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36대 혜공왕 김건운 | ← | 37대 선덕왕 김양상 | → | 38대 원성왕 김경신 |
시호 | 선덕왕(宣德王) | |
성 | 김(金) | |
휘 | 양상(良相) | |
생몰년도 | 음력 | ?[1] ~ 785년 1월 13일 |
재위기간 | 음력 | 780년 ~ 785년 1월 13일 (6년) |
1 개요
신라의 37대 왕. 《삼국사기》의 구분에 따르면 신라 하대를 연 왕. 명칭이 비슷해서 27대 선덕여왕과 헷갈리기 쉬운데, 그 탓인지 원래 선덕여왕의 명칭은 따로 여(女)가 들어가지 않는 그냥 선덕왕이었는데 먼저 집권했음에도 그 쪽이 바뀌었다.안습 본 항목은 宣德王이고 여왕은 善德王이다. 이 왕이 태종무열왕계 마지막 직계 후손이며 후대 원성이 자자한원성왕 때 부터 내물왕계 왕통이 신라의 왕위를 계승해 나간다.
2 출신과 가족
내물 마립간의 10대손이며 미사흔의 9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찬 김효방(金孝芳)이고 할아버지는 김원훈(金元訓)이다. 또한 증조할아버지는 신라의 풍월주로 이름을 날린 김사다함(사다함)이다.[2]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四炤夫人)이다. 선왕 혜공왕은 그의 외사촌형제가 된다. 그러므로 내물왕계의 계승자라고 하지만 어머니가 무열왕의 직계 후손이라서 모계 쪽으로 무열왕의 직계 혈통을 잇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는 5묘를 모실 때 외조부인 성덕왕을 함께 모시기도 했다.
왕비는 구족부인이며 각간 양품의 딸이다(아찬 의공의 딸이라고도 한다.)
3 즉위 전 행보
왕위에 오르기 전 양상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764년 정월에 이찬인 만종이 상대등에, 아찬인 양상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이루어진 연구에서는 이후 왕위에 오르는 원성왕과 그의 후손들이 왕위에 지속적으로 올랐던 점으로 봤을 땐 딱히 전제왕권을 견제하는 귀족세력의 득세라 보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당나라와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세력과 일본과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세력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겸 수성부령검교 감은사사각간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찰기관인 숙정대의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동왕 12년에는 한화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였던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즉위는 태종 무열왕계인 김주원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덕왕은 사실 뒷날 조선시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잠시 즉위한 정종과 비슷한 위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4 치세
즉위하자 그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아버지를 개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어머니 김씨를 정의태후로 추존하였으며, 아내를 왕비로 삼았다. 이찬 김경신(뒷날의 원성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아찬 의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선덕왕의 치적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즉위년의 어룡성에 대한 개편이다.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를 경으로 고치고 다시 감으로 바꾸었다. 또 하나는 패강진[3] 개척이다. 781년에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하였고, 782년 한산주(지금의 서울, 경기도 지역)에 순행하여 민호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을 대곡진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 또는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의 축출을 꾀하려는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 만에 죽으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후사가 없는 가운데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그의 사후 복호(卜好, 내물 이사금의 아들로 눌지 마립간의 동생이자 미사흔의 형)의 11대손 김경신과 무열왕의 8대손 김주원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 선덕왕이 즉위하다
一年 죄수를 사면하다
一年 왕의 부모를 추존하고 처를 왕비로 삼다
一年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삼고 김의공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 어룡성 봉어를 경으로 고쳤다가 다시 감으로 고치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秋七月 사자를 보내 주와 군을 위로하다
三年春閏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年春二月 백성들을 패강진으로 옮기다
三年秋七月 시림 벌판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四年春一月 김체신을 대곡진 군주로 삼다
四年春一月 서울에 많은 눈이 내리다
五年夏四月 왕이 왕위에서 물러나려 하다
六年春一月 당에서 왕을 책봉하다
六年春一月 왕이 병이 낫지 않자 유조를 내리다
一年春一月十三日 선덕왕이 죽다
- ↑ 선덕왕의 아버지인 김효방이 732년 9월-733년 정월에 당에서 숙위 중 사망했으므로, 늦게 잡아도 732년 이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 ↑ 사다함은 진흥왕 시기로 선덕왕 기준으로 거의 200년전 인물이다. 그리고 왕실 계보 기준으로 내물왕에서 10대 이후인 선덕왕은 100년전 인물. 선덕왕 항목에도 있지만 대수가 이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은 상당히 특이한 일이다.
- ↑ 오늘날의 황해도, 평안남도(대동강) 인근지역, 고구려 후기의 중심지로서 신라는 삼국통일 백여년만에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실하게 굳힐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신라 영향권이 아예 아닌 건 아니지만 고구려 계통의 토호들을 통해 느슨한 형태의 간접 지배를 하고 있었고, 본격적으로 군현을 설치하고 영역화를 시작한 건 경덕왕 시대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