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드리스가 정확한 표기임에도 랜드리스라는 잘못된 표기가 많이 퍼져서인지 랜드리스라는 명칭으로도 이 문서에 들어올 수 있다.(렌드리스 법, 혹은 렌드리스 계획)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주장한 미국의 대연합군 물자지원 계획이다.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헝가리 등의 추축국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국에게 물자를 지원하자는 취지였으며, 1941년 3월 11일에 시작해 1945년 9월 2일에 종료했다. 그 이후로도 이미 보내기 시작한건 운송을 계속해서[1] 그 해 9월 20일에 원조를 끝냈다.
1 특징
각종 무기나 군수품 외에도 식량이나 연료도 지원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0년에 주창했던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 정책의 일환이다.
사실 유럽 연합군의 핵이었던 소련과 영국 모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자금이 부족했고, 거기다 전쟁 초기 나치 독일군에게 탈탈 털렸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기 힘들었다. 일본군에 대항하던 중국 국민당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아무튼 이것을 지난 대전에서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던 미국의 물량으로 커버하는 것.
1.1 소련
소련에 지원된 물자목록. 끝이 없는 글씨에 정신이 멍해진다.
결과적으로 이 계획으로 엄청난 득을 본 것은 연합군의 탱커였던 소련이었다. 다만 재미있는 사실이자 의외의 사실은, 소련은 무기대여법 최대 수혜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대로 받은 국가는 다름 아닌 영국으로, 소련의 3배에 달하는 렌드리스 물품을 받았다.[2]
소련은 대전 초반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독일에 비해 훨신 높은 생산효율과 렌드리스 물자의 보급을 통해 결국 독일을 이기고 베를린을 짓밟는데 성공했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는건 가능하겠지만[3] 반격을 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4] 여기에 직접 병기 및 관련 군수품도 지원받았다.
렌드리스가 체결되고 소련과 미국은 가장 가까운 북극항로를 이용할 계획을 짰다. 소련과 미국은 양측의 배를 동원하여 함께 전체 렌드리스 물자의 23%를 이 루트로 옮겼다. 그러나 이 루트는 계절적인 제한과 독일 해군의 공격으로 운송 중 전체 물자의 7%를 잃어버렸고[5], 따라서 이 루트는 노르웨이의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를 거의 다 때려잡은 대전 후반부에나 큰 루트가 되었지, 당장 급한 1941~1943년에는 주 루트로 삼기 힘들었다.[6] 결국 2번째로 짧은 태평양 루트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이쪽도 태평양 전쟁이 터졌고 미국배의 운송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이란과 협상을 하여 인도양의 이란에 보급품을 내려 육로로 소련에 수송하는 루트를 사용했다. 이 방식은 상대적으로 안전했지만 너무 심각하게 멀었고[7],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될 즈음인 42년 중반이 되어서야 드디어 운영되기 시작한다. 이 루트는 주로 미국이 사용했는데 미국은 이 루트로 전체 렌드리스 중 27% 가량의 물자를 옮긴다. 한편, 태평양 전쟁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일본은 한동안 서로 중립을 지켰고 일본은 1)소련 선박일 것, 2)비전투물자만을 수송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운송을 허가한다. 비전투물자에 한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루트를 통해 소련은 자신들 배로 전체 물자 중 50% 가량의 물자를 수송했다.
소련 공군은 경합금 관련 기술이 부족해 방부 처리가 안된 나무로 전투기를 만드는 안습한 상황에서 벗어나서 미국이 지원한 경합금으로 생산한 항공기에 미제 엔진을 달고[8], 미국이 지원해준 항공유로 띄워, 미국이 준 무전기로 통신하면서, 미국에서 보내준 고폭약으로 만든 항공폭탄으로 독일군을 개발살냈다. 뭐야 이거 그냥 미국 전투기잖아[9] 게다가 직접 영국제와 미국제 비행기 18,303대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소련 공군이 보유한 모든 항공기의 15%를 차지했다. 그나마 소련 해군 항공대가 개전 초 전멸을 면하고 공군의 재건 시까지 어떻게든 버텨 준 덕분이기도 했다.
미국이 준 약 15,000,000 켤레 전투화는 소련 육군 장병들이 신고도 남았고, 함께 온 혹한기 대비용 털장화는 소련 장병들의 꿈이라고 불릴 정도로 질이 좋았다. 소련군 장병들의 보급에는 당연히 미국이 준 스팸 통조림도 있었다. 심지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반에 소련군이 막장 상황에 빠져서 식량 배급이 극도로 부실할 때 장병들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나눠 준 게 허쉬 초콜릿이었다고 할 정도. 게다가 기호품도 공급했기 때문에 미국이 준 콜라를 마실 수 있어서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같이 콜라를 입에 달고 다닌 사람도 많았다. 위의 렌드리스 목록 링크에 따르면 과일단물주스, 바나나, 사과 등 오만잡다한 것들이 다 올라와 있다.
군과 민간인의 생활을 동시에 지탱해준 수송 분야는 완전히 미국제가 꽉 잡았다. 당장 소련군은 미국이 준 409,526대의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녔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생산한 모든 트럭 수를 능가한다.[10] 게다가 미국이 준 철도 레일과 1,860량의 기관차, 11,181량의 화차와 객차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날랐으며, 이 때문에 전쟁기간 내내 소련제 기관차, 화차, 철도 관련 시설에 대한 생산은 거의 없었고, 기존에 있던 차량과 시설을 보수할 목적으로 가뭄에 콩나듯 조금 생산한 것이 전부였다. 덤으로 석유도 2,599,000톤을 지급해서 모처럼 받은 수송차량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막았다.
식량 분야도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 일단 소련은 자급자족이 가능했긴 했지만 개전 초의 대패배로 주요 곡창지역이 독일군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제대로 된 농기계도 없이 인력부족인 상황에서 남은 농경지만으로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국에서 트랙터나 콤바인을 지원해주고 비료까지 투입한 덕분에 간신히 기초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통조림 같은 저장물자나 전투식량은 미국제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식량 지원은 4,281,910톤으로 소련이 필요한 식량의 25%를 담당했다.
즉 무기대여법은 식량과 기초적인 원자재, 통신과 철도, 지프 등으로 대표되는 수송장비를 소련에 대량공급해 줌으로 독소전 초반에 공업력의 75%, 식량 생산량의 50% 이상을 잃어버린 소련이 빠르게 회복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펼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는 나치 독일이 온 유럽의 공업력과 자원을 다 가지고도 공업효율이 개판이라 생산성이 그야말로 형편없던 것도 한 몫 한다.
그리고 무기대여법으로 지원된 물자 중 "아 뭐 수량도 많지 않고 성능도 별로였어."라고 가장 저평가를 받는 병기도 의외로 호평인 경우가 많았다. 즉 츤데레 일단 전차를 비롯한 기갑차량은 12,161대로 소련의 보유량 중 15%를 차지했으며, 야포 및 박격포의 경우에도 96,000문으로 소련의 보유량 중 2%를 차지할 정도로 수량이 만만치 않았다. 이외에도 기관총 131,600정, 포탄 325,784톤 당연히 기존 소련 포탄은 사이즈가 안맞으니까., 야전용 전화기 422,000개를 지급해서 전투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했다.
렌드리스로 받은 전차의 경우 소련 지휘관들의 입장은 미국과 영국이 보내준 전차들은 T-34 등 소련제 전차보다 성능이 떨어지며[11] 별 도움이 안되었다고 깠지만, 지휘관이 아닌 소련 전차병들은 대부분의 미/영제 전차를 좋아했다고 한다.
전차병 입장에서는 소련제 전차보다 기계적 신뢰성이 높아 고장이 잘 안 나고, 일부 영국산 전차를 제외하면 자국산 전차에 비해 거주성이 좋고 화력 역시 소련제와 동급 내지는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12] 소련은 렌드리스 전차의 일부 구성품이나 컨셉을 그대로 베껴서 자기네들 전차에 적용하기도 했다.[13] M4 셔먼 전차도 소련군은 '장갑 괜찮고 속도도 나름대로 빨라 추격전에 좋고 고장도 잘 안 나고 화력도 좋다'고 극찬을 했다. 그나마 셔먼 전차의 흠이라고 잡은게 너무 높아 넓은 평지에서 적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과 궤도 폭이 협소해 험지돌파 능력이 모자랐단 것이었다.[14] 소련군은 이런 셔먼들을 애지중지하여 대전 말기까지 스탈린 친위부대 같은 정예부대에 몰아주어 베를린 포위전, 빈 포위전 등 독일 본토 공략에 요긴하게 써 먹었다. 서부전선의 미군은 셔먼 전차로 독일군의 티거와 판터에도 맞서야 했으니 장갑과 화력이 약하다고 징징거렸지만,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티거와 판터 등에 맞설 전차로 자국산의 IS-2 같은 전차들이 있었기에 셔먼의 장갑과 화력에 대해 만족해했다.
공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소련의 지휘관들은 서방군의 수송기는 쓸만하지만 전투기는 성능이 나쁘다고 깠으나 실제로는 P-39 에어라코브라가 정예부대 소속이었으며, 전차와는 달리 실제 알려진 전과도 엄청난 경우가 많았다. 역사상 미제 전투기로 올린 최다 격추수 보유자들도 소련 파일럿들이다. 나치 독일은 떼삼사로 최다격파수를 가지고 있더니
이렇게 징징대면서도 대전 중 소련은 렌드리스 더 보내라고 미국을 달달 볶았고 심지어는 그 미국도 소련이 원하는 물량을 도저히 맞춰 줄 수가 없어서 난처해했다. 소련은 별별 것들을 다 요청했는데 이렇게 소련이 요청한 것들 중에는 심지어 핵무기 개발용 우라늄 물질까지 있었다.
말 그대로 소련은 무기대여법의 효과를 톡톡히 누린 셈이다. 정작 미국과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간접적으로 전쟁했었고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부터 몇 십년간 서로 노려 본 사이임을 생각하면 참 웃긴 셈. 만약 렌드리스가 없었다면 소련 뿐만 아니라 서방 연합국도 상당한 희생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소련이 45년 5월에 나치 독일의 베를린을 완전히 짓밟고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깃발을 세우며 전쟁에서 완벽히 이길 수 있었던 건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제 무기들은 소련제보다 전반적으로 품질관리가 잘 되어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았다. 더욱이 소련은 독소전쟁 초기에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상실했기 때문에 식량문제가 아주 심각했다. 공장이야 어찌어찌 우랄산맥 근처로 옮겨 어떻게든 굴릴 수 있다지만 식량은 특성상 기후 및 토질이 맞아야 생산이 가능한데 아시다시피 시베리아는 농업에 부적당한 땅이니 농사가 불가능했다. 이러니 무기가 있다 한들 그것을 사용할 사람이 굶어 죽으면 생산한 의미가 없다. 즉 식량 위주로 이루어지던 초기 렌드리스의 위력이 실제론 소련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엄청난 위력이었단 소리이다. 평상시가 아닌 전쟁 땐 식량배급량을 줄이는 편법도 쓸 수 없는 것도 감안하면.[15]
그러나 미국의 지원은 무기보다는 소련이 중공업에 몰빵할 수 있도록 알루미늄, 구리 같은 자원 및 객차 및 화물을 실는 화차를 끄는 기관차 같은 부수기재들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더 빛을 발휘했다. 항공유 1가지만 예를 들어도 전쟁 전 소련은 석유는 많이 뽑았어도 기술부족으로 78옥탄가 밖에 안 되는 저등급밖에 생산하지 못했으며, 이것도 전쟁이 발발하자 생산을 못해 미국이 100옥탄가의 고등급 항공유를 100만 배럴 넘게 지원했으며 나중엔 아예 4개 플랜트 시설을 제공했다. 그것도 레일이나 연료탱크같은 부수기재까지 통째로 같이 넘겨주면서 말이다. 이 문단 초반에 언급한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로서만 아니라 소련 석탄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던 돈바스 지역 같은 핵심 광업 및 공업의 중추이기도 했다. 이런 알짜배기 지역을 나치 독일에게 넘겨버린 소련이 말 그대로 무주공산인 우랄 산맥에서 자력으로 독일의 공세를 막을 수는 있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물론 그런 알짜배기 땅을 다 먹고도 여러 삽질로 생산성이 한참 떨어진 나치 독일도 대단하고.[16]
사실 미국의 지원은 렌드리스법이 미국 상원을 통과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Pre Protocol이라고 해서 1941년 6월부터 1941년 10월까지 14만 톤의 고옥탄 항공유를 포함해 약 9,200만 달러의 물자가 들어갔었는데 큰 지원은 아니었지만 수도 코앞까지 밀렸던 절망적인 상황인만큼 가뭄의 단비 같은 도움이었다.
다만, 무기대여법으로 소련이 전쟁초반을 버텨냈냐하면 그런것은 아니다. 1942년에는 북극항로가 독일의 방해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이후인 1943년 2월 이후부터 보급이 이루어졌고, 기나긴 보급선인 이란루트-태평양루트를 통해 보급되었다. 또한, 보급액에 있어서도, 1942년 소련이 연합국에게 도움 받은 가치는 1,376,000,000달러. 1943년 2,436,000,000 달러, 1944년 4,074,000,000 달러였다. 무기대여법 총액중 11%가량만이 42년에 지원되었다. 43년 이후부터 45년까지 지원액이 89%를 차지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42년까지는 사실상 소련의 자력에 가까운 힘으로 막아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시기를 거친 러시아인들 대부분은 영어를 읽을 줄 안다. 미국이 러시아에 물자를 퍼주면서 포장 박스, 사용설명 매뉴얼 까지는 러시아어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17] 이러니 당시 러시아인들은 받은 엄청난 물자를 뭔지 구별하기 위해, 때로는 생존을 위해 영어를 배웠다. 잘못쓰다가 목숨이 날아가는 일이 부지기수 였기 때문.[18] 러시아는 키릴 문자를 쓰고 있었고, 이는 영어와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으며, 로마자를 읽을 수 있고 일상생활에선 프랑스어도 많이 쓰던 귀족=장교들은 러시아 혁명과 적백 내전으로 많은수가 죽고 쫓겨났으며 일부 공산당을 지지한 구 귀족 출신 소련군 장교들도 곧 등장한 강철의 대원수가 대숙청으로 쓸려나갔다. 거기에 서민층의 교육상황도 엉망이었다. 유럽사회에선 전통적으로 성경 공부 등으로 서민들의 읽기, 쓰기, 시초적인 산수, 역사 등의 교육을 담당하는게 교회이거나, 교회 소속의 학교들이었다. 그런데 혁명의 와중에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들과 학교들도 상당히 파괴되며 이들이 거의 담당하던 기초 교육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러시아 공산당도 이부분은 심각하게 생각해서 의무교육과정과 대학교육을 도입했지만, 많은 돈이 들어갔고, 크고 아름다운 러시아 대륙은 더더욱 많은 돈과 인력을 필요로 했다. 간신히 키운 대학생 집단들은 또 제1차 세계 대전 등을 겪으며 또 다 죽어나갔다. 여기에 일껏 공부시켰더니 장교가 되거나(사망률이 높아진다), 내전에 휘말리거나 숙청되는 식으로 자꾸 죽어나가자 시골에선 아예 교육 자체를 안 시키는 풍조까지 만연했고, 식량난까지 겹쳐 평균 지능 등도 동시대 유럽국가들 보다 떨어졌다. 고증오류로 유명한 에너미 앳 더 게이트 등의 영화에도 소개되듯이 장병 상당수가 로마자는커녕 자국어의 문자인 키릴 문자도 못 읽는 문맹이거나, 사실상 문맹에 준할 정도로 교육수준이 낮았다.
1.2 영국
Spam, Spam, Spam, Spaaaam, Lovely Spaaaaam!, Wonderful Spaaaaaaaam!
다들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무기대여법 최대 수혜국이었던 영국. 영국 혼자 렌드리스 전체에서 60% 가량을 차지한다.[19]
일단, 영국 육군의 경우 사실상 전차의 주력이 M4 셔먼으로 통일되다시피 했다. 이는 보병전차와 순항전차로 이원화된 전차개발구조의 문제 및 그 결과물도 상황에 쫓겨서 급조하는 등 영 신통치 않아서 자원을 낭비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의 기술력도 출중하였으므로 파이어플라이 나 M10 아킬레스 같이 셔먼 전차나 울버린 구축전차를 개조한 개량형도 많이 생산했지만 옛날 모자랄것 없었던 대영제국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망신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찌하랴.
영국 해군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개전 당시 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 3개 전선에서 활동하느라 전력이 분산되어 함선 수가 부족한데 대서양 전투로 유보트의 위협까지 받자 미국에게 구식 구축함 50척을 지원해달라는 것을 처칠이 루스벨트 앞에서 노출 플레이를 시전해 뜯어낸 것을 시작으로 수십척의 호위항공모함 및 호위구축함을 지원받았다. 게다가 주력함인 전함과 항공모함도 영국 본국의 수리 및 건조시설이 부족해 대규모 개장이나 수리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면 미국으로 가서 수리 및 개조를 받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한마디로 미국 없었으면 개전 당시의 해군 규모를 유지하기도 곤란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함선 지원의 대가로서 영국은 카리브 해 지역의 주요 해군 기지들을 미국에 양도하게 된다. 때문에 영국은 카리브 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미국에 넘겨주게 된다. 전후 영국의 자존심 때문에, 2000년대까지 프리깃 한 두 척을 상시 마약 등의 밀수 단속 임무차 카리브 해에 초계함으로 배치해 두고 있었지만, 현재는 경제 문제로 철수시키고 미 코스트 가드에게 넘겨 버렸다.
또한 본토만으로는 식량자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의 식량지원이 소련보다 더 절실했다. 덕분에 영국 요리는 말 그대로 스팸처럼 쏟아지는(...) 스팸이 지배하는 상황[20][21]에 놓였으며, 영국에서 생산하는 각종 통조림이나 전투식량도 상당수가 미제 완제품, 그렇지 않더라도 미국에서 들여온 원재료를 영국에서 가공처리한 것일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영국이 소련에게 지원한 물자의 상당수도 사실상 미제였다. 일단 미국제가 직접 넘어간 것도 많고, 영국이 미국에게서 지원받은 물자로 생산한 병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 중 호평받은 것은 발렌타인 전차였다.
1.3 중화민국
중화민국의 경우는 우선순위에서 밀린탓에 소련이 110억 달러, 영국이 330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받는 동안 10억 달러도 못 받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국부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내부에 만연한 부정부패, 이에 대한 연합군 수뇌부의 불만등으로 지원을 의심 받기도 하였다.
일단 중일전쟁 개전초의 국민당군 정예병력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아직 일본과 동맹을 맺지 않은 나치 독일이 대량의 무기를 수출하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같은 고문관들까지 파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으면서 고문관들이 철수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량의 병력과 장비를 상실한 국민당군은 그 이후로 미국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어디까지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선에 해당했고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기도 바쁜데 중국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의 주요 해안을 장악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항복한 이후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루트가, 영국령 버마가 일본에게 함락 당한 이후로 버마 루트까지 끊기면서 물자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기껏 가능한게 티베트 상공을 통한 수송인데 이러한 항공 수송으로 전차를 비롯한 중화기를 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기껏해야 총기나 야포류나 조금 줄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사고가 많아서 다 주지도 못했고 영국에서 이집트 방위를 위해 낼름 가로채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기껏 지원 온 무기들도 스틸웰이나 셔놀트를 비롯한 미국인들이 독점했지 정작 장제스는 총 한자루 받아보지 못하는 처지였는데 이 때문에 열받은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이 적은 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스틸웰 때문이라고 잡아 비난하면서 가뜩이나 좋지 않던 둘의 사이는 더 나빠진다. 그나마 인도에 주둔한 중국군의 경우에는 꽤 풍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약간의 M4 셔먼과 스튜어트 전차 100대로 무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 수백만이 주둔한 중국 본토의 사정은 가히 절망적으로,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스틸웰의 버마 공략 지원을 위해서 없는 물자와 병력을 차출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정치계에선 감리교도인 장제스 부부와 쑹메이링의 로비 때문에 친중파가 꽤 생겨난 데 반면에 미군의 경우에는 국민당군을 싸우지도 않는 군대로 얕보고 경멸하는 시각이 퍼져 있어서 국민당을 왜 지원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는데 이는 당시 중국 사정에 무지한 미국인들의 오만한 평가였다. 스틸웰 등의 미국 장교들은 국민당은 왜 방어전, 소모전에만 일관하고 왜 대규모 야전을 하지 않는가, 국민당이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벌였다는 분투는 국민당의 거짓말이다 라고 중국을 깔아보았는데 이들의 편견 덕분에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지원 우선순위는 자꾸 밀리게 된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장제스와 영미는 자꾸 충돌을 거듭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그나마 중국에 호의적인 편이었던 미국 정치계에서조차 반중 감정이 퍼지면서 상태는 심각해졌다. 게다가 스틸웰의 희대의 병크로 대륙타통작전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니미츠의 대만공격론이 쑥 들어가서 중국을 지원해야 할 전략적인 이유마저 없어지게 된다.
그나마 버마가 탈환되고 스틸웰을 대신하여 성격이 부드러운 앨버트 웨드마이어가 부임한 이후로 상태가 꽤 나아져서 중국군은 전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전열을 회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셔먼 전차를 비롯해서 미국식 무기로 무장한 국민당 정예부대들은 중국 남부를 겨냥한 일본군 10만 대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군 3만명을 저세상에 보내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미국은 나치를 패망시키고 나서 조지 패튼을 비롯한 미국의 장군들과 지상군 파견을 비롯한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나 그 전에 일본이 원자탄과 소련군 웨이브를 맞고 백기를 들면서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한편 공산당에 대한 지원 떡밥도 나온 바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장제스 대신에 자신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싶어했고 미국 특사들을 옌안에 초청하여 그들을 구워삶아 미국이 중국에서의 대화 파트너를 장제스에서 자신으로 교체하려는 로비를 벌였다. 마오는 항일에 거의 힘을 쏟지 않으면서 수백만명의 피를 뿌려가며 일본에 맞서는 장제스가 항일을 도외시한다는 얼토당토않은 프로파간다를 퍼뜨렸고 충칭은 부패하고 무기력하지만 옌안은 민주적이고 활기차다는 식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미국인들을 꾀려 했다. 스틸웰도 자기 말 안 듣는 장제스를 압박하기 위해 공산당에게도 무기를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장제스 약을 올렸는데 이 때문에 장제스와 스틸웰의 사이는 더욱 틀어졌고 결국 해임당할 처지가 된 스틸웰은 공산당 지원을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장제스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후임인 웨드마이어는 공산당을 도움으로 중국의 유일한 정권인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을 흔드는 일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취함으로 공산당에 대한 지원은 완전히 물건너갔다.
정작 국민당이 엄청난 양의 지원을 받은 것은 중일전쟁이 끝난 후로, 트루먼 행정부는 40~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국민당에게 해주지만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질서를 회복하는데 실패한 국민당이 민심을 잃으면서 중국은 대혼란에 빠졌고 장제스가 파멸적인 만주 진공 작전을 수립하면서 국공내전의 패배의 단초를 제공함에 따라 장제스에게 쥐어졌던 상당량의 미제 무기들은 국공내전에 좀 사용되다가 국민당의 전열이 붕괴되면서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넘어갔다. 이들 물자의 일부는 심지어 6.25 전쟁에 투입되어 미군을 향해 불을 뿜기도 했다.
2 전후 상황
미국 :호고갱님들 전쟁중에 빌려가신 전쟁물자 도로 돌려주셔야져?영국, 프랑스 : 돈 없는데여...
미국 : 50년 할부로 해드릴까요? 물론 이자는 붙습니다.
- 50년후 -
미국 : 빵집아저씨하고 생선집아저씨는 그래도 대충 거의 갚긴 하셨네여, 아 그리고 니넨 니네 엄마느금마빚 언제 갚을 꺼냐?
러시아 : 어... 동생들아?
발트 3국,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 형이 엄마 유산 다 받았자나? 혼자 갚으셈
러시아 : ...
사실 이 계획은 무상 지원이 아니다. 전부 빌려준 것. 세부 사항을 보면 전쟁이 끝나면 그 기간 동안 손실이 되지 않은 지원품은 미국에 돌려 주기로 되어 있었다. 돌려주는건 지원품을 직접 돌려 주던지 아니면 돈으로 환산 하여주면 되었다. 그러나 전쟁후 물자가 부족한 국가들은 상당량의 지원품을 계속 쓰길 원했고 또 미국은 전쟁중 만들어졌지만 보내주기 전에 전쟁이 끝나서 미국에 남은 상당량의 보급품을 처분해야 됐다. 이 것들은 10분의 1로 떨이로 연합국에 넘겼는데, 엄연히 대가가 달린만큼, 당연히 여력이 있는 국가는 전부 갚아야 했고, 실제로 미국은 전쟁 끝나고 나서 부족하게라도 다 받아냈다. 보통 이자율 2%에 50년 상환 기환을 주었기 때문에, 미국외 국가 에게 큰 이득이 되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심지어 적대국 소련조차도! 당장 루스벨트가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를 설득할 때 '무기를 빌려준 다음 다시 그 무기를 돌려받는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했기 때문인데 이 때 나온 비유가 이웃집에 불이 났으면 불이 번지기 전에 호스를 빌려줘야 한다는 것. 한편 반대편은 이 법안을 껌에 비유해 '아무도 돌려받고 싶지 않을 것'이라며 비난했다.
참 비싼 껌이다.
1945년 9월 2일, 전후 피폐한 영국은 갑자기 무기대여법이 끊기자 미국에 추가원조를 요청했다. 그래서 쓰고 남은 물건을 미국이 거의 10분의 1 가격으로 떨이로 팔고 나서 50년 단위로 상환을 받기로 계약을 체결하는데, 그 '10분의 1'로 떨이 판매를 한게 파운드화로 대략 11억 가까이 됐다. 여기에 무기대여법은 언제까지나 전쟁 끝나고 나서는 다 갚아야 하는 것이니 그 빚도 추가. 영국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전쟁 이후 긴축에 힘써야 했고, 상당히 오랜 기간 프랑스처럼 전쟁터가 되지 않았음에도 피폐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후 50년이나 넘은 2006년에서야 비로소 다 갚을 수 있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비밀창고에 있던 금괴로 땡처리하고 입을 씼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루머이다는 말이 있었지만 이게 사실로 밝혀 졌다. 1942년 영국함 HMS Edinburgh 미국에 보내는 금괴 4.5톤을 나르는 중 독일 잠수함에 침몰 되었다. 이 금괴는 1981, 1986년에서야 인양 되었다. 1948년에 소련이 1.7억 달러로 전부 변제하는것으로 하자고 했으나 미국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미국은 전쟁중 소련에 보낸 물자 값어치 중 전쟁 손실 예상 50%를 공제한 가격의 10분의 1인 13억 달러를 요구 했다). 1951년에 8억 달러를 변제하라고 요청하자 소련은 3억 달러만을 변제하겠다고 하자 또 파토가 난다. 결국 1972년에 소련이 7.2억 달러를 갚기로 미국과 최종 합의 한다. 그런데, 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하는 바람에 변제 주체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소련의 구성 공화국 중 러시아가 잔액의 61.34%를 담당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구성 공화국들이 나누어 책임지기로 했으나 발트 국가,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투르크 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서명하지 않았다.[22] 그러나 1993년 4월 2일 러시아가 관련 채무를 전부 책임지는 것으로 서명하여 렌드리스 관련 채무는 전부 러시아가 책임지게 되었다. 2000년에 6억달러를 변제하고 경제가 나아진 2006년 8월 21일에 전액을 변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파리클럽을 통해서 소련시절 서방에 졌던 빚을 전부 갚은 것.
중국 국민당의 경우는 국공내전 이후 타이완 섬으로 쫒겨 나가서 갚을 여력은 커녕 추가적인 도움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에 그냥 미국이 빚 받기를 사실상 포기했다. 그 외에도 무기 대여를 받은 국가들은 전쟁 이후 물자 지원에 대한 보답 겸 대금 지불 대신으로 미국에게 병기나 식량 등의 물자를 지급하거나, 기지 부지 등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사실상 전쟁을 일으킨 추축국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이 미국의 채무자가 되어버렸다. 또한 독일이 더 오래 저항하거나 미국에게 선전포고 안 했으면 그만큼 빚이 더 늘어났을 것을 생각해보면...영국은 망했어요
3 의의
무기대여법으로 당시 강국이던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미국의 무기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산 무기에 익숙해진 유럽의 조병창들과 군인들의 경험은 훗날 북대서양 조약기구 창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마디로 미국산 무기를 오래 쓰다보니 길들여져서,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하면서 미국식 규격이 새로 도입되었지만 별 문제없이 미국식 규격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
전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피폐해진 유럽에 부흥자금을 지원하는 마셜 플랜까지 실시, 무기대여법과 마셜 플랜은 전후 세계에서 미국의 입지를 새롭게 구축하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사실 이것은 미국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 경제가 이런 잉여 생산품을 모조리 외국에 처분하게 되어 대공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 미국의 활황을 만들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연합국의 윈윈게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냉정히 말하자면 미국이 조금 더 많이 이득이였고.사실 엄청난 개이득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의는 바로 만약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떻게 끝났을까? 나치가 워낙 꽉 막힌 집단이기는 하지만 생산력 자체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에 비해서는 밀릴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독일군은 부족한 공업력으로도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선전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추축국의 실제 기본 공업력은 소련에게 전혀 밀릴 일이 없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 추축국은 영국과 러시아의 유럽 영토 일부를 제외하면 정복과 동맹, 우호적인 중립 등을 통해 전 유럽의 자원과 공업력을 거의 다 흡수한 상황이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 공장설비를 포함해서 뜯어갈 수 있는건 모조리 뜯어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모든 설비를 뜯어갈 수 있던것도 아니고 공장은 뜯어간다고 하더라도 지하에 매장된 자원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이는 소련의 공업력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다만 소련 점령지에서 독일이 얻은 이익은 다른 점령지보다는 적은건 사실인데 설비를 뜯어간것 뿐 아니라 인종청소를 한다고 마구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비숙련공을 동원해서라도 일단 닥치는대로 찍어내다 보니, 규모의 경제에 의한 숙련에 의해 갈수록 더 나은 것이 찍혀나오는 소련에 비해 독일의 생산효율성은 심하게 떨어졌다.
독일은 독소전쟁 이전에 이미 총력전 태세로 들어갔고, 소련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여 많은 자원과 공업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관료제의 부패 및 기업들의 알력 다툼 등으로 지극히 비효율적인 생산을 했다. 프리츠 토트 - 알베르트 슈페어의 생산 개선에 의해서야 무기 생산량을 증가하기 시작했으나 이는 상당히 늦은 시점(1943~1944)이었다. 이미 연합군은 추축국 점령지를 탈환했고, 추축국 내부에서도 동맹들이 하나 둘씩 이탈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소련의 자원줄을 끊어대던 유보트 전력도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오히려 연합군 해공군에 의해 독일의 자원줄은 계속 끊기고 있었다. 공장에는 포탄이 떨어지고, 장인들 역시 자원이 부족해서 예전같은 고품질 병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총력전에 동원된 비숙련공들이 만든 병기들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고스란히 가져가면서도 비숙련공의 숙련화를 통한 공업효율 증가 효과는 크게 누릴 수 없었다. 결국 전쟁 후반에는 개선된 품질의 소련제 병기와 전장에서 끝없이 숙련된 소련 병사들의 힘으로 비효율의 독일을 앞지를 수 있었다.
결국 소련의 물량에 밀린 독일이 패하기는 했겠지만 적어도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루스벨트의 말마따나 이웃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 호스를 제때 빌려주어서 우리집까지 불이 옮겨붙지 않게 된 셈이다.
4 추축국의 경우엔?
추축국의 중심인 독일 역시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다. 독일은 원유의 30% 이상을 루마니아에서 받았으며, 자잘한 전차부품의 최소 30% 이상을 헝가리로부터 공급받았고, 강철과 같은 물품들의 1/3을 노르웨이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려지지 못한 얘기지만, 독일은 동계장비를 절대적으로 핀란드에서 공급받았다. 독일은 전쟁 내내 핀란드에게 동계 장비를 공급받았으며, 이탈리아군이 저평가 당하는 경우가 심한데 북아프리카 전선 또한 이탈리아 해군이 죽어라 노력해준 덕분에 겨우 보급을 유지하는게 가능했었다. 또한 독소전 초기 독일의 보급선은 독일의 동맹국들이 피와 살을 깎는 고통을 겪으며 보호해주고 있었다. 괜히 독일이 동맹국의 원조가 없었으면 유고 빨치산에게 패전했을꺼라는 얘기가 있는게 아니다. 다만, 노르웨이는 공격을 받은 시점부터 동맹이 아니라 식민지 수준이었는데 노르웨이를 동맹으로 간주하게되면 영국도 if 에선 독일만큼 개막장이 되버린다(...)그런데 뭐 좋을 게 있다고 나치에 유리한 if를 설정하나?
- ↑ 항복한 적성국에 주둔하는 부대를 위한 장비 소요, 중간에 중단할 경우 소요되는 행정 비용이 더 많은 경우 등을 고려한 것이다.
- ↑ 무기대여법 전체 추산 액수인 약 500억 달러 중 영국은 313억 달러(전체 액수의 60%) 가량을 받았다. 소련은 109억 달러(21%) 가량. 다만, 이 수치는 영국과 영연방 전체를 포함한 수치이다.
- ↑ 소련은 이미 렌드리스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1942년 1월에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1차적으로 독일의 공세를 꺾었다. 이후 스탈린의 반격이 실패하면서 다시 나치와 소련은 공방을 이어가게 되지만 어쨌거나 나치 독일의 자랑거리였던 전격전은 1942년 1월에 이미 끝났고, 이후는 완전히 소모전으로 돌입한 상황이었다. 이렇듯 소련이 미국의 도움없이도 독일의 공격을 막아낼 가능성이 높은 건 맞지만, 여기엔 소련의 광대한 국토라는 요인이 크다. 나치 독일이 목표로 삼았던 유럽 러시아(우랄산맥 서쪽)의 면적은 인도 아대륙(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과 맞먹는 광대한 영토로 이론적으로 수백만 병력을 배치한다고 해도 1㎢당 고작 2,3명의 병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었으며 수비만 할 수도 없었기에 중일전쟁의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철도와 도시에만 수비병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모스크바까지가 독일의 공세역량 한계였던 것이다.
- ↑ 애초에 러시아는 그들이 해온 거의 대부분의 전쟁에서 무지막지한 국토와 추위를 통한 방어전으로 적군의 끔찍한 소모를 강조해 승전하는 전쟁이 대부분이었고, 러시아가 자기 국토를 떠나 공격해서 승리한 전쟁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1차대전에서는 방어전이었음에도 양쪽에서 전쟁을 하던 독일에게 완패를 인정하고 전쟁에서 빠졌다, 2차대전에서도 미군의 지원 없었다면 결국 최악의 방어전쟁의 승자 정도이상은 어려웠다. 러시아가 공격에 나설 수 있던 이유는 철저히 렌드리스 덕분
- ↑ 대전 총합, 당연히 독일 해군의 유보트와 폭격기 세력이 그나마 건재하던 초기에는 소모율이 훨씬 높았다.
- ↑ 즉, 그 동안 전시물자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소리다.
- ↑ 지구본이나 세계지도를 놓고 보자. 북아메리카 북부에 위치한 미국과 캐나다에서 배에 물품을 싣고 북대서양에서 출발하여 지구 반대편의 남대서양 최남단의 희망봉을 넘어서 다시 적도권으로 올라가 이란까지 갔다가 거기서 육로를 통해 북유럽에 가까운 동부전선으로 렌드리스를 보낸다.
길기도 하다보면 알겠지만 지구 정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의 최북단에서 최남단을 거쳐 다시 최북단으로 돌려서 물건을 배송하는 엄청난 여정이다. 그나마 1943년 중반 이후에 북아프리카 전선과 시칠리아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탈리아 전선이 생기면서 지중해에서 추축국 세력을 정리하고 나서야 수에즈 운하를 통해 렌드리스 수송이 시작되고 최북단->최남단->최북단을 돌리는 뺑뺑이가 사라지면서 이전에 비해서는 그나마 가까워진다. - ↑ 총 14,902기의 엔진을 지원
- ↑ 물론 진짜로 소련 전투기들이 미제 엔진을 달고 날라다닌건 아니다. 오히려 렌드리스로 받은 항공기에도 자기네들 엔진을 가져다 달기도 했고 주력 전투기들의 엔진은 자기들 엔진을 가져다 썼다.
물론 그 엔진을 만드는데 사용한 재료야 뭐... - ↑ 이미지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트럭 숫자가 병력수에 비해 정말 극도로 한심한 수준이었으며, 실제로도 보급 운반을 트럭이 아닌 말로 했다.
한심한 독일 - ↑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연합군이 일부러 못써먹을 병기를 보내오나 의심할 정도로 렌드리스 전차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다. 마틸다나 발렌타인은 포탑이 너무 작아서 나치 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큰 주포를 장착 할 수가 없는데다 소련 전차에 비해 속도가 느렸다. 발렌타인은 그나마 소련에서는 T-34와 SU-76에 밀려 43년 이후에는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 소련제 경전차들을 대신하여 경전차로는 쓸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마틸다는 나름대로 튼튼한 것 외에는 장점이 없었고 M3리나 그랜트는 당연히 나쁜 평가를 받았으며 그나마 처칠과 셔먼의 평가가 좋은 편이었는데 처칠은 그 맷집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셔먼은 너무 높은 차체와 그에 비해 좁은 궤도 폭이라는 문제점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괜찮은 전차라는 평가를 받았다.
- ↑ T-34는 공격*방어력*속도가 조화를 이루었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승무원이 필수로 망치를 갖고다녀야 할 정도로 조종성이 나빴고 거주공간이 매우 좁아 30분 이상 운행시 전투에 지장을 줄 정도였으며 소련의 열악한 금속가공기술 덕분에 16시간 이상 운행하면 반드시 오버홀(전면점검)해야 할 정도로 내구성이 안 좋았다.
- ↑ 그 외에도 소련은 렌드리스로 온 원조품들, 미국의 과학기술 원조(15000의 소련 관리와 기술자들이 미국의 공장과 군사시설을 방문했다.)를 통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군사, 산업 부분에 써먹었다.
- ↑ 사실 전차 높이가 높은 것이 꼭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 것이 높이가 높은 만큼 시야가 좋아져서 미리 적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뿐더러 피아구별이 확실해진다는 장점도 생긴다. 궤도 폭은 확실한 단점이지만...
- ↑ 전쟁이 발발해서 사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 일일 칼로리 소모량이 급격히 높아지기 때문. 1kg 남직한 철모를 쓰고 4kg가 넘는 묵직한 소총을 개인화기로 들며(기관총 사수나 박격포병 같은 보병은 이것보다 더 무거운 기관총 및 박격포 같은 지원화기도 더해진다), 10kg는 넘는 탄약을 소지하면서 여기에 더해 야삽, 텐트 같은 군장까지 감안하면 40kg가 넘는 무게를 지고 전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평상시의 1일권장섭취량인 2500kcal에 비해 4,000kcal는 기본이고 심하면 6,000kcal를 넘는 막대한 칼로리를 소모하게 된다. 식량배급량을 줄이게 되면 당연히 전투에 막심한 손해를 끼치게 되므로 전략적 차원에서 자살골이나 다름없으며 후방인원 역시 전쟁시엔 공장에서 쉴새없이 생산활동에 전념해야 하므로 막대한 칼로리가 소모되는 것은 똑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군을 초식동물로 만든 무타구치 - ↑ 실제로 차트를 보면 대전 중 물자 생산량은 연료를 제외하면 석탄, 철광석, 알루미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소련이 독일보다 열세했다. 그런데도 병기 생산량이 밀리는것은 렌드리스와 나치 독일의 형편없는 생산관리 역량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 ↑ 사실 미국에서 쓰려고 제조한 물자를 수출도 아니고 말그대로 공짜로 퍼주는 상황이었으니 포장을 바꾸는데 또 돈이 들어가는 것도 문제였다.
- ↑ 비슷한 예로 한국군은 1960년대 베트남전에서 거의 모든 물자를 미국에 지원받았다. 그 중 대인 지뢰/폭탄인 크레모어를 받았는데, 적 방향으로 설치 하라고 쓰인 'To enemy front' 라는 영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반대 방향으로 세팅해 놨다가 부대원 30여 명이 전멸당한 사례도 있다. 도저히 웃지못할 '실화' 이고 이런 경우가 한두번도 아니고 상당히 많았다. 견디다 못한 한국군도 미군에 지원물자를 한국어로 기입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군에선 군납물자 스펙을 자신들이 결정할 수 없다고(사실 군납품의 스펙을 결정하는 것은 베트남에 있는 미군사령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군납품을 보급하는건 미 국방부니까) 매뉴얼만 한국어로 써서 보냈는데 당연히 이런 종이 매뉴얼 쪼가리는 정글인 베트남에선 비에 젖어서 거의 쓸모가 없었다. 결국 한국군들은 선임들이 후임들에게 목숨과 맞바꾼 노하우를 구두로 전승하는 식으로, 저 영어 단어만 죽어라 외우고 익히는 식으로 적응해 나갔다.
- ↑ 다만 이 수치는 영연방 전체가 받은 지원 금액이다. 물론 직접 받은건 영국이고 영국이 그렇게 받은걸 영연방에게 분배했으니 영국이 받았다고 이야기해도 무리는 없겠지만.
- ↑ 애초에 오늘날 이런 불필요한 메일을 일컫는 '스팸'이 이런 스팸만 먹던 영국의 사정에서 나온 말이다...
- ↑ 그 유명한 피쉬 앤 칩스를 생선 대신 스팸으로 만들기도 했다.
- ↑ 1991년 12월 4일 "외부 공공 부채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합자산 승계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