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 75

(MG ZT-T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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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01년식 로버 75 커너서(Connoisseur) SE. 피닉스 컨소시엄 산하에서 만들어진 생산분으로 영국 유니언 잭 벳지가 추가되었다.)

Rover 75 / Roewe 750

1 개요

1999년 6월부터 2005년 4월까지 로버 그룹MG로버 그룹이, 그리고 2007년부터 SAIC가 생산한 중형 고급차이다. 로버 그룹이 진행한 마지막 대형 프로젝트이자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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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00년식 로버 75 세단. 트림은 중저가 트림인 클래식(Classic) SE나 클럽(Club)으로 추정.)

BMW가 로버 그룹을 인수했을 당시, 로버 그룹에서는 3세대 로버 200 시리즈와 2세대 로버 400, MG F 등의 소형차 라인업의 개발이 진행중이였다. 이들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가는 과정이였기 때문에, 로버 그룹은 당시 기준으로 신차였던 로버 600과 상당히 노후화된 기함 로버 800의 자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리처드 울리(Richard Woolley)가 이전보다 고전 로버차들의 디자인 요소[1]들을 반영한 3개 디자인 제안인 "플래그십(Flagship. 800 세단 후속)"과 "에릭(Eric. 800 쿠페 후속)", "코어(Core. 600 후속)"의 3개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예산 부족을 이유로 600 후속 프로젝트만이 개발이 계속되었고, 이름도 "아이시즈(Isis)"로 개명해 600과 800을 동시에 대신할 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또한 로버 600과 800은 서로 다른 급이였음에도 크키는 비슷해, 생김새 외에는 800에 V6 엔진이 제공되는 정도의 차이가 그나마 "기함급" 차와 "중형 세단"을 구분하는 정도였다. 또한 로버에서는 K-시리즈 엔진을 기반으로 만든 KV6[2]이라는 명칭의 V6 엔진을 개발하던 참이라, V6 엔진이 로버 아이시스의 주요 엔진이 될 필요가 있었다.

1994년 말에 BMW의 경영진들에게 로버 아이시스 프로젝트가 공개되었을 때, BMW는 프로젝트의 진행과 투자에 대해 호의적이였고, 이는 곧 RD1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진행되었다. 디자인 과정 초기에는 BMW의 베른트 피셰츠리더 회장이 로버를 독립적인 자회사로 취급하는 정책을 펼친 덕분에 자율적으로 디자인에 임할 수 있어서 로버 아이시스의 디자인 요소들이 양산차에 거의 그대로 들어갔고, RD1 프로젝트의 초기 클레이 모형이 공개되었을 때는 BMW와 로버 양측이 좋은 반응을 보였다. 반면, 인테리어 디자인은 1963년에 나온 로버 P6에서 영감을 얻은 "고전적인" 인테리어 테마와 훨씬 급진적인 현대적인 디자인과 전통적 제료, 그리고 전통적 구성을 융합한 "진보적인" 인테리어 테마를 두고 고심하다가 "진보적인" 테마를 선택했다.

"급진적 진보와 전통의 조화"라는 컨셉으로써, 최종 선택된 인테리어 테마는 나무를 단순한 "장식"으로서가 아닌 자동차 대시보드의 주 재료로 쓰고자했으며, 당시 로버 그룹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수석으로 있었던 원 토머스(Wyn Thomas)는 모든 라인업에 기본사양으로 진품 호두나무(Burr Walnut) 우드그레인[3]을 사용하는 방법도 고려해보았고, 메탈릭 마감과 무광처리 등을 고려했지만 나무의 풍부함과 온기 등의 느낌이 부족하다고 평가해 고광택 래커(lacquer)로 마감하는 기존의 방안을 그대로 유지했다. 비록 "급진적인" 디자인 테마를 골랐지만 기본적으로는 안팎으로 복고풍 디자인을 꾀하고 있었고, 프로젝트 참가자들을 비록한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로버 P6이 있었던 1960년대를 지향했다기보다는 1930년대 스타일에 더 가까웠다는 평가도 나왔다.[4]

설계 부문이 진행되기 시작했을 때는, 프로젝트명이 '아이시스'에서 "R40"으로 바뀌었고, R40 프로젝트는 브리티시 레일랜드 시절처럼 파업으로 온 회사가 골치를 썩히거나,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로 갓 민영화된 오스틴 로버 그룹 말기와 로버 그룹 시절처럼 지나친 원가절감으로 인해 프로젝트가 줄줄히 취소되던 시절이 아니라 BMW에서 투자를 아끼지 않고 해 주던 시절이였기에 설계 부분에도 크게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고려된 건, 1963년에 출시된 BMC ADO17에서 추구한 것과 똑같은 "최고로 견고한" 골격 구조였는데, 충돌사고 등의 '피동적인' 안전성뿐만이 아니라 차체 뒤틀림을 억제함으로써 훨씬 정확한 핸들링을 얻고자하는 등의 '능동적인' 안전성도 동시에 노린 조치였다.. 또한 변속기와 크로스멤버가 들어갈 자리를 넉넉히 잡기 위해서 견고한 차체는 필수적이였고, 이를 위해서 구형 BMW 5시리즈(E34)의 뒷바퀴굴림 플랫폼을 앞바퀴굴림으로 변환해서 사용했다. 앞바퀴에는 맥퍼슨 스트럿 구조의 서스펜션이 적용되었고 뒷바퀴에는 "Z-액슬" 구조의 서스펜션이 적용되었는데 앞바퀴의 경우는 혼다와의 기술제휴 관계의 영향을 받았고, 뒷바퀴의 경우는 기존에 로버 그룹의 자율경영을 정책으로 삼았던 BMW가 로버의 실적 부진을 이유로 로버 그룹에 크게 영향력을 끼치게 되면서 기존의 계획이 변경된 경우이다. 이 때문에 이미 다른 서스펜션들을 테스트하던 로버 그룹과 BMW 간의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서스펜션 세팅은 BMW와 로버간의 정체성(아이덴티티) 구분과도 연관이 있었다. BMW에서는 "Ultimate Driving Machines", "Sheer Driving Pleasure"이라는 카피 그대로 스포티함과 운전 감각을 강조하고 있었고, 로버에서는 'Relax. It's a Rover'라는 카피로 대표되는 부드러운 주행감, 그리고 영국풍 전통을 아이덴티티로 내세웠던 것을 반영하여 "일반적인 스포츠 세단처럼 빠르게 뛰되 동시에 훨씬 세련되고 편안하게 뛰는 차"로서 세팅되어 BMW의 스포티한 주행감과 같이 로버차가 기존에 강조하던 "편안하고 부드러움"을 겸비하려고 했다.

한편, BMW에서 이전과 달리 로버 그룹에 직접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개발과정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이때 R40 프로젝트의 개발과정과 여러 시험들이 면밀히 조사될 필요가 있었다. 가령 봉함선이 보인다는 이유로 BMW가 로버 그룹에게 기존의 썬루프를 재설계하라고 지시를 내린 바가 있었고, 미국독일 뉘르부르크링(Nurburgring)과 같은 여러 등지에서 여러 시험차들의 주행 시험이 이루어지는 등, 출시에 앞서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1998년이 되자, 로버 그룹에서는 R40 프로젝트를 1999년 봄에 열릴 제 69회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 알아챈 사람은 드믈었지만, BMW에서는 이 공개 계획에 대해서도 1998년 10월에 열릴 영국 버밍엄(Birmingham)의 영국 모터쇼(British Motor Show)에서 공개하자는 식으로 압력을 넣고 있었다. 공개 시기를 앞당긴다는 것은 공개될 시기와 고객들에게 판매가 이루어질 시기 간의 공백이 크게 남는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실제로 로버 75로 출시된 때가 1999년 6월임을 감안하자면 공개부터 출시까지 대략 9달간의 공백기가 남는 셈이라 상업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일부 언론에서는 R40 프로젝트가 심각한 품질 문제로 공개 및 시판이 지연중이라고 보도하고 있었고, 1997년 제네바에서 공개한 신형 미니(2000년 출시)의 너무 이른 공개로 온 회사가 같은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 10월, 영국 버밍엄에서 R40의 데뷔가 강행되었다.

당시 영국 모터쇼에서 공개된 차들 중 가장 주목받는 차들은 R40, 즉 로버 75를 포함해서 총 2대였다. 로버 75와 더불어 공개된 다른 하나는 포드 산하에서 재규어(Jaguar)가 개발한 재규어 S-타입이였고 둘 다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되살려내고자 한 노력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로버 75 역시 "로버의 마지막 기회가 될 세단(Rover's last chance saloon)", "로버가 만든 최고의 차(best car Rover ever made)"로 언급되면서 상당한 주목을 껴안을 수가 있었다. 당시 첫 선에서, 로버 75는 전체적으로 진보적인 베이스에다가 복고풍 요소들을 잘 배합했다는 후한 평가를 받았고, 엔진 라인업도 1.8리터 K시리즈 외에 2리터와 2.5리터짜리 KV6 엔진이 추가되어 주목을 받았다. 또한 수작업으로 생산하다시피하던 800과는 달리, 75는 옥스포드(Oxford)의 카울리에 위치한 전시간 생산라인(full-time production power unit)에서 생산될 예정이였고 판매 목표도 매년 10만대로 잡을 정도로 목표 역시 꽤 야심찼다.

로버 75가 온갖 언론과 방문객들의 상당한 호흥을 이끌어내고 있을 때, 피셰츠리더는 당시 유럽 통화대비 강세를 보이던 영국 파운드화의 환율과, 롱브릿지 공장 보수작업에 대해 꾸물거리던 영국 정부의 태도에 대해 속을 썩히고 있었고, 오후 4시에 예정되었던 기자회견 발표가 진행되기 전에 피셰츠리더가 로버 그룹의 회장으로 임명한 Walter Hasselkus와 심각한 분위기로 토론을 하느라 시간이 30분 지연되었다. 그나마도 피셰츠리더 본인이 직접 나선 기자회견의 내용이 신차에 대한 내용은 일절 없이 영국 정부의 태도에 대한 불평, 로버 그룹의 긴급한 위기상황과 같은 어두운 주제로 진행되는 바람에 모터쇼에서 쌓아 두었던 여론들을 다 날려 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핬다.

피셰츠리더 회장은 자기 발언을 포함한 이 모든 상황에 좌절감을 맛보아야만 했고, BMW와 로버 모두가 온갖 공을 들이고 들였던 신차의 공개는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로버 그룹의 이미지도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몇달 지나지 않은 1999년 2월 5일, 피셰츠리더와 라이츨레가 BMW에서 사실상 쫓겨나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제조 부문의 최고책임자였던 요하임 밀베르크가 로버 그룹으로 인한 난장판을 수습하게 된다.

3 출시 및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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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01년식 로버 75 투어러. MG로버 출범 당시 처음 출시된 신차였으며, 사진 속 차량은 클래식 SE나 클럽 트림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99년 6월, 로버 75의 판매가 시작되었다. 비록 1998년 10월의 데뷔 상황이 안 좋았고 품질에 대한 BMW의 걱정으로 출시가 4개월 연기되기는 했으나 "자동차"로서 75가 받은 평가는 꽤 좋았다. "최고 수준의 승차감과 최고 수준의 핸들링을 잘 조합했다"는 평가가 있었는가하면, "오토카" 지의 리뷰에서는 승차감과 크게 개선된 방음처리 등을 칭찬하면서 "등급 내에서 가장 잘 다듬어진 차":이며, 로버 그룹이 "부자연스럽거나 과장된듯한 감정 없이 뚜렷하고 명백한 정체성을 만들고자 애썼다"는 평가를 내린 바가 있다. 하지만 "최송합니다, 로버. 당신의 새 75는 만족스럽지 못하군요"라는 헤드라인을 걸었던 "탑기어" 지처럼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는 곳이 있는 등, "제품"으로서의 평가는 "차"로서의 평가에 못 미쳤다.

우선은 "한때" 로버 P6로버 SD1, 로버 800처럼 진보적인 디자인의 차를 내놓았었고 회사 자체도 전성기 때 랜드로버와 안전 자전거, 가스터빈차 등의 온갖 혁신들을 내놓았던 경력이 있었던 로버에서 "복고풍" 디자인을 시도했다는 점이 있었다. 때문에 로버가 시대를 역행해 "어르신들 차", "구식"으로 완전히 돌아가버렸다는 비판이 생겨났고, 기존의 중장년층 고객들의 주목을 받긴 했으나 젊은 부유층들을 비롯한 새 고객들을 유치하는 데는 실패했다. 또한 "등급"의 문제도 있었는데, 개발비 부족과 BMW 차량과의 직접적인 경쟁을 회피하고자 했던 시도 때문에 소형 고급차와 중형 고급차 사이에 배치된 "애매한" 크기는 BMW 3시리즈와 비교하기엔 너무 컸고, BMW 5시리즈와 비교하기에는 좀 작은데다가 실내도 좁은 편이였다.

또한 설계 부분에 있어서도 비판이 있었는데, "오토카" 지에서는 "핸들링이 나쁜 건 아니나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다"고 평가했고, "중장년층 고객들에게 핸들링은 중요한 성능이 아니고, 차부터가 전체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중점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면서 젊은 고객층들의 주목을 끌기에 부족한 구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초점 없는 내용으로 제작된 광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당시 75의 광고를 만들었던 업체의 전 회장은 "광고에서 말하려는 바가 무었인지 알 수 없었고, "영국 최고와 독일 최고의 만남"을 주제로 광고를 만들었어야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결국 로버 75는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했고, 로버 그룹의 쌓여가는 적자와 실적에 지쳐버린 BMW가 2000년 4월에 로버 그룹을 해체/매각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2000년 5월에는, 존 타워스 전 로버그룹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 4인이 운영하던 사모펀드 기업인 피닉스 벤처 홀딩이 로버 그룹을 인수했다. MG로버 그룹으로 개편된 뒤, 그런 점에서 로버 75에게 주어진 첫 변화는 생산 라인이 카울리에서 롱브릿지로 이동했다는 것인데, 이 공장의 CAB2 라인이 항후 BMW가 신형 미니를 생산할 예정지였기 때문이였다. 다행히도 BMW가 정한 기한까지 큰 문제없이 완결이 났으며, 덤으로 공장 기술진들이 이곳에서 생산될 차들의 품질관리를 위해 캐슬 브롬위치(Castle Bromwich)의 재규어 S타입이 생산되는 공장 라인에서 생산 방식을 배워온 참이라 롱브릿지 라인에서 생산된 차들의 품질은 훨씬 괜찮은 축에 속했다. 또한 BMW 산하 때부터 개발하된 웨건인 "투어러(Tourer)"와 리무진 "반덴 플라(Vanden Plas)"를 출시했고, MG 브랜드의 라인업 보충을 위한 스포티 라인업인 MG ZTMG ZT-T가 개발되어 판매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MG ZT는 포드에서 가져온 4.6리터 V8 "모듈러(Modular)" 엔진을 장착한 V8 버전이 제공되었고, 이후 MG XPower SV 슈퍼카와 로버 75의 V8 버전에 같은 엔진을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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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식 로버 75 CDTi 커너서. 사진 속 차량은 로버 브랜드로 생산된 마지막 차량이기도 하다.)

2004년에는 양쪽 버전의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져 훨씬 현대적인 디자인을 꾀했고, 뒷좌석 공간을 넗힌 뒤 차량 세팅을 손보는 한편, "프로젝트 드라이브(Project Drive)"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던 원가절감 프로젝트의 영향으로 원목 우드그레인이 사라지는 등의 비용절감을 하기도 했다. 또한 로버 75가 "그나마"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호흥을 받고 있다는 점[5]을 감안해 기존의 클럽 트림을 대신하는 "컨템포러리(Contemporary)" 트림과 로버 75의 V8 버전을 출시했으며, 중국 상해기차(SAIC)와의 기술제휴 협상과 로버 75 페이스리프트의 예고편으로서 쿠페 버전을 컨셉트카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과의 기술제휴 협상도 실패했고, 2005년 4월에 회사 전체가 파산하면서 로버 75 역시 211,175대의 생산대수를 뒤로 하고 단종되었다. 한편, MG로버와의 협상을 통해 75와 K-시리즈 엔진의 지적 재산권을 얻은 상해기차는 로버 75를 재생산할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한편, 로버 75의 플랫폼은 로버 25로버 45를 동시에 대체하는 준중형차인 "RDX60" 프로젝트에서도 사용할 계획이였으나 MG로버의 파산과 해체로 인해 현실화되지 못했다.

3.1 MG ZT와 Z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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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형 MG ZT 260 V8. 기존의 앞바퀴굴림 설계를 도로 뒷바퀴굴림으로 전환했으며, 기존의 4기통 및 6기통 버전과의 차이가 매우 미미하다.)

4 로위 750(Roewe 750. 2007~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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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페이스리프트 이전 연식의 로위 750E. 로버 75 V8의 범퍼와 알로이휠 디자인이 사용되었다.)

MG로버가 사라지기 바로 직전이였던 2005년 3월에​ 협상이 결렬되자, 중국으로 돌아온 상해기차에서는 MG로버한테서 받아온 지적 재산권을 기반으로 로버 75와 25,K시리즈 엔진을 다시 생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개량 작업을 위해서 영국 업체인 리카르도(Ricardo)와 같이 손을 잡았으며, 2005년 5월에는 "Ricardo2010"이라는 이름의 디비전을 만들어 SAC528이라는 프로젝트 이름 하에 MG로버와 Powertrain Ltd.[6]에서 건너온 150명의 기술진들이 고용되어 로버 75를 부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06년 여름이 되었을 때, 상해기차와 리카르도는 75를 다시 생산할 준비를 거의 다 마쳤고, 8년이 다 된 차를 재생산하기 위해 손봐야했던 온갖 사양들은 빠른 시간안에 작업이 다이루어졌다.

그러나 랜드로버 브랜드의 소유주였던 포드에서 랜드로버 브랜드의 이미지 훼손을 차단하고자 BMW로부터 로버 브랜드의 상표권을 사들이는 동시에, 상해기차가 "로버 75"라는 이름 그대로 차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으면서 제동이 걸렸다.[7] 때문에 상해기차는 로버 브랜드를 대신할 대용 브랜드를 구상했고, 독일어로 "사자"를 뜻하는 "Loewe"에서 유래된 "로위(Roewe)" 브랜드를 런칭했다.[8]

로위 750은 말 그대로 예전의 75를 손을 본 차로, 크고 고급스러운 차를 선호하는 중국인들의 취향에 맞추어 휠베이스를 103mm 늘려 뒷좌석 공간을 키우고 그릴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고급스럽게 손질하였으며, 로버 75 시절부터 쓰던1.8리터 K-시리즈 엔진과 2.5리터 KV6 엔진이 기존의 K-시리즈 엔진과 KV6 엔진의 신뢰성 문제를 야기했던 헤드 가스켓 결함을 해결해 각각 '18K4G'와 '25K4F'라는 이름으로 제공되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이 더 있다면, 로위 750에는 MG로버 말기에 나온 75처럼 일반 750과 750E라는 이름의 라인업을 통해 서로 다른 디자인의 그릴이 제공되었으며, 난징을 인수한 후인 2007년 4월에 MG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점이 있다. 로위 버전과 동시출시된 MG 7 역시 일반형과 고급형(MG7 L)이 서로 다른 그릴을 제공하고 있으며, 1.8리터 버전은 MG ZT의 디자인을 차용했고 2.5리터 버전은 로위 750 L의 경우처럼 V8 버전에서 쓰던 디자인을 차용했다. 최근에는 페이스리프트 버전이 출시되었으며 75/750의 플랫폼은 로위 650/MG 6의 플랫폼으로도 활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중순에 단종되었다. 이후 로위 750의 자리는 상해기차에서 조립생산하는 뷰익 라크로스를 베이스로 만든 로위 950[9]이 이어받는다.
  1. 최종 결과물이 된 로버 75의 경우, 1959~1973년 사이에 만들어진 고급차였던 로버 P5의 디자인 요소들이 많이 녹아들어가 있다.
  2. 이 엔진은 기아자동차와의 기술제휴를 통해서, 기아 카니발기아 크레도스 2에 장착된 바가 있다. "V6 Quad Cam 24 Valve"라는 로고가 붙어 있다면, 그 차는 로버 KV6 엔진이 장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3. 실제 양산차의 경우, 최고급형 "커너서" 트림 중 1999~2003년식에만 진품 우드그레인이 사용되었다.
  4. BMW 인수 초기에, 볼프강 라이츨레(Wolfgang Reitzle) BMW 사장이 "로버 그룹의 정체성을 재성립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존 타워스(John Towers) 회장을 비롯한 로버 측 대표들은 "스핏파이어"를 제안했지만 얼마 안가 폐기되었다고 한다.
  5. 여담으로 MG로버가 파산한 후에 남아 있던 재고차들 중, 로버 75의 수가 꽤 적었다는 제보가 있다.
  6. 로버 그룹 산하에 있던 엔진 설계업체로, 로버 K-시리즈 엔진과 KV6 엔진이 이 회사의 대표적인 제품이다.
  7. 그러한 뒷배경을 들어보자면 랜드로버가 한때 로버와 같은 업체였던 것도 있었고, 로버 브랜드의 가치 역시 1970년대부터 크게 퇴보해 더 이상 "고급" 브랜드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8. 독일어로 "Loewr"는 'loh-vuh' 라고 읽히며, 영어로 읽으면 주로 roo-eevey 나 roo-ee라고 읽히는 단어이다. 이를 중국어로 읽으면 'long wei'라고 읽히는데, 발음대로 직역하자면 '영광의 힘'이라는 의미도 된다.
  9. 어짜피 상해기차가 GM의 뷰익 브랜드 차들을 정식 생산하는 업체로 등록되었기에 이게 가능했다. 어찌보면 한국의 알페온과도 접접이 있는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