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1 개요
대한제국 시대의 영국계 유대인 언론인으로,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다.
한국식 이름은 배설(裵說). 참고로 풀네임을 줄여 부르면 E.T. 배설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뭇 학생들에게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2 상세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원래는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하지만 곧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의 현실[1]을 보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2] 당시 체결되어 있던 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3]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향년 37세에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눈엣가시인 그의 묘비 뒷면 비문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이 쓰레기 새끼들이 이렇게 수난당한 묘비는 1964년 4월 4일 편집인협회가 전국의 언론인 뜻을 모아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호머 헐버트와 함께 한국을 위해 몸을 바친 외국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언인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해야 한다."는 베델이 진심으로 한국을 위해 힘썼음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4] 그가 죽은 뒤에도 신문사는 유지되었으나, 경술국치 이후에는 그 유명세를 이용당해 '대한' 제호만 떼어낸 매일신보로 강제 인수되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1995년 주한 영국 대사관에서 베델의 헌신과 공로를 기리고자 '베델 언론인 장학금' 을 제정하였다.
이화학당[5]을 세운 메리 스크랜턴[6]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프리메이슨의 한양 지부인 롯지 한양의 창립 회원이라고 한다.[7]
3 기타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당시 한국을 방문하고 쓴 책[8]에서 베델의 한국 사랑, 성정이 잘 드러난다.
- ↑ 한국의 침탈에 관한 기사를 썼지만 그가 몸 담고 있던 런던 데일리 뉴스는 친일 성향이 있어서 베델의 기사는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 ↑ 영어 이름은 'Korean Daily News'였는데, 본인이 종사하던 'London Daily News'의 영향이 보인다.
- ↑ 발행인을 영국인인 자신의 이름으로 내세웠다. 일본의 입장에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한국인이 아닌 동맹국의 영국인이 언론사를 지배하는 입장이므로 이를 함부로 건드리다간 작게는 영국 크게는 국제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해질 수 있는 점을 이용했다.
- ↑ 그 역시 유대인이기에 나라 잃은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 ↑ 現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
- ↑ 이화학당뿐 아니라, 現 매향중학교와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의 전신인 삼일소학당도 세웠다.
- ↑ 그렇다고 이게 다 세력 확장을 위해서다 따위의 고인드립은 자제하자. 이분은 정말 머나먼 타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고 엄연히 우리 민족의 계몽에 큰 역할을 하신 분이다. 음모론적 시선을 거두고 보면 프리메이슨은 그냥 단순한 전세계적 친목단체일 뿐이다.
요새는 그놈의 음모론 때문에 회원이 안 들어와서 망해간다 카더라 - ↑ 국내명 <아손 그렙스트, 100년 전 한국을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