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곤

남곤(南袞)
(1471 (성종 2년) ~ 1527 (중종 22년))

1 개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사화(士華)과연 사화의 주인공, 호는 지정(止亭)·지족당(知足堂). 그래서 지족당 남곤이라고도 한다.

훈구파로 알려져왔지만 실제 그는 사림파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고,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과는 동문이자 친한 사이였다. 그는 훈구파가 아니라 실은 임사홍과 함께 사림파에 의해 오점으로 기록된 인물이었던 것이다.[1] 또한 현대에 이르어서 재평가된 인물 중 한 명.

대국적으로 보자면 사장詞章(문장+시가)을 중시한 조선 초기 도학파의 마지막 걸물로 불린다.

2 생애

2.1 가계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후손으로 남규의 손자[2]이자 곡산군수를 지낸 남치신(南致信)의 아들이다. 사림파의 중시조인 점필재 김종직의 직계 제자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던 김일손과도 친했다고 한다[3].

하지만 사후에 그가 역적으로 몰려서 가계가 몰락했으므로 그의 가계는 정확하지 않다. 게다가 그의 아들도 없고, 서자 한 명이 겨우 후손을 이어갔으므로 누구하나 그에 대해 정확하게 재조명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어려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지만 이 때문에 그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죽을 위기를 넘긴다.

2.2 조광조와의 만남

조광조 스승 김굉필은 무오사화로 죽었지만 김굉필의 동문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리고 김굉필에게서 배출된 다른 제자들인 김정국, 김안국 등도 있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은 물론 0.5세대 차이나는 선배인 남곤 또한 즐겨 모셨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무오사화 이후 시점이면 남곤은 이미 생존자로 끝발 높은 중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하루는 남곤과 조광조가 산책을 나갔는데 조광조는 어떤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가자 계속 흘끔흘끔 쳐다보게 됐다. 그러나 남곤은 눈길 한번 안주고 그대로 앞만 보고 달려갔다.

집에 돌아온 조광조는 부끄러움에 자책하며 한탄하였으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이렇게 받았다.

"젊은 사내가 어떻게 여자 보고 눈이 한번도 안돌아갈수 있겠느냐? 그러나 남곤이란 친구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친구가 아니라 선배 뻘일텐데[4] 그는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서른이 넘었잖아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아가씨들에게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이냐.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흘리게 할 거나 외면할까봐 무섭구나"

이 말을 마친 조광조의 어머니는 짐을 싸서 남곤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이사했다고 한다. 본격 야사 디스 돋네요 다만 참고해야 할 것은 이처럼 '지나치게 냉정한' 인간을 멀리하라는 이야기는 조선 시대에 흔히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비슷한 야사는 다른 인물에게서도 찾을 수 있으며, 조광조 모친의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에 그저 야사 정도로 취급하는 게 좋을 듯 하다.[5]

2.3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성종생원시험과 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1494년에는 과거에 급제했으며 검열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성종 때 외척 윤필상을 탄핵하였다가 투옥되었고 유순정, 성희안의 비리를 탄핵하였다가 또다시 투옥되기도 하였다.[6]

그뒤 낭관, 직제학, 부제학, 좌부승지를 거쳐 연산군 초 도승지를 지냈다.

곧이어 성종은 죽고 연산군이 즉위했다. 연산군의 폐비 윤씨 추존을 성종의 유지를 어기는 일이라 비난했고, 연산군의 행동에 테클을 걸다가 갑자사화 때 겨우 목숨을 건지고 유배된다. 1504년무오사화로 유배지에 위리안치형이 내려짐으로서 자칫하면 죽을 뻔하기도 했다.

1506년중종반정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후 반정 공신들에게는 밉보였지만 중종반정을 긍정하고 지지한 덕에 살아남을수 있었다.

2.4 중종반정, 기묘사화, 승승장구 그리고 최후

역모를 고변한 공로로 종2품으로 승진한 뒤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중추부동지사, 중추부지사 등을 지냈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내기도 했다. 1518년에는 종계변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변무를 요청했지만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이 문제는 나중에 홍순언이 해결하는 그 일이다.

1519년 심정(沈貞), 김전 등과 함께 중종의 비밀 명령을 받고 입궐,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것을 묵인했다. 조광조 항목에서도 드러나지만, 발의와 결정은 중종이 했다. 정광필 등을 설득하는 역은 본인이 맡았다고 한다.

그 결과 조광조(趙光祖), 김정, 김식 등 신진사림파와 안당 등의 친사림적 재상들이 모조리 숙청됐는데 후에는 진짜 원인제공자인 중종을 대신해 그가 모든 죄를 쓰게 됐다. 비록 심정과 홍경주와 함께 기묘사화를 준비했다고 할 지라도 조광조가 잡힌 이후에는 처벌 수위를 낮게 청하다가 부끄러움을 느껴 귀가했다고 했고, 조광조의 사사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슬퍼했다고 한다. 실록을 보면 오히려 남곤이 조광조빠라는 생각까지도 들 정도다. 그후 좌의정을 거쳐 1523년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이 된 이후 떠오르고 있던 김안로에 대해 위험의식을 느끼고 그를 유배시켜 버린다. 도학정치를 조광조를 몰아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후일 김안로처럼 권세를 휘두르는 간신은 아니었다. 차림은 수수했고, 뇌물을 멀리했다. 또한 글을 잘 써 중국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했었다고 한다. 당대의 대문장가였다. 애초에 조광조 측의 미움을 받은 것도 문장을 잘해서... 사실 심정이나 이행등 남곤 일파들은 개인적으론 청렴한 인물들이었다. 차라리 사림의 지지를 받은 김안로가 사치했다면 사치했지... 반정 삼대신이 죽은 이래 윤씨 외척들이 등장할 때 까지의 관료들은 대부분 사림이며, 그래서 이 시대는 훈구 vs 사림으로 보기보다는 되려 선조 초기의 사림의 노소 분열과 유사한 강온 대립이라고 보는게 이해에 바르다.

하지만, 그는 사화 이후, 땅으로 떨어진 학풍과 권신들의 행보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 등에 대해서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데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정치가였던 셈.[7] 현실주의적인 면에서도 신숙주와 닮았다.

다만 남곤도 변명의 여지는 있는데, 기묘사화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중종에게 돌아갔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조광조의 개혁을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기묘사화의 주범으로 몰리고 개혁을 지지하던 사림에게 주적으로 찍히면서 남곤이 중종의 뜻을 거스르면서 개혁을 시도하거나 실권을 행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던 사람이 어찌 됐는지를 눈앞에서 똑똑히 봤으니...

죽기 전 자신이 쓴 글들을 꺼내면서 "나는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이 글들을 모두 불태워 나의 죄가 더해지지 않도록해라. 그리고, 나의 무덤에는 비석도 세우지 말고, 시호도 청하지 말거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광조를 죽이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에 대해 속죄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그가 쓴 글들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그의 최후를 설명하였다. 자신의 글들 대부분을 태우지 않고 남겼더라면 당시 문학과 시대, 그리고 남곤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기에 아쉬울 수 있는 부분.

향년 57세. 조광조가 죽은지 8년 만의 조금 빠른 죽음이었다.

'잊혀질 권리'를 주장한 선구자라 카더라

3 사후

세상을 떠난 뒤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김안로의 복귀로 그의 동지들은 4년 만에 풍비박산이 났고레알 권불십년, 이어 조광조의 후학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1558년(명종 13) 관작과 함께 삭탈당하였고, 선조 초년에는 다시 관작을 추삭(追削)당하였다. 당장 중종 말년에 김안국이 복권 된 걸 생각해 보자.

그의 외손자 송인중종의 서녀 정현옹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아들 후손이 없었던 탓에 그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서자인 남승사의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이극돈의 케이스와 같은데, 이건 사실 서얼은 이 당시 문과 응시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고, 진급에도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제도를 만든 것이 성종이고, 서얼 및 서얼 자손들에게 문과응시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조선후기의 일이다. 즉, 원래 양천제였던 조선초기에서 서서히 양반들의 특권이 본격화 되고, 그외 신분들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하는 것이 성종에서 중종으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성종에서 중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서얼차대법(서얼), 재가녀자손금동법(재혼한 여성 자손), 종친사환금지법(종친) 등이다. 이는 성종대 훈구파가 시작했고, 중종대에 등장한 사림에 의해서 더더욱 강화되었다. 당장 조광조부터가 낮은 신분에 있다가 벼슬에 오른 사람들을 용납을 못했다. 이후 조선사에서 서자로 고관에 오른 유자광 같은 사람은 씨가 마르게 되고, 당상관에 오른 허준은 족보에 서자라고 되어 있음에도 알고보면 적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 정도가 된다. 사실 허준의 경우는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했던 선조의 영향이 더욱 크겠지만 말이다.[8]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썼으나 사화를 일으킨 인물이라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후대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얼마나 욕먹었는지 후에 현종때 김만중이 허적을 남곤, 심정에 빗대어 탄핵했다. 뭐 탄핵과정은 서인인 김만중이 좁게는 탁남, 넓게는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지만 말이다.

4

그의 문장은 앞서 말한 일화로 거의 사라지고 유일하게 시 "신광사"의 한수만이 전한다.

庭前柏樹儼成行(정전백수엄성행) / 뜰앞의 잣나무는 삼엄하게 늘어서

朝暮蕭森影轉廊(조모소삼영전랑) / 아침저녁 우뚝한 그림자가 회랑을 돈다
欲問西來祖師意(욕문서래조사의) / 서쪽에서 온 조사의 뜻 물으려 하니
北山靈風送凄凉(북산령풍송처량) / 북산의 신령한 바람 서늘한 기운 보내온다

또한 김일손의 묘를 중종반정 뒤 이장할 때 추도시를 짓기도 하였다. #

  1. 사림에 오점을 남겼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림의 기준이다. 역사적 평가를 고려하면, 사림이 이런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면서 사림의 한계와 폐쇄성을 드러냈다라고 볼 수 있다.
  2. 남규는 임사홍의 외할아버지이다.
  3. 다만 김일손, 김안국과는 7살 차이, 김굉필과는 무려 17살이나 나이차가 난다. 조광조와는 아래로 11살차.
  4. 다만 과거, 구한말까지만 해도 나이가 열살 넘게 차이가 나도 친구가 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기에 9살 차이여도 친구일수는 있었다.
  5.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중국에도 있는데, 이쪽은 평가가 정반대이다. 대표적인 것이 세설신어에 등장하는 용두 화흠과 용미 관녕의 일화. 이 때 좀 더 인간적인 화흠을 관영은 선비도 아니라고 갈라서는데, 화흠이 악역이다. 조조쪽에 붙어서 화흠이 좀 대표적으로 디스당한 인물이라고 해도 해석이 정반대라는 것이 이체롭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한국이 더 극단적이고 교조적인 경향이 강한데, 야사에서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6. 유순정과 성희안은 뒷날의 중종반정 공신으로 이때문에 중종 때 한번의 위기를 또 넘기기도 한다.
  7. 조광조 측에서 '시나 문장 같은 거 모조리 없애야 됩니다!' 식의 발언을 하자 '그럼 중국과의 외교는 무엇으로 하겠습니까!'하고 반대했다.
  8. 선조는 임진왜란 호송공신으로 마의를, 종계변무로 역관을 공신에 올리는 파격적인지 감정에 휩쓸리는 모를 행동을 했다. 종계변무와 엮인 야담은 선조의 기행 때문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