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 ||||
2대 혜종 왕무 | ← | 3대 정종 왕요 | → | 4대 광종 왕소 |
묘호 | 정종(定宗) | |
시호 |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 (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 | |
능묘 | 안릉(安陵) | |
성 | 왕(王) | |
휘 | 요(堯) | |
자 | 천의(天義) | |
배우자 | 문공왕후(文恭王后), 문성왕후(文成王后)[1] | |
아버지 | 고려 태조 왕건(王建) | |
어머니 |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 |
생몰년도 | 음력 | 923년 ~ 949년 3월 13일 |
양력 | 923년 ~ 949년 4월 13일(27세) | |
재위기간 | 음력 | 945년 9월 15일 ~ 949년 3월 13일 |
양력 | 945년 10월 23일 ~ 949년 4월 13일(4년 6개월) | |
사망지 | 고려 개경 제석원(帝釋院)[2] |
1 개요
고려의 제3대 왕이다.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왕요(王堯). 왕의 이름이므로 '요임금 요(堯)' 자는 고려가 망할 때까지 피휘에 따라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글자 대신 삼국유사 고조선 기사에서의 예와 같이 이 '높을 고(高)' 자를 사용했다. 당대 강력한 호족이었던 충주의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탄탄한 권력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처가가 후백제의 왕실이었고, 동복누이인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가서 지지기반은 형인 혜종을 압도할 만큼 출중했다. 이복형인 혜종이 요절하자 종실세력의 거두였던 왕식렴 세력의 지지를 얻어 즉위하였다.[3]
2 왕권 강화 추진
후에 즉위하는 광종의 동복형으로, 다소 유약한 면이 있었던 혜종[4]과 달리 야심이 많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는 혜종이 외가쪽인 나주 오씨 가문이 다른 호족들에 비해 한미한 편인지라 지지기반이 비교적 미약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늘 불안에 떨어야 했던 사실에 반해,[5] 정종은 이미 배후에 든든한 지지 세력을 갖추고 즉위했던 만큼 자신감과 야망이 컸던 점에서 기인한 것 같다. 정종은 혜종이 즉위하던 시절에 왕규에게 역적이라고 찍히고도 무사할 정도로 그 기반과 세력이 강성하였다.[6]
정종은 즉위한 이래로 죽을 때까지 정적들을 억누르고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를 위한 개혁에 힘썼으나 어째서인지 그 결과는 대개 안습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2.1 피의 숙청
정종은 즉위 후 자신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왕규 일파와의 대립 끝에 공신인 박술희를 죽인 죄와 반역을 꾀한 죄 등을 물어서 제거하는 등 위협적인 정적들을 처리하는데에 주력하였다. 비록 왕규가 혜종대에 반역을 꾀하고 박술희를 모함하여 죽게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왕규와 박술희 모두 선왕인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혜종을 모시던 충신들이었기 때문이다.[7][8]
정적 처리 과정에서 왕규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할 때 지나친 인명을 살상하여 개경 세력들과의 대립이 심해졌고, 무엇보다 개경 백성들의 불만을 사서 민심도 나빠졌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죽은 자만 300명이었다고 한다.
2.2 서경 천도 시도
정종은 이미 민심이 떠나간 개경에서는 더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여겼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떠나기 위해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하였다. 천도를 계획할 당시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고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핑계로 댔다. 또한 서경이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꼽힌다는 점도 서경 천도 계획의 이유가 되었는데, 이는 왕건도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대업을 만 대에 전할 땅이니..." 라고 이야기할 만큼 서경이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으로, 이러한 풍수지리적 이점을 근거로 서경천도를 주장한다. 그러나 서경에 새 궁궐을 짓는 공사 과정에서 서경의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게 되자 서경 백성들조차도 왕에게 불만을 품게 된다. 결국 서경 천도 계획은 민심을 얻기는 커녕 왕에 대한 반대 세력과 불만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9]
2.3 광군 편성
정종은 한편으로는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30만명의 광군을 조직하여 호족들로 하여금 이를 지휘하도록 하게 하였으나 이 역시 정종의 뜻대로 되지 못하고 점차 흐지부지해졌다. 개국초의 고려는 30만이나 되는 군대를 제대로 운용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냥 예비군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3 요절과 음모론
이런저런 개혁이 연이어서 실패하자 정종은 마음이 약해졌는지 즉위 과정에서 인명을 지나치게 살상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하였다. 말년에는 사찰에 곡식을 베풀고 직접 걸어가서 개국사에 불사리를 봉안하기도 하였는데 아마 자신의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위였을 것으로 추즉된다.[10]
그러던 중, 여진의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내려친 천둥 소리에 놀라 쓰러진 후, 병을 얻더니 급기야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든든한 후원자였던 왕식렴이 죽자 상심이 커져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재위 4년만인 949년에 27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운명을 맞았다. 그 최후마저도 안습하기가 그지없어서 정종이 승하한 직후에 서경 천도 계획이 취소되자 부역에 시달린 서경의 백성들이 기뻐하며 환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죽음에 대해서는 후에 광종이 되는 친동생 왕소와의 대립 끝에 시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외가는 같았으나 후원 세력은 정종이 왕식렴 등 서경세력, 광종이 처가인[11] 황주 황보씨와 연계되어 갈등을 빚었다고 보는 설이다. 실제 후에 광종은 태조의 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아우인 왕욱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인 성종을 사위로 삼기도 했다.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이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훈요 10조 3번 조항에 따라 동생 왕소가 광종으로 대를 이었다. 경춘원군은 이후 전대 혜종의 아들 흥화군(興化君)과 함께 광종에 의해 숙청당한다. 여담으로 경춘원군은 후백제왕 견훤의 외손녀 문성왕후의 아들로, 그가 왕위를 이었다면 대대로 견훤의 피가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무산됐다. 정종이 27세에 요절했으니 경춘원군의 나이는 잘해봐야 10세 전후일테니...설사 경춘원군이 왕위를 물려받았어도 고려 헌종처럼 숙부에게 눌려지내거나 심할 경우 폐위되버렸을지도...물른 왕위에 오른다는 가정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알려진 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박술희를 살해한 것도 그이고 반란의 주동자로 알려졌던 왕규를 살해한 뒤 그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웠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왕규와 박술희는 태조로부터 혜종을 보필하도록 당부까지 받은 처지였던 이들이라 서로 불화를 일으킬 사이도 아니었고,[12]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주는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이다. 박술희는 후삼국 통일에 군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친위 무장의 성격이 강했기에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고, 광주의 호족출신인 왕규는 왕씨 성을 하사받고 대중외교의 중책을 맡을 정도로 왕건이 총애했던 인물이지만 기본적으로 문신이었기에 군사적 기반이 없었다. 때문에 왕규가 굳이 박술희와 혜종에게 위해를 끼칠 일이 없었다는 설도 있다.[13] 진실은 저너머에. 또한 이전부터 혜종과는 왕위를 두고 대립하던 관계였던지라 혜종이 사실 병으로 승하한 것이 아니라 시해당했고 그 배후에 정종이 있다는 설까지 생겨나는 등 정종을 둘러싼 많은 음모설이 존재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결국 혜종 세력(박술희, 왕규)을 물리치며 왕이 되었으나 혜종과 똑같이 동생 때문에 환장하다가 허망하게 요절하고 말았다.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광종 왕소가 위협이 되었다. 제거하자니 기반이 만만치 않아 그도 쉽지 않았던 것. 게다가 왕규까지 반란을 일으키고 앉았으니. 결국 정종이 각종 반란을 때려잡고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박살내려고 온갖 짓을 다했으나, 허망하게 요절하면서 광종이 그 덕을 봤다.정종의 후견인이던 왕식렴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으니 광종은 참 덕을 잘본듯 하다.
그래서인지 광종에게 비판적이었던 최승로는 피의 숙청을 한 정종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아래에는 정종의 대한 최승로의 평가다.
정종께서는 왕자였을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께서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께서 이를 먼저 알아차리시고 은밀히 서도(西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14]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하셨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태조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간 왕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정종께서는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시어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고려 왕씨가 계속 왕위를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은 광종이 아니라 정종의 공이라고 평하고 있다. 비록 요절하고 무리한 서경 천도가 있기는 했지만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사극에서
KBS 제국의 아침에서는 최재성이 맡아 출연했고, MBC 빛나거나 미치거나 에서는 류승수가 이 인물을 맡았다. SBS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 정종 왕요를 맡은 배우는 홍종현.
보통 사극에서 왕소를 주인공으로 삼는 바람에 본이 아니게 찌질이나 폭군 혹은 악역을 맞는다. 최근에 왕규의 난이 새롭게 해석 되면서 더욱 악역 같지만, 당대 최승로의 말 처럼 반대파를 숙청해 고려의 안정적으로 만든 공이 있다. 그리고 30만 대군 육성 등 여러 모로 능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왕식렴에게 밀렸다고 하는데 실상 그랬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최승로는 그가 미신을 믿어 무리수를 썼다고 비판했다.
- ↑ 부인 모두 견훤의 딸인 국대부인과 박영규의 딸이다.
- ↑ 고려 정궁 후원에 있었던 사찰. 919년에 창건되었다.
- ↑ 왕실 종친인데다 어렸을 때 부터 왕무를 보았을 왕실렴이 왕무를 지지 하지 않은 것은 그 만큼 왕무의 세력이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해 흥화궁군이라고 왕무의 장자가 엄연히 있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왕요의 세력이 그 만큼 막강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 ↑ 유약하다기 보다는 쓸 수 있는 카드가 별로 없었다. 애당초 친위대 세력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던 혜종과 달리 어머니, 장인, 누이 그 뿐만 아니라 서경 왕식렴 등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왕요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초반의 무리하게 왕소와 왕요 제거를 하려 했다가 왕무의 반대의 부딪친다. 그 뿐만 아니라 박술희는 왕규와 대립하는 등 혜종의 세력이 하나로 뭉쳐도 될까 말까 인데 분열을 거듭했다.
- ↑ 자신을 암살하려 한 자객을 제압하고는 취조하지 않았다. 이는 취조해서 밝혀질 사실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 이다.
- ↑ 이 때 이미 왕규와 혜종의 의견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왕규는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고자 했지만, 혜종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등 왕규와 다른 행보를 보였다.
- ↑ 박술희는 몰라도 왕규는 조금 애매한 경우다.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와 왕소를 죽이자고 했으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등 왕규의 뜻과 대치했다. 그리고 나중에 혜종이 병에 들자, 박술희와 왕규는 백여명에 호위병으로 대치하는 등 대립이 극의 달했다. 아무래도 왕소와 왕요 처리를 두고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 ↑ 어찌 되었든 혜종 다음으로 왕이 될 사람은 왕요 밖에 없었고, 왕요와 왕소를 제거하고자 했던 왕규로써는 왕요가 즉위하면 죽는 일 밖에 없었기에 충분히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문제는 왕식렴 기록과 최승로의 평가처럼 이 둘은 왕규의 공격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 그럼에도 정종이 죽을 때 까지 서경 천도가 진행 된 것을 보았을 때 당시 호족들과 신하들조차 왕요의 뜻을 꺾을 만한 힘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 이를 딱히 죄책감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서경 천도가 반대의 부딪치자 민심을 달래고자 했던 것일 수 있다. 서경 천도를 위해 주로 동원 될 백성들은 패서 일대 백성이고 송악도 예외는 아닐 것이 분명하기에.
- ↑ 정확히는 아내의 외가, 광종의 아내 대목왕후 황보씨는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딸로 외가의 성을 따랐다.
- ↑ 고려사 박술희 열전에 따르면 혜종이 병에 들자 백여명에 호위를 이끌고 왕규와 대립했다고 한다. 왕규는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고자 했는데 박술희는 이의 대해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혜종도 마찬가지라서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사실상 왕규와 뜻을 달리 한 것 이다.
- ↑ 혜종 사후 박술희는 정종이 역모를 의심해 귀양 보내자 왕규는 왕명을 사칭해 박술희를 죽이고 곧바로 왕요를 쳤지만, 이미 기다리고 있던 왕식렴과 왕요에게 당한다. 이런 점에서 왕규는 박술희의 죽음을 왕요 탓으로 돌리고 그들의 군사력을 흡수해 공격하려는 무리수를 두다 망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려 했기에 왕요의 즉위는 사실상 왕규에게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 ↑ 오늘날 매체에서 최종 보스로 나오는 왕식렴일 것인데 어떻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정종(고려)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