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양장리 전투

1 개요

6.25 전쟁 중기인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용인군 용인읍 금양장리(現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김량장 전투'라고도 한다. 그중에서도 금양장리 전투라고 하면 특히 1월 26일 오후에 발생했던 151고지 공방전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2 중공군의 진격

공산치하의 중국군대가 개입하여 기세를 올린 북한, 중공 연합군이 서울을 재점령하고 남쪽으로 진격하고 있는 와중, UN군은 1월 25일을 기해 작전명 선더볼트를 발동, 중공군의 진공을 무디게 하고 서울 수복을 위한 반격의 발판을 만들려는 일련의 군사행동에 나섰다. 당시 UN군에서 미군과 영국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던 터키여단은 미 제1군단 휘하 25사단에 배속되어 중공군 50군 49사단 447연대, 150사단 448연대가 전개돼 있는 수원-용인 일대를 목표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 시점에서 중공군은 이미 3차에 걸친 공세로 병참선 유지 능력이 고갈되어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인식, 주력을 한강 이북으로 철수시키고 일부 병력을 수원-용인 일대에 남겨 지연전을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UN군의 공세개시 시점이 약 10일 정도 늦을 것이라 예상했고, 때문에 1월 25일 선더볼트 작전이 개시되던 당시 중공군은 아직 철수 및 지연전 준비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접적선만 텅 빈 상태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UN군은 작전개시 첫날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대적으로 수월한 진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특히 미 터키 여단은 1월 26일 금양장리로 진격할 때 해방된 현지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3 151고지를 탈환하라

하지만 이들이 금양장리에 도달했을 때, 마을 인근의 151고지에 의외로 많은 중국군이 잘 구축된 원형 방어진지 안에 웅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화력지원이 부족한 중국군으로서는 보기 드물게도 고지 내부에는 박격포가 배치돼 있어, 터키 여단은 이들을 연대 규모로 추측하고 이의 소탕을 위해 항공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25사단으로부터 전차를 지원받아 151고지에 대한 전면 공세에 나섰다.

그런데 당시 터키 여단은 앞선 군우리 전투에서 비록 병사 개개인의 용맹성은 입증했고 부대 또한 그럭저럭 잘 싸운 편이었으나 예하 일부 부대가 명령 없이 철수하는 등[1]의 불미스러운 사태로 부대의 명예가 크게 실추된 상태였다. 이에 명예 회복의 기회가 왔다고 여긴 터키 여단은 여단장 타흐신 야즈즈 준장[2] 이하 전 장병이 잔뜩 독이 오른 상태였다. 특히 군우리 전투에서 명령 없이 철수한 부대였던 터키 여단 예하 241보병연대 제3대대는 대대장 뤼트피 비글린 중령 이하 총원이 이 151고지 공격의 선두에 서기를 자청했고, 결국 151고지 공격은 사실상 3대대 거의 단독으로 항공공격 직후 전차대의 후방 직접지원사격을 받으며 맹렬한 고지 돌격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4 알라후 아크바르!!!

이 전투에서 241연대 3대대는 장병 전원(당시 600여 명)이 새로 지급받은 M1 소총[3]총검을 꽂은 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151고지의 참호진지를 향해 닥돌했다.

그리고 그 결과 고지의 중국군은 그날 17시경 말 그대로 분쇄돼 버렸다. 이날 151고지에서 발견된 중국군의 시체는 총 474구였는데, 시체 대다수에 개머리판에 맞아 뼈가 부서지거나 총검에 찔려 과다출혈을 일으킨 흔적이 남아 있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터키군의 맹렬한 돌격은 앞서 있었던 공습과 전차포 사격으로 충분히 전투력이 떨어진 중국군의 전의마저 빼앗는 결과를 불러, 중국군은 제대로 방어조차 못 한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고, 그 결과 터키군은 이 돌격 과정에서 전사 12명과 부상 70명이라는 전과에 비해 매우 가벼운 손실[4]을 기록했다. 더구나 이 장렬한 돌격 장면을 API통신의 종군기자가 현장에서 목격한 덕분에 터키군은 중공군에게 깨진 명예도 회복하고 "백병전의 터키"라는 명성도 얻었다.

여기서 알라후 아크바르라는 말을 두고 여러 말이 많은데,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극단주의자 테러리스트들이나 쓰는 말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나 이는 원래 "알라는 위대하시도다!"라는 뜻으로 무슬림들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터키에서는 6.25 전쟁을 악의 세력인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성전이라 규정했기 때문에 나올만 한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종교가 다른 이교도들에겐 관대하지만 신을 아예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에겐 알라의 자비가 없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슬림들에게는 상극인 사상. 그래서 북한은 김일성 이하 3명의 돼지들를 신격화하려고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5 기타

여담이지만 이 금양장리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중국군은 총 1,9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터키 여단은 151고지 사상자를 합쳐 약 100명의 사상자를 내는 데 그쳤다. 이후 터키 여단은 수리산[5] 일대에서 이 금양장리 전투로 와해돼 버린 중국군 제50군의 잔존 2개 연대와 3일에 걸친 치열한 격전을 치렀는데, 이 두 차례의 전투를 통해 터키 여단은 군우리에서 잃은 명예를 완전히 회복했다.

2010년에 한국에서 만든 코레 아일라(Ayla My Korean Daughter)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해당 전투가 등장한다. 한국전쟁에 참여해 군우리, 금양장리, 철원 등에서 싸웠던 슐레이만이란 터키 육군 장교(위관급 장교로 참전, 최종 계급은 대령)가 전쟁 당시 자신이 돌봤던 아일라(가명)라는 고아 소녀를 노병이 되어 다시 찾는다는 내용.한국어 버전

같은 장소일지 모르지만, 오늘날 처인구 김량장동에 속한 지역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핵솔전투라 하는 의병들이 용인전투에서의 패배를 씻는 대승이 있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의병을 이끈 지휘관은 다름아닌 형보다 나은 아우의 대명사. 원연장군이다.
  1. 그 외에도 비슷한 시기 한국군과 비슷한 추태, 그러니까 부대 지휘체계가 부분 와해되면서 적지 않은 병사가 행방불명이 되는 등의 사태도 있었다. 게다가 이 상실 병력 중 상당수는 적중에 남겨졌다가 자력으로 아군 전선에 복귀한 것도 당시의 한국군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2. 1892년생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 때인 1912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 전투 때 무훈을 세운 고참 장교였다.
  3. 터키 여단은 본래 한국에 파병될 당시 자국에서 쓰던 Gew98이나 맥심 기관총 같은 구식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고, 탄약도 UN군 표준과 맞지 않았다. 이것이 군우리에서 터키 여단이 패퇴한 원인 중 하나였으며, 이 때문에 UN군은 터키 여단이 철수한 후 우선적으로 미군 장비를 공급, 병참의 효율성을 기함과 동시에 분대 단위 화력을 최대한 강화시켜 주었다.
  4. 그래도 돌격 부대의 15% 가까이가 사상당했다. 물론 그만큼 터키군이 용맹하게 싸웠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5. 경기도 안양시, 군포시, 안산시에 걸친 산. 현재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총 높이는 475 m로 이곳에서도 유해 발굴작업을 했으나, 유해가 있음을 확인하고 예산이 없어 2016년 현재는 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