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990년 ~ 1992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
한화 이글스 No.70 | ||||||||
이정훈(李政勳) | ||||||||
생년월일 | 1963년 8월 28일 | |||||||
출신지 | 대구광역시 중구 | |||||||
학력 | 삼덕초 - 경상중 - 대구상고 - 동아대 | |||||||
포지션 | 외야수 | |||||||
투타 | 좌투좌타 | |||||||
프로입단 | 1987년 빙그레 이글스 2차 1순위 지명 | |||||||
소속팀 | 빙그레-한화 이글스(1987~1994) 삼성 라이온즈(1995~1996) OB 베어스(1997) | |||||||
등번호 | 44번,10번(이상 빙그레~한화),7번,0번(이상 삼성),55번(OB) | |||||||
지도자 경력 |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1999~2003) 한화 이글스 1군 주루코치(2004~2005)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2006) LG 트윈스 2군 1루·외야코치(2007~2008) 북일고등학교 감독(2009~2012) 한화 이글스 2군 감독(2013~2015) 한화 이글스 육성군 타격 코치(2016~현재) |
1987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신인 | |||||
김건우(MBC 청룡) | → |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 → | 이용철(MBC 청룡)[1] |
1991년, 1992년 한국프로야구 타격왕 | |||||
한대화(해태 타이거즈) | → |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 → | 양준혁(삼성 라이온즈) |
1987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안타상 | |||||
이광은(MBC 청룡) | → |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 → |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 등번호 10번(1989~1994) | |||||
김정태(1986~1987) | → | 이정훈(1988~1994) | → | 김승권(1996~2000)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0번(1996) | |||||
→ | 이정훈(1996) | → | 황성관(1997~2000)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번(1995) | |||||
김용국(1985~1993) | → | 이정훈(1995) | → | 김재걸(1996~2004) | |
OB 베어스 등번호 55번(1997) | |||||
장건희(1996) | → | 이정훈(1997) | → | 이혜천(1998) |
1 소개
1987년에 데뷔하여 빙그레 이글스 - 삼성 라이온즈 - OB 베어스에서 활동했던 前 프로야구 선수. 現 한화 이글스 육성군 타격 코치.
2 선수 시절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 ||||
장효조 OF / 상원고 | 이정훈 OF / 상원고 | 박재홍 OF / 광주제일고 | ||
류중일 SS / 경북고 | 김성래 2B / 경북고 | |||
김동주 3B / 배명고 | 남우식경북고 송진우세광고 | 유지홍 1B / 선린상고 | ||
백인천 C / 경동고 |
악바리
제 2의 장효조로 불리운 사나이
이글스의 초대 신인왕
빙그레 이글스 역대 최고의, 최강의 리드오프
대구 출신이긴 했으나 당시에는 삼성이 1987년 1차 지명으로 내야수 강기웅, 류중일과 좌완투수 장태수를 연달아 지명하는 바람에 2차 지명으로 밀리면서 빙그레 이글스의 2차 1순위(전체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2][3][4] 이때 나를 뽑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고 말하면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여 같은 대구 출신인 이강돈, 강정길[5][6][7]과 함께 빙그레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에서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사실 당시 삼성의 전력으로서는 타자보다 투수가 더 아쉬운 상황이었다. 특히 외야 요원은 장효조-허규옥-장태수로 이어지는 날고 긴다는 쟁쟁한 멤버들로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이정훈이 삼성에 입단했다면 신인왕은 고사하고 주전 자리를 제대로 챙겼을지 미지수. 실제로 이정훈이 신인이던 1987년은 삼성이 KBO에서 전무한 팀 타율 3할을 기록하며[8] 타자 전원이 거의 3할을 치던 막강한 타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투수 쪽은 김일융이 트레이드로 일본에 복귀하는 통에 좌완 투수의 공백을 메워야 할 상황. 게다가 그 전해 해태 타이거즈와의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투수력의 격차를 실감하면서 패했기 때문에, 좌완투수 장태수를 지명한 것은 전혀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단지 결과가 기대했던 대로 안 나온 것 뿐. 결과적으로는 이정훈의 근성을 과소평가한 삼성의 오판으로 귀결되었다.
1987년 22게임 연속 안타 기록을 수립하고 타율 0.335(3위), 안타 124개(1위)를 기록하면서 신인왕을 수상하였으며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 그리고 근성 있는 플레이 스타일로 악바리란 별명과 더불어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87년 데뷔부터 1992년까지 3할을 넘지 못한건 1990년(.291) 단 한 해 뿐일 정도로 꾸준했으며, 1991(.348), 1992(.360) 2년 연속으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다만 1991년은 김영덕 감독의 밀어주기[9]로 장효조(.347)와 같은 팀 장종훈(.345)을 근소한 차이로 제치고 얻은 타이틀이라 본의 아니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10] 1992 시즌에 자력으로 타율 .360을 찍으며 마음고생을 덜었다.이정훈 이후로 2010~2011년에 이대호가 타격왕 2연패를 달성하기까지 20년동안 타격왕을 2연속으로 차지한 타자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수 시절에 우승 경력은 없는데, 빙그레에서 4번 준우승으로 1999년까지 콩라인이 되었던 선수. 삼성에 있었을 적에는 하필 삼성의 암흑기가 도래하였던 때였고... 다만 1999년 한화 코치로 있으면서 우승을 맛보았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1989년을 제외하고 5시즌 동안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1991년 개최된 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6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며 맹타를 휘둘러 한국프로야구 타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타율(.391)을 기록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11] 이처럼 한때 국내 야구계를 대표하는 타자였으나, 1993년부터는 체력적 한계가 오면서 그럭저럭 2할대를 찍어야 했다.
커리어 전반 6시즌과 이후 5시즌의 기록이 같은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딴판인데, 이는 온갖 잔부상에도 특유의 근성으로 출전을 강행한 여파 때문. 1993년에 손목 부상을 당했는데, 문제는 이 때였다. 손목 통증 때문에 속칭 "대포 주사"로 불리는 데포메드롤을 세 번이나 맞고 나섰으나, 그 부작용은 은퇴할 때까지 고스란히 그의 선수 생명을 갉아먹었다. '야구가 좋아'라는 사이트에서 연재한 최훈의 레전드 카툰에서 인용한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로는 후배를 데리고 무리하게 연습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는데, 그 상황에서도 계속 타격 연습을 할 정도로 몸을 무리하다가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렸다고 한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의 낙후된 스포츠 의료도 한몫했다. 일본이나 미국의 의료 수준으로는 충분히 수술 후 재활하면 완치가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오로지 근성만으로 극복하려는 풍토로 수술 시기를 놓쳐 버린 것. 본인도 이런 수술 방법이 있는지 은퇴 후에 알았다고 한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교타자가 이렇게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170cm의 작은 체격에 비해서 단단한 체형과 파워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체격의 한계 탓에 부상이 많이 온 게 아닌가도 추정된다. 사실 170cm도 반올림으로 올린거고 실제 키는 168cm라는 얘기도 있다. 삼성에서 지명하지 않은 건 물론 타선이 충분히 좋았던 덕도 있지만 이정훈의 작은 체격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빙그레 시절 1990년 7월 31일 무등 야구장에서 한 관중이 난입을 해서 외야 수비를 보던 이정훈에게 시비를 걸었던 적이 있었는데, MBC의 재연프로 타임머신 에도 나온 내용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운동선수 상대로 맞시비를 건다는게 쉬운 일은 아닌데 취기도 있었고 키도 워낙 작았던 이정훈이 만만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뭐 그냥 웃고 넘어간 해프닝 수준이지만.
1993년 시즌부터 성적이 급락했으며, 1994년에 김영덕의 후임으로 부임한 강병철 감독은 이정훈을 비롯한 늙은 선수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1994년 시즌 후 장정순과 묶여 정영규와 정경훈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는데, 1995년 시즌 후 부임한 백인천 감독은 강병철 감독과 마찬가지로 이정훈, 강기웅, 이종두 등의 늙은 선수들을 싫어하는 편이었다.[12] 이 때문에 1996년 시즌 후 강영수+박현영과 1:2 트레이드로 OB 베어스로 이적,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방출당하며 은퇴했다.
고향 팀인 삼성에 있었을 적에는 7번을 달은 적이 있으며(1995년 한 시즌만), 나중에 0번으로 바꿨을 때에는 최저 타율인 0.213를 기록했다.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97년 OB에서 뛸 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친정 팀 한화 정민철의 노히트노런 경기에 출장하여 대기록의 희생양 중 한 명이 된 적도 있다.[13][14]
선동열을 상대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특히 198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시리즈를 통틀어 선동열을 상대로 9타수 5안타라는 흠좀무한 기록을 찍기도 했다. 선동열 역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는 타자로 이정훈을 꼽았었다. 아무리 유인구를 던져도 자신감있게 속지 않고 제 스윙을 가져간다나.
3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7 | 빙그레 이글스 | 100 | 370 | .335 (3위) | 124 (1위) | 13 | 7 (2위) | 4 | 34 | 56 | 20 | 45 | .441 | .405 (5위) |
1988 | 96 | 366 | .309 | 113 | 20 (5위) | 3 | 4 | 34 | 69 (3위) | 18 | 41 | .413 | .377 | |
1989 | 51 | 198 | .323 | 64 | 20 | 2 | 1 | 23 | 30 | 14 | 17 | .460 | .372 | |
1990 | 114 | 402 | .291 | 117 | 20 | 3 | 7 | 52 | 71 (4위) | 22 (5위) | 47 | .408 | .360 | |
1991 | 111 | 379 | .348 (1위) | 132 (4위) | 21 | 12 (1위) | 17 | 55 | 81 (4위) | 18 | 47 | .602 (2위) | .417 (3위) | |
1992 | 111 | 369 | .360 (1위) | 133 | 17 | 2 | 25 (4위) | 68 | 89 | 21 | 56 | .621 (3위) | .435 (4위) | |
1993 | 41 | 111 | .225 | 25 | 5 | 1 | 2 | 12 | 10 | 3 | 15 | .342 | .313 | |
1994 | 한화 이글스 | 67 | 239 | .247 | 59 | 7 | 2 | 2 | 22 | 35 | 13 | 27 | .318 | .321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5 | 삼성 라이온즈 | 74 | 236 | .250 | 59 | 9 | 0 | 1 | 10 | 33 | 12 | 18 | .301 | .302 |
1996 | 61 | 136 | .213 | 29 | 4 | 2 | 1 | 10 | 16 | 3 | 20 | .294 | .314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7 | OB 베어스 | 92 | 266 | .237 | 63 | 16 | 3 | 2 | 33 | 24 | 7 | 23 | .342 | .296 |
통산 | 918 | 3072 | .299 | 918 | 152 | 37 | 66 | 353 | 515 | 151 | 356 | .437 | .368 |
4 지도자 시절
은퇴 후에는 친정 팀인 한화가 그에게 단기 지도자 연수를 지원해 주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다. 귀국한 후에는 한화와 LG의 코치로 일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한화 이글스에서 타격코치를 맡았으며, 2004년부터 2005년까지는 작전주루코치를 맡았다. 2006년에는 다시 타격코치로 활동하려는 본인의 요망에 따라 LG로 자리를 옮겼으나, 자신을 영입한 이순철 감독이 시즌 개막 이후 두 달 만에 중도 경질되면서 입지가 애매해졌고 덩달아 쌍으로 까였다. 이듬해 김재박 감독이 영입되면서 2군에서 1루 및 외야 담당코치로 임명되었고, 2008년 2군 작전코치를 맡은 것을 마지막으로 LG와의 3시즌에 걸친 인연이 정리되었다.
LG 트윈스를 떠난 후 2009년부터는 북일고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되었다. 북일고등학교에서는 선수들에게 근성을 강조하며 강훈련을 지시했으며, 한화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2009년 제 63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2009년 제39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대회 때는 아마추어 지도자 자격증 신청 기한을 놓쳐 관중석에서 작전을 지시했지만(...) 두 번 다 준우승까지 나아갔고, 벤치에서 제대로 지도한 봉황대기에선 우승했다.
2011년에는 덕수고에서 북일고로 전학을 왔던 내야수 길민세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기도 했다.[15]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었던 북일고를 강팀의 반열에 다시금 올려놓으며 고교야구의 정점에 선 지도자로서 명성을 쌓았지만, 한화그룹의 전폭적인 지원 덕이지 이정훈 감독의 순수한 능력이 아니라며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16] 하지만 이정훈 본인의 악바리 근성에 힘입은 강훈련 등도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절대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좋은 자원을 보유하고도 그에 걸맞는 성적을 내지 못하는 팀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2012년 8월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면서 김성근과 함께 한화의 차기 감독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특히 한화와 연줄이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더 높게 점쳐졌으며, 29일 김성근 감독이 고양 원더스와의 2년 재계약을 하면서 최유력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외야수 출신이라는 게 심히 걸린다
서울에서 열리는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의 감독으로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고 여러 국가의 대표팀과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8월 31일의 첫 상대팀은 베네수엘라. 특히 한화의 차기 사령탑으로 자주 거론된 인물이기 때문에 한화 팬들을 비롯하여 여러 야구팬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 결과만 놓고 본다면 2-1로 이기긴 했다. 다만 서로가 팽팽한 투수전을 벌인 것이 아니라 12안타에 4사구 9개를 얻어냈음에도 2점밖에 얻어내지 못할 정도로 견제사, 주루사, 작전미스가 많이 발생했다. 윤형배가 3과 2/3이닝동안 무실점으로 막아내지 않았다면 질 수도 있었던 상황. 작전 미스뿐만 아니라 덕아웃에서의 표정변화와 리액션 또한 심했기 때문에 뭇 한화팬들은 '한대화+이만수=이정훈'이 아닌가 걱정하였다.
9월 6일 한일전이 있기 전 일본 청대에서 압축 배트를 사용한다는 의혹을 그가 제기했으나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고, 이후 2:4로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야구 팬들에게 입만 살았다는 비난을 당해야 했다.
9월 14일 언론에 "한화 감독을 맡고 싶다"라고 의사표명을 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는데 이 기사에서 그가 한 "선수들이 감독 눈치를 보면서 경기를 하면 안 된다. 감독도 삼진 당하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선수를 노려봐서도 안 된다. 그런 팀은 좋은 경기를 할 수 없다"는 발언은 청소년야구선수권에서 보여 준 행동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에 반대 여론이 한층 커지게 되었다.
결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을 5위로 마감함으로써 한화 감독 선임에서 멀어졌다는 풍문이 돌았고, 실제 한화의 새 감독은 김응용으로 결정되었으며, 이정훈은 2군 감독으로 내정되어 북일고등학교 감독직을 이강돈에게 넘겼다. 선수 육성에는 일가견이 있는 만큼 한화 이글스 2군에서 지도자 경험을 쌓은 뒤, 김응용이 물러날 때가 되면 차기 감독을 맡기려는 의사가 있는 듯하다. 2군 선수들도 다 죽었다 서산 식초 부대 출범
2013 시즌 팀은 비록 3할대의 승률을 기록하며 1군과 마찬가지로 퓨처스 11개 구단 중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조정원, 박상규, 장운호, 엄태용 등 2군에서 육성되던 선수들이 1군에서 좋은 모습을 종종 보여 주었고, 은퇴 기로에 있던 추승우, 이양기 등이 1군의 활력소 역할을 한 것으로 볼 때, 2군 감독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4.1 2014 시즌 이후
2014년에 들어 한화 이글스 2군이 파죽의 10연승을 기록하는 등 퓨처스의 절대 강자 상무에 이어 남부리그 2위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성장속도가 더디었던 이학준을 비롯한 조정원, 강경학, 김기현, 조영우 등 신진급 선수들이 1군에 올라와서 짧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고 있어 한화 이글스 갤러리 등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한용덕과 함께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팬들도 생겨나고 있다. 악동니뮤ㅠㅠ[17]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이 대활약 후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2군에서 너무 힘들어서 1군에서 죽어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2군에서 신인들을 잘 조련해 보내는 것만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고도 훈련과 거기에 얻어지는 땀이라고 쓰고 식초라고 읽는다을 매우 중시하는 일명 식초 야구를 구사하는 이정훈. 김일배, 김성근의 계보를 이은 식초 야구 3세대라고 평가하는 팬도 있다.
한 네티즌이 만든 서산 식초 부대 훈련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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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감독과 한화이글스 2군 선수들의 꿈을 위한 도전
2014 시즌이 끝난 후 한화 프런트에 의해 한용덕과 함께 차기 감독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전부터 '칰무원' 문제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고 있고,[18][19] 반대로 이정훈이나 한용덕을 지지하는 의견도 만만찮아서 한화 팬덤이 두쪽날 것 같을 정도로 반응이 엇갈리고 있었으나, 김성근 감독을 영입하면서 모조리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U-21 대회 이후에야 신의 한 수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에는 1군 김성근, 2군 이정훈이라는 피할 곳 없는 지옥훈련 헬게이트가 열렸다.
2014 시즌 후 U-21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팀에서는 강경학, 엄태용, 장운호와 함께 참가했다.
그러나 2015 시즌 김성근 감독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란 당초의 기대와 달리 김성근 감독의 지나친 간섭과[20] 이정훈 감독 특유의 혹사성향이 겹쳐 순위에 큰 의미는 없지만 2군 중부리그 4팀 중 4위를 기록하였고 타 팀과 비교하면 선수양성의 성과도 눈에 띄지 않았다.
2016년부터 육성군 타격코치로 좌천되었다.[21] 새 한화 2군 감독은 전대영
5 평가
타격코치로서의 평가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1군 타격코치로 시작하여 하위팀의 단골 레퍼토리 분위기 쇄신 명목으로 자행되는 코칭스태프 보직 변경 조치에 따라 2군에서 시즌을 마치는 경우가 잦았다. 한화가 2002, 2003 연속으로 팀타율 7위를 기록한 후 2004년부터는 작전주루코치로 아예 보직이 변경되었다. 2005년 김인식 감독이 부임하면서 '이정훈 코치를 원래 보직으로 되돌리겠다'는 발언을 한 후 타격코치와 주루코치를 겸하게 하였으나, 새로 영입한 우경하 코치가 1군 타격코치로 임명되면서 이름뿐인 겸직이 되자 타격코치로 복귀를 희망한 그는 결국 다음해 LG행을 택한다.
선수 시절의 불같은 성격은 코치가 된 후에도 여전하여 몇 가지 에피소드를 남긴 바 있다.
- 2000년 4월 23일 대구에서 열린 경기에서 아웃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에게 폭언을 퍼부어 시즌 1호 퇴장을 기록하여 벌금 50만원을 물었다.
- 2003년 3월 26일 광주에서 열린 시범경기에서는 프로야구 창설 이래 역대 시범경기 최초 코칭스태프 퇴장을 기록하였는데, 판정을 두고 어필하는 과정에서 심판에게 욕설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 며칠 전 안병원이 선수, 코칭스태프 통틀어 역대 시범경기 최초로 퇴장을 당한 덕에 코칭스태프 퇴장 1호로 기록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 2004년 7월 1일 대전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롯데 포수 최기문과 언쟁을 벌였고 최기문에게 이를 전해 들은 양상문 감독과 김응국 코치가 흥분하여 선수들끼리가 아니라 코칭스태프 간에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질 뻔 한 사건이 있었다. 5점 차로 앞선 롯데가 9회초에 희생번트를 댄 것을 두고 이정훈 코치가 공수교대 때 최기문을 갈군 것이 원인.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서의 팬들의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이것은 한화의 암울한 현실 때문에 선수들에 대한 질타가 큰 여론에 기반한 것이고, 남부리그 2위의 성적만으로는 아직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다만, 김성근 감독은 이정훈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순식간에 3군 코치로 내쳐버렸다는게 함정
- ↑ KBS N 해설위원 맞다. 그런데 가끔 야구팬들이 중앙일보에 있었던 동명이인인 이용철 기자와 헛갈려 하는 경우가 있다. 조심하자.
- ↑ 그 해 2차 지명 때 지난 시즌 최하위와 6위를 기록한 빙그레와 청보 핀토스가 번갈아가며 2차 1순위 지명권을 2장씩 받아 전체 1~4순위를 지명하게 되었다. 투수난으로 속을 끓이던 빙그레는 1순위로 군산상고-동국대 출신의 투수 이동석을 지명했고 청보가 2순위로 이상훈(1971년생 야생마 이상훈과는 동명이인)을 지명하자 그 다음으로 이정훈을 지명했다.
- ↑ 그런데 이것은 배성서 감독의 허허실실 작전으로 이룬 쾌거였다. 2차 지명 직전에 청보의 박정삼 단장이 배성서 빙그레 감독과 노진호 빙그레 단장에게 "누굴 뽑을 거냐" 라고 묻자 배성서는 대번에 이동석이라고 얘기했고 그 다음에 노진호 단장이 외야수 정상진이라고 하자 배성서는 "투수가 부족한 판에 투수를 더 뽑아야지 야수는 필요없다" 라고 펄펄 뛰며 이정훈에겐 관심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 ↑ 이에 낚인 박정삼 단장은 '그럼 우리도 2순위는 투수를 뽑은 뒤에 이정훈을 4순위로 찍어야지' 라고 안심했는데, 빙그레가 전체 3순위로 이정훈을 낼름 낚아채자 청보는 완전 닭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청보의 강태정 감독은 책상을 발로 차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후였다.
- ↑ 강정길과 이강돈은 본래 삼성의 지명을 받았으나 지명권을 양도하여 빙그레에 입단한 케이스이다.
- ↑ 한편, 빙그레 초창기 시절에는 유독 대구 출신 선수들이 많았다. 삼성에 잉여 전력이 다른 팀에 비해 월등히 많았던데다가 빙그레가 창단될 때 인심쓰듯이 삼성에서 자유계약선수로 많이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진호 빙그레 단장이 직전까지 삼성 구단의 이사였던 것도 컸다. 유이의 아버지 김성갑도 이러한 케이스.
- ↑ 다만 김성갑의 경우는 프로야구 선수 시절 처음에는 잠깐 삼성 유니폼을 입은 적이 있었다. 첫 시즌을 보내고 방위병으로 복무하다가 1986년에 전력보강선수로 이적했다.
- ↑ 이전버전에는 전무후무라고 써있었지만 2014년 삼성 라이온즈는
역대 최악의 타신투병 풍조에 힘입어두번째로 3할 기록에 0.301로 역대 최고 팀타율을 기록했기때문에 후무란 글자를 삭제했다. - ↑ 장효조는 볼넷으로 거르고 이정훈은 출전시키지 않았다. 장종훈은 홈런과 타점 신기록이 걸려있었던 관계로 계속 출전시켰다. 장종훈으로서는 평생에 유일하게 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할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 ↑ 하지만 장종훈의 경우에는 단일 시즌 홈런과 타점 신기록이 걸려있던 터라 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할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타율이 떨어지는 리크스를 감수하고 꾸준히 출장한 점은 있다.
- ↑ 이 대회에서는 국내에서 내로라는 타자들이 일본 투수들의 공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면서 빈타에 시달렸고, 특히 한대화는 13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 ↑ 물론 삼성 시절에도 악바리답게 연습벌레였고, 당시 신인이었던 이승엽은 이정훈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좌우명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도 이정훈을 통해 얻었다고 한다.
- ↑ 정민철은 이정훈이 빙그레 시절에 팀 고참으로서 유독 신경을 썼던 선수기도 했다.
- ↑ 하루는 정민철이 훈련 중 요령을 피우는 것 같자 이정훈이 자기 휴식시간을 포기하면서 "민철아 너 나랑 한 번 뛰자" 하고는 둘이 단내날때까지 런닝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미래에 악동님으로 불릴 분답다.
- ↑ 길민세는 넥센에 지명되어 입단했지만, 예상대로 문제를 일으켜서 2012 시즌 후 방출당했다.
- ↑ 일부에서는 전국의 유망주들을 싹쓸이하는 북일고를 대한민국 고교야구계의 뉴욕 양키스라고도 한다.
- ↑ 선수 시절 별명 '악바리'+감동님. 물론 찬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 ↑ 사실 이정훈 감독이 2군에서 보여준게 많지만 다른 레전드급 코치인 이상군, 강석천, 송진우 등의 삽질이 이 무렵 악명높았고 과거 타코 시절 실적이 좋지 못했던 게 한 몫했다.
- ↑ 그 외에도 외야 수출신 감독들의 실적도 백인천 정도를 빼면 모두 나쁜편이었으니 반대를 받았다.
- ↑ 1군 선수 등록하지 않은 유망주를 1군 선수단과 대동시키며 특타,특투 및 1군 배팅볼 훈련 투수로 활용하였다.
- ↑ 2군 감독직은 코칭스태프 서열 2, 3위에 해당되고 육성군은 대부분 초임 코치나 인스트럭터 성격의 코치가 담당한다. 이는 선수단 인사에 전권을 가진 김성근감독의 2015시즌의 부진한 2군 성과 혹은 김성근 감독 부임에 따른 칰무원 퇴출로 인한 유일한 내부승진 차기감독 후보자에 대한 견재로도 생각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