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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미화(金美花) |
출생 | 1964년 9월 22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1] |
신체 | 154cm, 42kg, A형 |
학력 | 신경여자실업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사)[2]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커뮤니케이션학과 광고홍보전공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예술철학전공 (박사과정 수료) |
데뷔 | 1983년 KBS 개그콘테스트 |
가족 | 어머니, 여동생 배우자 윤승호, 딸 윤유림 |
취미 | 등산, 노래부르기 |
특기 | 모창, 말 빨리하기 |
별명 | 순악질여사 |
포인트 | 큰 입 |
종교 | 천주교(세례명 : 로사) |
KBS 연예대상 대상 | |||||
임하룡 (1989) | → | 김미화 (1990) | → | 임하룡 (1991) |
목차
1 개요
박미선, 이경실, 이영자와 함께 코미디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던 개그우먼
나는 항상 '여성이 주도하는 코미디 연기도 충분히 훌륭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보여주었다.- 김미화
쓰리랑 부부, 개그 콘서트의 창업 공신. 이 두가지로 대표되는 KBS 개그의 전설같은 존재.
가난한 환경을 이겨내고 작은 체구로 80~90년대 한국 개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뒤, 21세기에는 소셜테이너로서도 많은 활동을 보이는 계그계의 대모이자 작은 거인.
1.1 1기 : 데뷔에서 쓰리랑 부부까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겸 방송인.
서울특별시의 수유리 빈민촌 출신으로, 기존에는 출생지도 서울특별시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신갈에서 태어난 뒤 다음해에 부모님이 그녀를 데리고 서울 수유리로 올라가서 그때부터 거기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김미화씨가 자신이 수유리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과거에 몇번 이야기했기 때문에 거기서 태어나기도 한 걸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출생지는 아버지의 고향인 신갈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자세한 정보는 없지만 출생 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수유리로 올라와서 살았다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출산을 앞두고 아버지의 본가로 가서 출산하기로 결정하여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유년기 내내 수유리와 미아리 지역에 있는 하천 다리 근처에 당시 빈민들이 거주하던 무허가촌에서 살았다고 한다.[3] 그러니 사실상의 고향을 따지자면 갓난 아기 때만 잠시 지냈던 출생지가 아니라, 이후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삶을 다 보낸 서울을 고향으로 보는게 맞긴 하다. 천지천이 자신이 어릴 때 주로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성이 박씨라고 한다. 호주제 법 때문에 어쩔수없이 어머니의 성(김씨)을 따른것. 본명은 즉슨, 박미화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본처가 아니고 첩(속칭:세컨드)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이미 본 부인과 결혼을 한 상태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것을 모른채 사실혼 관계를 유지 한 채로 같이 동거를 했다고 한다. 호적 등록을 할 때에도 김미화 자매를 호적상 정상적인 가정에 자녀들로 살게하려고 아버지 호적에 아버지 박씨와 본처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들, 김미화 자매로 호적등재를 했다고(...)[4]
그러던 중 초등학교 2학년때에 아버지와 호적상 어머니가 돌아 가시면서 김미화 자매는 법적으로 고아가 되었고, 어머니(김씨)가 고아가 된 자신의 딸들과 한 호적을 갖기위해 방법을 취해[5] 어머니는 미혼모가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을 낳아 뒤늦게 출생신고를 한것 처럼하여 관청에다 출생신고지연 벌금을 내고 미혼모의 자녀로 김미화 자매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게 되(이중신고?) 법에 따라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어머니가 재혼한 후 새 아버지와 성이 다르기 때문에 수치심을 겪는 등 여러 가지 힘겨운 경험을 했다고(...)
어릴적부터 사람들을 웃기는데 재능을 보이며 주변 동네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던 귀여운 소녀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의 부친은 첫째딸인 그녀가 어릴적부터 심한 폐질환을 앓다가 일찍 사망하였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청소년기가 되어 상업고등학교까지 입학하며 졸업 후의 가족 생계에 대한 책임감이 커지던 시기여서 학교에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아르바이트도 있었으나, 개그맨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지인을 통해 방송국 보조출연(엑스트라) 아르바이트도 하였다고 한다. 코미디에 대한 꿈을 결코 버릴 수 없었던 그녀는 상고 졸업을 앞둔 1983년 제2회 KBS 개그콘테스트에서 이정문[6]과 함께 '사부와 석순이'라는 개그로 은상을 수상하면서 공채 2기 개그우먼으로 데뷔했다. 당시 그녀가 졸업 후 바로 취업하기를 원하시던 어머니는 저녁식사 중에 KBS '생방송 오늘'에서 그녀가 개그콘테스트 수상자로 나온 걸 보고 매우 놀랐고, 돌아온 그녀를 때리고 화를 내며 말렸다고[7] 한다. 그녀는 6개월 안에 개그우먼으로써 확실한 위치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 그만두겠다고 약속하겠으니 그동안만 지켜봐달라고 하여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데뷔한 뒤 생각외로 빠른 시일내에 큰 인기를 얻고, 수입도 커지게 되자 어머니는 오히려 응원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데뷔 직후 KBS '젊음의 행진'에서 활약하면서 '유머 일번지'까지 진출하며 점점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인기가 더 올라가자 다른 여러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게 된다. 본인 스스로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는 당시 신인 중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신인이었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수많은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어마어마한 연습을 하며 철저하게 노력했다고 한다. 이 욕심이라는 것은,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가 개그계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여성 코미디언들은 프로그램에서 주도하는 역할은 별로 하지 못하고 주로 받쳐주는 역할이었고, 그에 대한 불만이 있던 그녀가 그런 관습을 극복하여 '여성이 주도하는 코미디 연기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그 결실이 바로 쓰리랑 부부다. 쓰리랑 부부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90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KBS 코미디 대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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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기 : 90년대 코미디의 전환기
SBS 개국과 함께 SBS에서도 활동하다가 KBS에서 프로그램 제안을 받고 1995년말부터 코미디 세상만사에 출연하게 되었다. 거기서도 코미디 방송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밤 10시에 '시작하는'[8] 심야 코미디의 영역에서 그에 맞는 새로운 형식을 개척한다. 지금보다 수위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성인 대상 코미디'의 지상파 진입 역시 이 프로그램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김미화는 이 방송에서 '이 밤의 끝을 잡고'라는 코너를 통해 일반 유명 남자 연예인과 부부 설정으로 상황극을 하면서도 간간히 그 연예인의 실제 생활에 대한 토크를 섞어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서 인기를 얻었다. 이재룡, 설운도, 현철 등 코미디 방송에서 잘 나오지 않던 연예인들이 그녀의 남편 역할로 매주 출연해서 재미를 주었고 그녀에 대한 평가와 인기 역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또한 코미디 세상만사를 통해 그녀가 새롭게 발굴한 연예인은 코미디언이 아닌 배우 전원주이다. 당시 그냥 연기경력 30년의 평범한 아줌마 역할용 배우로만 알려져 있던 전원주였으나, 그녀의 서민적이면서 친근한 속성이 코미디에 활용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김미화가 피디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사미인곡'이라는 코너에 출연하게 된다. 이 코너는 사미인곡이라는 유명한 고전 가사 문학작품 이름을 패러디하지만 실제로는 4명의 미인들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목욕탕 사우나에서 4명의 유부녀 아줌마들이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는 꽁트이다.
기본 멤버는 서세원어?[9], 김미화[10], 전원주[11], 정선희[12]였다. 전원주가 4명의 아줌마 중 한 명으로 추천되어 출연하게 되면서 그 코너가 인기코너가 되고, 여러 유행어도 남기게 되었다. 특히 전원주의 푼수끼 섞인 '어! 호호호호허허하하'하는 웃음소리가 독특하다는 부분이 주목받기 시작하고, 우리 시대 어머니 이미지가 천천히 시작되기 시작한 것도 이 코너에 출연하면서부터이다.[13] 당시 전원주의 유행어는 '나 갈게. 다음에 또 여기(목욕탕) 모이게 되면 떼레뽕 때려줘.'로 전화해란 말을 일부러 코믹하게 한 것이 전원주의 새로운 유머 이미지 발굴'에 도움이 되었다.[14]
그 후, 코미디 세상만사의 메인 MC이기도 했던 서세원이 개인사정으로 정선희 전원주와 함께 '사미인곡'에서 빠진 뒤 최양락(서세원 자리에 대타로 들어옴) 김지선 최란이 들어왔으나 최란은 스케줄 문제 탓인지 2주 만에 하차했으며 최란 자리에는 전원주가 대타로 들어갔다.
이후, 최양락이 자의로 코미디 세상만사에서 빠진 데 이어 김미화는 타의로 그만뒀고 코미디 세상만사는 두 사람이 빠진 뒤 메인 MC제를 없애는 동시에 '사미인곡' 코너는 최양락 김미화의 하차와 함께 김지선이 빠졌으며 이들 대신 김형곤 권은아 장미화가 들어왔으나 98년 10월 시작한 SBS 기분좋은 밤 때문에 시청률이 갈수록 하락하자 99년 봄 개편 때 사미인곡 등의 코너를 없애는 대신 새로운 코너를 신설하여 물갈이를 했지만 시청률은 올라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99년 9월 최양락과 김미화를 게스트 형식으로 합류시키는 한편 곽재문 최형만 이옥주 등 SBS에서 활동해 온 코미디언을 투입시켰으나 시청률이 오르지 않자 2000년 봄 개편 때 막을 내렸다.
90년대 후반 기존의 꽁트 코미디가 완전히 사장되는 위기에 직면하자 백재현, 전유성과 함께 초대 개그콘서트의 시작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개그콘서트 자체가 실험적 코미디를 무대에 올림과 동시에 신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등용문의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은 신인들만으로 꾸려가면서 때 되면 밀려난다 김준호 김대희 박성호는 뭐져 위에 서술되어 있는 코미디 세상만사 또한 성인용 심야코미디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시도였고, 개그콘서트가 중간급 신인들의 메인 무대가 되자 이번에는 완전 신인 발굴을 위한 심야프로인 개그사냥을 런칭하기도 했다. 초반 개그사냥에서는 최종 선발 과정으로 김미화 본인과 '삼순이 블루스'라는 단막코너 연기 무대를 선보여야 하는 미션이 있었다.
다만, 메인 MC로 참여한 프로그램들은 대거 1년을 넘기지 못한 적이 있는데 토요일이 온다 웃는밤 좋은밤 가족만세 등이 대표적이었다.
1.3 3기 : 소셜테이너
90년대 후반 김미화는 개그콘서트의 시작을 주도하면서 현장에서의 역할에서 물러났고,[15] 늦깎이로 성균관대학교에 진학(2001년)해 대학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점점 개그계 바깥의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03년 MBC 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을 맡게 되었는데, 개그맨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시사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하다보니 자신도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시사문제 공부를 시작하면서 김미화는 본격적으로 소셜 엔터테이너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로 인해 김미화는 과거의 코미디 현장이 아닌 시사문제가 궁금한 평범한 아줌마인 MC,DJ라는 캐릭터가 확립되어 라디오 DJ및 MC로 활약했다. CBS에서 김미화의 여러분을 진행하기도 하고, 딴지일보 팟캐스트에서 나는 꼽사리다를 진행하는 등 시사 전문 MC로 활동하면서 아래 언급할 KBS 블랙리스트 파문등을 겪기도 한다.
2016년 현재 몇 라디오 방송을 맡고 있으며, 출생지인 용인 근처에 친환경 카페를 열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하며 살고 있다.
사족으로, 김미화는 2001년 5월 6일부터 KBS 2TV 쇼 파워비디오 진행을 맡아오다가 방송활동과 학업까지 병행하느라 스케줄 조절에 어려움을 겪어 그 해 11월 11일 방영분을 끝으로 하차했으며[16] 첫 회부터 임백천(2003년 6월 22일 하차), 김미화와 함께 공동 MC를 맡았던 김원희는 김미화와 마찬가지로 방송활동과 학업(2001년 광운대 방송연예학부 편입)까지 병행하느라 스케줄 조절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2001년 7월 29일 방영분을 끝으로 하차했고 김미화 김원희와 비슷한 이유 때문에 빠진 여자 MC는 현영(2005.11.6 ~ 2006.3.18)이 있는데 방송활동과 대학원 진학까지 병행하느라 스케줄 조절 문제 때문에 빠졌다[17].
아울러, 김미화와 비슷한 이유 때문에 하차한 김원희의 후임으로 <쇼 파워비디오> 진행을 맡았던 안연홍은 본업인 연기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2001년 11월 18일 방송분을 끝으로 빠졌고 연기 활동에만 전념 중이며 안연홍의 후임으로 들어온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김연주는 안연홍이 그랬던 것처럼 연기 활동에 충실하기 위해서 2002년 4월 7일 방영분을 끝으로 하차했는데 안연홍 김연주와 비슷한 이유로 빠진 여자 MC는 '핑클' 출신 이진(2003.11.8 ~ 2005.10.30), 그룹 '밀크' 출신 박희본(2006.3.25 ~ 11.18)이 있었다[18].
2 출연 작품
2.1 방송
3 논란
3.1 논문 표절 논란
최근 일부 언론매체에서는 김미화가 2011년 성균관대 언론대학원에서 받은 석사학위 논문 '연예인 평판이 방송 연출자의 진행자 선정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 부분 표절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김미화는 2013년 3월 24일 오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저는 3월 25일 자로 시사프로그램 진행에서 내려오겠습니다"며 표절 논란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고, 자진 하차하였다.
2013년 10월, 성균관대 측에서 논문 표절로 보기 어렵다는 판정 결과를 통보받았다.#
3.2 KBS 출연금지 및 정치참여 논란
2010년 7월 6일 트위터를 통해 KBS 내부에 출연금지문건이 존재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출연이 안 된다며 소위 'KBS 블랙리스트'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KBS는 김미화의 근거 없는 추측성 발언은 명예훼손에 해당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3개월간 공방을 벌인 양측은 그해 11월 KBS가 김미화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면서 일단락됐다. 더불어서 2013년 2월 27일 KBS 창사 40주년 특집 ‘개그 콘서트’ 녹화에도 참여해 1980년대 히트작 ‘쓰리랑 부부’를 재연하면서 KBS와의 악화되었던 관계는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정치코메디를 하는 것이 꿈이라고도 말하기도 했다. #
2012년 국정원의 민간인 불법 사찰 논란 때 김제동과 함께 국정원으로부터 사찰당했다고 주장했다. #
2014년 변희재가 허위사실에 기초해 자신에게 '종북친노좌파'라고 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에 법원은 변희재에게 "김미화에게 1천 300만원을 배상하라"라고 판결했다. 관련기사- ↑ 출생 당시에는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신갈리이다.
- ↑ 자기추천전형을 통해 01학번으로 입학하였다.
- ↑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 사당동 빈민촌 출신인 배우 정우성이 있다.
- ↑ 당시 법적으로는 김미화씨 친어머니는 남이고 아버지의 본처가 호적상 어머니가 되는 셈이다. 혼외자녀는 서출로서 생모를 따로 기재할 수 있지만 본처를 생모로 기재하는일이 많았다고 한다.
- ↑ 법적으로는 남이며 김미화씨의 호적에 어머니가 오를 수는 없는일이고 어머니 호적에 자매를 올릴 수 밖에 없었는데, 아시다시피 자녀가 어머니의 호적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를 모르는 미혼모의 자녀이거나 외국인 아버지를 둔 케이스.
- ↑ 잠시 개그맨 활동을 하다가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만화가 이정문과는 다른 사람으로 동명이인이다.
- ↑ 말린 이유에 경제적인 부분도 컸지만, 그녀의 모친이 사실 가장 중요하게 걱정한 것은 '연예계 성상납'이었다고 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성이던 딸이 그런 것에 휘말릴까봐 용납할 수 없었다고.
- ↑ 당시에 지상파 코미디 방송은 대부분 7시에 시작해서 8시에 끝나는 게 정석이었고, 늦게 하더라도 10시 이후에 끝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었다.
- ↑ 서세원도 아줌마 역할로 나온다. 아줌마면서도 MC 느낌의 역할. 지금이야 여러 문제로 방송에 안 나오지만 당시에는 꽤 인기도 많았고, 이 코너에서도 아줌마 연기와 웃음 유발 두가지를 모두 잘 소화했다. 종종 남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개그포인트이긴 했다. 김미화와 함께 전원주를 다그치면서도 전원주의 개그포인트를 살리는 역할.
- ↑ 개그를 하면서도 프로그램 특성상 특별출연 손님도 나오기 때문에 서세원과 함께 진행을 하는 역할
- ↑ 복부인 느낌의 돈 많은데 아는 거 많은 척하고 싶은 푼수느낌 있는 맏언니 역할
- ↑ 외국에서 살다 온 새댁 역할
- ↑ 그전까지는 TV드라마에서 파출부나 가난한 집 주부 같은 역할을 많이 했고, 어쩌다가 주인공 어머니 역할을 할 때도 주인공이 가난하다는 설정이 많아서 어머니 이미지의 대표 위치는 아니었다.
- ↑ 본인도 코미디프로에 나온 것이 어색해서 실수도 하고 했는데, 그때마다 웃는 웃음소리가 새로운 재미포인트
실수의 미학이 되었고, 이때부터 '전원주가 부잣집 어머니 역할을 해도, 약간 푼수끼 있게 한다면 괜찮고 재미있겠구나'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 ↑ 이 부분은 사실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데 타의로 인해 밀려난 부분이 크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대학원 진학 후에도 개그콘서트에 참여했으나 새로온 연출자가, 김미화가 이전에 이미 모든 개그콘서트팀과 상의하에 동의를 다 받고 갔다 온 대학원 수업 이후 회의에 몇분이라도 늦게 오면 그런 날마다 미리 다 기록을 해 둔 뒤에 어느 날 "선배님, 그동안 회의에 어느날 5분 어느어느날 15분 지각하셨습니다. 이대로는 방송 준비에 계속 지장을 주실 수 있으니 이제 그만 나와주셔야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개그콘서트에서 하차를 종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실제 준비에 그리 치명적인 시간이었던 게 아니었고, 실제로 그녀가 그로 인해 방송공연 준비에서 큰 문제를 발생시킨 적이 없다는 부분에서 그녀는 억울함을 느낌과 동시에 그 순간 그 피디가 자신을 애초부터 하차시킬 목적을 가지고 상황을 계획했다는 듯한 생각이 확신에 가깝게 들었다고 한다.(그 전에 어느 상황에서 그 피디와 갈등이 있었거나 했는지는 그녀가 추후 뒷소문을 듣지도 못했고, 그 피디가 직접 말해준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녀는 모른다고 한다. 실제로 큰 갈등은 없었던 걸로 보이지만 개그계 대모이자 개그콘서트의 창립구성원으로서 워낙 큰 권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의견과 피디의 의견이 갈렸을 때 그녀의 의견이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채택되거나 하여 불만이 생겼을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냥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 수도) 처음에는 따지고 항의도 해봤지만 일단 약점이 잡힌 이상 더 이상 대화가 안 되어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녀는 꽤 충격을 받고 개그콘서트를 떠나 방송활동은 거의 하지 않으며 쉬다가 소셜테이너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났다고 하기는 어렵다. - ↑ 김미화의 후임으로는 김경식이 들어왔고 김미화는 '쇼 파워비디오'에서 빠진 뒤 2002년 1월 시작한 SBS 토요일이 온다와 웃는밤 좋은밤으로 TV 진행자 활동을 재개했다
- ↑ 김원희는 2006년 봄 개편 때 현영 후임 물망에 한때 거론된 바 있었다
- ↑ 공교롭게도 '쇼 파워비디오' 원년 멤버였던 김원희가 김연주,이진의 후임 물망에 한때 거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