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혁

1 후한 말의 인물

郭奕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 위나라의 정치가로 자는 백익(伯益). 곽가의 아들이자 곽심의 아버지.

영천군 양책현 사람으로 통달해 이치를 잘 헤아렸다고 하며, 207년에 곽가가 원희, 원상 등을 추격한 원정 중에 병에 걸리면서 요절하자 그의 뒤를 잇고 후에 태자문학을 지냈다가 곽가처럼 요절한다.

왕창과 친분이 있었지만 왕창이 그에 대한 평가를 남기면서 왕창이 아들과 조카에게 글을 써서 경계하게 한 일 중에 다음과 같은 말로 등장한다.

영천의 곽백익은 통달한 사람으로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그의 사람됨은 도량의 넓음에 있어서는 부족하였고,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존경하는 것이 극단적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태산처럼 중시하였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풀처럼 홀시했다.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가까이 지내는데, 나의 아들이 그와 같이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정작 자신의 들은 본받았다.

다만 배송지가 주를 달아 말하기를 왕창의 비평은 일반적인 견해이며, 친구의 악평을 후세에 전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평했다. 왕창의 비평에 따른 사람이라면 재능은 있지만 인간성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아내를 잃었기에 순상이 남편을 잃은 딸인 순채를 곽혁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순채는 결혼할 뜻이 없었고 순채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뒤에 순채가 방을 차려서 오게 했지만 이 때 순채가 이야기를 멈추지 않자 곽혁은 순채를 꺼려해 일을 치르지 못한 채 새벽에 방을 나섰고 결국 순채가 자결하면서 이 결혼은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것은 순상은 190년에 사망했고 곽혁의 아버지인 곽가만 해도 순상의 몰년인 190년에 20살이라는 문제가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곽가가 죽었을 때 조조가 슬퍼해 곽가를 정후에 봉하면서 그를 궁중에서 기르기로 하는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1.1 미디어 믹스

324-Guo-Yi.jpg
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등장한다. 태사향, 전만과 함께 아버지 잘 만나서 등장한 케이스. 허나 능력치는 역시 그저 그렇다.

삼국지 3에서는 뭐가 어찌 됐는지 번역이 뭐가 잘못됐는지 간에 곽혁이나 곽회이나 둘다 똑같이 곽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곽회와 달리 군사가 될수가 있다. 게다가 곽가의 아들이라는 설정은 어디로 날아가고 곽가의 자식무장으로 설정되어있지도 않은 채 재야무장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23/29/70/76의 그저그런 문관. 혼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19/23/75/74/28의 흔하디 흔한 문관계. 왕창의 평가 덕에 매력까지 낮다.

삼국지 12에서는 삭제되었다가 PK에서 다시 추가. 일러스트는 무슨 방문 판매원 같다만 아무래도 아버지를 닮아서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은게 아니었을까. 지력 70으로, 삼국지12에서 군사 특기를 가진 무장 중 가장 지력이 낮다. 하지만 위보의 책같은 쓸만한 전투용 비책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전법은 복병

RPG 천지를 먹다 2 제갈공명전에서는 낙양의 제 1관문에서 8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형, 전만과 함께 적으로 등장한다.

2 서진의 인물

郭奕
(? ~ 287)

서진의 관료. 자는 대업(大業)

태원군 양곡현 사람으로 어려서 중한 명성이 있어 산도가 그 고상하고 꾸밈없음과 너그럽고 깊은 도량이 있는 것을 칭찬했으며, 처음에는 야왕령이 되었고 양호가 항상 그 현을 지났다고 한다.

곽혁은 양호에 대해 양숙자는 어찌하여 곽대업을 덜어내려 하지 않냐고 탄식했지만 양호가 적은 이들을 뽑은 뒤에 다시 떠나자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갔다면서 탄식했다. 수백 리 경계까지 나와 양호를 전송하고 앉은 채로 지켜봤으며, 265년에 사마소의 주부가 되었다.

이 때 종회가 촉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순욱은 종회의 종생(사촌자매의 아들)인 종씨 일가의 사람이었지만 사마염이 그를 자신의 연으로 삼았기에 곽혁이 나와 이에 대해 아뢰었으며, 조환이 이를 기용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아담하고 바른 것을 알게 되었다.

265년에 사마염이 즉위해 동궁을 세우자 정묵과 함께 중서자가 되었으며, 우위솔, 효기장군이 되었다가 평릉남에 봉해졌고 함녕[1] 초에는 옹주자사, 응양장군으로 옮겼다가 적당, 곡개, 고취를 임시로 받았다. 곽혁에게는 홀로 된 손윗 누이가 있었지만 곽혁이 벼슬을 하게 되자 부리는 동복과 수많이 간통해 사람에게 규명받았으며, 곽혁이 이를 살피는 것을 마치고 대장부가 어찌하여 늙은 손윗 누이를 구명하겠냐고 했다.

마침내 떠나보내 더는 캐묻지 않았고 이함이 준걸의 재주가 있었지만 가문이 한미해 호족들에게 배척받자 곽혁은 그를 별가로 기용했으며, 이함이 훗날 명성있는 지휘에 오르자 곽혁을 통해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게 되었다. 태강 연간에 징소되어 상서가 되었고 곽혁은 중한 명성이 있어 당시의 조신들은 모두 아래로 내려갔으며, 276년에 사마염이 양준에게 국사를 일임하자 저략과 함께 그의 그릇이 작아 사직을 맡길 수 없다고 표를 올렸다.

그러나 이를 듣지 않았지만 양준은 훗날 주살되었으며, 곽혁이 병에 걸리자 사마염이 이십만 전과 함께 하루마다 술과 쌀을 내리는 조서를 내렸다. 287년에 사망해 태상이 경(景)의 시호를 올렸지만 맡은 관리는 귀하고 천한 것을 함께 부를 수는 없다고 했으며, 곽혁의 시호는 경황(景皇)과 같다고 의논해서 사마염이 그 말에 따라 경의 시호를 허락하지 않았다.

곽혁의 시호에 대해 목(穆)을 청했지만 조서를 통해 시법을 살펴보니 일덕(一德)이 나태해지지 않는 것을 간(簡)이라 하면서 곽혁은 충성스럽고 꿋꿋하면서 청렴하고 강직했으며, 덕을 세워 변하지 않다고 해서 시호는 간이 되었다.

곽혁은 재능이 있으면서도 온갖 관청에서 관직에 임용하도록 추천했어도 모두 거절한 양호를 가리켜 오늘날의 안자(안회)라고 칭찬했다. 곽혁이 칭찬한 후에도 양호는 왕침과 함께 조상에게 초빙되었지만 이를 거절했으며, 뒤에 조상이 몰락하자 왕침이 그의 의견이 옳다고 여기면서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겸손함을 나타내다가 사마소가 대장군이 될 때부터 양호는 벼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 275년 ~ 28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