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 이사금

75px
신라의 역대 국왕
3대 유리 이사금 박유리4대 탈해 이사금 석탈해5대 파사 이사금 박파사
시호탈해 이사금(脫解 尼師今)
석(昔)
탈해(脫解) / 토해(吐解)
생몰년도음력기원전 19년 ~ 80년 4월(99세)
재위기간음력57년 10월 ~ 80년 4월 (24년)

1 개요

백제 다루왕의 라이벌

석씨의 시조 중의 한 명이자, 신라 석씨 왕조의 첫 . 칭호는 이사금.

석탈해(昔脫解), 또는 이름을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성의 유래는 그가 올 때 그가 처음 신라에 올 때 실려(?)있던 배 위에 까치()가 많이 있어, 이에 까치라는 글자에서 '새 조(鳥)' 자 부분을 빼고 석(昔)만 남은 것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름은 음차일 가능성이 높다.

2 생애

2.1 전설

등장부터가 전설이다. 가야신라의 전설을 조합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석탈해는 왜국 동북쪽 1천 리 바깥에 위치하는 용성국(龍成國) 혹은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자로, 왕비가 임신 7년(?)만에 큰 을 낳았고, 아버지인 함달파왕이 불길한 것이라고 생각해 배에 실어 내버렸다. 이후 배를 타고 신라 동해안의 아진포에 떠내려온 걸 노파가 건져내 알에서 깨어난 탈해를 키웠다. 탈해는 물고기를 잡으며서 어머니를 부양했지만 양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짐작해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장성한 뒤에는 금관가야에 가서 왕위를 내놓으라고 깽판(…)을 치다가 김수로왕에게 처발리고 신라로 가서, 이번에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던 호공의 집을 속임수로 강탈(...)하고[1], 그 소문을 들은 남해 차차웅이 그가 지략가임을 알고 사위로 삼았다.

용성국(龍成國)은 정명국(正明國)·완하국(琓夏國)·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하였으며,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수로에게 쳐발린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금관가야)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나루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머털도사?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ㅡ 《삼국유사가락국기

이러한 탄생 및 출세담에는 탈해의 출신에 대한 여러 가지 단서가 있는데, 우선 출신국의 이름에서 다파나국은 서역(西域)의 소국이며 함달파는 불교음악이므로 용성국은 서역에 있었다는 설, 북방적인 야장설화(冶匠說話)와 남방적인 난생설화(卵生說話)가 모두 들어 있는데, 그 두 요소가 함께 들어올 수 있는 경유지가 중국 중남부 해안 지역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두 설과는 결합되지 않지만 탐라국, 즉 제주도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한편 신라에 도착한 후에는 계림 동해안에서 거주했다는 점을 봐서 동해안에 거주하던 집단의 수장이라는 설도 있다. 그가 죽은 뒤 동악(東岳)의 신으로 여겨진 것과도 연결된다. 신라의 오악 중 동악이 토함산인 것을 보면 토함산의 이름 또한 탈해의 이명인 토해의 이름을 땄을 가능성이 높다.

  • 이러한 학설과 여러 가지 조사가 합쳐져, 최근에는 석탈해가 인도 타밀주 촐라국 출신이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참조. 다만 단순히 인도에서 직행해서 온 건 아니고, 일본 북부의 타밀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왔다고...그래서 신라식 카스트제도가 생겼나
  • 그 외에, 호공 또한 당대에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석탈해와 사이가 좋았음을 들어 호공이 집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석탈해가 그의 집에 얹혀 살았으며, 마찬가지로 신라 외부에서 온 자로서 신라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호공의 도움을 받아 석탈해가 신라 귀족 사회에 편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탈해왕 2년(57) 호공을 대보(大輔, 총리대신)에 앉혀 자신의 후임을 맡겼다. 대보란 관직은 고구려 유리명왕의 기록에도 나온다. 탈해왕 이후로 대보는 이벌찬이찬의 업무로 변경되는 듯. 이 때문에 신라에서 대보를 맡은 인물은 세 명 뿐이고, 이때문에 대보라는 직책 자체가 외부 유이민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도 있다.
  • 한편 가야의 성립 연도는 AD 42년으로, 이 때는 기록상 이미 석탈해가 남해 차차웅의 사위였다. 역사와 전설의 이러한 모순점은 당시 국제 정세를 비추어볼 때 세력을 확장하던 신라가 가야의 성립을 반대하여 석탈해가 가야로 침공했다가 패배했음을 시사한다는 주장이 있다.

어쨌거나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부인도 그렇고 제주도삼성혈 신화에서 부인들이 온 것도 그렇고 의외로 남부에서 배 타고 유입된 인물들이 많았던 모양. 고대 인류의 무역은 이따금씩 상상을 초월한다.

여하튼, 장인어른 남해 차차웅은 석탈해가 왕위를 이으라고 했지만 유리 이사금과 잇자국 대결(?)을 통해 남해의 아들 유리에게 우선 왕위를 양보했다. 이사금이라는 칭호 또한 이 잇자국 대결에서 나왔다. 이 때 잇자국의 수 비교를 먼저 제안한 것은 탈해 이사금이었다. 부처의 상 중에 이가 많다는 것이 있음을 감안하면 역시 탈해 이사금이 인도 쪽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 가능. 그러다 유리 이사금이 사망한 뒤에야 결국 석탈해가 신라 제4대 왕이 된다. 이 때가 AD 57년이며 이후 AD 80년까지 재위하고 사망. 나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이 같은 책 내에서도 묘하게 다르다. 출생년도가 기원전 19년이라고 되어 있는 주제에 즉위년인 AD 57년에 62세라고(...). 헌데 유리왕 재위기의 후기 14년 기록이 없고, 기록이 없기 시작하는 AD 43년에 그가 62세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때쯤 유리왕이 권좌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3 신라 국왕에 즉위한 이후

왕이 된 뒤에는 일설에 의하면 본인의 출신국가일지도 모르는 국과 수교하는 등 외교에 힘을 기울였으나, 백제가야와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63년 백제의 외교 요청을 거부
  • 64년 백제의 침공을 격퇴
  • 66년 와산성의 함락과 탈환
  • 70년의 백제 침공
  • 73년 왜구의 침략(방어 실패...)
  • 74년의 백제의 노략질
  • 75년 와산성 함락, 76년 탈환
  • 77년 가야와의 교전

재위기간 내내 백제가 쳐들어왔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따져보면 백제는 아직 한강 하류를 다스리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신라도 경주와 그 주변 수준을 다스리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2] 석탈해 때 백제와 싸웠다는 기록은 신뢰성은 떨어진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정말로 백제와 신라가 싸운 것이 아니라, 후에 백제에 합병되는 마한계 소국 가운데 하나와 역시 훗날 신라의 영토가 되는 진한계 소국 가운데 하나가 전쟁을 벌인 것이 백제와 신라로 기록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아니면 실제로는 몇백 년 뒤에 일어난 사건인데 삼국의 역사를 늘리기 위해 시대를 앞당겨 기록하다가 생긴 오류로 보기도 한다.[3][4]

왜구도 오고, 가야하고 교전했지만 이건 덤 같은 느낌. 77년 6월 가야군 1천이 낙동강을 통해 황산(양산시)으로 쳐들어오자 장군 길문(吉門)을 싸우게 해 승리했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안 나오지만 거도 열전에는 탈해 이사금 때 장군 거도가 거칠산국(지금의 부산광역시)과 우시산국(지금의 울산광역시)을 당시 신라에서 일 년에 한 번 개최했던 말타기 행사 마숙(馬叔)을 하는 것으로 위장해 두 나라를 방심시킨 뒤, 모인 기병으로 기습 공격해 복속시키기도 했다. 삼국사기상에서 나오는 신라의 첫 번째 경주 바깥 외국 정복 기록이다.

이후 AD 80년에 사망하였으며, 전설에 따르면 이후에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뼈를 새로 수습하였는데 머리둘레가 3척 2촌, 키가 9척 7촌이라는 무시무시한 수치였다고 한다. 당시 1척이 20cm 가량이었음을 감안해도 머리둘레만 64cm에 키는 194cm... 고대인들의 평균 키를 감안하면 우리가 최홍만을 보는 것 이상의 위압감이 느껴졌을 것이다(기록을 신뢰할 수 있다면). 생각해 보면 미국링컨 대통령도 사열식을 그린 그림을 보면 군사들에 비해 머리가 삐쭉 나와있었고, 자식도 귀했던 것을 생각하면 두 사람이 비슷한 병을 앓았을 가능성도. 그것보다 머리 크기가 더 공포스럽다. 무슨 날씬한 사람들 허리 둘레보다 머리 둘레가 더 크냐...

어쨌거나 그 뼈를 수습하여 부순 뒤 흙과 섞어 소상으로 만들어 동악(東岳, 동쪽의 큰 산)에 모셨다고 한다. 시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후 신라 왕조에서 동악신으로 숭상되었다. 신라의 동악이 토함산인 것을 보면 탈해의 이명인 토해의 이름을 땄을 가능성이 높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一月 탈해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호공을 대보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토함산에 오르다
三年夏五月 왜국과 우호를 맺다
三年夏六月 살별이 천선에 나타나다
五年秋八月 마한의 장군 맹소가 항복하다
七年冬十月 백제 왕의 회동 요청을 거부하다
八年秋八月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다
八年冬十月 백제의 구양성 공격을 물리치다
八年冬十二月 지진이 일어나고 눈이 오지 않다
九年春三月 알지가 태어나고 국호를 계림으로 고치다
十年 백제에게 와산성을 빼앗겼다가 회복하다
十一年春一月 박씨 귀척을 주주·군주로 삼다
十一年春二月 순정이벌찬으로 삼다
十四年 백제가 침입하다
十七年 왜인의 침공을 막다가 우오가 전사하다
十八年秋八月 백제의 침공을 막다
十九年秋九月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다
十九年冬十月 백제가 와산성을 함락시키다
二十年秋九月 백제에게 빼앗겼던 와산성을 회복하다
二十一年秋八月 아찬 길문이 가야와 싸워 이기다
二十三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四年夏四月 강한 바람이 불어 금성의 동문이 무너지다
二十四年秋八月 왕이 죽다

5 기타

또한 대개 하늘의 목소리라고 기록된 것이 대개 거론하기 힘든 특정 집단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신격화는 석탈해를 숭상하는 집단의 압력에 의해 행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후에 수많은 씨의 선조가 되는 김알지(金閼智)는 4대 탈해 이사금 시기에 신라에 왔다. 중국 기록에는 이들이 백제 사람으로 기록되어있지만, 당시 정황을 고려하자면 멸망한 마한의 왕족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탈해는 김알지를 발견한 곳을 계림이라 부르고 국호도 같은 것으로 했다. 더구나 김알지를 양자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신라를 지키면서도 외부 세력을 포용하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니면 포용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김알지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다음 대 왕은 다시 박씨인 파사 이사금으로, 후의 석씨 왕인 벌휴 이사금이 탈해의 손자라면서 연대 차이가 제법 나는 것을 고려하면 석탈해에게는 적자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도 신통력을 부렸다든가 하는 이야기도 있는 등 각종 이야기가 많다. 석탈해 신화 모 웹툰에 따르면 역사상 최초로 포장되어 나온 왕이다(...)

문무왕대에 다시 뜬금없이 등장하는데, 문무왕의 꿈에 탈해 이사금이 나타나 "내 뼈를 파내서 조각상을 만들어서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문무왕이 이 명을 따라 탈해 이사금의 뼈를 파내 흙을 붙여 조각상을 만들고 그것을 토함산에 지은 탈해신전에 모셨다고 한다. 이후 탈해 이사금은 동악신이 되었다는것.

이런 일화는 문무왕이 진골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권력에 중심부에서 밀려나 잊혀진 세력인 석씨 세력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석씨 세력을 기용하기 위한 명분으로 탈해 이사금의 꿈드립을 쳤을 것이라는것.

이 글을 쓰는 데 위키백과한 권으로 보는 신라왕조실록을 참조.


스퀘어에닉스가 개발하고 액토즈소프트가 한국 퍼블리싱을 맡은 모바일 게임확산성 밀리언 아서에 특이형 석탈해라는 이름으로 참가한다. SR등급으로 강적 토벌대상. 까치깃처럼 생긴 귀에 까치 날개가 돋아있고 까치 두마리와 함께 전깃줄(...)에 앉아있는 까치 모에화(...) 미소년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Asino.

  1.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았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마을에 간 동안, 호공의 조상이 그 집을 빼앗아 살고있는 것이라는 거짓말로 호공의 집을 차지했다. 찔렸는지 나중엔 왕으로 즉위한 후 호공에게 벼슬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2. 일단 삼국사기 기록들로 따져도 석탈해 때에는 경주 바로 옆인 울산광역시 등을 정복하고, 다음 왕인 파사 이사금대구광역시, 경산시 등의 지역을 정복한다고 하는데, 경주에서 대구까지도 못 미치는 시기에 한강 하구 위례성에 있는 백제와 벌써 맞붙기는 어렵다.
  3. 삼국시대 초기 왕들의 수명이 인간의 평균수명에 비해 지나치게 길다는 점을 해결해보기 위해 나온 가설.
  4. 이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마음대로 역사를 왜곡해 시대를 앞당긴 게 아니라, 김부식이 당시에 참고한 더 오래된 책들에서도 이미 아귀가 안 맞게 써 있는 부분이 가득했다. 가령 백제 관련 기록에서는 온조왕 때 복속한 마한이 왜 나중에 또 튀어나와?? 식으로 김부식도 일단 쓰기는 쓰지만 고기록에 혼란을 느꼈던 부분이 많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