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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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상위 항목에서 분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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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 8월 미군정청에 의해 경성대학을 비롯한 9개 전문학교(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을 합쳐 만들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들이 미 군정청의 계획에 반발하면서 소위 '국대안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1950년 사립 서울약학대학을 흡수하여 약학대학을 신설하였다.

2 전사(前史)

아래에는 각 전신학교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한다. 서울대학교 설립 이후 편입된 서울약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신은 설립년도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2.1 법관양성소

1895년 법관양성소로 출발하였다. 사범학교와 함께 서울대학교의 가장 오래된 전신 중 하나이다.[1] 1909년 한성법학교로, 합방 이후인 1911년에는 경성전수학교가 되었다. 이후 전문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22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출발이 구 한국의 법관양성소였기 때문에 합방 후에도 한동안 조선인 학생들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이러한 제한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전, 고상 등 타 전문학교에 비해 조선인 입학생의 비율이 많은 편이었다. 경성제대와 달리 법학전문 졸업생들은 법학 실무에 뛰어드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법과계통 전문학교를 줄이고자 하는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폐지되었고 경성경제전문학교로 흡수되었다. 해방 후, 동문들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독자적인 대학 승격을 준비하다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안에 의해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인 법관양성소의 설립년도인 1895년개학년도로 삼고 있다.[2] 유명 출신인물로 법관양성소 졸업생 이준열사가 있다.

2.1.1 학과 편제(1946)

법관양성소(1895) -> 한성법학교(1909) -> 경성전수학교(1911) -> 경성법학전문학교(1922) -> 경성경제전문학교(1944) -> 경성법과대학(1946)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46)

학부/예과/전문부 운영(1946)

2.2 한성사범학교

1895년 한성사범학교로 출발하였다. 법관양성소와 함께 서울대학교의 가장 오래된 전신 중 하나이다. 합방 이후인 1911년에는 독립된 학교의 지위를 잃고, 경성고등보통학교 소속 사범과가 되었다. 1921년 독립하여 조선총독부사범학교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경성사범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35년에는 경성여자사범학교가 독립하였다. 원래 당시 학제상 사범학교는 오늘날의 사범대학과 달리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기관이었으며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보통학교/소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할 수 있는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시기 중등교원의 양성은 일본 본토에만 있는 고등사범학교나 일반 대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다 1940년대에 들어와 방침이 바뀌어 비로소 사범학교의 지위가 전문학교급으로 승격되었다. 해방 이후 경성사범학교를 비롯, 경성여자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에서 독자적인 대학 승격을 시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초등교원양성기관이 아닌, 중등교원양성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3] 유명 출신인물로 소설가, 언론인 선우휘가 있다.

2.2.1 학과 편제(1946)

한성사범학교(1895) ->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1) -> 조선총독부사범학교(1921) -> 경성사범학교(1922) -> 경성사범학교(1935) -> (가)경성사범대학(1946)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

예과/학부 운영(1946)

  • 교육과 - 교육과(1946)
  • 국문과 - 국문과(1946)
  • 영문과 - 영문과(1946)
  • 사학과 - 사학과(1946)
  • 체육과 - 체육과(1946)

2.3 의학교

1899년 의학교로 출발하였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총독부로 이관되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교가 되었다. 1916년 총독부에 의해 전문학교로 승격,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조선에도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경성의전을 대학으로 승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실제로 일본의 제국대학 설립 과정을 볼 때, 의학전문이 제국대학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많았다.[4] 그러나 총독부는 기존의 경성의전을 그대로 두고, 새로 설립될 제국대학에 별도의 의학부를 설치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설립 이후에도 꾸준한 대학 승격 운동이 있었으나 총독부는 일제 패망 때까지 식민지에 새로운 대학을 설치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본토에도 의과대학, 의학전문학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성의전은 본토의 일본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경성제대 의학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경성제대 의학부 설립 당시 상당수의 교직원을 경성의전에서 빼와서 충당한 데다 지원도 줄었다. 경성제대 의학부의 존재가 경성의전의 대학 승격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도 가장 강력히 저항한 학교이기도 하며, 우여곡절 끝에 통합이 됐어도 의전 출신 재학생을 의학부 출신 재학생과 달리 전문부[5]로 취급하는 것을 두고 경성의전 측이 강력히 반발하여 한동안 진통이 있었다.[6] 유명 출신인물로 장기려, 백인제가 있다.

2.3.1 제중원에서 대한의원으로 이어지는 역사

제중원(설립당시 명칭은 광혜원)은 1885년 조선 정부가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현 외교통상부) 산하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병원이 이관됐다. 선교부에 이관된 후 1900년엔 건물이 신축되는 과정에서 거액을 기부한 미국의 사업가 이름을 딴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현재의 연세대학교 의료원의 모태가 된다.
이와는 별도로 국립병원이라는 역사가 1899년에 세워진 의학교와 부속병원격인 광제원, 이는 이후 대한의원으로 이어졌다.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내에 있는 구 본관이 바로 1909년에 건립한 대한의원 본관이다.
따라서 제중원은 국립병원과 선교병원이라는 이원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이유로 제중원의 적통을 두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대립하는 일이 있었다. [7]
이 문제는 아직 정확히 결론 나지는 않았으나 서울대학교가 개학연원을 법관양성소의 설립시기로 보는 것으로 한발 물러나서 지금은 잠잠한 상태이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서울대학교병원은 이와는 별도로 광혜원부터(즉, 1885년부터)를 자신의 역사로 설명하고 있다.

2.3.2 학과 편제(1946)

의학교(1899) ->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교(1910) -> 경성의학전문학교(1916) -> (가)서울의과대학(1946)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1946)

예과/본과/전문부 운영(1946)

2.4 상공학교

1899년 상공학교로 출발하였다. 1904년 농상공학교로 개편되었으며, 농상공학교의 공과가 1906년 공업전습소로 발전하였다. 1916년 총독부에 의해 전문학교로 승격,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1939년 광산부문이 경성광산전문학교로 분리 독립하였다. 1944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서울대학교 통합 직전에는 토목과(1916), 염직과(1916), 응용화학과(1916), 응용화학과(1916), 건축과(1916), 전기과(1938), 기계과(1938), 전기통신과(1944), 전기화학과(1944) 등이 존재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설립 전까지 후에 분리되는 경성광산전문학교와 함께 유이한 공과계 고등교육기관이었다.[8] 유명 출신인물로 시인 이상이 있다.

2.4.1 학과 편제(1946)

상공학교(1899) -> 농상공학교(1904) -> 공업전습소(1906) -> 경성고등공업학교(1916) -> 경성고등공업학교(1939) -> 경성공업전문학교(1944) -> (가)서울공업대학(1946)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1946)

  • 수학과 - 학부 수학과(1946)
  • 물리학과 - 학부 물리학과(1946)
  • 화학과 - 학부 화학과(1946)
  • 공업경영학과 - 학부 공업경영학과(1946)
  • 공업화학과 - 응용화학과(1916) -> 응용화학과 응용화학부(1922) -> 학부 공업화학과(1946)
  • 전기화학과 - 전기화학과(1944) -> 학부 전기화학과(1946)
  • 섬유공학과 - 염직과(1916) -> 방직과/응용화학과 염직부(1922) -> 학부 섬유공학과(1946)
  • 기계공학과 - 기계과(1938) -> 학부 기계공학과(1946)
  • 전기공학과 - 전기과(1938) -> 학부 전기공학과(1946)
  • 통신공학과 - 전기통신과(1944) -> 학부 통신공학과(1946)
  • 토목공학과 - 토목과(1916) -> 토목공학과(1938) -> 학부 토목공학과(1946)
  • 건축학과 - 건축과(1916) -> 건축공학과(1938) -> 학부 건축학과(1946)
  • 항공조선학과 - 학부 항공조선학과(1946)

2.5 농상공학교

1904년 농상공학교로 출발하였다. 1906년 농상공학교의 농과가 농림학교로 발전하였다. 1918년 총독부에 의해 전문학교로 승격, 수원농림전문학교가 되었다. 1922년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로 개칭하였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수원농림전문학교로 이름을 되돌렸다. 농상공학교 시절의 농과를 시작으로 각 학과가 분화하여, 서울대학교 통합 직전에는 농학과(1922), 임학과(1922), 수의축산과(1937), 농토목과(1942), 농화학과(1946)가 존재하였다.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된 후에도 계속 수원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서울로 캠퍼스를 이전하기 전까지 수원농대라는 약칭으로 통용되었다. 반면 서울'농대'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아닌, 서울농업대학[9]의 약칭이었다. 유명 출신인물로 정치인 장면, 경제학자 백남운이 있다.

2.5.1 수원고농 반제운동 사건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일제 강점기 동안의 몇 차례의 항일반제운동사건의 초점에 놓인 바 있다. 이른바 수원고농 반제운동 사건으로 지목되는 사건이 세 차례가 있었는데, 1926년 수원고농 재학생과 동문들이 결성한 '개척사'라는 항일 비밀결사가 일경에 발각되어 관련자가 적발된 1차 수원고농 사건을 비롯하여, 1935년 7월 반제 독서회가 발단이 된 2차 수원고농 사건, 1941년의 교내 한글연구회 모임이 발단이 된 3차 수원고농 사건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생회는 전신인 수원고농 시절의 항일운동 전통을 기려 학생회 슬로건으로 "반제항전 일 세기 자랑찬 전통"을 사용하고 있다.

2.5.2 학과 편제(1946)

농상공학교(1904) -> 농림학교(1906) -> 수원농림전문학교(1918) -> 수원고등농림학교(1922) -> 수원농림전문학교(1944) -> (가)수원농과대학(1946) -> 서울대학교 농과대학(1946)

학부/전문부 운영(1946)

  • 농학과(학부/전문부) - 농학과(1922) -> 학부/전문부 농학과(1946)
  • 임학과(학부/전문부) - 임학과(1922) -> 학부/전문부 임학과(1946)
  • 수의학과(학부) - 수의축산과(1937) -> 학부 수의학과(1946)
  • 축산학과(학부) - 수의축산과(1937) -> 학부 축산학과(1946)
  • 농공학과(농업토목과)(학부/전문부) - 농토목과(1943) -> 학부 농공학과(1946)
  • 농화학과(학부/전문부) - 학부/전문부 농화학과(1946)
  • 농경제학과(학부) - 학부 농경제학과(1946)
  • 농생물학과(학부) - 학부 농생물학과(1946)
  • 수의축산과(전문부) - 수의축산과(1937) -> 전문부 수의축산과(1946)

2.6 경성경제전문학교

1915년 설립된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10]의 경성분교로 출발하였다. 1918년 일본 본토와 분리된 경성척식전문학교가 되었으며, 1920년에는 사립 경성고등상업학교가 되었다. 이후 1922년 재정난으로 총독부에 이관되어 관립 경성고등상업학교가 되었다. 1944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합되면서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해방 이후 분리, 독자적으로 대학승격을 준비하였으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입시에서의 조선인 차별이 심한 편이었다고 한다. 유명 출신인물로 두산그룹 창립자 박두병, 고고학자 도유호가 있다.

2.6.1 학과 편제(1946)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1907) ->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1915) -> 동양협회경성전문학교 고등상업과/행정과(1918) -> 사립 경성고등상업학교(1920)[11] -> 경성고등상업학교(1922) -> 경성경제전문학교(1944) -> (가)경성경제대학(1946)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1946)

예과/학부/전문부 운영(1946)

2.6.2 교과과정

다음은 1941년도 경성고등상업학교 교과과정이다.

  • 필수과목

수신, 일본학, 국사(일본사), 국어(일본어), 지나어(중국어), 영어, 상업통론, 은행 및 금융론, 화폐 및 외환론, 교통론, 보험총론 및 해상보험론, 부기(상업 및 은행), 원가계산, 회계학, 상업수학, 상품학, 상업지리, 상업문, 상업실천, 상업사, 주산, 경제원론, 통계학, 동양경제사정, 상업정책, 공업정책, 대륙경제정책, 재정학, 법학통론, 민법, 상법, 물리화학, 수학, 체조

  • 선택과목

신탁론, 해운, 육운 및 공운, 상품실험, 배급조직론, 물가론, 거래소론, 세관 및 창고론, 협동조합론, 상업경제서강독, 경제학사, 경기변동론, 경제통계론, 농업정책, 세계근세사, 중국최근사, 중국사회사정, 중국화폐금융론, 경제심리학, 사회학, 공학, 상사관계법, 국제법 및 어학

2.7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1922년 경성치과의학교로 출발하였다. 1929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당시 대학에 아직 치학부(치과대학)가 개설되지 않았고, 전문학교도 일본 본토에서조차 네 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성치의전의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해방 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서울대학교 설립 당시, 유일한 사립학교였다는 점이 특징.

2.7.1 학과 편제(1946)

경성치과의학교(1922) ->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1929) -> 서울대학교 치과대학(1946)

2.8 경성대학

자세한 내용은 경성제국대학 본문을 참조바람. 여기서는 서울대학교의 관점에서 본 경성제국대학의 역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2.8.1 설립 배경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식민지 내의 대학 진학 수요가 높아지고 있었으나 식민지 소재 대학이 한 곳도 없다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었다.[12]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식민지 대학 설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

종전에는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정준영 등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총독부는 민립대학설립운동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조선에서의 대학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의 최고학부인 '제국대학'을 식민지에 이식하기로 결정한 데 있어서는 다소간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대학 설립의 주된 원인이라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13]

식민지 대학을 제국대학의 형태로 설립하기로 결정한 뒤에도 몇 가지 잡음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명칭을 둘러싼 갈등이 있는데, 원래 식민지 대학의 이름은 '조선제국대학'이 될 예정이었다. 앞서의 제국대학이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 등 도시가 아닌, 지역의 이름을 따왔고 총독부 당국이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이렇게 되자 새 대학의 이름이 조선제국의 대학으로 들린다는 지적이 내부에서 나왔다. 그래서 도쿄, 교토처럼 식민지 제국대학 역시 도시 이름인 경성을 따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기존의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제국대학으로 승격시킬지의 여부, 설치할 학부의 종류 등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2.8.2 대학 예과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개설되었다. 당시 일본의 학제는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 예과-대학 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고등학교는 오늘날의 고등학교가 아닌, 대학의 1-2학년 교양 과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제 패망 이후 제각기 독립된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대부분의 고등학교 졸업자는 최고학부인 제국대학이나 관립 의대에 진학이 가능했다. 대학 예과 역시 졸업하면 대학 학부 진학이 가능하였으나, 정해진 대학 학부에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진학하게 된다는 점이 고등학교와 다르다. 총독부는 조선인의 본토 대학 진학을 억제하고 식민지 조선의 우수한 인재를 식민지 소재 대학인 경성제대에 묶어두기 위해 고등학교 대신 예과제를 채택하였다.[14] 예과는 2년제로 출발하였다. 이는 3년제인 본토 고등학교와는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경성제대 예과의 수준이 그에 상응하는 본토 고등학교의 수준보다 한 수 낮다는 인식이 있었고, 30년대에 접어들어 대학 교수들의 요구에 의해 대학 예과의 재학연한이 고등학교와 같은 3년제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늘어난 예과의 재학연한은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던 1943년에는 다시 2년제로 회귀하였다.
예과는 문과, 이과로 구성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문과는 법학과 진학반, 문학과 진학반으로, 이과는 단일반으로 구성되었는데, 문학과 진학반에서 적지 않은 수의 학생이 법학과에 진학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예과의 재학연한이 3년제로 늘면서 이와 같은 구분 대신, 학과 진학과 무관하게 외국어(영어, 독어)로 반을 구분하였다. 30년대 말 이공학부 설치가 결정되면서, 이과도 이공학부 진학반과 의학부 진학반, 두 개의 반으로 분리되었다.
예과 입시는 조선인 차별이 암묵적으로 존재하였다. 조선인은 정원의 1/3 가량으로 선발한다는 쿼터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15] 이 때문에 대체로 조선인 합격생의 수준이 일본인 합격생의 수준보다 높았다는 회고가 많다.

당시에도 경성제대 입학시험 문제는 오늘날 수능 문제가 신문에 공개되듯 신문에 실렸는데, 역사 문제 일부를 보면 이런 것들이 출제되었다. 30년대로 넘어가면서 국수적인 경향을 띠어감을 알 수 있다.

  • 1925년
문1.(총점 100)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역정책(?)에 대해 쓰시오.
2) 동주시대의 미술·공예에 대해 쓰시오.
3) 다음 사항에 대해 아는 대로 쓰시오.
- 藏人所(일본의 옛 관청 이름)
- 藤原隆家(후지와라노타카이에)
문2.(총점 100)
4) 송대의 유학에 대해 쓰시오.
5) 다음 사항에 대해 아는 대로 쓰시오.
- 鄭和(정화)
- 尼布楚條約(네르친스크 조약)

  • 1930년
(총 100점)

1. 메이지 시대 조약개정 문제의 경과에 대해 쓰시오.
2. 헤이안 시대의 미술과 공예에 대해 쓰시오.
3.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존왕한 일들에 대해 쓰시오.
4. 에도시대 번주를 뽑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쓰시오.

  • 1931년
(총 100점)

1. 파리강화조약 이후 산동문제의 교섭과 해결 과정에 대해 쓰시오.
2. 지나(중국)의 약도를 그리고, 아래 지명을 표시하시오.
- 낙양, 장안, 건강, 함양, 개봉, 임안, 연경, 무창
3. 명대의 기독교 동진(東進)에 대해 쓰시오.
4. 다음 각 항에 대해 쓰시오.
A. 개원의 치
B. 迦膩色迦 王(카니슈카 왕)
C. 고증학
D. 임칙서

  • 1934년
국사(일본사) 총 100점

1. “건무중흥”에 공을 세우고 근왕한 여러 장수들에 대해 쓰시오.
2. 세계대전에서 우리나라(일본)의 전투경과에 대해 쓰시오.
3. 다음 항목들에 대해 설명하시오.
A. 豊受大神(도요우케 오카미)
B. 臨濟宗(임제종)
C. 本朝通鑑(본조통감)

2.8.3 학부

1926년 본과를 개설하였다. 법문학부와 의학부, 두 학부를 설치하였는데, 이후 법문, 의, 이공, 농 등으로 확장할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의 불황 및 총독부의 무관심 등의 이유로 무산되었다. 전쟁 중인 1941년에 들어서야 이공학부가 새로 설치될 수 있었다.[16]

법문학부는 크게 법학 계통과 문학 계통으로 구분된다. 법문학부라는 단과대학 형태를 갖게 된 것은 각 학문 분야 교수들의 파벌주의를 막고 학부 졸업생이 자기 전공 분야에 편중된 지식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당시에는 도호쿠제국대학에서 최초로 법문학부 형태의 단과대학을 운영하고 있었다. 설립 초기 법문학부에 법률, 정치, 문, 사, 철 다섯 학과를 두었으나, 학부 개설 이듬해인 1927년 법률학과와 정치학과를 법학과로 통폐합하여, 결과적으로 법학과,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네 학과가 법문학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법학과는 법률, 정치, 경제 관련 학문을 담당하는 학과로 본토 도쿄제국대학교토제국대학의 법학부 법률학과, 정치학과, 경제학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세부전공 없이 단일 학과로 운영되었고 졸업생 모두 법학사 학위를 수여하였으나, 1935년부터 전공이수코스를 제1류(순수법학, 사법학), 제2류(정치학, 공법학), 제3류(경제학)로 구분하여 운영하였다.[17]
문학 계통에 해당하는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는 세부전공을 개설하였다. 세부전공으로는 국어학/국문학(일어학/일문학에 해당), 조선어/조선문학, 지나어/지나문학, 영어/영문학, 국사학(일본사학에 해당), 조선사학, 동양사학, 철학/철학사, 종교학/종교사, 미학/미술사학, 윤리학, 교육학, 중국철학 등이 존재하였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3년에는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를 문학과로 통폐합하였고, 세부전공으로 사회학을 새로 개설하였다. 이들 학과는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목적으로 언급한 조선학 연구와 만선사관의 확립을 담당한 학과이다.
의학부는 문학과 등과 같은 세부전공은 없었으나, 생리학 등 교실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문학 계통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의 풍토병, 기생충학 등이 의학부의 주 연구대상이었다. 의학부가 본토에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성제대의 타 학부에 비해 의학부는 본토 출신 일본인 입학생이 많은 편이었다.
이공학부는 일본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군수산업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개설되었다. 세부전공으로 물리, 화학, 전기, 기계, 응용화학, 광산야금, 토목 등이 존재하였다. 타 학부와 달리 교사가 서울의 외곽인 공덕리에 설치되었는데,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사용하다가,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교사로 쓰고 있다.

2.8.4 경성대학으로의 개칭과 폐교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익일 조선인 조수[18], 학생들과 직원을 중심으로 자치회가 결성되어 경성대학으로 명패를 바꿔달았다. [19][20] 이후 각 전문학교에 근무 중인 명망있는 조선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경성대학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재학생이 떠난 자리는 한국으로 귀국한 일본 구제 대학 재학생이나 전문학교 졸업생의 편입으로 보충하였고, 이 시기 경성제국대학에 없는 학과 출신 편입생을 수용하기 위하여 다수의 학과가 신설되었다. 그러나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됨에 따라 경성대학은 해체, 캠퍼스와 대학 기자재들이 서울대학교로 이관되었다. [21]

2.8.5 학과 편제(1946년 기준)

경성제국대학 예과(1924)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학부(1926)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학부/이공학부(1941) -> 경성대학 법문학부/의학부/이공학부(1945) -> 서울대학교(1946)

  • 법문학부 법학과 - 법률학과/정치학과(1926) -> 법학과(1927) -> 법학과 제1류/제2류/제3류(1935) -> 법학과/정치학과/경제학과(1945)[22]
  • 법문학부 문학과 - 조선어문/지나어문/영어문전공(1926) -> 조선어문/지나어문/영어문/조선사학/동양사학/철학철학사/종교학종교사/미학미술사/지나철학/윤리학/심리학/교육학/사회학전공(1943) -> 조선어문/지나어문/영어문/독어문/언어학전공(1945)[23]
  • 법문학부 사학과 - 조선사학/동양사학전공(1926) -> 폐지(1943) -> 조선사학/동양사학전공(1945)[24]
  • 법문학부 철학과 - 철학철학사/종교학종교사/미학미술사/지나철학/윤리학/심리학/교육학전공(1926) -> 폐지(1943) -> 철학철학사/종교학종교사/미학미술사/지나철학/윤리학/심리학/교육학/사회학전공(1945)[25]
  • 의학부 - 의학부(1926)
  • 이공학부 물리학과 - 물리학과(1941)
  • 이공학부 화학과 - 화학과(1941)
  • 이공학부 수학과 - 수학과(1945)
  • 이공학부 전기공학과 - 전기공학과(1941)
  • 이공학부 기계공학과 - 기계공학과(1941)
  • 이공학부 응용화학과 - 응용화학과(1941)
  • 이공학부 광산야금학과 - 광산야금학과(1941)
  • 이공학부 토목공학과 - 토목공학과(1941)

2.9 경성여자사범학교

1935년 경성사범학교의 여자학급을 독립하여 설치된 경성여자사범학교로 출발하였다. 해방 후 독자적인 대학 승격을 준비하였으나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경성사범학교와 함께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2.9.1 학과 편제(1946)

경성여자사범학교(1935) -> (가)경성여자사범대학(1946)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

예과/학부/전문부 운영(1946)

  • 국문과 - 국문과(1946)
  • 영문과 - 영문과(1946)
  • 역사(지리)과 - 역사(지리)과(1946)
  • 생물과 - 생물과(1946)
  • 교육과 - 교육과(1946)
  • 가사과 - 가예과(1946)
  • 예공과 - 예공과(1946)

2.10 경성광산전문학교

1936년 설립된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가 별개의 전문학교로 독립된 경성광산전문학교로 출발하였다. 채광학과(1939), 광산기계학과(1939), 야금학과(1939)가 존재하였다. 해방 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경성공업전문학교 등과 함께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2.10.1 학과 편제(1946)

경성광산전문학교(1939) -> (가)서울광공대학(1946)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1946)

  • 광산학과 -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1917) ->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1922) ->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부 채광학과(1938) -> 경성광산전문학교 채광학과(1939) -> 학부 채광학과(1946)
  • 금속공학과 -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1917) ->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1922) ->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부 야금학과(1938) -> 경성광산전문학교 야금학과(1939) -> 학부 금속공학과(1946)
  • 기계공학과 - 광산기계학과(1939) -> 학부 기계공학과(1946)
  • 응용수학과 - 학부 응용수학과(1946)
  • 지질학과 - 학부 지질학과(1946)

2.11 경성음악학교

1945년 현제명이 설립하였다. 서울대학교의 타 전신 학교들과 달리, 해방 이후 설립되었다는 게 특기할 만하다. 1946년 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2.11.1 학과 편제(1946)

2.12 서울약학대학

서울대학교의 전신 대학 중 유일하게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이후에 편입된 단과대학이다. 1915년 조선약학강습소로 출발하였다. 1919년 조선약학교로 개편, 1930년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해방 후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다. 한국전쟁 중 재정악화로 관으로 이관, 서울대학교에 편입되었다. 서울대학교 설립 이후 편입된 유일한 전신이다.

2.12.1 학과 편제(1950)

3 국대안 파동과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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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창설로 인해 경성대학을 비롯한 서울 근교의 관공립학교는 모두 발전적 해체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대안 파동'이라 불리는 분규가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 이 무렵 조선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대학은 여러 단과대학, 학과로 분할되었고, 각 관공립학교 역시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으로 승계되었다.

3.1 국립서울대학교안과 국대안 파동

일제 패망 후, 전국 각지의 고등교육기관은 다시 학교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해방에 직면했을 때만 해도 일본인 교직원들은 일본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는 자신들이 강의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들의 순진한 바람과 달리, 해방 직후부터 조선인 학자, 학생들에 대한 대학 접수가 시작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의 현판에 적힌 '제국'이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에 지워진 것은 이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경제학자 백남운, 물리학자 도상록 등 저명한 조선인 출신 학자들이 새로 출범한 경성대학의 교수진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인 교수회에 의한 교수 초빙 및 교수 자치는 일제가 물러난 조선의 행정을 담당하게 된 미군정과 마찰을 빚었다. 학장 임명을 둘러싼 갈등, 교내 군 부대 주둔으로 인한 소란 등으로 인해 이 해 제대로 된 학사가 운영되지 못했다. 어쨌든 이 해 경성대학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경성대학' 졸업생을 배출하고 새 예과생을 모집하였다. 구제 고등학교 학생, 구제 제국대학 학생, 사립대학 학생, 전문학교 학생들은 편입을 통해 예과나 본과에 들어오기도 했다.

이듬해(1946년) 2월 10일, 당시 조선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대학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법문학부를 개강했다.[26] 경성대학 외에도 다른 관공립, 사립 전문학교도 개강을 했다. 이들은 개강과 동시에 일정 시기 이루지 못했던 대학 승격 작업을 준비했다.

건국동량의 요람, 대학으로 승격되는 24 남자대학(동아일보, 1946.05.20)

우리 육영계의 반가운 소식은 9월 신학기부터 28개 관공 남녀 사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므로 더 한층 빛을 발하고 있다. 이리하여 문과계통은 4년제 대학으로, 자연과학 계통은 6년제 대학으로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내용 충실을 도모하고 있다. 이리하여 새로 나타나게 되는 대학은 서울대학을 제외하고 관공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된 것이 14교, 민립대학이 9교이고, 여자대학만도 이화대학을 비롯하여 여자사범, 여자의과, 숙명여자대학 등 5교나 된다. 그리고 입학시험은 제1기로 7월 1일부터 4일 간, 제2기로 7월 13일부터 4일 간 각기 모집하는데 금년 은 기왕에 이 학교 저 학교 시험 치던 폐단까지 없이 하고, 다만 두 번만 수험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제정하여 학도의 불타는 연학의 좁은 길을 열어주기로 하였다.

이미 결정된 대학 중에 가장 그 이름부터 특이한 학교는 보성전문이 고려대학이라 한 것이고, 그밖에는 대개 전 교명을 단과대학으로만 고쳤다. 연희전문은 종합대학으로, 중앙전문은 중앙여자대학으로 각각 승격준비를 하는 등 각 학교는 아연 활기를 띄우고 있는 터이다.

이제 각 대학의 시험기일 모집인원 등을 조사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 시험(7월 1일/4일)
경성대학 예과(전 성대) 문과 120명(국사/한문) 이과갑 160명(화학/물리), 을12명(화학/생물)
고려대학 예과(전 보전) 법과 경제과 문과 각 100명 문과 2년 보결 약 60명
경성의과대학(전 경성의전) 동 예과 100명(물리화학) 전문부 100명(동일)
승격준비중인 학교
대구농업대학(전 대구농전)
광주의과대학(전 광주의전)
경성광산대학(경성광전)
대구사범대학(대구사범)
경성법과대학(법전)
경성여자의과대학(경성여자의전)
숙명여자대학(숙전)
경성약학대학(약전)

제2기시험(7월7일/13일)
세브란스의과대학(전 세의전) 대학예과 100명(물리/화학/생물) 전문부 80명(동일)
연희종합대학 문과 예과 정치과예과 경제과예과 외교과예과 수리과예과
경성사범대학(전 경사) 동예과 문과 150명 이과 150명 동학부 교육과 국문과 사학과 영문과 체육과(이상 각 40명)
경성여자사범대학(전 여사) 국문과예과 영문과예과 역사과예과 교육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신설준비) 이상 각과 50명
경성경제대학(전 고상) 예과 100명 전문부 200명 동 각학년 보결생 약간
경성치과대학(전 치전) 예과 전문부
이화대학(전 이전) 문과예과 음악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예과 보육과예과 약학과예과 의학과예과(각 모집인원 미정)
승격준비중인 학교
수원농림대학(수원고농)
대구의과대학(대구의전)
경성공과대학(경성고공)
부산수산대학(부산수산전문)
혜화대학(혜화전문)


그러나 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각종 관공립학교를 통폐합, 하나의 종합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국립대학안을 기획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법문학부, 의학부, 이공학부, 세 학부(단과대학)으로 구성된 경성대학에 농학부, 교육학부 등을 추가하고 법학부와 문학부를 분리하여 종합대학을 만들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이 안에 따르면, 경성대학 외의 법학전문, 경제전문, 의학전문 등의 각 전문학교는 개별 단과대학으로 독립하여 발전하게 된다. 일본의 사례를 생각하면 된다. 관공립 전문학교로 출발한 도쿄고등상업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 도쿄고등공업학교 등은 도쿄대학과 별도로 각기 도쿄상과대학(히토츠바시 대학), 도쿄교육대학(쓰쿠바대학), 도쿄공업대학 등으로 발전하였다. 결과만 놓자면 이 안은 폐기되었다. 경성대학을 비롯한 서울 근교의 모든 관공립학교를 통폐합하여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립서울대학교안'이 채택되었다. [27]

최고학부를 통합개편, 9월 신학기부터 실시. (동아일보, 1946.07.14)

교육균등의 새로운 이념 아래 문교부에서는 앞서 제정한 신 교육제도에 마쳐, 기왕의 서울대학과 도내의 각종 관립전문(예외로 치과의전도 포함)학교를 통틀어 종합대학인 국립 서울대학교로 기구와 내용을 고쳐 9월 신학기부터 새로운 출발을 짓게 되었다.
즉, 새로운 대학 제도는 국립대학교의 총칭 아래 문리과/사범/법과/상과/공과/의과/치과/농과/예술과 등 9개의 단과대학과 한 개의 대학원을 두어 유기적인 연락 밑에 운영되는 것이다.
이는 9월 신학기부터 실시되는데 현존한 서울대학은 물론 각종 전문학교는 시설이 그대로 이관되는 동시에, 종전의 전문은 전문으로서, 신입생만은 신제도에 의하여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과대학은 대략 다음과 같이 개편되며, 지금 문제되어 있는 서울대학[28] 의학부, 경성의전 합병문제도 합병이 아니라 기구의 개편으로 해석된다고 할 것이다.
-9개 단과대학명=
문리과대학(경대 예과와 경대 문학부, 이공학부의 일부가 주체)
사범대학(경사와 경여사)
법과대학(법전)
상과대학(경제전문)
공과대학(고공과 광전 일부)
의과대학(경대 의학부와 경의전)
치과대학(사립 경성치전)
농과대학(수원농전)
예술대학(신설로서 미술과 음악을 전공) 등 9종이다.

국대안에 대해서는 1946년 6월 말부터 일부 언론에 의해 그 윤곽이 보도된 바 있었으나, 각 대학은 그에 대하여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입시를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미군정의 국대안 발표는 여전히 각 대학에 있어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각 전문대학 입학지원(자유신문, 1946.07.03)

배우자하여도 배움의 터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있던 우리나라 청년학도들은 해방과 함께 그 향학열을 높을대로 높아져서 입학시험을 앞둔 시내 각 전문 대학에는 매일 같이 지원자가 쇄도하고 있는데 특히 고려대학 예과, 경대 예과 등은 13대 1이라는 비율을 보이고 있어 여전히 시험지옥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감이 난다.
다음 각 학교의 지원자수와 장마로 원서접수기일을 연기한 학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성대학 법문학부(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경제과 약간명 150
정치과 상동 88
법학과 약간명 110
문학과 상동 60
철학과 약간명 40
사학과 상동 20

경성대학 의학부(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1학년 60 40
2학년 약간명 2
3학년 상동 2
4학년 상동 1

경성대학 이공학부(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약간명 200(단 예과출신을 제외)

경성대학 예과(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문과 120 1612
이과갑 160 1328
이과을 120 528

고려대학 예과(보전)(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예과 200 2670
학부 100

(후략)

3.2 대학 설립 과정에서의 진통

국대안의 대상이 되는 모든 기관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특히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과의 합병 문제가 가장 진통을 겪었다. 양 교 모두 교직원과 학생 가릴 것 없이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역설적으로 다른 단과대학과 달리,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은 경성대학 설립 이전부터 합병이 거론될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경대 의학부와 의전 합동(동아일보, 1946.07.08)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합동문제에 대하여 그 귀치가 자못 주목되어 오는 바, 군정청 문교부 군정관 부리-핏탠가 중좌는 5일부 편지로서 경성대학의 학부 학생에게 회답을 보내어 합동의 부득이한 조치를 표명하였다. 이 회담 내용에 의하면 현재 경성의전은 그 설비에 비하여 많은 편인데 비하여, 대학의 설비는 학생 수에 비하여 병원과 학교 설비에 여유가 있으므로 합동하면 분리되어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며 또한 합동은 신학기부터 실시될 것이라 한다.이러한 회답을 받은 동 의학부 학생 일동은 7일에 제2호 성명서를 내어 합동안이 타당치 않음을 지적하여 합동안을 철회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합동은 소멸을 의미-경의전 교직원회서 성명(동아일보, 1946.07.12)

방금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을 합동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 하는데, 경성의전에서는 이에 순응할 수 없다고 지난 10일 하오 6시부터 동 병원 신강당에서 교장 심호섭 씨, 원장 백인제 씨 이하 교직원회를 열고 대략 다음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 우리 학교는 이미 광희 3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기 전부터 국립의학교로 창립되었고, 그동안 양으로나 질로나 우리 민족 보건에 공헌한 바가 크고 많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교수진으로 보거나 교직원의 향햑열과 상호 화합의 공기를 보거나 울 학교는 가장 우수한 학원으로 자부하는 바이고 우리들은 경성의전의 발전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느끼는 바이다.(중략) 진구한 교사는 그나마 소실되고 병원은 협작해서 해방 조선의 화급한 요구의 하나인 의육의 중책의 완성을 기하기에는 절대적 골난을 느끼는 바이므로, 필요한 시설을 문교당국에 요구했을 따름이고, 역사 깊은 우리 학원의 소멸을 의미하는 합동설을 인정할 위사는 위로는 교수진으로부터 밑으로는 학생에 이르기까지 추호도 없을 뿐 아니라, 타 학원의 발전을 해하고자 한 사실은 물론, 그러한 생각조차 없음을 성명하는 바이다. 7월 10일 경성의전 교수직원 일동

대학안에 반대, 경대 학생회서 성명(동아일보, 1946.07.25)

경성의전과 서울대학 의학부 합동문제가 나자, 서울대학에서는 반대운동을 계속하여 오던 중 지난 13일 국립서울대학교안이 발포된 후, 다시 2차나 학생대회를 열고 이에 반대 운동을 23일에 재차 다음과 같은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하나, 11교를 1개의 종합대학으로 통합하여 관선 이사회로서 통제지배하려 함은 학원의 자주권을 탈취하고 학원의 민주화를 유린하는 것
하나, 학교 수가 감소되고 불가피적으로 학생 수의 감소를 초래하는 것
하나, 경제학부와 정치학부의 폐쇄와 이공학 계통의 축소는 조선과학발전에 장해를 가져오는 것.

우여곡절 끝에 통합은 되었으나, 한동안 각 대학은 내홍을 겪었다. 이 시기 일련의 국대안 반대 운동을 흔히 '국대안 파동'이라 한다. 국대안 파동은 교수자치와 관권개입의 측면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29]부터, 좌우익의 대립, 미국식 자유주의 교육제도와 일본식 교육제도의 충돌이 원인이라는 관점[30]까지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

사대생들 건의맹휴(경향신문, 1946.10.13)

서울 사범대학 학생 일동은 국립대학안에 대하여 11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구 조건을 들어 맹휴를 단행하는 동시에 학교당국의 긴급선후책을 요망하였다 한다.
하나, 교육자, 학자, 문화인, 기타 각계 명사로서 민주주의적인 가칭 "국대안 심의기관"을 설치하여 그 모순점(이사
회, 학생처 등)을 해결시킬 것
둘, 학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완전보장하는 학생 자치권을 승인할 것
셋, 학내 경찰 간섭을 절대반대하며 이에 관하여 학장은 전 책임을 질 것
넷, 이상 요구조건을 완전 해결하지 못한 시에는 학장은 인책 사임할 것

"학사호"문제로 학생이 교수 구타(동아일보, 1947.07.05)

서울국립대학교의 의과대학 내의 전문부 일부 학생들은 졸업한 뒤의 '학사호'문제로 말미암아 지난 2일 1학년 말 시험이 끝난 뒤, 허규 씨 등 교수 2명을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학장 주택을 습격하였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8명을 퇴학시키고 169명을 정학에 처하였다.
즉, 전 경의전 계열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학교 당국에 자기들이 학습하고 있는 강의과목과 교수는 의학부 학생(전 성대)이 학습하고 있는 과목과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학부 출신자들은 졸업 후 학사호를 달게 되나, 자기네들은 학사호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수차에 걸쳐 동일한 대우를 해주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예과과목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행하여 합격된 의전 출신자에 대해서만이라도 학사호를 수여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국대 총장은 지난 28일 의학부 출신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는 자는 문리과대학에 가서 2년 간 더 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의전부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에 분격하여 지난 2일 드디어 수 명의 교수를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과 설비 등을 파괴학 오후에는 학장 심호섭 씨 댁을 습격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3일에는 의과대학 사무장 댁까지를 습격한 것이다.

특기할 만 한 점은 이 시기 많은 좌익계열 학자들이 경성대학을 떠났다는 것이다. 백남운을 비롯하여 리승기, 도상록[31] 등은 월북하여 이북의 새로운 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하였다. 국문학자 김태준처럼 남로당 활동으로 인해 처형당한 이도 있었다. 북행을 하거나, 이 시기 국립대학 안에 반대한 학자 중 다수가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제국대학 인맥으로 얽힌 사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초기 김일성대학의 창립에는 경성제대, 도쿄제대, 교토제대, 규슈제대 등 다양한 제국대학 출신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의 공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제국대학의 후신이라고 자주 언급되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초창기가 경성제대 출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일본 사학 출신의 리버럴한 학자들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과 대비된다.

학생들도 적지 않은 수가 경성대학과 국립서울대학교를 떠났다. 좌익계열 학생들은 북행을 택하거나 군 입대를 선택했다.[32][33] [34]

3.3 국립서울대학교의 탄생

우여곡절 끝에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의 단과대학과 학과는 다음과 같다.

  • 문리과대학 -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중어중문학과, 언어학과, 사학과, 사회학과, 종교학과, 철학과, 심리학과, 정치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지질학과, 생물학과
  • 공과대학 - 전기공학과, 기계공학과,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화학공학과, 야금학과
  • 농과대학 - 농학과, 임학과, 농공학과, 수의학과, 농화학과, 농생물학과, 농경제학과
  • 법과대학 - 법학과
  • 사범대학 - 교육과, 국문과, 영문과, 사회생활과, 수학과, 물리화학과, 생물과, 가정과, 체육과
  • 상과대학 - 경제학과, 상학과
  • 예술대학 - 미술부(제1회화과, 제2회화과, 조각과, 도안과), 음악부(성악과, 작곡과, 기악과)
  • 의과대학 - 의과[35]
  • 치과대학 - 치의학과
  • 예과

단, 예과는 경성대학 예과 재학생이 모두 졸업하는 1947년까지만 한시적으로 존속하였다. 예과생들은 원하는 전공으로 본과에 진학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학생이 문리과대학, 의과대학, 공과대학을 선택하였다.

서울대학교 예과를 폐지 (경향신문, 1948.05.25)

국립대학교의 예과 제도는 금년 예과 졸업생 870명을 최후로 폐지하게 되었다는데, 동 예과는 일제시대에 창립된 후 20년 간 존속되어 왔었으며, 국립대학제 실시로 말미암아 없어지게 되었는데 금년 졸업생들의 취학 희망은 다음과 같다.
-문리대 지망 195-정치과 71-영문과 22-불문과 21-철학과 21-사회과 19-상대 16명-법대 18명-예대 1명-농대 4명-공대 291명-의대 131명 (이상 21일 현재)

마지막으로 1950년 사립 서울약학대학이 관으로 이관되어 서울대학교에 편입됨으로써 서울대학교로의 통합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후의 학과 변천과정은 서울대학교/학부 항목을 참고할 것.

4 관악캠퍼스 이전

1971년 관악캠퍼스 조성이 시작되어 1975년 완료되었다. 서울대학교/캠퍼스 참고.

5 경성제국대학 문제

일본과 엮이는 게 어지간히 신경쓰였는지 공식 발표는 1946년 폐교된 경성대학 등 10개 학교의 시설을 바탕으로 신규 설립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식 역사야 어쨌든 사실은 엄연한 사실로, 실제로 법대나 농생대, 의대 등의 일부 단과대학은 자신들의 근원을 경성제대나 설립 당시 통합된 전문학교, 또는 구한말 설립된 관립학교[36]로 보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2010년 3월 말에 서울대 총동창회에서 1895년으로 개교년도를 바꾸는 것이 어떻냐고 제의한 바 있다. 또한 의대는 국립병원이라는 점을 내세워 광혜원이 세워진 1885년까지 올려잡는 경우가 있다.[37]

경성제대를 비롯한 서울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구제전문학교/사범학교 졸업생들은 서울대를 모교로 생각하고 있어서, 학교 내의 각종 도서관에서 경성제대 졸업생들이 기증한 책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어로 누렇게 뜬 책들은 거의 100%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설립 주체와 설립 목적이 바뀌었다는 점, 경성제국대학 이외에 여러 단과대학이 합쳐져 만들어진 학교라는 점[38]을 들어 경성제대 계승론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세간의 인식과는 반대로 하나의 학교라는 관점에서 경성제국대학이 국립 서울대학교에 남긴 유산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직원은 거의 일본인이었는데, 해방 당시 조선인 교수는 1명[39]이었고, 역대 통틀어도 4명에 불과하며, 이들의 재직 기간을 다 합쳐도 2년[40]이 채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교수, 연구 인력의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경성제국대학의 유산은 캠퍼스와 교정, 소장도서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만 대학이 아닌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국가 우위의 대학교육, 관료 지향적 학생들의 양산 등의 현상이 식민지 조선의 교육에 연원을 두고 있고, 그 중심에 경성제국대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경성제국대학의 유산은 결코 적지 않다. [41]

2010년 10월 10일 기사를 보면 서울대 최고의결기구인 평의원회는 1895년 한성사범학교[42] 와 법관양성소가 개설된 이후부터 경성제대 시절까지를 포함해서 묘사하는 역사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50년의 역사를 버리고 싶지 않은 모양. 다만, 서울대학교의 "개교"는 여전히 1946년이고 1895년은 "근대적인 대학 교육이 시작됐다는 의미"에서 '개학(開學)연도'로 한다'고 결정했다고 한다.[43]

6 일본 기피증(?)

서울대가 하드웨어를 이어받은 경성제국대학은 제국대학인데, 이것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서울대를 현재도 친일파를 배출한 온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일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 설립모체라는 점은 서울대를 깔때 흔히 사용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이고, 사실이 사실인지라 학교 차원에서도 은근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일례로 설립 직후인 1947년에 외국어학과의 대대적인 개편을 감행하여 당시 있던 일문학과(제국대학 당시 문학과. 단 이때의 문학과는 일본어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도 합쳐서 문학과라고 불렀다.)를 폐지했으며 아직도 부활되지 않고 있다.

미군정청은 미국식 대학의 한국 설립과 영어강의 진행 등 미국식 학제의 이식을 원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어가 저절로 배제되고, 정부수립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아무도 일본의 지금과 같은 재약진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일본어를 학문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언어로 간주하여 해방 이후 설립되는 신생 대학들은 일문학과를 굳이 개설할 필요성이 없었다는 정도가 유력한 설로 취급되고 있다[44]. SKY 중에서 유일하게 일어일문학과가 있는 고려대학교도 1983년에야 만들어졌을 정도이며 연세대학교에는 아예 일어일문학과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창립 당시 일본의 도쿄대학에 조선어문학과가 없어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그러나 당시 국대안을 추진하면서 일문학과를 없앤 것은 미군정청이기 때문에 별로 관련은 없다. 도쿄대에 조선어문학과가 없어서 서울대에 일어일문학과가 없다는 말은 서울대생이나 세간 사이에서도 꽤 퍼져 있는 잘못된 루머이다. 2000년 서울대학교에서 일어일문학과를 설치하려는 시도가 있자 당시 사회학과 교수였던 신용하 교수가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했던 발언이 그 진원지로 보인다.[45] 여담으로 도쿄대학 대학원 과정에는 한국조선문화연구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80년대 후반까지 입학심사에 제2외국어일본어 과목에서 얻은 점수를 반영하지 않아 수많은 시비에 휩싸였고 1992년 이에 대한 헌법소원이 진행되어 서울대 측의 해명과 사과문의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대학측에서 실시하는 입학심사는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 중 일부이고, 당시 고3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소송(92헌마68, 92헌마76)은 패소했다. 물론 현재는 내신이나 수능 제2외국어의 일본어 과목도 반영되고 있다.

소송에서 이겼지만 일본어 성적을 반영하지 않는 점이 대외적으로 공개되고 문제가 되어 버렸기에 일본어 강좌를 개설하고 교양과목에 '고급일본어' 과목을 추가하게 된다. 기초나 중급일본어 강좌도 없이 고급 일본어만 있는 점, 교수도 일본인이고 애초 강의계획서부터가 일본어로만 써져 있으니 숙련자가 아니면 수강하기도 힘들다는 점, 기껏 개설된 고급과정도 난이도가 상당히 어중간해서 중급도 고급도 아닌 점에서 많은 불만을 사고 있다. 한동안 학점에 반영조차 되지 않는 유명무실한 과목이었지만 최근 정식 교양과목으로 학점화는 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 언어교육원에서 일본어 강좌를 등급별로 개설하고 있으며, 국제대학원과 사회과학대학이 합동으로 일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일본사 및 일본정치에 관한 강의 역시 여타 대학보다 훨씬 나은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실상 공식 일본어 교양강의가 개설되지 않는 점을 제외하면 서울대 학교의 일본연구는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인문계의 탑 레벨이다.[46] 또한 전후 일본 인문학이 약진하는 현재에 와서 국어국문학과나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언어학과 등에서는 일어일문학과 개설을 바라고 있는 실정이며 실제로도 꽤 예전부터 일본 관련 수업과 연구를 진행하는 학부 개설에 노력해왔다.

결국 2012년에 인문대학 내 신설되는 아시아언어문명학부[47]에 '일본언어문명전공'이라는 이름의 일본학 과정이 생겼다. 참고로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는 지금까지 서울대에서 다루지 못한 일본, 인도, 동남아시아, 아랍권에 대한 언어, 역사, 종교, 사상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7 대학 입시에서의 국어 미반영

역사적으로는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이 공포되기 전, 국어를 배운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48]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회에서 입시시험과목에 국어와 한문 과목을 제외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자 총장이었던 앤스테드 대위가 “자국어 시험을 치르지 않고 학생을 뽑는 대학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고 default 훈계한 역사가 있다. 수외과

8 법인화 논쟁

서울대는 세계 10위권 대학 진입을 목표로 법인화를 통과시켰다. 법인화가 되면 서울대학교의 명의로 계약을 체결하고 재산을 취득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법인화를 통해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하여 자율성을 가지겠다는 것이다.(사립대가 되겠다는 것은 아님) 즉 서울대는 법인화를 통해 대학의 경쟁력을 갖춰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도약하겠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서울대학교는 '국립서울대학교'에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가 된다.

학생회 등은 법인화가 되면 등록금이 오를 수 있고, 학과 개설/통폐합 권한이 대학으로 넘어가므로 기초학문이 무시당하거나 학교에 영리 기업이 들어올 수 있는 등의 이유[49]를 들어 법인화에 반대하고 있다. 서울대 교수진들은 법인화 내용이 전혀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있고, 지방거점국립대학교들도 자신들도 법인화가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법안 자체가 통과되는 과정이 보기에 안 좋아서[50] 넘어야 할 산이 여전히 많이 남았다.

이장무 전 총장 시절 법인화를 밀어붙이면서 내세운 논리가 국가로부터 더 많은 예산을 확보하고 교육부 소속 국가기관이라 제약이 많은 인사관리권을 가져온다는 것이었는데, 현재 통과된 상황에 따르면 돈은 돈대로 못받고 국가의 입김이 더 강해지는 상황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애초에 서울대는 국가기관 아니었나? 물론 서울대학교가 한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볼 때 어지간하면 막장으로 가도록 사람들이 냅두진 않겠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현재 한국의 정책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망했어요 덕분에 재학생들은 등록금이 뛰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야한다고 반쯤 진담으로 말하고 있는데, 08학번부터는 심화/이중전공 의무화로 8학기 졸업이 엄청나게 힘들어졌다! 현재 서울대학교 본부에서 어떤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

도쿄대학 같은 경우는 법인화 이후 예산이 엄청나게 늘었지만(물론 다른 국립대학들이 그만큼 쪼그라들었다... 서울대 법인화도 아마 이 길로 갈 확률이...) 각 학과에 대한 본부의 통제력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하는데, 서울대 교수들의 학내 지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 일부 찬성론자들은 이참에 교수들이 테뉴어 받고 띵가띵가 노는 걸 막자는 이야기를 하지만 애초에 모든 학문의 연구성과가 단순히 기간 내에 압박을 넣는다고 튀어나오는 건 아니다.

서울대 총학생회에서는 5월 30일 학생총회를 성사시키고 법인화 전면 재검토[51] 및 법인서울대 설립준비위 해체 요구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된 이상 본부로 간다본부 건물 점거를 결의했다. 당초 총학측에서 제시한 행동방침은 동맹휴학, 국회 앞 집회, 본부점거 세 가지였는데 표결을 실시한 결과 압도적인 표차로 본부점거가 결정된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화끈하게 본부를 점거해 버렸다.[52]

점거라는 행동은 근본적으로 인원수가 딸리면 저지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시험기간임에도 서로 교대식으로 본부를 오갔다.원래 시험기간에 잉여력이 폭발하는 법 직접 본부점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식사와 간식, 각종 물품(침구류, 멀티탭, 살충제 등)을 지원했다. 심지어 몇몇 교수님들과 강사님들도 점거에 참여했다.(...) 시험기간임을 감안하여 본부 4층 한 층은 본부 4열로 명명하고 책걸상을 구비하여 시험공부가 가능한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이게 '공부하면서 시위하는 서울대생들'이라는 식으로 언론에 의해 화제가 되기도...

6월 16일~17일 현재 일부 학생들(명칭:본부스탁을 추진하는 날라리 내부세력)이 주축이 되어서 법인화 반대 행사로 개최하려고 했던 본부스탁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이유는 무대 설치 차량등 행사 진행 차량을 학교 입구에서부터 검문을 통해 틀어막고 총장잔디로 들어가는 도로에 버스 바리게이트를 쳐서 2중으로 막고 있기 때문. 거기다 본부에선 본부스탁 진행기간 중 총장잔디에 들어가는 모든 학생을 퇴학시키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러한 본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이른바 '경륜산성'을 피해 손으로 직접 무대 차량을 들어옮기는등, 공연을 성사시켜 16-17일 양 일에 걸쳐 성황리에 공연을 개최하였다. 이번 본부스탁은 흥했다!!!

그러나 본부스탁에서 점거투쟁의 동력은 피크를 찍고, 종강 후 본부에는 점거인원도 적고 동력을 상실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53] 결국 6월 25일 열린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의 결과로 본부와의 내용도 없는 합의를 받아들이고 28일 아침 8시 이후로 모든 점거를 풀었다.

한편 9월 24일에는 2010년도 법대 학생회장이라는 학생이 법인화 반대 고공시위를 벌이다 50시간만에 119에 의해 실려나가는 일도 있었다. [1]

2011년 12월 28일 결국 법인화가 되었다. 학생들은 분향소를 차리고 故 국립 서울대학교를 추모했다(...)

한동안 캠퍼스를 뜨겁게 달궜던 법인화 논쟁은 대선기간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래 내용 참조.

9 국공립대 공동학위제 논쟁

4.11 총선 이후 대선 정국이 시작되면서 민주통합당에서 국공립대 공동학위제를 정책으로 추진한다고 발표하였다. 전국의 모든 국공립대를 한 대학교로 만들어서 어느 대학교에서나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입학 및 졸업 학위도 공동으로 수여한다는 계획이다. 이 정책에 따르면 서울대를 나오던 전남대를 나오던 똑같은 국립대 졸업이기 때문에 같은 대학교에서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보겠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따라 많은 서울대학교 재학생들은 이 정책을 사실상 서울대 폐지나 마찬가지라고 보고 노무현 정권때의 서울대 죽이기가 다시 부활했다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4.11 총선이후 보여주었던 민주통합당 및 통합진보당의 여러가지 병크에 더해서 직접적으로 서울대 구성원들에게 타격을 주는 정책을 추진하는 만큼 기존의 소위 진보정당에 우호적이었던 시각이 정반대방향으로 바뀌었고 민주통합당이 해당 정책을 추진하는 이상 새누리당을 지지하겠다는 발언도 스누라이프에서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다.하지만 새누리당에서 서울대 세종시 이전을 검토한다면 어떨까[54] 특히 법인화 완료 이후 민주통합당에서 발표한 정책이라 서울대학교 법인화가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도 나타나고 있다.[55] [56]

특히 총학생회에서 작금의 상황에 대한 코멘트를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이 까이는 듯하다. 정문점거하던 패기는 어디로 갔어요? 해당 총학생회장은 해당 사안이 한창 뜨거울 때에도 다른 정치적 활동은 활발하게 했기 때문에 학생회 임기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2013년 1월 현재까지 까이고 있다. 사건이 처음 터졌을 때에는 농활 가있느라고 현재 의사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라고 하면서 페이스북에는 셀카와 자기가 농활에서 만든 음식 등을 올려대며 히히덕거리고 있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방학이라 전학대회를 할만큼 위원들이 모일 수가 없어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이름으로의 대응은 힘들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해적녀의 시위에는 참가해서 해적녀 옆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서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스랖에서는 탄핵드립 등 온갖 이야기들이 다 나오고 온갖 욕을 다 먹었으나 모르쇠로 일관하고 페북에서 시시덕거리다가 어느새 임기가 끝났다. 평소에 스랖에 상주하며 댓글도 달고 키배도 하던 모습은 대체 어디에 갔나

선거 기간에는 그럴듯한 말과 샤대문에 올라가는 등의 퍼포먼스로 학생들을 속여넘기고 당선된 후에는 학교는 나몰라라 하고 학생회장이라는 직함만 챙겨서 정치활동에만 몰두하는 '잘못된 운동권 총학'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평. 이 일과 담배녀의 이연타로 운동권 뿐만 아니라 그냥 학생회 조직 자체가 2012년 말 이후 학내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하며 총학, 인문대, 사회대, 법대, 공대, 농대로 이어지는 사상 초유의 선거 무산 사태가 벌어졌다.
  1. 정확히는 법관양성소가 몇 달 더 빠르다.
  2. 일단 대학 차원에서는 광혜원의 적통을 주장하는 연세대학교와의 대립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경성의전 참고.
  3. 그렇지 않은 사범학교는 이후의 교육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4. 센다이의전 -> 도호쿠제국대학, 후쿠오카의전 -> 규슈제국대학, 오사카의과대학 -> 오사카제국대학, 아이치의전 -> 나고야제국대학
  5. 대학 소속이지만 전문학교에 상당하는 과정
  6. 교직원에 대한 테러 등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흠좀무
  7. 일단 연세대학교는 학교의 역사를 광혜원 설립일인 1885년으로 보고 있다.
  8. 성대 이공학부 설립 후, 평양에 대동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9. 경성농업학교의 후신이자, 지금의 서울시립대의 전신이다.
  10. 타쿠쇼쿠대학의 전신
  11. 행정과 폐지
  12. 주로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이런 불만을 제기했다. 조선인이야 대학은 커녕 고등보통학교 졸업자도 드물었으니...
  13. 앞에서 서술한 대로 조선 이주 일본인들의 불만이 설립 이유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내지인만의 학교로 구상했다.
  14. 반면 대만의 경우, 고등학교가 존재하였는데 앞서의 문제가 그대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대북제대에도 예과를 설치하게 되었다.
  15. 선발 인원뿐만 아니라 입학 전형 자체가 차별적이였다. 뭐 시험과목이 일본어인 것은 당연하니 응시자들도 그러려니 했지만 조선인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입시과목선정에다 무엇보다 지원자 전원에게 형사,순사가 찾아와서 신분조사까지 했다. 동아일보 1924년 3월13일자 참고.
  16. 이공학부에 진학할 예과생은 1938년부터 모집하였다.
  17. 이 경우에도 역시 학위는 법학사로 똑같이 나왔다.
  18. 일단 경성제국대학 당시의 교수진은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이었으므로 일제 패망 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요즘으로 치자면 조교 정도의 인원만 조선인이었다.
  19. 아닌 게 아니라 교문 앞에 붙은 경성제국대학의 '제국'을 일제가 패망하자마자 흰 종이로 지웠다고 한다.
  20. 1945년 10월 16일 미 군정법령 제15호로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이 '서울대학'으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경성대학과 더불어 '서울대학'이라는 명칭도 혼용되었다.
  21. 아래에도 나오겠지만 언급한대로 연구인력 전원이 교체되었으므로 일단 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교는 학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22. 법학과, 정치학과는 법학사, 경제학과는 경제학사 학위 수여
  23. 학위는 문학사
  24. 학위는 문학사
  25. 학위는 문학사
  26. 이 시기 경성대학을 지칭하는 표현이 다양하다. 일정 시기에는 성대城大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경성대학의 공식 명칭은 서울대학이 되었고, 약칭은 경대京大가 되었다. 1946년의 기사들을 보면 동일한 대학을 두고 경성대학, 서울대학, 경대, 성대 등의 여러 표기가 난립하고 있다.
  27. '대학교'라는 말이 학교의 공식명칭이 된 우리나라의 첫 사례이다. 국대안 이전의 우리나라는 고등교육기관의 이름으로 '대학'을 썼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을 제외한 다른 한자문화권 역시 일반적으로 '대학교'가 아닌 '대학'을 사용한다.
  28. 경성대학을 가리킨다
  29. 좌파 계열 학자들의 시각
  30. 국대안에 관여한 교육학자 오천석의 시각
  31. 북한의 핵물리학자
  32. 이전 판에 김종필이 국대안에 반대하여 서울대 사범대를 중퇴했다는 설명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종필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자) 서울사대 중퇴후 서울대의 국립대학안을 반대하다 피신 차원에서 사병입대했다는 소문이 있다." "(김종필) 완전히 연기도 안나는 소문이다.나는 사실 국대안을 찬성했다. 경성사범학교가 승격되는데 왜 반대하겠는가. 3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신뒤 집안이 급격하게 기울었다.당시 소형 자동차까지 타고 학교에 다닐 정도였는데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제 내 힘으로 앞길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파고다공원앞 모병소에 원서를 냈다.그리고 신설부대인 13연대로 들어갔다 두들겨맞고 탈영한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기사링크
  33. 이전 판에 보면 남덕우 역시 국대안을 반대하여 서울대학교를 떠났다고 서술하고 남덕우 항목에도 같은 서술이 있었는데 역시 잘못이다. 본인이 집필한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 보면 해방 당시 을지로에서 프린트사를 운영하다가 이듬해 국민대학관(국민대학교 전신)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정경학과에 입학했다고 말하고 있다.
  34. 그러나 김종필, 남덕우 등 정치인들의 증언은 곧이 곧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국대안 파동 당시 국대안을 반대했다고 증언하는 것은 해방 직후에 자신이 좌익 활동을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정치적 위치에서 좌익으로 오해받응 수 있는 과거를 고백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동이기 때문에, 설령 학생 시절 국대안에 반대했더라도 솔직하게 증언하기를 기대하기는 난망이다.
  35. 부속기관으로 부속병원, 부속간호학교가 존재
  36. 가장 역사가 긴 단과대학은 법대인데, 이들은 1895년 설립된 법관양성소를 연원으로 삼고 있다. 법관양성소는 이후 경성전수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거쳐 해방 이후 경성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일부와 함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발족한다.
  37. 이로 인해 현재 광혜원-세브란스병원-세브란스의대로 광혜원의 전통을 나누어 계승한 연세대학교와 정통성 분쟁을 벌이고 있다.
  38. 단순히 경성제국대학 역사만 따질 경우 다른 단과대학들의 역사를 흑역사화 하는 것이 된다.
  39. 해방 직전인 7월 17일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김종원이 교수로 임명됨.
  40. 13개월, 4개월, 1개월, 3일
  41. 정준영, '경성제국대학과 식민지 헤게모니' 참조.
  42. 사범대학의 전신이다.
  43. 이전 판에 한국 최초의 4년제 대학이 1905년의 숭실대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 대한제국 말기와 국권 병탄 직후에 ‘대학(大學)’이나 ‘대학부(大學部)’라는 명칭을 가진 고등교육기관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학으로 볼 수 없다. 이 명칭을 가졌던 현재의 일부 대학교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대학과 대학부라는 명칭을 가진 학교를 인가한 사실을 들어, 자신들이 최초의 대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 총독부의 숭실협성대학, 경신학교 대학부, 이화학당 대학부의 인가 내용을 보면, 전문학교급 인가였으며, 대한제국의 인가사항을 연장하여 임시로 인가한 것에 불과했고 정식으로 전문학교령이 제정된 이후에는 모두 인가를 상실했다. 이 시기 일본의 교육법제상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은 설립ㆍ운영할 수가 없어 1918년에 대학령이 제정되기까지는 일본에서도 제국대학 이외에는 대학의 설립과 운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가 상기 학교의 대학이나 대학부라는 명칭을 대학으로 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법제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1926년 경성제국대학 본과의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대학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44. 사실 교수를 담당할 전문가도 없었다. 어문학과는 단순히 어학을 배우는 곳은 아니다. 해방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어 서적으로 공부하고 일본말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데다가, 패망한 일본과는 국교나 교류도 없어서 실용적 어학 교육의 수요는 적었으며,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네이티브들이 넘쳐나서 취직도 못할 일본 문학을 전공하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45. 신 교수는 서울대가 일문과를 먼저 만들거나, 우리는 학과를 만들고 도쿄대는 관련과목만 개설한다면 민족을 대표하는 국립대로서 있을 수 없는 굴욕이라며 자존심을 반대 이유로 내세우기도 했다. (출처는 http://www.snujn.com/index.php?_filter=search&mid=news&category=488&search_keyword=69%ED%98%B8&search_target=extra_vars1&document_srl=1902)
  46. 물론 서울대 소속 연구자의 질과 학 생들의 일본에 대한 향학열이 충족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일본사 및 일본정치에 대한 강의 수 자체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동양사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경우에 도 이에 대한 불만이 크다. 개개의 연구자들이 눈물겹게 노력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시스템의 문제를 해소 하지는 못한다. 실제 로 일본 기피증이 있 든 없든 학문연구에 장애가 된다는 것은 문제다.
  47. 학부생 정원은 법대의 로스쿨 전환 및 약대의 2+4 체제 전환으로 남은 학부생 정원의 일부를 이용해 마련했다.
  48. 실제로 일제당시,‘조선어'는 1938년에 선택 과목이 됐고, 43년에는 아예 폐지됐다. 해방 뒤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시간이 한국어 시간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교과서도 없었고 교사도 부족했다.
  49. 학생들이 다양한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은 좋으나, 반대로 돈 없는 학생들은 이러한 서비스에서 소외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50. 야당이 점거한 국회의사당을 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여 돌파해 2분만에 법안을 통과시켰다(...).
  51. 반대가 아니다
  52. 학생총회가 정족수를 채워 성사된 것만도 기적인데 그 자리에서 점거를 결의하고 바로 행동에 옮기는 걸 보고 오히려 총학 집행부에서 놀랐다고 한다.
  53. 앞서 말했듯 점거는 충분한 인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방학으로 접어들면 동력이 감소할 수밖에...
  54. 새누리당의 경우 세종시 이전을 검토까지만 했고 정식으로 공약으로 내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인제 등 일부 핵심인사들은 이후에도 수 차례 이전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아주 폐기한 정책은 아닌 듯...
  55. 법인화의 가장 큰 효과가 정치권으로 부터 압력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
  56. 물론, 이것은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수준의 결과론이다. 법인화를 추진하는 쪽에서도, 찬성하는 쪽에서도 정치권의 이러한 움직임을 예상하지도 못했고, 이러한 이유로 법인화를 추진하거나 찬성하지도 않았다. 거기다 법인화 이후로 학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수익사업은 학내 구성원들에게 유익하지도 않고 수익성도 없는데다가 소위 '돈 안되는' 과에 대한 지원 감축이 벌써부터 진행되는 것을 보면.... 거기다 국공립대 통폐합 이야기를 꺼내던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가 낙선하면서 국공립대 통폐합논쟁이 사실상 종결됨에 따라 그 결과론도 다시 의미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