이즈미를 응원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전직 총리가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파격인데다가, 천하의 고이즈미까지 가세했다. 그래서 호소카와 전 총리가 도쿄도지사에 당선될 경우 아베 정권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되었다 야 이 아베노무 새끼야 너 지금 꼼짝말고 있어 내 지금 정계로 진출해서 니놈들의 틀려먹은 사고방식을 다 뜯어고쳐주겠어! 극우노무 새끼들!
하지만(...)
2월 9일 도지사선거 결과, 아베 신조 총리와 자민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마스조에 요이치 前 후생노동상의 당선이 확실시되면서 낙선하고 말았다. 그것도 더블 스코어였다! 관련 아사히신문 보도. 마스조에 후보는 211만2천979표, 호소카와와 우쓰노미야는 각각 95만6천63표, 98만2천595표를 획득했다.
전날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한 20년만의 폭설로 인한 낮은 투표율도 선거에 영향을 미쳤지만, 마스조에가 내건 복지 공약과 2020 도쿄 올림픽에 대한 어젠다가 호소카와 전 총리의 탈원전 공약보다 도쿄도민들에게 더 큰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비여권 내 표의 분산도 커다란 패인이었다. 탈원전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한 우쓰노미야 겐지[1] 후보와 단일화를 실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일본 민주당의 지원 권유를 거부했던 것도 역시 패인이었다.
만약 두 후보의 단일화가 성사되었다면 단순 계산으로 211만 vs 193만으로 상당히 근접한 수준이 된다. 거기다가 사표도 줄었을 것이라 그야말로 해볼만한 선거였을 것이다. 이런 양자구도가 되면 주민들에게 먹히는 공약과 민주당의 지원을 통한 바닥민심 확보 등으로 승리도 충분히 가능했다는 이야기. 결국 그의 패배로 아베 총리의 아베노믹스를 비롯한 경제, 정치, 외교 정책들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선거 이후 근황은, 역시 탈원전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 선거에서 당선 된 마스조에 요이치가 정치자금 문제로 사퇴하여 2016년 7월에 다시 보궐선거가 치뤄지게 되었다(...) [2] 다만 고이즈미 전 총리와 호소카와 전 총리는 이번 선거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
5 이모저모
2010년에는 "한일 병합은 강제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2004년에는 경남 산청을 방문해 도자기를 직접 만들었다. 첫 번째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2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산청군에 방문한다고.
<내일은 없습니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총리시절의 일기인 『나이쇼로쿠(内訟録)-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대신 일기』펴내기도 했다. 논어의 말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책망하는 이가 없다란 의미.
과거 김영삼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YS는 잘맞춰라는 게임의 대전액션게임 파트에서 당시 일본 국가원수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한항공 광고 '일본에게 일본을 묻다' 캠페인에 내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