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참봉

陵參奉

1 개요

조선 왕조의 벼슬 자리 가운데 하나.

종9품으로, 제일 낮은 벼슬이다. 왕의 무덤인 능을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 주 업무. 묘지기최종 보스

물론 보통은 능참봉이 양반 벼슬아치 체면에 직접 손수 벌초 같은 육체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랫사람으로서 능에 소속된 수복이나 수호군[1]이 있어서 이런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 능에서 제사를 지내면 준비를 하는 일도 맡는데, 대략 한달 전에 한양에 올라가서 축향(祝香)을 받아와야 했다. 왕이 능행을 오면 마중도 나가야 한다. 왕릉의 수리공사를 할 때 관리 감독도 맡았다.

선왕의 무덤이니 만큼 잘못 관리하면 목이 달아난다. 큰 나무 한 그루를 손상시키면 3년간 유배, 두 그루를 손상시키면 천리 밖으로 귀양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따라서 능 수호군을 시켜서 벌목을 막는 것도 능참봉의 일이다.

비록 미관말직이지만 임금의 능을 관리한다는 상징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사람보다는 연륜이 있는 사람이 임명되었고 장래 경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녹봉은 매달 열 말에 닷 말. 그리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빚을 지기도 했다.

초야에서 이름을 떨치던 남명 조식이 처음으로 받은 벼슬이다. 물론 죽어서 추증받은 벼슬은 영의정. 끝에서 끝까지

능보다 격이 낮은 원(園)에는 역시 종9품인 수봉관(守奉官)이 지키게 되었다.

2 권력

"참봉어르신"

조정에서는 쳐주지도 않을 만큼 매우 낮은 미관말직이지만, 이것도 벼슬은 벼슬이며 왕릉을 관리한다는 특성상 지역 사회에서는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뻐길 수 있게 되는 벼슬이다. 일단 벼슬자리에 있는 만큼 동네 양반들인 진사, 생원과도 격이 다르다.[2]

일단 사후에는 자기 신위에 "학생부군신위"에서 "학생" 대신에 "능참봉"이 붙게 된다.

일단 왕릉 주변에서는 완장이 가능하다. 왕릉 근처에서 사냥이나 나무베기 같은 짓을 하다가 걸리면 그 자리에서 그냥 치도곤(!!!)을 때릴 수 있었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선왕을 모신 능에서 뭐하는 짓거리냐! (내가 다음에 임금님 왔을때 일러바쳐 줄까?)"라고 버럭! 하면 어지간한 인간은 오금이 저려서 벌벌 떨 것이다. 뭐 이런거 감시하는게 바로 능참봉의 업무지만.

능참봉은 짭짤한 재미가 적지 않았다. 왕릉에는 효행사찰이라 하여 왕릉에 묻힌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비는 이 딸려 있으며 절에서 제사에 소요되는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서 토지도 딸려 있다. 이런 땅은 문전옥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감독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야 한다.

이렇게 관리를 담당하는 효행사찰의 추수관을 임명하는 역할은 능참봉에게 있다. 이 추수관이 되면 소작인들의 대접, 선물, 그리고 은근슬쩍 떼어먹는걸 할 수 있고, 아무튼 이것도 여러가지로 해쳐먹을게 많다. 그렇다보니 능참봉에게 아부를 하는 사람이 수없이 쌓이게 되는 것이고, 추수관이 떼어먹은 것의 일부는 능참봉에게 돌아오게 된다.

3 고생

여담으로 왕이 효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고생하는 벼슬이다.

이런걸 빗댄 말로 "(모처럼) (여든에, 칠십에) 능참봉을 하니까 거둥이 한 달에 (열아홉, 스물아홉) 번이라."는 속담이 있다. 늙은 나이에 마침내 능참봉 벼슬이나 해서 드디어 벼슬자리에 올랐는데 왕이 한달에 스무번도 넘게 능행을 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하겠는가? 이처럼 실속없이 고생만 하는 일을 빗댄 말이다.

이 말은 정조사도세자의 무덤을 자주 찾아 수원 지역에 나돌게 된 말이라고 한다.

4 능참봉에 얽힌 민담

정조는 "수원 능참봉[3]은 한 끼에 닭 한 마리"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돌보던 능참봉에 관한 민담이 생겨났다. 왕씨 성을 가진 능참봉이 지나가던 점쟁이에게 관상을 보았는데 며칠 뒤에 죽을 상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또는 밤중에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 사도세자능을 껴안고 있으라는 말을 들어서 능참봉은 비오는 가운데 묘지를 껴안고 있었다.

그런데 궁궐에 있던 정조가 문득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내 아버지는 비오는데 추운 무덤 안에 누워계시는데 능참봉이라는 놈은 따뜻한 방 안에 있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전관을 보내 "능참봉에 방 안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죽여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선전관이 와서 보니 능참봉이 기특하게 비를 맞으면서 무덤을 지키고 있기에, 돌아와서 보고를 하였고 정조는 무척 기뻐하며 상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버젼의 전승도 있다. 비가 억수로 오던날 박경인이라는 능참봉이 잠을 자다 조상님의 꾸중을 듣고 사도세자 능에 나가 보니 억수비에 뗏장이 벗겨지고 흙이 패여나가는 중이었다. 사람을 모을 틈도 없이 미친놈처럼 밤 새도록 능을 끌어 안고 있었는데, 마침 폭우에 아버지 무덤이 걱정된 정조가 선전관을 보냈다나 뭐래나. 폭우에도 자기 몸 안 사리고 관리하는 것에 감동한 정조가 수원 능참봉만 특례로 종6품으로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리 왕이 최고 지존이라 하더라도 조선은 나름 법치가 확립된 나라라 군주가 신하를, 혹은 양반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이거나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성과 잦은 능행이 만들어낸 전승 중 하나. 여담이지만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7대조부 성만종이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무덤) 능참봉이었다.

여기까지 봤으면 알겠지만 이런 아들을 둔 사도세자는 죽어서나마 호강했지만 그 능참봉은 고생길 훤했을 거란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조 역시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을 능으로 승격시키고자 했지만 장희빈에게 데인 아픈 기억이 있는 아버지 숙종이 후궁을 왕비로 추증하는 것을 절대 하지 못하도록 유명을 내렸기 때문에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에 대한 야사가 있다. 영조가 백성들과 대면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나무꾼을 만났다. 나무를 어디서 베었냐고 하자 "소령이 있는 곳 근처에서 베어 왔습니다요."라고 말하였다. 나무꾼이 일자무식해서 원과 릉을 구분하지 못하고 임금의 어머니 묘이니 릉이라고 생각한 것. 그러자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존대해줬다며 크게 기뻐하면서 그 나무꾼에게 상금과 소령원 수봉관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

5 현대의 능참봉

현대에야 당연히 없어졌지만,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조선왕릉 이외에도 삼국시대, 고려 등 역대 왕가들의 왕릉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을 문중에서 능참봉이라 불러준다. 이 경우에는 대부분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태릉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모아 명예 능참봉으로 임명하여 문화재를 관리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관련기사

윤종신이 버라이어티 야행성에서 발라드 계의 능참봉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관련기사

검사들은 대통령의 고향을 관할하는 검사를 능참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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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실 사도세자는 왕이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그 무덤은 능이 아니었고 묘,또는 원으로 불렸다.하지만 일반 백성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으니 능참봉이라 불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