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더작센

독일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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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주
쥐트바덴서베를린뷔르템베르크-바덴
뷔트템베르크-호헨촐레른
주기(州旗)주장(州章)
니더작센 주의 위치
국가독일
시간대(UTC+1/+2)
주도(州都)하노버

1 개요

Land Niedersachsen, 니더작센 주

독일의 16개 연방주의 하나로, 옛 하노버 왕국의 역사를 계승하는 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주 내부에 브레멘위요지의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주도는 하노버이다.

1946년 올덴부르크 일대, 하노버 일대, 샤움부르크-리페 일대를 합병하여 탄생한 주이다. 동프리슬란트도 니더작센 주의 서북부에 위치해 있다. 전체적인 기후는 북해의 영향으로 위도에 비해 매우 온화한 편.

2 역사

작센(Sachsen)이라는 명칭은 색슨 족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원레 작센족이 살던 지역으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정복하기 전까지 작센왕국이 있던 곳이다. 810년대 최종적으로 작센 왕국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면서 작센 공작령이 되었고 이 지역은 크게 서쪽의 베스트팔렌(뮌스터, 파더보른, 올덴부르크), 동쪽의 오스트팔렌(브라운슈바이크, 뤼네베르크 등),[1] 중부의 앙그리아(민덴, 함부르크, 하노버),[2] 북부의 노르트알빙기아(현 홀슈타인)로 구분되었다. 작센공작령은 이후 빌룽 가문에게 넘어가며, 동프랑크 왕국을 거쳐 신성로마제국이 제후령이자 선제후가 된다.[3] 작센의 상징은 빨간 배경에 하얀 말. 현대 니더작센의 문장으로 쓰이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문장에도 베스트팔렌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남아있다. 이는 작센족의 부족장이였던 비두킨트(Widukind)가 전설 속에서 탔다는 오딘의 말 슬레이프니르에서 기인한 것으로, 후일 작센 공작이 되는 벨프 가문이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하노버가 말(동물과 언어 둘다)로 유명해지면서.. 선견지명이 되었다.

중세부터 작센주는 동부의 슬라브 족들을 토벌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이에 따라 작센을 부르는 지역이 나날히 커져갔고 특히 초기 동프랑크 왕국이 현 작센-안할트 지역에 크베들린부르크, 막데부르크 등을 건설하고 투자하면서, 작센의 중심지도 점차적으로 엘베강역으로 동진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10세기 벨프가문의 작센 공작이였던 하인리히 사자공 때 절정에 달해 동부로 무한 영토 확장에 나섰고, 잘나간다며 위아래 없이 막장을 부리던 하인리히 사자공은 상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심기를 건드려 토사구팽 당했다. 일단 작센공작의 영토가 너무 컸기 때문에 분할하기로 결정, 1235년 제국 의회에서 전통적인 작센 지역인 베스트팔렌과 오스트팔렌, 앙그리아는 크게 베스트팔렌 공작령과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으로 분리되었고, 현 작센-안할트와 작센주 지역은 아슈카니아(안할트) 가문에게 넘어가게 된다.[4] 아슈카니아 가문에게 넘어간 지역도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령과 작센-비텐베르크로 나뉘게된다.

하인리히 사자공이 추방된 후 작센 공작령이 3개로 분리될 때 실제로는 가문간 알력, 분할상속, 강력한 권력의 부재로 더 많은 소국들이 파생되었다. 우선 주교령들은 모두 독립적이였기 때문에 각각 주교, 대주교령이였던 파더보른, 뮌스터, 힐데스하임, 브레멘, 함부르크는 별개였으며, 각각 1101년과 1111년 작센 공작의 제후 령으로 설립된 올덴부르크 백작령, 흘슈타인 백작령과 샤움부르크-리페 또한 분리되었다.[5] 브레멘과 함부르크는 훗날 제국자유도시로 승격되고 한자 동맹으로 독립적인 행보를 나아간다.

1448년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티안 1세는 덴마크의 왕위를 상속받게 된다. 그래서 올덴부르크 백작령이 덴마크의 영토가 되는데, 홀슈타인 백작령도 크리스티안 1세가 상속받으면서 신성로마제국내 2개 제후령이 덴마크 왕의 소유영지가 되었다. 이때 크리스티안 1세가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왕위도 이어 받으면서 올덴부르크 가문의 권력이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강대해진 시점이다. 지금도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왕실은 올덴부르크 가문의 후손들이다.밑의 영국 하노버 왕가 사례까지 합치면 니더작센은 말그대로 현대 왕족들의 발상지이자 수출지역이 되는 셈.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에딘버러 공도 올덴부르크 가문 후손이다.

니더작센이란 명칭은 16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단위 지역 명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엔 브레멘과 함부르크,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 공국, 메클렌부르크 공국, 홀슈타인 공국,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이 이 지역에 포함되었다. 작센-비텐베르크와 브란덴부르크, 안할트, 포어포메른 등이 오버작센으로 분류되었다. 작센-라우엔부르크와 작센-비텐베르크는 작센 선제후의 승계를 두고 알력 다툼을 했는데 결국 작센-비텐베르크가 승리하여 1356년 작센 선제후로 공식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베틴 가문으로 작위가 넘어간 후 1806년에 작센왕국이 된다.[6] 현재의 니더작센 주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홀슈타인으로 분류되는 작센-라우엔비루크나 따로 분리되는 멕클렌부르크가 포함되어있고, 올덴부르크와 오스나브뤼크는 빠져있다. 즉 중세 시기의 니더작센 개념과 오늘날의 니더작센 주의 개념은 조금 차이가 존재했다는 것.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1269년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 공국내에 브라운슈바이크 영주령과 뤼네베르크 영주령을 신설하여 자녀들에게 분할상속하였다. 이때 공작 작위는 브라운슈바이크 영주령으로 내려간다. 1291년에 브라운슈바이크 영주령은 또 다시 3개로 분할되며 브라운슈타인-볼펜뷔텔 영주령, 괴팅겐 영주령, 그루벤하겐 영주령이 되었고, 1432년 칼렌베르크 영주령이 브라운슈타인-볼펜뷔텔에서 떨어져나온다. 1495년엔 드디어 분열을 멈추고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는데 먼저 칼렌베르크와 괴팅엔이 합체한 후, 1617년엔 그루벤하겐과 뤼네베르크가 합쳐진다. 합체로봇? 드디어 1692년 칼렌베르크의 영주이자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이였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선제후가 되면서 칼렌베르크를 중심으로 브라운슈바이크 영주령만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통합됐다. 이 때 하노버 공중 고문이였던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가 벨프 가문의 족보를 조사하여 선제후 상속 권한이 있다는 증거물을 마련했다는건 유명한 일례. 안그레도 팔츠계승전쟁(9년 전쟁)을 도운 댓가로 보상을 하고 싶었던 신성로마제국 레오폴트1세 황제와 아귀가 맞아 떨어지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선제후로 임명했다. 칼렌베르크의 중심은 하노버였기 때문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자신의 직위를 하노버 선제후로 개명하였다.[7] 브라운슈바이크 첫번째 눈물

이때 하노버 가문으로선 또 다른 복권에 당첨되었으니..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부인, 팔츠의 소피아는 영국의 왕 제임스 1세의 외손녀였는데, 앤 여왕을 마지막으로 제임스 1세의 직계 스튜어트 가문이 끊기게 된 것. 앤 여왕에게는 이복동생이 있었으나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영국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왕위 승계권이 소피아를 통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 게오르크 루트비히에게 가게 되었다!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아버지에 이어 1698년에 하노버 선제후를 상속 받았고, 1714년 앤 여왕이 죽어 영국 왕위도 얻음으로서 조지 1세가 되었다.

하노버 선제후는 조제 1세때 부터 하노버 가문의 영국 왕실이 가지게 되었고, 조지1세의 증손자 조지 4세가 조지3세의 섭정 시절 빈 회의에 참석해 하노버 선제후의 공작위를 왕국으로 급을 높이는데 유럽 열강들의 합의를 이끌어내어, 1814년에 하노버 왕국이 수립되어 동군연합이 되었다. 동군 연합을 사랑하는 영국. 이때 베스트팔렌의 오스나브뤼크도 하노버 왕국으로 편입됐다. 동시에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의 일부였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은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독립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의 두번째 눈물

이후 하노버 왕국도 영국 왕실의 의도에 따라 자유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사상이 유입되어 공민권이 수립되고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가 성립된다. 조지 2세는 1734년 지금도 독일에서 탑을 달리는 괴팅겐 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노버도 스코틀랜드처럼 잉글랜드가 꿀꺽 삼키나 했는데.. 조지 4세가 자녀 없이 죽으면서 동생인 윌리엄 4세가 영국과 하노버의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윌리엄 4세에게는 딸만 있었다. 딸에게도 왕위가 상속되는 영국법과 달리 하노버는 남자에게만 왕위가 상속될 수 있는 살리카 법을 따랐기 때문에, 윌리엄 4세가 죽고 영국 왕위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하노버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물려진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어릴적 부터 독일에서 생활했으며 군인으로 자라게 된다. 아무레도 근대적 군인식 사고방식이 머리에 박히면서 기존 자유주의적이였던 하노버 왕국을 억압적이고 절대 왕정식으로 개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괴팅엔 대학의 그림 형제를 비롯 7명 교수가 항의서를 보냈으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그들을 해임시켜버렸다. 1851년 조지 5세가 그의 아버지를 이어 새 하노버의 왕이 되었다.[8] 이 당시엔 독일 지역의 패권을 두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신경전을 벌이던 시기였고 결국 둘 사이에 전쟁이 터져버리는데, 조지 5세는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다. 결과는 알다시피 오스트리아의 패. 결국 1866년 프로이센 군대는 하노버로 침공해왔으며, 하노버 왕가는 영국으로 피신하고 하노버 왕국은 프로이센에 강제 합병된다. 지못미 하노버 왕가는 하노버 영토를 모두 잃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영국 왕실의 일원원으로서 받았던 컴버랜드 공작으로 살아간다. 조지 5세의 손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였던 윌리엄이 1884년 자녀 없이 죽음에 따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되어 다시 독일로 귀환한다. 브라운슈바이크의 세번째 눈물. 드디어 최종 합체에 성공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딸 빅토리아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함으로서 성공적으로 독일 왕정에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곧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의 편에 들게 됨으로서 영국 의회는 1917년 귀족법을 개정하여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의 컴버랜드 공작위를 회수해버린다. 그리고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해 공화국이 되었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도 잃게 된다. 지못미X2

올덴부르크 백작령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덴마크 올덴부르크 가문 왕실의 관심은 떨어졌고, 분할 상속으로 인해 홀슈타인-슐레스비히 공작위가 덴마크 왕실 영지와 올덴부르크 가문의 친척뻘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에게 이등분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1761년 러시아의 황위를 이어 받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표토르 3세가 1762년 부인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폐위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령이 러시아 제국으로 들어가는 상황을 막기위해 덴마크는 올덴부르크 백작령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령을 교환한다.[9] 이에 홀슈타인 공작령으로 다시 하나로 합쳐져 덴마크 군주의 영토가 되었고, 올덴부르크 백작령은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에게 상속된다. 1777년에는 공국으로 승급한다. 1815년에는 대공국이 되고 1871년에 독일 제국에 합류한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은 구 하노버 왕국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올덴부르크 대공국 및 자잘한 주교령 영토를 모두 프로이센 지방으로 분류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이 패망함으로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분할 통치에 들어가는데 아무레도 영국과 깊은 관계가 있던 지역이였기 때문인지 이곳은 영국이 통치하게 된다. 1946년 8월 영국정부는 구 하노버 왕국 지역을 프로이센 지방에서 분리해 하노버를 주도로 하는 하노버 주를 신설하였다. 하노버 주의 초대 주총리였던 하인리히 빌헬름 코프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올덴부르크 공국 지역과 주변 다른 지역들도 합병해 니더작센 주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코프의 주장은 사실 이미 1920년대부터 나오던 행정구역 개혁안을 토대로 한 것이였고 실제 생활권이나 경제권에 부합했다. 브레멘도 니더작센에 합병하려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당시 브레멘 시장이 미국을 찾아가[10]브레맨의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전통적으로 하노버와는 독립적인 지역이였음을 강변해 브레맨은 별도의 주가 되었다. 결국 영국군정은 1946년 11월 브라운슈바이크와 올덴부르크 지역을 하노버주와 합병한 뒤 니더작센 주를 출범시켰다. 브라운슈바이크의 네번째 눈물 그래도 하노버 주에 합병된건 아니잖아

3 사회

3.1 인구

총 80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데, 독일 내 16개 연방주 중 4번째로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다. 외국인도 50만 명으로 상당수가 거주하는데 다른 주들과 마찬가지로 터키인과 폴란드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 주에서 가장 큰 도시는 인구 약 50만명의 하노버이며, 주변의 브라운슈바이크, 볼프스부르크, 힐데스하임, 괴팅겐 등을 묶어 인구 390만명의 하노버 광역권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 광역권이라는게 수도권처럼 도시-도시로 연결되어있지도 않고 워낙에 넓다보니 이런 명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가령 하노버랑 괴팅겐은 100km 떨어져있다. 그 외의 중소도시로는 오스나부뤼크올덴부르크, 뤼네부르크 정도. 참고로 함부르크나 브레멘의 광역권들도 니더작센의 영토이다. 이러다보니 거주지는 니더작센이면서 함부르크나 브레멘에서 일하는 함부르크 및 브레멘 유동인구도 많다.

3.2 경제

전통적으로 농업광업의 비중이 큰 주이다. 북부지역은 토질이 거친 관계로 작황이 힘들어 초원을 이용한 목축업이 발달했으며 남부지역은 황토 토질을 이용한 감자, 귀리, 사탕무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하노버와 그 근교는 승마, 마장마술 등을 위한 로도 유명한데, 경종마 중 하노버리안 이란 종이 따로 있을 정도.(맨 위의 문장이기도 하다) 이 지역 영주가 대대로 투자해온 사업이기도 하거니와 영국에 하노버 왕조가 들어서고나서는 영국 상류 사회에도 적극적으로 소개되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하노버가 박람회로 유명해진 계기 또한 말과 관련된 산업 덕분.

광업의 경우에는 특히 남부의 하르츠(Harz) 지방을 중심으로 12세기에 이미 은광이 풍부한 것으로 유명했고 오늘날에는 철광석갈탄을 활발히 채굴하고 있다. 여담으로 가끔식 해외토픽으로 소개되고는 하는 소금 광산도 이 곳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원유도 나온다. 디젤관련 기술이 맨 처음 개발될 당시 원유 채굴과 처리 기술들은 모두 이 부근에서 실험되고 실전되면서 발전되었다. 현대에는 다만 채산성이 낮아서 더이상 거의 뽑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첼레(Celle)지역에 가면 석유가 그냥 땅위로 세어나오는 곳들도 여럿 있다. 첼레 근교의 빗체(Witze)에 독일 석유 박물관이 있고 박물관 뒷뜰엔 과거 원유를 채굴하고 정유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시추탑과 철도선도 그대로 있다.

20세기 이후로는 제조업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 중 자동차 산업이 가장 주목할만하다. 볼프스부르크에는 지금도 폭스바겐이 자리잡고 있다. 하노버에도 수 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설립되었었는데 자동차 산업이 막 시작될 때였던지라 경쟁에 치여 도산하는 회사들이 많았고 다른 회사에 흡수합병되기도 하였다. 자동차 부품 회사인 콘티넨탈은 여전히 하노버에 위치해있다.

21세기부터는 대개 그렇듯이 서비스업 또한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독일 최대 여행사인 TUI도 본사가 하노버와 베를린에 있다. 하노버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박람회 도시로, CeBIT도 매년 하노버에서 열리고 있다. 아무레도 지리적 장점이 크게 작용하는데, 남부 독일을 빼면 정중앙에 위치해있는데다가, 쾰른/뒤셀도르프와 베를린을 잇는 동서선과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를 잇는 남북선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고속도로와 철도, 공항도 그렇게 건설되어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장소. 게다가 독일 표준어 지역이니, 작센이나 바이에른 같이 같은 독일인도 알아듣기 힘든 곳에 비해 언어장벽도 낮다.

니더작센 주가 북해에 닿아있기 때문에 해안가 쪽은 관광업도 발달되어있다. 뤼네부르크의 하이데 지방도 매년 꽃구경 외에도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며, 작센-안할트 주와 튀링엔 주와 삼분하고 있는 하르츠 산악지대도 주요 관광지역. 다른 두 주보다 더 산세가 높은 쪽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겨울엔 스키도 탈 수 있다. 하멜른과 힐데스하임도 외국인이 많이 찾는 관광지역이다.

3.3 정치

전통적으로 사민당의 텃밭이다. 특히 하노버일대와 그 남부인 괴팅겐 지역, 오스나부뤼크 지역, 북서부 끝자락의 프리즈란트는 완전 사민당. 젊은 세대도 많고 공업도 고루고루 발전한 덕이다.[11] 반면 니더작센의 북부 농촌지방은 기민당. 2차대전 이후 2016년까지 12명의 주총리 중 8명이 사민당 출신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도 니더작센 출신이며 니더작센에서 주 총리를 하다가 독일 연방 총리가 된 사람이다. 즉 정치적 기반이 니더작센. 2016년 현재 주총리는 사민당의 슈테판 바일 전 하노버 시장이다.

다만 2000년대 중반부터 근 10년간 기민당이 반짝 강세를 보였다. 독일 연방 대통령이 되었다가 불명예 퇴임했던 기민당의 크리스티안 불프가 당시 주총리를 맡았었다. 1980년대 주정부가 원자력 폐기물 매립지를 유치하려고 함에 따라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를 등에 업어서 동맹 90/녹색당이 대안정당으로 급부상하기도 한 지역이다. 사민당과 함께 적녹 연정을 이루고 있는 상황.

니더작센 내의 유명한 지역감정으로는 아무레도 하노버와 브라운슈바이크. 둘 사이에 파이네(Peine)라는 조그만한 도시가 있는데 서로 동파이네(Ost-Peine)니 서파이네(West-Peine)니 깎아 내려 부른다.[12] 이건 아무레도 과거 권력 이동과 관계가 있는 것이, 본래는 브라운슈바이크가 이 지역의 중심이였으나 하노버 공국과 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하노버로 중심지가 이동했기 때문. 브라운슈바이크 사람들 입장에선 박탈감이 있는 것이고 하노버 입장에선 말도 안되는 과거 감정을 가지고 몇 백년 지난 지금도 때부린다고 생각하는 것. 이건 쾰른과 뒤셀도르프간의 지역감정과도 맥이 통한다. 다만 이쪽은 반대인 것이, 쾰른이 뒤셀도르프보다 인구가 더 많고 니더작센은 하노버가 브라운슈바이크보다 인구가 더 많다.

오스트프리즈란트는 생략한다. 이미 다른 곳에서 열심히 설명한 분야가 많지 않던가? 먼나라 이웃나라 라던지

3.4 언어

독일의 표준어는 하노버 지방 방언을 기준으로 한다. 즉 하노버말이 서울말. 많은 사람들이 왜 베를린 방언이 표준어가 아닌지 의아해 하는 편. 사실 독일에서 표준어라는 것이 성립된 것도 별로 긴 역사가 아니다. 신성로마제국 시절 수 많은 봉건왕국과 공국, 주교령들로 분리되어있을 때에는 어디가 표준어인지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던 것. 마틴 루터 이후 여러 문학가들에 의해 독일어 연구가 진행되면서 처음엔 마이센 지역의 언어가 표준으로 취급되다가 점점 하노버 쪽으로 기운 것. 특히 표준독일어의 가장 큰 분별점은 r의 발음법.

반면 그 외의 북부 대다수 지역은 저지독일어(Niederdeutsch 또는 Plattdeutsch)라는 사투리를 쓴다. 독일인들에겐 그럭저럭 익숙한 사투리 라고 할 수 있겠지만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에겐 매우 생소한 어휘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오스트프리즈란트 쪽 사투리는 평균 독일인들도 알아듣기 힘든 지경. 저지독일어의 영향으로 북독일에서 Hallo 대신 Moin(모인)이란 인사법이 더 많이 사용된다. 바이에른 쪽에선 Servus를 더 즐겨 쓰는 것과 같은 이치.

3.5 관광

니더작센은 규모가 큰 주이며 북쪽으로는 북해가 남쪽으로는 하르츠가 위치해있어 다양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하노버는 대규모 박람회를 거의 1년 내내 개최하기 때문에 사업차, 관광차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도시이다. 이 곳에서 숙박할 때 주의할 점이라면, 박람회 기간과 자신의 숙박 기간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 숙박 요금이 많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 하멜른이나 첼레, 힐데스하임, 괴팅겐, 볼프스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 고슬라 등의 도시는 모두 하노버를 거점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또한 지리적 이점으로 고속철도 ICE를 타고 베를린이나 함부르크, 브레맨, 쾰른,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로 가기에도 매우 편한 곳. 독일의 왠만한 도시는 모두 4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다만 라이프치히드레스덴, 에어푸르트 쪽으로 가는 노선이 살짝 아쉬운 상황. 이 경우 괴팅겐이나 카셀, 막데부르크에서 IC등으로 갈아타야 한다. 하노버 공항은 중소규모이지만 유럽의 거의 대다수 공항과 노선이 연결되어있다. 런던까지는 약 한 시간. 한국 직항은 없다.

니더작센 중부에 베르겐이라는 곳에 베르겐-벨젠(Bergen-Belsen) 나치의 강제 수용소가 위치해있으며, 현재는 추모시설 겸 박물관이다. 안네 프랑크 등 네덜란드 지역에서 잡힌 유태인들이 주로 수감되었던 곳.[13] 관심이 있으면 방문할 수 있으나 교통편이 제약적이니 미리 알아볼 것.[14]

3.6 종교

니더작센의 최대 종교 종파는 개신교이다. 약 48.5%의 인구가 개신교. 그 중에서도 루터파가 절대 다수다. 가톨릭은 약 17.3%. 그 외 34%가 무종교.

하노버를 관할지역으로 두는 루터파 하노버 지역 개신교회는 독일 전체 루터파 개신교회 중에서도 지주 역할을 할 정도로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 중심 교회는 하노버 구시가지에 있는 마르크트교회이다.[15]

한편 네덜란드와 인접한 오스트프리즈란트는 한국인들이 흔히 개신교의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하면 떠올릴 개혁교회가 은근히 많다.[16] 네덜란드쪽과 비교하면 전반적으로 교회건물 보존이 잘 되어있는 편.

주 전체적으로 개신교가 강세인 곳이지만, 힐데스하임과 오스나브뤼크는 가톨릭 세가 어느 정도 살아있다.[17] 종교개혁 시기에 대대적으로 개신교를 받아들인 북독일 지역에서는 이 두 교구만이 폐지를 면하고 살아남아 이후 북독일 지방 가톨릭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

4 같이 보기

  1. 팔렌(Falen)은 평지를 뜻하는 말이다. 서쪽평지, 동쪽평지
  2. 정작 지금은 영국의 지역명이 되버렸다. 영국인을 주로 이루는 앵글로섹슨족을 말할 때의 앵글로가 바로 이 앙그리아 지역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게르만족을 일컫는다. 섹슨은 작센족의 영어명이다.
  3. 독일의 건국 때부터 있던 5대 공작령 중 하나다. 나머지 4개는 프랑켄, 슈바벤(현 바덴-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로트링겐(현 팔츠). 튀링겐도 건국 당시 독립적인 제후령 영토였지만 공작령 지위가 아니였으므로 제외된다.
  4. 벨프 가문은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을 그대로 가지게 된다.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의 벨프 가문은 후일 하노버 가문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국의 왕위를 잇게 된다.
  5. 올덴부르크는 아예 처음부터 작센 공작과 분리되었고, 홀슈타인 백작령은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령의 제후령이 되었다가 공작령으로 신분상승(?)하며 샤움부르크-리페는 후일 현대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로 통합된다.
  6. 그래서 현 작센 주의 문장은 베틴 가문의 상징물을 그대로 가져다 쓰게 되었다.
  7. 안그래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버지 게오르크도 가문 이름을 벨프 가문에서 하노버 가문으로 개명한 뒤였다. 하노버 사랑
  8. 참고로 조지5세는 젊을 적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가 중년이 되서 다른 쪽 눈의 시력도 놀이를 하다 잃게 되면서 장님이였다.
  9. 15세기 신성로마제국과 채결했던 리펜 조약에 의해 홀슈타인 공작과 슐레스비히 공작은 동일 인물이 동시에 가져야 했기 때문.
  10. 당시 미군의 군정통치지역은 독일 남부지역이었으나 미군의 병참선(해운)유지의 필요성으로 브레멘시는 미국에 넘겨졌다.
  11. 반대로 오스트프리즈란트는 하도 주류 독일인들에게 박해받은 역사가 길다보니 자신들을 평등하게 대해준 사민당을 밀어주었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
  12. 가령 브라운슈바이크 입장에선 하노버는 파이네의 서쪽 지역구 라는 뜻으로 서파이네라고 부르는 것
  13. 안네 프랑크도 이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14. 다만 이 곳은 가스실이 없었다. 가스 학살은 동부 유럽에 세워진 수용소에서 사용되었고 이 곳은 열악한 위생 및 영양 상황과 나치 독일의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운용으로 대다수가 영양결핍과 전염병으로 숨졌다.
  15. 종파 중심지이니 엄청 화려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갔다간 엄청 실망할 것이다. 루터파 답게 장식은 얼마 안되며(그나마 제단이 있는 맨 앞쪽에 집중되어 있다) 교회자체도 별로 크지 않다. 원래 가톨릭이 쓰던 성당을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가 쓰다가 2차세계대전에 폭격 맞고 간소하게 복원한 후 사용 중.
  16. 북서독일-바이에른 개혁교회 총회(Synode evangelisch-reformierter Kirchen in Bayern und Nordwestdeutschland)라는 교단으로 이름처럼 니더작센뿐 아니라 바이에른과 구동독에 있는 극소수 개혁교회 노회들도 이쪽에 소속되어 있으며 현재 독일 개신교회(EKD)에 속한 20개 교단들 중 온건 개혁주의를 확실하게 표방하는 유일한 교단이기도 하다. 레어(Leer)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총회 본부가 있다.
  17. 두 지역 중에서는 가톨릭 세가 강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 인접한 오스나브뤼크 쪽이 가톨릭 인구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