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 ||||
17대 인종 왕해 | ← | 18대 의종 왕현 | → | 19대 명종 왕호 |
묘호 | 의종(毅宗) | |
시호 | 강과장효대왕 (剛果莊孝大王) | |
능묘 | 희릉(禧陵) | |
성 | 왕(王) | |
휘 | 철(徹)(어릴 적 이름)/현(晛) | |
자 | 일승(日升) | |
절일 | 하청절(河淸節) | |
배우자 | 장경왕후(莊敬王后), 장선왕후(莊宣王后) | |
아버지 | 고려 인종 | |
어머니 | 공예왕후(恭睿王后) | |
생몰년도 | 음력 | 1127년 4월 11일 ~ 1173년 10월 1일 |
양력 | 1127년 5월 23일 ~ 1173년 11월 7일 (만 46세 5개월) | |
재위기간 | 음력 | 1146년 2월 28일 ~ 1170년 9월 기묘일 |
양력 | 1146년 4월 10일 ~ 1170년 10월 13일(만 24년 6개월) |
1 소개
고려가 본격적으로 막장화된 계기를 만든 암군 중의 암군.[1]
고려의 제18대 왕. 인종의 장남이다. 의종의 의는 사나울 의.
2 생애
2.1 태자 시절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하여 부모가 걱정했다. 의종의 모후 공예왕후 임씨는 둘째 아들 대령후 왕경을 총애하여 인종에게 태자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인종은 반대했으나, 태자를 바꾸려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대에 강직한 신하로 이름이 높았던 정습명(후손이 정몽주)의 만류로 그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도 정습명은 의종이 풍류를 즐기는 것을 간언하다가 의종의 미움을 사고 결국 1151년, 향년 57세로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혹은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의종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고 죽었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젊은 시절부터 놀자판의 기질이 있다고 고려사에 기록은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사람 자체만 보면 대단한 엄친아로 암군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백하팔인급의 인물은 아니다. 의종은 힘이 세서 강궁을 잘 다루었고 방 안에 촛불을 켜 놓고 활시위를 당겨 촛불을 꺼버리는 묘기를 선보인 기록도 남아있다. 또한 기마술과 격구에도 두루 능했던 무인형 군주였으며 수박희라는 일종의 격투기를 좋아하여 무인들의 수박희 경기를 자주 즐겨 감상했다. 그리고 풍류를 즐긴 군주답게 음악과 시문 등 예술적 감각도 뛰어났다. 비슷한 예술가 타입 군주였던 공민왕이 무예에는 그다지 소질을 보이지 못했고 오히려 공민왕은 노국공주(!)에게 말타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는 말을 탈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듯 의종은 무예에도 뛰어났다. 연산군 순한 맛
2.2 실패한 개혁가?
즉위 초 의종은 인종 시대의 잦은 내란으로 인해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는데 권력을 휘두르는 문벌 귀족들의 견제를 위해 환관과 측근 세력을 양성했으며 특히 무신들을 중용하여 이 때 무신정변의 주역들로 유명한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같은 이들이 발탁되었다. 재위 직후 불교·음양설·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 전형적인 중국형(?) 반관료 암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1154년 창건한 중흥사, 1158년 연백주(백주)에 창건한 중흥궁은 고려 왕실을 중흥(重興)하겠다는 의종의 의지가 드러난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 역시 왕실의 재력을 바탕으로 추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시도는 실세 권력을 잡고 있던 김부식 일파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세력가였던 문벌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종전대로 문신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무신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문신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인종 시대에 잔치 중 용춤을 추던 정중부의 수염을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이 태워먹었다는 일화가 유명한데, 이 장면도 이러한 당시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또한 무신 정변 당일에는 종5품의 젊은 문신이었던 기거주 한뢰가 종3품이 되는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일이 있었을 정도. 종3품이면 고려시대 무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니, 현대로 치자면 대략 중앙부서 과장 정도가 육군 중장의 싸대기를 날렸다고 생각하면 비슷한 분위기가 된다. 이는 그당시 무인들이 문인에 비해 얼마나 홀대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낸다. 흔히 이 사건이 무신정변의 원인이라고들 하는데, 이 사건과 정변은 같은 날에 일어났으므로 원인이 될 수 없다. 정변 자체는 이 일과 상관없이 사전에 왕이 보현원에 가면 결행하기로 모의된 것으로 이 일이 없었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다만 정변 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한뢰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은 이 일이 원인으로 보인다.
결국 말년에는 문신과 환관들과 어울려 항락과 사치를 즐겨 백성들이 왕을 원망하기도 했다. 머리카락 잘라 팔아서 공사판에서 일하는 남편과 동료들의 점심을 마련한 여인 이야기의 배경이 바로 의종 시대다. 이 이야기 또한 당시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건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의종 21년 3월조에 나와 있는 이야기로 중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실린 이야기다. 잦은 연회로 국고가 탕진되어 인종 때까지 그럭저럭 유지되던 고려의 태평성대가 무너지게 되었다.
2.3 비참한 최후
결국 이러던 중 마침내 1170년 음력 8월, 의종은 보현원에 행차했는데, 이때 그 동안 문신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은 무인 이고, 이의방, 정중부 등은 문신들을 싸그리 몰살시켰다. 이 때 제거된 문신의 수는 대략 50여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무신들이 문신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왕 의종은 뭘 하고 있었느냐면, 그 살육의 현장에서 정작 의종 본인은 태연하게 평소처럼 술에 취해서 악사들의 음악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고 한다.
그리고 무신들은 개경에 입성한다. 무신들은 입성 후 바로 의종을 폐위시키진 않는다. 그러나 의종이 총애하던 환관[2] 정변 시작 3일 후 왕광취를 비롯한 환관세력들이 반 무신정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고, 이 배후에 의종이 있다 생각해 의종을 폐위시키고 동생 명종을 옹립하여 고려의 정국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무신정권의 시작으로 무신 집권기는 1270년 마지막 실권자 임유무가 살해되기까지 정확히 100년간 지속되었다.
쫓겨난 의종은 거제도에 유폐되었다. 1173년 무인 정권에 반발하며 의종의 복위를 꾀한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으나 이의민에게 진압되고 이 때문에 계림(경주)에 옮겨져 유폐되었다. 원래 의종은 거제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경주 지역을 거점으로 벌어져서 동경의 난이라고 불린 김보당의 난 동안 경주로 옮겨왔다. 즉 직접 가담. 결국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자 동경은 경주로 격하되었고, 의종은 그대로 유폐되었다. 곧 찾아온 이의민에게 글자 그대로 끔살당했다. 향년 47세. 얼마나 끔찍하게 죽었는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전왕을 끌어내서 곤원사의 북쪽 못가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가 담요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중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아마 기록으로만 미뤄 보면 고려사 아니 한국사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공민왕과 더불어 가장 참혹하게 살해당한 임금 중 한 명일듯 싶다. 줄여 말하면 이의민의 필살 등뼈꺾기에 온몸의 뼈가 부러져 죽었고페이탈리티 그 시체를 담요로 감싸고 가마솥 2개를 합쳐서 연못 속으로 시체를 버렸다는 소리. 후덜덜. 중국에서도 뼈가 꺾여 끔살당한 군주가 있었는데 춘추시대 때의 노나라 환공으로 제나라 양공의 지시로 팽생에 의해 뼈가 꺾여 끔살당했다.
그나마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수습해 관을 짜서 물가에 묻어 주었고, 동생인 명종이 왕위에 오른후 그를 희릉(禧陵)에 안장하였다. 의종에게는 1남 3녀가 있었다. 외아들이자 태자였던 효령태자 왕홍(왕기라고도 함)은 유배되었는데 의종 시해 후에 어떻게 됐는지 기록이 없다. 정황상 피살된 듯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천민 출신인 이의민을 무관으로 발탁하여 출세시킨 것은 바로 의종 자신이었다.[3]
3 평가
흔히 이렇듯 항락에만 몰두하다가 자신도 비참한 운명을 맞았고 무신 정변으로 고려의 혼란을 초래한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다가 험한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 비운의 군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문종 이후의 왕들이 괜찮은 주변여건에다 내부적으로 안정기라서 대체로 명군 소리 까지 듣는 것에 비해서, 의종은 무신 정권의 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당시 상황을 기록하는 문신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은 측면도 있다.
사실 비운의 군주 소리를 듣기엔 25년이란 재위 기간은 결코 짧은 것도 아니다. 고려 왕조의 평균 재위기간이 유독 짧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의종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훨씬 오래 살았고 또 오래 재위했다. 되려 이런 자기 정치 길게 한 임금이 정변에 그렇게 무방비 했다니 그렇기에 그 긴 재위 기간은 분명히 재평가받을 여지는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무신 집권과 고려의 국정 혼란을 초래한 책임은 피할 수 없는 인물로 특히 무신 집권기 이후 몽골의 침입 때까지 고려가 개판으로 돌아가는데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버렸다는 점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규철 씨가 배역을 맡았는데 특유의 멘붕 연기로 강한 포스를 남겼다. 폐위될 때 반드시 다시 돌아와 오늘의 역적들을 도륙낼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몇년 후 김보당의 난 때 경주 호족들과 야합하여 김보당과 개경을 협공하고자 하였으나 김보당은 붙잡혀 참수되고 이의민에게 경주를 장악당하며, 이의민이 거제현으로 다시 데려가겠다고 하자 한때 자신의 은덕으로 천민에서 벗어난 그에게 이별주를 청하며 부월무를 보여달라고 한다. 이 때 이의민이 추는 부월무가 압권. 그 후에 계곡을 바라보며 "떠날 때가 됐구나"[4]라고 말하며, 그 직후 역사대로 이의방의 밀명을 받은 이의민에게 등뼈가 으스러져 죽는다.
그리고 의종은 훗날 환생하여 자신을 죽인 이의민의 개가 된다 카더라.
- KBS 1TV <역사저널 그날> 2015년 3월 29일 67회에 <드라마 속 역사인물 시리즈 제 4탄 천민 이의민 왕을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이의민을 다뤘다. 정중부에게 오늘 일을 잊으라며 술을 따라준 장면이 나왔는데, 정중부는 의종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술을 쏟아버렸다.
- ↑ 물론 고려 역사에서 의종말고도 암군들이 있긴 하지만 무신정권의 발단을 제공하여 고려를 막장국가로 전락시킨건 의종이다.
- ↑ 조선시대엔 환관과 내시가 똑같은 의미로 거세한 자들을 가리키나, 고려시대엔 환관은 거세한 자, 내시는 신하 중 왕의 총애를 받는 몇몇 자들을 의미한다.
- ↑ 고려사절요에는 금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사신이 김돈중의 관상을 봐 주었다는 말을 듣고 의종이 자신의 관상도 봐 달라고 하면서 수명을 물었는데, 사신은 "왕께서는 수명이 셀 수 없을만큼 길고 기셔서, 조정의 노소 신료들 다 죽고 난 뒤에야 임천지환(任川之患, 물가에 다다라서 생기는 고민)이 생길 듯 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되어버렸다.
- ↑ 어쩌면 죽음을 예견한 것일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