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경종이 세제였던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음모론으로 진위와는 별개로 조선을 반백년 동안 뒤집어 흔들어 놓은 초대형 음모론이다.
2 배경
독살설의 배경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 시작된다.
원래 몸이 약했던 경종은 1724년 8월 2일부터 위독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병상에 누워있다가 8월 20일에는 게장과 생감을 받아 먹었는데, 이게 당시 의학에서는 매우 안좋게 보는 음식이었다. 그 말이 맞았는지 다음날(21일) 부터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기 시작해서 8월 24일에는 의식불명 상황까지 와버렸다.(출처:경종실록 경종 4년 8월 21일~24일)
이런 상황에서 경종에게 인삼을 여러번 처방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24일 오전즘에는 경종이 의식이 혼미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에 의관 이공윤은 "삼다(蔘茶:인삼차)를 써서는 안된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할 것 같으면 설사는 금방 그치게 할 수 있다."라면서 경종에게 계지마황탕을 처방했지만 저녁즘에는(酉刻) 상태가 더 심각해진다. 이에 연잉군과 도제조였던 우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신하들이 경종을 찾아가고 이런 상황에서 연잉군이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런 조치에 이공윤은 반대했지만 연잉군의 주장에 밀렸고 그렇게 이에 인삼차를 2번 복용했는데 임금의 안시(眼視)가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하여졌다. 그렇게 되자 연잉군도 안도하며 그러나 몇시간 만에(2경(二更))즘에 병세는 다시 악화되고, 이때즘 이광좌와 연잉군은 종묘에서 기도를 올리려고 했는데 그 기도가 시작도 하기전에 경종은 사망한다.
3 진위여부
3.1 독살이 아니다
죽기 직전 독살 시도가 있었다고도 한다. 경종은 말엽에 병환으로 기운을 잃고 잘 먹지 못했는데 게장과 생감을 올리자 웬일로 맛있다고 잘 먹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고 그 후 다시 건강 상태가 악화된다.
- 경종은 연잉군의 처방 후 잠시 기운을 되찾는 듯 했으나[1] 얼마 안가 다시 건강 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승하했기 때문. 그 때문에
그러나 독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왜냐면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몸에 안 좋기는 하고[2], 당대에도 결코 좋은 음식궁합은 아닌 것으로 보았지만, 죽을 정도는 절대 아니고 어의가 처방한 약과 연잉군이 올린 인삼차가 상극이기는 했지만, 어의가 믿을 놈이 못 되었다. 툭하면 이 약 처방했다가 다른 약 처방했다가 하는 어의를 믿을 수 있겠는가.[3]
하지만 영조 본인도 어느 정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비전문가이면서 어의의 처방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한 점이다. 심지어 이러면서 한 말이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기운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라고. 이 말을 하고 얼마 안 지나 새벽에 바로 경종은 사망했다. 그렇지만 독살설을 제기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4]
더군다나 정치적 입장에서도 연잉군으로서는 경종이 죽어봤자 득 될 일이 없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기반 세력이 탄탄하다면 모를까, 소론이 득세하고 있는 와중에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준 형을 스스로 죽여가면서까지 왕위에 올라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사방이 정적들로 둘러싸인 와중에 어의의 의견을 비난하면서까지 인삼차를 처방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연잉군이 경종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세제가 처방한 약을 먹고서도 임금이 끝내 절명했다면, 바로 이와 같이 세제에 의한 독살설이 떠도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자신을 옹호해줄 세력이 미미한 상황이라면 자칫 이를 빌미로 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바득바득 인삼차를 권한 것은 그만큼 경종이 살아주길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 한마디로 연잉군 입장에서는 독살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저지르면서까지 정적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왕노릇을 할 바에야 경종이 나름대로 오래 살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보위를 이어받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본인 입장에서도 편했던 것이다.
3.2 독살이 맞다
다만 독살설에 신빙성이 있느냐 없느냐와는 별개로, 위의 주장을 근거로 독살설을 부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지지 기반이 탄탄하기는커녕 정적들이 바글대는 위태로운 정국에서 저런 도박을 할 수 없다는 위의 주장에 따르면 당장 계유정난은 일어날 수도 없었으며, 세조는 존재할 수 없었다.[5][6]
연잉군이었을 당시 영조는 정말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던 게 맞다. 걸핏하면 역적 모의에 자기 이름이 걸려 들었는데, 당시 임금이 경종이어서 망정이지 다른 시대였으면 애저녁에 몇 번이고 박살이 나서 뼈도 못 추려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경종이 본인 생각이야 어쨌든 간에 죽을 당시까지 영조를 보호해준 덕에 죽는 일까지는 면했지만 당시 연잉군으로서는 참으로 뭣같은 상황이었고,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가시 방석 중의 가시 방석 위였으며, 경종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을 경우 주변 소론 대신들의 부추김에 따라 마음을 바꿨을 가능성 또한 상당하였다. 그야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
그런 상황에서, 무슨 게임처럼 세이브 로드를 하면서 미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영조가 인간으로서 느꼈을 감정을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은 결코 그렇게까지 계산적이지 않으며, 저렇게까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다 노부나가를 시해한 아케치 미쓰히데나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 또한 좋은 참고가 된다. 사건 터진 뒤에 보기에는 "쟤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 일들이지만, 그러한 일들은 역사 속에서 이미 몇 차례고 일어난 바 있다.
그리고 당시 영조의 상황은 그저 몸 사리며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기 보다는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인데 이판사판으로 한 번 걸어 봐도 충분한 상황이었다[7] 동기가 충분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꽤나 충분했다. 게다가 경종을 독살함으로써[8] 영조에게 갈 이득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 최소한 영조가 즉위를 하지 못했을 때에나 가능한 주장이지, 영조가 즉위를 한 마당에 가능한 주장은 아니다. 무슨 말이냐면, 위의 주장은 다름 아닌 영조 스스로가 즉위함으로써 모조리 다 개박살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이 '개박살을 내버렸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경종의 죽음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노론과 더불어 조정을 장악하였다. 전세가 하루아침에 역전된 것이다. 하다 못해 경종이 생각을 바꿔서 말년의 선조처럼 후계 문제를 두고, 폐세제까지는 못 한다 쳐도 밀풍군[* 이게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후에 이인좌의 난을 통해서 드러난다. 경종이 좀 더 오래 살면서 소론의 부추김을 받거나 경종 본인이 신임옥사 때처럼 빡이 확 돌거나 아니면 연잉군 쪽에서 뭔가 또 꼬투리가 잡히는 식으로 일이 틀어진다면 밀풍군 또한 아주 불가능한 패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말 그대로 죽을 위기에 놓인 채 가시밭길을 걷고 있던 영조로서는 이 또한 아주 무시하진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이든 양자든 뭐라도 끼고 다른 말을 하기라도 했더라면 광해군이 그렇게 당했듯이 영조 또한 꽤나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냥 멀리 갈 것도 없이 경종 본인이 바로 이런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다 당했다.[9] 그런데 그런 말을 할 새도 없이 경종이 덜컥 골로 가버렸다. 사실 영조로서는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데 경종이 죽음으로써 정말 영조에게 이익이 없다고 볼 수 있는지는 좀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렇게 즉위하고 얼마 안 가 영조는 그 정적인 소론, 특히 준론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하였다. 물론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불미스러운 사건들도 더러 있긴 했지만 이괄의 난 때처럼 파천을 한다든가 하는 일도 없이 모두 무난하게 극복해 냈고, 괘서 사건이라든가 과거 시험장에서 빅엿 좀 먹은 일이라든가 같은 건 확실히 영조의 기분을 잡쳐버리는 데에는 충분했을지언정 영조의 조정까지 잡쳐버리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영조의 조정은 그냥저냥 10년쯤 해먹은 정도가 아니라 조선 왕조 500년 중 무려 10분의 1인 52년을 해먹으며 가장 오래도록 장수하였다. 정통성 문제로 어느 정도 시달린 건 사실이지만, 그게 그리 심각한 문제였다고 보기에는 영조 정권이 상당히 안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니 영조를 까는 사람들도 영조 시대 왕권이 약했다는 둥 정국이 불안했다는 둥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하여간 못해도 비교적 적당한 타이밍에 죽어줬다고 보는 게 옳다. 그뿐 아니라 영조는 조선 후기를 잘 이끌어 나간 명군 중의 한 명으로 역사에 그 이름이 남았고, 반면에 그 적이었던 소론은, 물론 상당 부분은 소론 스스로가 자초한 측면이 강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정말 씨가 말라버렸다. 말 그대로 개박살이 나버린 것. 이후 순조때까지 소론계 대신은 있기야 하지만 소론이라는 명칭은 무색하게 그냥 소론이란 지붕 아래 있는 개인뿐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정조 독살설만큼이나 당시에는 퍼져 있었던 이야기로 경종이 죽은지 31년이 지난 후에 영조가 친림하던 과거 시험장에서 영조를 찬탈자에 독살자라고 마구 욕한 내용을 써서 냈다가[10] 친국을 받던 죄인 중 하나인 신치운이 "신은 갑진년(영조 즉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이외다"라고 영조의 면전에서 대놓고 디스를 했다는 기사가 실록에도 나오며[11], 조선왕조 5백년에서는 궁녀 몇명이 어린 사도세자(최수종 분)에게 이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고 이 궁녀들이 친국들 당하는 것을 사도세자가 훔쳐보다가 사건의 진상을 아는 것으로 처리했다.[12]
그의 죽음과 경종이 죽기 직전에 벌어진 행동은 비주류로 몰린 소론과 남인 세력 등에게 큰 논란이 되었고 영조는 즉위 내내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비난으로 끝난게 아니라 이인좌 등이 선왕의 원수를 갚자는 복수설치의 기치를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터지면서 소론, 남인의 음모론 신봉이 단순 뒷담이 아니라 국가를 흔들 수 있는 내전으로 번질수도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무신년의 배반자인 전 전라감사 정사효 등이 역모를 꾸몄고 영조 24년 무신난의 잔당이 역변을 일으키려는 사건이 영조 31년에는 윤지의 나주괘서사건이 있었으며 심정연,신치운 등의 왕의 친림시험장 테러사건이 터진다.
덕분에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에 거의 발악을 하면서 집착했고 노론 4대신은 물론 김용택을 비롯한 1급 반역자들까지 날 위해 한 것이다!란 명분으로 죄다 신원시켜주었다. 그리고 영조 31년(1751)에 이르면 천의소감의 저술을 지시하여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대대적으로 알리는데 그 중 '내가 게장보낸게 아니라고 이놈들아!'라고 공개적으로 독살설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른다. 즉위 후 30년이 넘도록 게장 독살설에 시달렸던 것이다. 어쨌거나 노론이 지지한 임금, 영조를 흔들려면 독살설을 신봉하여 영조를 찬탈자로 낙인찍어야 했던 소론 준론과 남인들은 계속해서 반역했고 결국 수백명의 소론 준론과 남인들이 처형되는 피바다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소론 완론과 온건한 남인들도 역당으로 낙인찍혀서 입지가 굉장히 좁아졌고 영조 31년 이후에는 "지난 날의 형벌이 너무 너그러웠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논리로 조태구, 유봉휘 등이 역률로 추죄되고 이광좌도 직첩을 빼앗기는 등 공식 역당으로 낙인찍혀서 개발살나고 만다. 당연하지만 다른 당파들이 역적이 되어 내쫓긴 조정은 노론이 차지했고 즉위 초에 정호, 민진원, 유척기 등 의리에 불타오르는 노론 명문가들에게 지친 영조는 홍봉한이라는 한미한 관료를 대대적으로 밀어주게 되니 노론, 그 중에서도 일부 유력 가문 중심의 척신정치를 낳게 된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세간에는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죽는다는 속설이 퍼지게 되었다.
몸이 안 좋은 것 자체는 사실이었던 듯하다. 자식도 없었던 점이며 마흔도 못되서 죽은 점이며... 심지어 경종 2년 6월 24일에는 삼수의 옥 문제를 논의하다가 신하들 앞에서 오줌을 싸기도 했다. 민망해진 대신들이 물러나길 청했으나 경종은 괘념치말고 남으라고 했다. 그런데 사헌부 지평인 이거원이 "군신간에도 예의가 있는데 말도 안하고 소피를 싸다니 예의에 어긋납니다"라고 왕을 비판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대중이 여기는 경종의 모습은 마른 체형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만 체형이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26세 때인 1714년 기사에는 경종의 모습을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라고 했고 재위 2년 기사에는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으로 묘사돼 있다. 비만한 만큼 더위를 많이 느끼고 땀이 많이 나는 질환을 자주 앓았다.
4 결과
독살설이 사실인지는 거짓인지와는 무관하게 영조는 이 독살설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한다. 일단 경종이 위중한 상태에서 세제 연잉군이 이공윤등 어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를 들게 했고 거기에 이전에도 경종을 상대로한 독살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신임옥사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세제와 가까운 사람들이였다는 정황 증거 때문에 노론을 중심으로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한지 얼마뒤인 1724년 12월 8일 소론이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국문할 때 김일경은 이상한 행보를 보여주는데, 자신을 선왕의 충신 그러니까 경종의 충신이라고 자처하고, 영조에게는 자신을 지칭할때 矣身(의신)이라는 존대말 대신 吾(오)라는 경어를 쓰는 등 흡사 육신전에서 세조를 부정했던 사육신과 비슷한 행동을 보여준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김일경이 연잉군을 지지하던 노론을 숙청한 인물이었고, 국문으로 고문받던 상황이니 어느정도 설명이 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일경을 숙청한 뒤 한달이 겨우 지난 1월 16일, 군사(軍士) 이천해(李天海)가 경종의 릉으로 가던 영조의 행차 도중에 영조의 독살설을 운운하며 고함를 지르는 사건을 사건이 벌어진다. 다음날 이천해를 국문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천해는 16일에 "국가가 무상(無狀)하다(질서가 없다)"를 시작으로 "환국(換局)을 어찌 하겠는가?"라는 한달전 소론 강경파 숙청을 언급한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천해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죄인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을 독살범 영조를 고발하는 고(발)자라고 자칭한다. 영조는 이 독살을 암시하는 "대궐 안을 왕래했다."는 이천해의 발언에 극도로 분노해서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史官)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며 사관들을 압박했고 결국 이 이천해의 독살발언은 이날 기사에는 쓰이지 못하고 나중에 신치운의 발언에 인용해서 밝혀진다.
그렇게 이천해와 관련자 방만규는 죽고
특이하게도 독살설의 중심은 연잉군이 올렸던 인삼과 부자가 아니라 (일단은) 영조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던 게장과 생감으로 논점이 이동한다. 비록 당시 의학에서 게장과 생감을 같이 먹는 것은 매우 않좋게 보았고 경종도 게장과 생감을 먹고 병세가 악화된 건 사실이지만 일단 연잉군이 게장과 생감을 올린 적은 없다.
작성중
- ↑ 콧등이 따스해지고 눈빛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 ↑ 게는 식중독을 일으키기 쉬운데 여기에 감의 탄닌 성분으로 인해 소화불량이 일어나기 쉽다.
- ↑ 당시 어의였던 이공윤은 강한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명성을 얻은 의원이었다. 당시 연잉군이 인삼과 부자를 올릴려고 하자 그러면 전하께서 기를 능히 돌리지 못하실 것이다 라고 반대했는데 기를 능히 돌리지 못한다는 건 사실상 그랬다간 죽으실 거다 라고 말한거나 다름없다.
- ↑ 이 때문인지 노론에 의해 기록된 경종수정실록에는 어의 이공윤이 인삼차를 먹이면 안된다고 반대한 내용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문제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인데다 경종실록의 내용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만 더욱 증폭시키고 말았다.
- ↑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는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가장 약소한 파벌을 이끌며 수세에 몰려 있었고, 주변에는 변변한 인물이 없어서 시정잡배들까지도 부려야 했을 지경이었다. 이런 세조가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본인이 잘나서라기 보다는 김종서를 비롯한 고명대신들과 조정이 바로 위의 주장을 근거로 마음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 ↑ 한데 공교롭게도 세조 또한 왕자 시절에 형 문종이 가족이라고 잘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세조는...
- ↑ 하다 못해 수양대군도 역모 관련해서 이름이 오른 적은 없었고 거사 전까지는 최대한 몸 사리며 지냈는데 연잉군은 주변의 잘못에 더해 본인도 처신을 좀 이상하게 해서 잊을만하면 이름이 튀어 나왔으며, 경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정말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상태였다.
- ↑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독살설이 맞다는 가정 하의 이야기.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 ↑ 숙종이 죽기 전에 후계 문제를 흔들어버린 바람에 경종은 이들로부터 말 그대로 임금 취급도 받지를 못 하였으며, 그 적수는 물론 연잉군이었다.
- ↑ 조선시대엔 이게 사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자기는 물론 친지들까지 죄다 찢어죽여달라고 애걸하는 수준이다.
- ↑ 이전에도 영조는 친국을 하면서 자신의 출생 루머나 독살설 운운하는 내용은 전부 기록하지 말도록 사관에게 엄포를 놓았다. 다만 이때 신치운의 진술만큼은 기록되었는데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실신 직전에 이르렀고, 때문에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을 깜빡 잊었기 때문이었다.
- ↑ 동궁에서 자란 사도세자의 궁에는 경종시절부터 그들을 모셔온 밀려난 상궁, 내시들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 시각을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