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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경기도 도지사 | ||||
28대 이해재 | ← | 29대 이인제[1] | → | 권한대행 임수복 30대 임창열 |
제15대 대통령 후보 | |||
기호 | 이름 | 기호 | 이름 |
1 | 이회창 | 5 | 허경영 |
2 | 김대중 | 6 | 김한식 |
3 | 이인제 | 7 | 신정일 |
4 | 권영길 |
제17대 대통령 후보 | |||||
기호 | 이름 | 기호 | 이름 | 기호 | 이름 |
1 | 정동영 | 9 | 전관 | ||
2 | 이명박 | 6 | 문국현 | 10 | 금민 |
3 | 권영길 | 7 | 정근모 | ||
4 | 이인제 | 8 | 허경영 | 12 | 이회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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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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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
이름 | 이인제(李仁濟 / Lee In-je) |
생년 | 1948년 12월 11일 |
출생지 |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읍 부창리 (현 충남 논산시 부창동) |
본관 |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 |
학력 | 서울대학교 행정학 학사 |
가족 | 4남 3녀 중 3남 부인 김은숙, 딸 이명주, 이진화 |
경력 | 제21회 사법시험 합격 대전지방법원 판사 통일민주당 대변인 제10대 노동부 장관 제29대(민선 1기) 경기도지사 제 13,14,16,17,18,19대 국회의원(6선) 국민신당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새천년민주당 제16대 총선 중앙선거대책위원장,상임고문, 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총재권한대행 민주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선진통일당 대표최고위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
정당 | 새누리당 |
공식 사이트 | 홈페이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
역대 소속정당 | 통일민주당(1988~1990) 민주자유당(1990~1995) 신한국당(1995~1997) 국민신당(1997~1998.9) 새정치국민회의(1998.9~2000) 새천년민주당(2000~2002.12) 자유민주연합(2002.12~2006) 국민중심당(2006~2007) 민주당(2007~2008) 민주당(2008) 무소속(2008~2011.10)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2011.10~2012.11) 새누리당(2012.11~) |
별명 | 피닉제 |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6선 의원(전 충청남도 논산시 계룡시 금산군 선거구) 출신이다. 판사 출신 노동인권 변호사에서 최연소 노동부 장관과 경기도 도지사를 역임.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온 인물. 전 새누리당 최고위원.
2 상세
충청남도 논산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서울특별시로 상경,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졸업 이후 유신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수사기관에 불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2] 군에 징집되어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1979년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1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어 1983년까지 약3년간 재직하였다. 1983년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김영삼의 소개로 1987년 정계에 입문하나 배신하고 다시 의기 투합을 하는 것을 반복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써의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지역구는 경기도 안양시갑. 현재 만안구 지역이다. 이후,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재선하였고, 19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만 45세 최연소 노동부 장관으로 기용되는 기록을 세웠다. 노동부 장관 시절 고용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업적을 남겼으며, 과거 변호사 시절 부터 실상을 잘 알고 있었던 산업현장을 찾아 다니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등 발로 뛰는 장관의 모범을 보여준 덕분에 당시 국민들에게 상당히 좋은 이미지로 각인되게 된다.
1995년 6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 도지사 선거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 노동부 장관 시절의 좋은 이미지 덕분에 여유롭게 당선되면서 민주자유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에서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이런 명성에 힘입어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며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게 된다. 경쟁 후보인 이회창의 압도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부터 이회창을 압박할 정도로 급속히 부상하면서 1차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하고 이회창과의 결선투표까지 갔지만 결국 이회창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내 경선과는 상관없이 급속도로 성장세를 타던 자신의 독자적인 지지 기반에 부응하고자, 결국 그는 같은 해 9월 13일 대선후보 경선 결과 불복을 선언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신당 후보로 독자 출마, 19.2%를 받아 3위에 오른다.
이인제의 경선 불복 및 대선 출마 덕분에 보수 진영의 표가 분산되어 어부지리로, 자민련의 김종필과 이른바 DJP 연합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후보가 당선됐다. 출마 선언 후 상당 기간 여론조사 2위를 달리며[3] 위력을 보였으나, 신생 정당은 기존조직과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고, 이회창 측의 강력한 네거티브 공세로 인해 끝내 지지율이 뒤집히며 3위로 밀려났다. 만약 이인제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이 아니라 무난하게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 1위 김대중이 40.3%였고 2위 이회창이 38.7% 였다. 3위 이인제가 19.2%임을 감안하면 김대중 당선의 1등공신인 셈. 본인이 의도하진 않았겠지만.[4]
다만, 그의 경선불복과 대권행보가 단순히 이인제 개인의 정치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김영삼의 의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5]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국무총리 및 당대표로 있었던 이회창과 껄끄러운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과거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서 껄끄러운 관계로 말이 많았던 노태우를 4000억원 비자금 조성 및 12.12 군사반란 혐의 등으로 내쳤듯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경우 본인 또한 퇴임후에 정치적으로 크게 다칠 것을 염두하여[6][7]이인제를 조종해 이회창의 대권을 막게 한 것이라는 논지. 사실 이인제의 경우 1997년 대선 당시 나이가 만 49세로 상당히 젊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앞으로 차기 대권에서도 기회가 많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일리있는 논리였다.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약 8개월 간 이만섭과 더불어 국민신당을 지켰으나, 1998년에 치러진 4월 재보선, 2회 지방선거, 7월 재보선 등 연이은 선거에서 국민신당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지방선거에서는 이인제의 고향인 논산시에서 시장을 배출했을 뿐이었다. 한편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연정 역시 의석 수 부족 및 차기 정치 지도자 부재를 통감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눈에 들어온 것이 국민신당과 이인제였다. 1998년 8월 29일, 국민회의는 국민신당과의 합당에 합의하면서 이인제의 세력도 받아들여, 이인제는 일약 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를 마다하고 자민련의 텃밭인 고향 논산에 출마, 현역 김범명 의원을 꺾고 당선되면서 그의 주가는 최정점에 달했고, 16대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가장 대세였으나, 이인제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노무현이 국민참여경선 과정과 영남 후보 대세론까지 더해지면서 드라마틱하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8] 15대 대통령 선거와는 달리 대통령 후보가 되지는 못했다.[9]
이 후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 후보 낙선운동(...)에 나섰으나, 각종 공작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대통령후보 자리를 유지하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이 후 여러 정당을 떠돌면서 매번 아슬아슬한 격차로 당선되며[10] 피닉제라는 애칭(?)을 얻었으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후보에게 예상밖의 역전패를 당했다(...)
19대 국회의원 임기가 종료되고 나서는, 국내 로펌으로 자리를 잡았다. 정계에서 잠시나마 자리를 뜨는 듯.
3 피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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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하고는 관련없다.
2008년에 만들어진거라 이미지에는 고작 9회의 당적 변경 경력이 쓰여 있지만, 총 13번이나 당적을 바꿨다. 덕분에 정당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그 정당의 기를 빨아먹어(...) 내 이름은 피닉제 날개짓할때면 둥지를 태워버리지국회의원에 당선된다는 평가가 많다. 좋게 말하면 자체 지지율이 상당하거나 진영에 관련없이 높으신 분들 전반에게 인식이 좋다는 말이 되겠지만 현실은(...). 그외에도 경선 불복으로 신당 창당을 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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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최저득표율로 당선되었을 당시 개표 방송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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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당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국민신당 —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 국민중심당 → 민주당 — 통합민주당 → 무소속 → 자유선진당 — 선진통일당 — 새누리당 (당명 변경이나 합당 등 타의적이 아닌 자의적 변경은 → 표시))
이러한 경력 때문에 대표적인 팀킬러 철새의 표본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렸으며, 이제는 철새 따위는 넘어선 불사조 취급받고 있다. 통칭 '정당(파티) 브레이커파멸의 천사'나 '불사조', '피닉제(피닉스 + 이인제)' 등의 별명으로 불린다.관련기사 123 JTBC에서 정관용 앵커가 직접 이 별명으로 이인제 의원을 데려다놓고 물었는데 과분한 별명이라고 한다.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사실 정치적 성향은 좌익도 좋고 우익도 좋다고 한다. 그냥 역대 대통령은 다 좋아한다고 한다.
2012년에는 딴지일보에서 기네스북에 '당적 변경 횟수 세계 신기록' 부분에 이인제를 등록시켜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기네스북측에서 그런 기록 취급 안한다고 반려시켰다.(…)
2014년 3월경 R모 웹에서 "당원증 콜렉터"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
2014년 10월 1일에 방송된 TV조선의 <강적들> 47회에서 이인제 의원의 당적변경을 전격 분석(...)한 바 있다. 그런걸 왜 분석해.... 여기에서는 당명 변경, 탈당과 입당, 합당 등을 고려하여 그간 13번이라고 알려져있던 당적변경을 7회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이력과 충청도 간판 정치인중 하나라서 그런지, 같은 충청도 출신인 굽시니스트[11]의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는 준주인공급으로 나온다.
2016년 4월 13일 SBS 선거방송인 2016 국민의 선택의 바이폰중 '절대뱃지를 찾아라'에서는 불을 뿜는 불사조의 모습을 보였다.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 gif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후보에게 패배함으로서 드디어 피닉제의 전설이 막을 내렸다. 몰락의 과정도 극적이었는데, 개표가 좀 일찍 진행된 계룡시와 금산군에서 앞서 가고 국민의당 후보와 김종민 후보의 표가 분산된 것으로 나타나면서 이번에도 또 역시 살아남나 했었는데[12] 개표가 늦게 시작된 논산시에서 김종민 후보의 표가 더 많이 나오면서 야금 야금 따라잡히기 시작하더니, 계룡, 금산의 개표가 사실상 끝나고 논산만 개표가 15% 정도 남은 상황에서 결국 역전 당해 최종적으로 1%(1038표)차로 낙선했다.
그가 몸담았던 새누리당 역시 선거에서 참패함으로서 그가 몸담는 정당은 결국엔 패망한다는 징크스는 끝까지 이어갔다. 여담으로 이 지역의 선거는 사실상 이인제와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대리전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안희정의 고향 역시 논산이고 김종민 후보는 안희정과 매우 가까운 측근 인사였기 때문이다.
한편, 낙선 다음날 낙선 소감을 트위터로 밝혔는데 밑에 달린 멘션이 네다칰....
칰은 디시인사이드 야구 갤러리에서 (충청도 연고지인) 한화 이글스의 비하, 조롱 목적으로 쓰이는 용어이며, 특히 프로필 사진이 LG 트윈스인 것으로 보아 한화의 비칭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혹은 그냥 불사조-새-닭으로 연결한 것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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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는 이런 것도 있다. 이인제 눈물을 거둬~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갑) | 통일민주당 | 29,325 (32.5%) | 당선 (1위) | 1990년 3당 합당 민주자유당으로 당적변경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갑) | 민주자유당 | 39,232 (35.8%) | 당선 (1위) | 1995년 6월 사퇴 (경기도지사 출마) |
1995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 민주자유당 | 1,264,914 (40.6%) | 당선 (1위) | 1997년 9월 사퇴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 |
1997 | 제15대 대통령 선거 | 국민신당 | 4,925,591 (19.2%) | 낙선 (3위)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논산시/금산군) | 새천년민주당 | 66,957 (65.4%) | 당선 (1위) | 2002년 자민련으로 당적변경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 자유민주연합 | 42,242 (44.9%) | 당선 (1위) | 2006년 국민중심당에 흡수 2007년 민주당으로 당적변경 |
2007 | 제17대 대통령 선거 | 민주당 | 160,707 (0.7%) | 낙선 (6위)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 무소속 | 23,595 (27.5%) | 당선 (1위) | 최저득표율 당선[13] 2011년 자유선진당 입당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 자유선진당 | 40,076 (42.4%) | 당선 (1위) | 2012년 새누리당과 합당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 새누리당 | 43,898(42.6%) | 낙선 (2위) | 불사조, 꺾이다 |
피닉제답게 여기저기 난잡한 정당을 확인할 수 있다. 7선을 바라보면서 단 한번도 같은 이름의 정당으로 총선에 출마한 적이 없다. 이회창과 마찬가지로 대선 외의 선거에서는 불패의 정치인이었으나 끝내 20대 총선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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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선에 다시 서서 : 2003년 작.
파일:Maiine111.png |
- 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 2007년 작.
파일:L9788997871117.jpg |
- 통일은 경제다 - 이제는 통일시대 : 2014년 작.
6 기타
- 다소 줏대없어 보이는 정치적 행보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바로 위에서 보듯 자신에 대한 조롱 섞인 세간의 시선에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과거 변호사 시절에는 억울한 피해를 본 사람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해준 적도 있다고. 탤런트 서인석의 지인도 그 중 한명이며 그래서 현재까지도 서인석과 절친하다. 나중에 서인석이 찾아가 수임료를 건네자 "한 번 무료 변론한다고 말했으면 그렇게 하는건데 왜 돈을 가져오느냐?"면서 돌려보냈다고.
- 2007년 대선에 출마할 당시 선거운동 차로 대전 관저동 성애노인요양원을 방문하였는데, 한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으며 얼굴이 할머니의 손에 잡혀 흔들리는 등 애취급(?)을 받아 웃음거리로 화제가 된적도 있었다. 관련움짤 이로 인해 '도리도리 이인제', '우쭈쭈 이인제'(...) 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그래도 피닉제보단 임팩트가 약한 편.
- 글씨체가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엽다(...). 17대 대선 후보자 글씨체 다만 이 글씨는 여비서가 대신 쓰다 생긴 일이라는 소리도 있다. 실제로 이인제가 쓴 다른 글을 보면 다소 평범한 글씨체를 보여준다.또다른 글씨체
- 쑹추위 : 중화민국의 정치인인데, 정치 인생이 이인제랑 비슷하다. 다만 쑹추위는 자기가 친민당을 만들고 거기서 옮겨다니지는 않았지만... 중화권 언론에서 쑹추위와 이인제를 놓고 비슷하다고 한 기사도 있었다.
- 호남고속철도 공주역은 원래 공주시내와 가까운[14] 계룡면 쪽에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이 의원이 공주역을 공주시내와는 멀리 떨어져있고, 자기 지역구(논산/계룡/금산)에 가까운 이인면 신영리[15]로 옮겨 버렸다. 수요는 하루 390명 정도. 자세한건 공주역 문서 참조.
- 사형제도 폐지에 찬성하는 정치인 중 한명이다.기사
- 더불어민주당 최규성 전 의원과 서울대학교 동기 동창이다. 두 의원은 학창시절 유신 반대운동을 했는데 이인제 의원이 중앙정보부에서 고초를 당하고 와서는 사법고시를 보겠다고 결심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강제 군징집 복무후 사법시험에 합격 한다.
- 그의 고종사촌 동생 중에서 모 입시학원에서 수학강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얼굴은 똑같이 생겼지만 목소리는 다르다.
- ↑ 민선 초대이기도 하다.
- ↑ 바로 이 때 사법시험을 치려는 결심을 했다.
- ↑ 1위는 김대중.
- ↑ 다만 DJP 연합 이후 김대중은 선거일까지 여론조사 1위를 놓친 적이 없는데, 정식 후보 등록 후 여론조사 1위가 항상 대권을 차지했다는 점을 들어 양자 구도로 갔어도 김대중이 이겼을 것이라는 시각도 제법 많다. 특히나 당시의 이인제가 보수표만 긁어갔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1당도 2당도 싫다는 사람은 지금보다 당시가 더 많았고, 지금이야 당을 나와도 양진영으로 구분되어버리지만, 당시에는 분명 중간에 위치하는 포지션이 있었기 때문. 또 김종필과 손잡은 것이 싫어서 이탈한 표도 많이 흡수했다.
- ↑ 이회창의 최측근인 서상목 전 장관은 당시 이인제를 따라 신한국당을 탈당한 홍재형 의원이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지지와 거리가 멀었던 중립인사였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이인제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는 음모론을 펼치기도 했다.
- ↑ 그렇게 따지면 김대중이 집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사사건건 대립한 이회창에 비하면 김대중은 그래도 과거 군부 독재 시절에 투쟁 동지였다는 인연이 있었던지라 최소한의 소통은 가능했다. 실제로 김대중이 집권한 이후 비록 사이는 안 좋았지만 김영삼이 직접적으로 다친 일은 없었던 걸보면.....
- ↑ 더군다나 양김은 서로를 너무 빠삭하게 알고 있어 저쪽에서 털면 이쪽에서 폭로해버리는 식으로 반격이 가능했다(...)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형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바보도 아니고, 선빵을 먼저 날릴 수는 없다는 것.
- ↑ 당시 노무현은 이인제의 대선 출마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선에 나섰다고 밝힌 바 있다. 이인제에 대해서 "재주는 있어 보이는데 성실해 보이지도 않고 철학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88년부터 89년까지 이인제씨와 함께 국회 노동위를 같이 했다. 그 때 이인제씨는 불성실의 극치였다." 등의 말로 비난을 하기도 했다. 당적을 옮긴 정치인이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게 할 수는 없다는 그의 확고한 논리는 이후 손학규를 비토할 때에도 그대로 쓰였다.
- ↑ 새천년민주당 경선 참조.
-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이 압권인데, 17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참가의 역풍으로 여론조사 금지기간까지 실시한 여론조사마다 열린우리당 양승숙 후보에게 밀리다가 정작 개표에서는 압승했고, 19대에서도 민주통합당 김종민 후보에게 내내 여론조사에서 밀리다가 본 개표에서 금산군의 몰표로 뒤집었다(...)
- ↑ 대전 출신이다.
- ↑ 특히 계룡의 경우 지난 19대 선거 때는 김종민에게 졌었다.
- ↑ 이 당시 논산계룡금산 선거구에선 한나라당,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무소속이 출마한 5파전이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여러 후보로 표심이 분산되는 효과가 일어났고 결국 30%도 안되는 지지율로 당선이 된 것.
- ↑ 차로 15분 정도 걸림.
- ↑ 이로 인하여 공주시와 분쟁이 야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