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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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화(金炳華)
Ким Пен Хва(김펜흐바)

1905년 8월 6일 ~ 1974년 5월 7일

1 구 소련의 사회주의 노력영웅

1.1 생애

1.1.1 출생에서 낙향까지

고려인으로 소련 전역에 한국인의 근면성을 떨친 농장 지도자. 연해주의 농민 가정에서 1905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들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자기 땅 하나 없는 빈농들이었다. 연해주의 쿨라크(부농)에게서 논을 빌려서 한뚝배기 하시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았으나, 굶주림과 빈곤은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6살 아버지를 잃고 4명의 형제들과 아픈 어머니를 이끌어가야만 했던 그는 여름에는 잡초 뽑는 일로 품삯을 받아서 연명했고 겨울에는 새끼를 꼬아서 파는 것으로 변변찮은 수입을 얻어왔었다. 대부분의 돈은 식량을 사는데 쓰였으며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김병화는 지역의 학교에서 4년동안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김병화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적백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일본 간섭군을 맞이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으며, 후에 1927년 붉은 군대에 입대한다. 군생활을 잘하였는지 모스크바의 군사정치 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와서 1932년에 졸업한다.

그렇게 상승가도를 달리던 김병화는, 비록 고향땅 연해주는 아니지만 카잔이라는 곳에서 중대장을 맡아 중위 계급장까지 달면서 성공한 고려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이게 왠 날벼락. 강철의 대원수연해주고려인들을 죄다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충공깽스러운 명령을 반포하고 고려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 그는 한국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련 정부의 드립에 의하여 대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39년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카잔에 있던 그의 원래 군부대는 이동하여 어쩔 수 없이 반강제적으로 제대하여 그는 가족이 추방당한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했다. 이때 그의 계급은 대위였다.

1.1.2 소련의 농장 지도자

그는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즈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맨 몸으로 아무런 시설도 없는 우즈베키스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상태였으므로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의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1]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지도자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40년, 그는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우즈베키스탄의 북극성 콜호즈(집단농장)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연해주의 소작농이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즈 최적의 지도자였다. 그가 지도자로 부임한 첫 해부터 눈에 띄는 생산량 증가가 있었다. 치트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그 효율이 시망이어서 80년대 말쯤에도 4%의 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괴랄한 상황이 벌어질 정도였다. 대충 계산해도 자영지의 효율이 7~8배 더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병화가 운영하는 북극성 콜호즈에서 그런 거 없다. 다른 콜호즈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생산량을 보여주었다.

1940년대에, 농사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병화는 또 다른 사업을 진행했다. 바로 주택 만들기. 당시 북극성 콜호즈의 한인들은 대부분 병영이나 간이 주택, 대피소 등에서 생활했다. 애초에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의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내던져진 조건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호사이긴 하였지만 김병화는 만족할 수 없었다. 소련 정부는 버거운 국방비와 사회복지비로 인하여 안 그래도 예산이 후달렸던지라 지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결국 북극성 콜호즈는 10~15 헥타르의 농지에서 쌀을 재배해 그 수익으로 주택과 여러 건물들을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주택과 발전소, 축산을 위한 외양간이나 헛간이 많이 건설되었고 1945년에는 집에서 살지 않는 농민이 없었다. 당시 40년대 초반이 대조국전쟁으로 북극성 콜호즈는 물론이요, 소련 전역이 정신없던 때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한편 독소전쟁이 벌어지자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김병화의 북극성 콜호즈 및 다른 한인 콜호즈가 큰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자신들을 고향 땅에서 내쫓고 머나먼 중앙아시아까지 보낸 스탈린이 아직도 정권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금을 한 고려인들의 대인배 정신, 혹은 나라 잃고 울타리 잃은 주민이 어떻게 되는지 뼛속 깊이 새겨진 고려인들이 썩은 울타리마나 보존하려던 서러움을 엿볼 수 있다. 소련 당국에서도 고려인들이 이렇게 충성심과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 나갈 의지를 보였으니 그나마 단계적으로 한국어 출판물, 학교도 허락해 주고 훈장도 준 것이다.

대조국전쟁이 끝나고 렌드리스도 끊겨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즈는 높은 생산성을 올려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즈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즈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제거기와 같은 농기계는커녕 비료도 안 보내줬다는 사실. 김성모가 울고갈 근성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비단 북극성 콜호즈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즈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모든 콜호즈가 이랬다면 소련이 안 망했을 텐데 그런데 50년대로 접어들자, 소련 농업성이 갑자기 북극성 콜호즈에게 주요 작물을 목화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벼농사와 더불어 목화 재배는 그 전에도 하고 있었긴 했다. 아랄해 사막화의 시작 독재 국가이니 까라면 까야 해서 결국 목화로 몽땅 갈아엎고 목화 재배를 시작하였다. 물론 결과는 우왕ㅋ굳ㅋ.

화학비료를 쓰기보다는 자연적 유기물질을 이용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호하였던 고려인들은, 배수지와 삼림을 먼저 갖추는데 전력을 다한 후 본격적인 면화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번에 떨어진 목표량은 헥타르 당 2톤. 북극성 콜호즈는 가볍게 목화 4.8톤을 찍어버려 생산량 두 배를 달성하였다.

그래서 스탈린이 사망한 해인 1953년에는 헥타르 당 5.2톤을 생산했고 전체 콜호즈 계획의 132%를 달성하여 소련 전역에 그 위엄을 떨쳤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주변의 작은 농장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즉시 김병화 버프가 발동하여 생산량을 뻥튀기 해주었다. 아훈바바예프의 쿠츨릭 콜호즈가 1952년에 북극성 콜호즈에 가입하자 헥타르 당 1.3톤이던 생산량이 다음 해에 2.47톤으로 증가했다. 버틸 수가 없다

또 소련의 7개년 계획이 진행되던 중에 4년만에 14% 초과 생산을 찍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먼치킨스러운 기록이 많다.

덕분에 북극성 콜호즈는 소련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콜호즈가 되었으며, 농민들의 후생수준도 빠르게 올라갔다. 현대적인 문화 시설과 건물들이 계속 들어섰고, 학교, 병원, 보육원, 주택도 늘어났다. 여기에 콜호즈에 1,000여 가구가 살았기 때문에 학교도 6개가 들어섰고, 우체국, 도서관, 미용실, 약국도 생겨났다. 그야말로 현실사회주의 농장의 최종테크. 경기장과 전국구로 유명한 한인 극장도 생겨났다. 또 당시 모든 가구에는 전기가 들어왔고 라디오도 있었다고 한다. 심시티 하시나 봐요 북극성 콜호즈에서는 B등급 축구팀도 있었다고. 소련의 축구 운영 체제에 대해 아는 사람의 자세한 설명바람.

1.1.3 사회주의노력영웅

위에 열거한 여러가지 노력을 입증 받아 김병화는 소련의 영웅 칭호 중에서 두 번째로 급이 높은 사회주의노력영웅을 무려 두 번이나 받았는데, 두 번 받은 사람이 소련 역사를 통틀어 205명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흠좀무. 세 번이상 받은 사람을 합쳐도 300명이 안된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이 훈장을 세 번 받은 사람은 2명 두 번 받은 사람은 3명이다. 사회주의노력영웅 말고도 다른 훈장을 많이 받았다. 김병화는 죽기 전까지 레닌훈장,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훈장/소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 받았다.

이렇게 해서 1960년대에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을 받은 이후 김병화는 우즈베키스탄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농업위원회의 위원으로 재임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주도로 북극성 콜호즈는 우즈베키스탄의 각종 건설 사업(운하 등)에서 노동력을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정이 많았으며 매우 청렴하고 겸손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소련을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였다. 어차피 태어난 연해주도 소련땅 경직된 소련 체제와 달리 김병화는 대단히 환경에 적응이 빨랐고 사고가 유연했다고. 그는 34년 동안 콜호즈 지도자로 재임했고 1974년에 죽었다. 타슈켄트에서는 그를 기려 김병화 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죽기 전에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목화 생산량 초과 달성의 경험(1953)과 풍요로 가는 길(1954)가 그것. 저서 이름부터가 비범하다

1.2 사후

그러나 김병화 사후 80년대에 농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단 잇따른 초과달성에 판단력이 흐려진 중앙정부가 진짜로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지시하기 시작했고 아랄해의 사막화가 심해짐에 따라 수확량도 줄 수밖에 없었다. 80년대에는 목화 생산량이 소련 평균보다 낮아졌고 모범 농장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1991년에는 북극성 콜호즈를 김병화 콜호즈로 이름을 바꾸어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름 버프는 없었다. 그래도 타슈켄트 교외에 아직도 그의 농장이 협동농장으로 체제가 바뀌긴 하였지만 남아있다. 과거의 패기가 부활하기를 바랄 따름.

김병화와 그의 동료 고려인의 노력으로 소련 내에서의 고려인 이미지는 매우 좋아졌으며, 비단 고려인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인 전체의 이미지 향상에 크게 기여를 했다고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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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안에는 김병화 기념관도 있으니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들려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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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간지 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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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방패

최근에 시온고 마을과 북극성 꼴호스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새로 나왔다. 김병화 기념관 내부 모습과 현재 마을의 고려인들, 당시 발행되던 한글 신문인 레닌기치 기사 등도 나오니 참고하면 좋다. 김병화 기념관은 2편부터.

2 북한의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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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지휘자.(1936.05.16~)
재일교포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행정직인 창작 창조부장 겸 지휘자, 인민예술가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

일본 효고 현 고베 시에서 태어났고, 어릴적 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 작곡과 지휘를 배웠다. 1954년에는 일본 거베 청년 합창단 겸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1955년부터 도쿄 음악센터 예술국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고, 1959년에는 버르토크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해 주목받기도 했다.

1960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주, 평양국립예술극장에서 피아니스트로 재직하면서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평양음악대학)에서 지휘를 배웠다. 1963년에 대학을 졸업한 뒤 국립예술극장 지휘자를 맡았고, 1970년에 조선국립교향악단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어 조선국립교향악단에서 수석 지휘자의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2000년도에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서울 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2005년에는 김일성상을 수여받아 김일성상 계관인이 되었다.

현재는 70대를 넘긴 고령으로, 장룡식에게 수석 지휘자 직책을 넘겨주고, 행정직인 창작 창조부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가 현재는 고령으로 인해서 은퇴를 했다. 이후 1만명 대공연에서 잠시 등장하여 노인들 합창을 1회 지휘했다.

이후 조선국립교향악단 창립 70주년 기념음악회에 출연해 조선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를 지휘 및 공연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제자가 바로 수원대 교수 박태영이다.
  1. 카자흐스탄에 이주한 사람들은 그나마 유목생활을 하는 부유한 카자흐인들이 제공한 임시주택에서 생활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였지만 우즈베키스탄은 워낙 주민들이 가난해서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이주 초창기엔 땅굴집을 파서 생활했을 정도로 열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