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

1 고대 형벌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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杖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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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그림중 '곤장치기'청나라 기록사진 중 장형 집행모습

1.1 개요

오형(五刑), 즉 ---- 중 2번째로,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십자 형틀에 묶어놓은 후에 나무로 만든 곤장(또는 치도곤)으로 볼기를 냅다 때리는 형벌. 스팽킹...따위완 수준이 다르다.[1] 회초리, 회초리와는 다르다

삼국사기에 '장 100대를 쳤다'는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유서깊은 형벌로, 중국에서 율령체제를 도입하면서 같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 사용된 의 형법전인 '대명률'에 따르면 큰 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죄의 무거움에 따라 60대부터 100대까지 5등급으로 나눠서 쳤다.

그리고 가장 비슷한 형벌인 태형이 비교적 작은 막대기로 10대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장형은 그 윗등급에 매도 크고 아름다운 것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당연히 1대의 위력이 천지차이다. 도형이나 유형에도 병과되어 본 형을 집행하기 전에 장형을 집행했다.

그러면 귀양 가는 양반들은 전부 곤장을 맞고 간 건가, 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실제로 사대부들의 경우 속전이라 하여 돈으로 형벌을 대신하는게 보통이었다. 대역죄 급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죄목이 아닌 이상 사대부가 장형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 실제로 형벌은 대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어 장형이나 태형을 받는건 보통 평민과 천민들이었고 사대부나 그 아녀자들이 장형을 당하는 경우는 사화급 사건 아닌 이상 없었다. 대신 곤장의 대수에 맞춰 벌금을 내야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천민과 악질 범죄자를 제외하고는 십자형틀에 묶어서 때렸다. 천민과 악질 범죄자는 그냥 바닥에 엎어놓고 벗긴 다음에 때렸다.

지방관아에서 잡범들 처리할 때나 쓰는 태형과는 달리 장형은 중앙에 보고가 될 정도의 중범죄자에게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관아에서 비공개로 처리될 때가 많은 태형과는 달리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집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왕명으로 장형이 집행될 때는 주로 종루 거리에서 시행되었다.

중국의 경우 상단 기록사진처럼 형구에 엎어놓고 치는 형태와 영화링크[2]처럼 양팔과 다리를 잡고, 주변에서 마구 후려치는 형태가 존재한다. 후자가 신장이다.

태형과 마찬가지로 속전을 내고 면제받을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오승포[3]를 각각 18필, 21필, 24필, 27필, 30필을 냈으며, 점차 속전의 양이 줄어들어 영조 때 간행된 속대전에서는 면포 1필 7자, 1필 14자, 1필 21자, 1필 28자, 2필 또는 돈으로 4냥 2전, 4냥 9전, 5냥 6전, 6냥 3전, 7냥을 내게 하여 그 양을 줄였다.

여담으로, 이건 국가나 적어도 지방정부에서 하는 공식적 형벌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집행된 것은 장형에 포함되지 않는다. 모양만 비슷하게 흉내낸 것이지 그냥 폭행이다[4]. 이 항목이나 태형 항목에 관련 이미지 등을 링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형벌은 아니고 일종의 의식에 가까운 곤장이 있었는데, 호랑이를 잡아온 포수들에게는 관아에서 곤장 3대를 때렸다.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고 불렀는데 감히 산을 잡았으니 '벌'을 내린다는 뜻. 물론 위의 사람 잡는 형벌이 아니라 그냥 톡 하고 때리는 시늉만 한 뒤 포상금을 포수들에게 지급했다.

1.2 타격의 정도

초반에는 을 쳤다고 하는데,등짝을 보자 이것을 맞은 사람이 얼마 안 되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등의 경우에는 신체의 중요기관이 근처에 있는데다가 척추가 지나가니 매맞다가 죽거나 반신불수되기 딱 좋았다. 그래서 세종대왕엉덩이를 치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가상 매체에서야 개나 소나 맞는 가장 흔한 형벌이지만, 현실에서는 그 아픔이 어찌나 심했던지, 사람들이 버티지를 못하고 "사… 살려 으악!! 주…줍쇼 끄악!!"라면서 하나같이 GG를 쳤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매가 심하게 아프고, 가장 낮은 60대만 맞아도 초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으며 곤장 100대 수준까지 되면 인생퇴갤까지 이를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사형같은 것을 집행하지 못할 때, 대신 합법적으로 사람을 저세상에 보내버릴 필요가 있을 경우 가장 빠르고 확실한 형벌로서 정치적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 말엔 정몽주정도전 등 역성 혁명파를 숙청하기 위해, 유배된 정도전 등을 장형으로 죽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태종)의 정몽주 살해로 실패하고, 훗날 조선이 건국된 뒤 정도전이 똑같은 방법으로 정몽주 일파의 인물들을 죽여 보복하였다.

곤장을 맞던 중 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는 대부분 쇼크사에 가깝고, 곤장을 맞은 후 옥이나 유배 중, 또는 집으로 돌아간 후 사망한 경우는 대부분 근육 파괴로 인한 급성 신부전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곤장을 맞아 광범위하게 근육세포가 파괴되면서 세포 내의 미오글로빈이 콩팥에 과다하게 축적되어 급성 신부전이 발생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사고 등으로 무거운 물체에 깔린 사람의 주된 사망원인 중 하나다.[5] 급성 신부전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곤장을 맞은 후 터진 상처부위의 2차 감염으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곤장을 맞다가 괄약근에 힘이 풀려 대소변이 새어나와 상처로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은 전근대였기에 세균의 감염이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었을 때 보통 '장독(杖毒)이 올라 죽었다'고 말했다. 민간에서는 장독을 치료할 요법으로 푸세식 변소에서 삭히고 삭힌 똥물을 생으로 먹인다고 한다. 독은 독으로 해소시켜야 한다나?

일부는 물곤장이라고 크고 단단한 참나무 곤장을 물에다가 조금 불린다음 죄수의 엉덩이 피부도 물을 흡수하도록 한 다음에 내리치는데 물에 불어서 약해진 살갓에 그런 몽둥이질까지 더해지면서 일부 심하면 뼈가 보일 정도가 되며 운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앉은뱅이가 되서 평생 일어설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이런식으로 볼기를 맞다가 고자가 되버리는 경우도 생긴다는것. 원인은 트라우마나 척추 등의 신경 손상으로 추정된다. -태형은 이미 폐지 되었으니 실제 예를 분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실험체를 때려보며 실험을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대미지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때리다가 몇 대 때렸는지 까먹어서 더 많이 때리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한 대요!" "두 대요!" 외치면서 때리거나, 활줄에 산가지를 매달아 한 대 때릴 때마다 옆에서 하나씩 셈한다거나.[6]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에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흥보가흥부 또한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것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가 이마저도 일감을 빼앗겨 실패하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직업이다. 보통 높으신 분들이 곤장을 맞게 되면 품삯을 받아서 대신 매를 맞고, 그런만큼 번 돈으로 고기를 사먹으며 몸을 추스린 후 회복되면 다시 매를 맞는 걸 반복...

또한 조선시대에서 태형은 최대 120대까지 때리게 되는데 절대로 한꺼번에 다 때리는 게 아니라 한 번에 30대까지만 때리고 이틀 간격으로 나눠서 때린다. 왜냐하면 30대만 맞아도 죽어나가기 때문에...

야사에 따르면 이런 개인사업을 하면서 먹고사는 부부가 있었는데, 신나게 맞고 돈을 많이 번 어느 날 남편이 "오늘은 힘들어서(아파서) 그만 해야겠어"라고 하는 걸 아내가 "한번만 더 맞고 와요"라고 졸라댔다. 결국 남편은 관아로 가서 곤장을 한 번 더 맞다가 그대로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탔고 그 후 아내는 마을에서 쫓겨나 유랑하다 아사해서 남편 곁을 따라갔다고 전해진다.

장영실세종대왕이 탈 가마 제작을 감독했다가 그게 부서져서 책임을 지고 장형 80대에 처해진 후 파면되었다고 한다. 이후 장영실은 알 수 없는 인생의 뒤안길로…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 장형 100대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

1.3 장형과 비슷하지만 다른 형벌들

강릉 임영관에서 분류해 놓은 곤장의 모습.
좌측부터 소(小)곤, 중(中)곤, 대(大)곤, 중(重)곤, 치도곤(治盜棍)이다.

오해가 있다면 장형과 곤장은 다른 형벌이다.그렇지만 곤장을 치면 이 항목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지 장은 태와 형태는 같으나 그보다 좀 더 굵은 형태의 둥근 몽둥이라면 곤장은 배를 저을 때 사용하는 노처럼 넙대대한 형태의 형구다. 곤에는 폭과 길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게에 따른 파괴력의 차이에 따라서 다섯종류가 있는데 작은 것을 소곤이라고 하며 그 다음 중(中)곤, 대곤, 중(重)곤, 가장 큰 것을 치도곤이라고 하며 치도곤의 경우 길이 5자 7치(173cm), 너비 5치 3푼(16cm), 두께 4푼으로 웬만한 성인 남성만한 큰 물건이다. 사극에서 몽둥이가 곤장 형태로 등장하는 건 고증오류. 곤장이 장형보다도 훨씬 고통이 심했으며 그래서 도적을 토벌할 때나 군법을 어긴 자를 처벌할 때 등 중한 처벌이 필요한 곳에서만 상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게 하였다. 물론 지방 수령들이 이걸 안 지켜서 문제였지만. 지방수령이 똘끼로 가득찬 인물이면 아무 때에나 치도곤으로 때렸다고 한다. 위키러들은 꼭 알아놓자. 곤장은 어디 선생님 빠따와는 수준이 다르다.

그리고 곤장하고 비슷하고 생겼는데 규격은 곤장보다 조금 작은 신장이라는 물건이 있었는데 이건 형벌용이 아니라 고문용이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경빈 박씨 처소의 나인들이 작서 사건 때문에 체포되어, 처음에 좋게 물어봤을 때 자백을 안 해서 바로 형틀에 묶여 곤장으로 정해진 대수 없이 무한정 얻어 맞아 엉덩이가 완전히 터지고 찢어져서 치마가 피로 적셔져 물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사용된 게 신장이다. 당연히 위력은 장보다 강하다. 사극에서 넙적대한 형구로 엉덩이를 맞는 장면이 흔하게 나오게 된 것은 이것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태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장을 쓰고, 장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신장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니... 근데 신장은 보통 중국에선 볼기를 치는게 맞으나 조선에서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신장으로 정강이를 치게 되어 있었다. 형벌용이 아니라 심문중에 집행하는 고문이었기에 죄인을 엎어놓은 상태에서는 증언을 듣기 힘들었기에 죄인을 의자에 앉혀놓은 상태에서 진술과 고문을 함께 시행하는데 편하기 때문이었다. 본래 1차에 30대까지만 치고 한 번 고문을 하면 3일 내에 다시 시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역모 사건의 경우 무한정 집행이 가능했다. [7] 다만 고문을 할 때에는 심문 담당 관원이 멋대로 하지 못하고 항상 왕에게 보고해서 허락받아야 했다.

형정도첩에는 세워서 붙잡아 놓고 종아리를 후려치는 형태의 태형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식적인 형벌은 아니다. 주로 하녀들에게 가하는 체벌로 사용한 방식이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여성에게 태형을 가할때는 볼기 대신 종아리를 치자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리고 역시 도둑을 고문용으로 의금부 수준에서만 진행된 형벌로 난장이라는 형벌이 존재한다. 역시 매는 신장과 같은 수준으로 보이는데, 이 형벌은 두 발을 묶은 다음에 들어올려서 고정시켜두고, 맨 발바닥을 후려친다. 역시 고문용이므로 가차가 없어서, 정약용을 난장을 일컫어서 발가락을 자르는 형벌이라고 불렀다. 이걸 맞다보면 발가락 정도는 전부 떨어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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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정도첩에 나오는 착고를 찬 죄인에게 태형을 가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 난장의 변형일 수도 있다.

1.4 여성에 대한 장형 집행

본시 중국에서 송나라 때까지는 태형과 장형을 가할 때는 남녀불문하고 타격부위를 벗겨놓고 치는게 원칙이었는데 [8] 원나라에 오면서 단의결벌(單衣決罰) 이라는 원칙이 생겨 여성의 경우 간통죄가 아니면 속옷 한장 입혀놓고 집행하는 방식을 채용했고 명나라 성립 이후 대명률을 통해 완전 명문화되었다. 대명률을 채택했던 조선 또한 이때부터 물볼기라는 집행 방식이 시행된다.

남원시 춘향테마파크에 있는 재현모형. 완성도 높은 신장이다.

하지만 태형이나 장형의 때리는 강도가 장난이 아닌데다 옷에 물을 끼얹기까지 하니 옷이 상처와 짬뽕이 되는 경우가 많기에 아예 여자에게 태형과 장형을 가할때는 신장의 방식처럼 정강이를 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춘향전에서도 춘향이 태형을 당하는 장면에서 묘사된 바 있다. 타격을 당하는 곳이 소위 말하는 조인트이니 아픈 정도를 생각하면 차라리 체면 다 내팽개치고 볼기를 맞는 게 나을 듯 매를 칠 때는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타격 부위를 벗겨 놓고 치는게 원칙이라 신장을 칠 때는 종아리를 걷어놓고 치게 되어 있었는데 볼기를 칠 때와는 달리 여성의 맨다리를 드러내는데 대해서는 제한이 없었다.

이를 이용해 최대한 덜 아프게 맞으려고 편법을 쓰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연산군 때 '내한매'라는 기생이 왕이 주최한 연회에서 왕이 한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는 죄목으로 왕의 명으로 장형을 당하게 되자 자신을 때릴 형리에게 뇌물을 주고 속치마로 가려진 엉덩이에 미리 호피를 깔고 맞으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게 기록이 남았다는 건 현장에서 걸렸단 소리고[9]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된 내한매는 결국 안 그래도 아픈 매를 훨씬 더 가혹하게 얻어맞았다고 전해진다.

본시 간통죄가 최소 장형 80대 이상이었던 만큼 태형으로 여성이 엉덩이를 드러내고 맞을 일은 없기에 이럴 경우는 전부 장형 집형시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장형은 관아에서 비공식적으로 집행하는 태형과는 달리 공개된 장소에서 집행하게 되어 있었으며 왕명으로 시행할 경우에는 종루거리 즉 현재의 종각 사거리에서 공개 집행을 하였다.

목민심서에 보면 어디까지나 규정상이었고 법을 잘 모르고 힘도 없는 평민이나 천민들의 경우 간통죄가 아닌 다른 범죄로 잡혀온 여인임에도 볼기를 내놓고 맞는 경우가 많은 폐혜가 있었다고 정약용이 이를 비판하는 서술이 있다. 때문에 차라리 장형급 범죄는 정강이 치기로... 태형급 범죄는 종아리 치기로 대체하자는 주장까지 했다. 여성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한 말인듯 한데 오히려 더 아프게 맞으라는...

하지만 여성의 경우는 조금 달라서 속옷 한 장 빼고 모두 벗긴후에 물을 끼얹고 쳤다. 그래도 다 비친다 이를 가리켜 물볼기라 한다. 속곳(속옷) 한 겹만 남기고 쳤다고 하는데, 보통 속곳이라 하면 속바지류를 의미하기 때문에 남겨뒀다는 속옷은 가장 안에 입는 속바지인 속속곳일 확률이 높다. 다리속곳은 티팬티에 가까운 모습인지라... 자세한 것은 한복의 속옷 항목 참조. 엉덩이가 보일 정도로 속바지를 걷어올리고 형을 집행했다. 한복의 여자 속바지는 통이 넓은데다 제작 방식에 따라 아래가 트여있기도 해서 충분히 그 정도로 걷을 수 있다.그럼 물은 왜 뿌린거냐;;


당시 형벌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형정도첩에서 묘사되 여성의 태형 장면을 봐도 속속곳를 입히고 허벅지와 엉덩이의 일부가 노출될 정도로 걷어 올려진채로 태형을 받고 있다. 보통 매체에서는 제대로 고증 안되는 편. 다른 데는 잘도 노출씬을 만들면서 유독 형벌 장면에서만 옷을 단단히 입혀놓는 마법

1.5 대중 매체에서

사극에서 이를 연기할 때는 그나마 살살 때리는 편이지만, 그래도 끔찍하게 아프기 때문에 맞는 부분에 책같은 걸 덧대서 충격을 줄인다고 한다. 물론 그래도 아프다.

또한 사극에서는 수위 문제상 보통 옷을 입히고 그 위에 때리지만 실제로는 엉덩이 맨살이 보이게 벗긴 다음 내리쳤다고 한다. 물론 옛날 작품으로 갈수록 벗기고 때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들어 장혁/이요원 주연의 대망 이라던지

여성에 대한 물볼기의 경우는 수위 문제도 있지만, 제대로 된 이해의 문제도 있어서 한번도 고증에 맞게 재현된 사례가 없다. 예를 들어 영화 방자전의 묘사를 보면 치마를 모두 입은 상태에서 물을 끼얹었기에 고증을 따진다면 명백한 오류이며 속곳(속바지, 속속곳, 단속곳 등)만 입히고 때리고 속치마 입히고 때린다고 하더라도 현대식 속치마는 개화기 이후에 입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것도 고증오류다. 원래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속옷[10]을 입었는데, 속바지도 상당히 많이 껴입은 탓에[11] 속치마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뭐 간혹 양반집에서 종종 행해지는 장형과 비슷한 사적재제들도 나오지만, 이는 형벌에 포함되지 않는다.

무한도전에서 "홍철아 장가가자'특집 이후 논란때문에 유재석김태호PD가 맞고, 스피드 레이서 특집 이후 태도 논란으로 박명수도 곤장을 맞았다.

1.6 기타

민속촌이나 관아 건물등의 문화재에는 방문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형틀과 장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 형틀이 십자가와 비슷해 보여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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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죄를 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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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오! 이보시오! 포졸양반!!!

가끔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이 형틀에 엎드리지 않고 바로 누워서 매를 맞는 시늉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때리는 시늉만 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선 끔찍(?)해 보일 수 밖에 없다. 엎드릴 때 엉덩이를 때릴 곤장이 바로 누웠을 때 어디를 때릴지는... 곤장의 받침을 지우면?

'호된 벌이나 곤경에 처하게 하다'라는 뜻의 관용구로 '치도곤을 안기다/치르다/먹이다'라는 말이나 욕설 가운데 일부로 '난장맞을' 등이 있다. 부관참시에서 파생된 육시럴이나, 능지형에서 나온 '깎아죽일'[12], 경을 칠, 우라질[13], 주리를 틀 같이 워낙에 형벌에 관한 관용구가 많은 한국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2 중국 후한의 문학가, 발명가

張衡
(78 ~ 139)

하남 남양의 서악 출신으로 자는 평자(平子).

혼천의로 유명해 흔히 발명가로만 알려진 천문학자 겸 문학가로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집안이 몰락해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학교를 다녔으며, 열심히 배우면서 재능도 뛰어나 성적이 훌륭했고 16, 7세에 낙양에서 유학하면서 학문을 닦다가 30세를 넘어서 문학의 재능을 인정받아 낭중이 되었고 대표작으로 반고의 양도부를 모방한 양경부로 불리는 동경부, 서경부 등을 남겼다.

태사령이 되면서 영헌 등을 저술하거나 수력으로 움직이는 혼천의, 지진을 측정하는 지동의 등을 발명했으며, 당시에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던 시기로 장형은 질시를 받아 수도에서 쫓겨나 하간상이 되었다.

138년에 낙양으로 돌아와 상서를 역임하다가 139년에 병으로 사망한다.

3 후한오두미도의 교주

오두미도의 역대 장천사
장릉장형장로

張衡
(? ~ ?)[14]

후한 말의 인물.

패국 풍인 사람으로 자는 영진(靈眞). 오두미도의 제2대 교주.

아버지 장릉이 죽자 이를 계승해 도술을 받들어 행했으며, 장형은 양평화에서 대낮에 승천했다. 이후 장로가 계승했고 사후에는 오두미도의 삼장이라 불린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장로가 자신을 계사(系師)라 자칭할 때 장로의 조부인 장릉을 천사(天師)로 칭해진 것과 동시에 장형도 사사(嗣師)라 칭해졌다.

경정문장구명의 제8 신선 조목에 따르면 장형은 북방귀제로 봉해졌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노식이 176년 9월에 유비, 공손찬을 불러놓고 천하의 일에 대해 근심할 때 한중 지방에는 장릉, 장형 부자로 이어지는 오두미도라는 것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식으로 언급되며, 장로에 대해 소개할 때 장형에 대해서는 장릉이 죽은 뒤에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백성들 중에 자신의 도를 배우려는 이가 있으면 쌀 닷말을 거두고 받아들여 세상 사람들이 그의 무리를 쌀도둑이라 불렀다고 했다.

4 수나라의 인물

張衡
(? ~ 612)

수나라의 인물. 자는 건평(建平).

하내군 사람으로 양주 총관의 사마를 지내다가 600년 3월에 행군총관이 되어 보병, 기병 5만을 이끌고 이영림의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다. 수양제가 태자 시절에 그를 가까이 하고 일을 맡기자 수양제를 위해 적통을 빼앗는 책략을 꾀했으며, 602년에 태자좌서자를 지냈다.

604년에는 수문제가 병이 들자 장형은 침전에서 병시중을 들면서 후궁들을 모조리 내보내어 별실에 가도록 하면서 수문제를 눌러 죽였으며, 수양제 즉위 이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607년에 수양제가 공(장형)의 주택을 지날 것이니 짐을 위해 주인 노릇을 해달라고 하자 먼저 달려가서 하내에 도착해 소고기, 술 등을 준비했으며, 수양제는 장형의 집으로 가서 3일 동안 머물고 연회를 베풀었다.

장형이 음식을 다시 헌상했고 수양제는 공경들에게 하사해주도록 하는 것으로 생색을 냈으며, 이는 위사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610년에는 수양제의 명으로 분양궁을 만들기 위한 도면을 갖추어 이를 상주하게 했지만 장형은 백성들의 노역을 조금씩 억제하라고 줄여달라는 간언을 했는데, 이로 인해 수양제의 마음이 심히 편안하지 못했다.

장형은 헌사(형벌과 옥을 담당하는 관청)의 일을 맡는 사람으로서 행동거지가 바르지 못했다고 해서 유림태수로 쫓겨났으며, 장형은 누번성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수양제는 장형이 몸을 상하게 하지 않은 것을 싫어했는데, 이로 인해 장형은 다시 유림으로 쫓겨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형은 강도궁을 짓는 일을 담독하게 되었으며, 장형은 양현감에게 설도형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양현감이 수양제에게 상주했다. 또한 왕세충이 장형이 궁궐을 짓는 도구를 줄이고 있다고 상주하면서 장형은 가둬졌다가 석방되면서 3월에 평민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수양제는 장형이 하는 행위를 엿보게 했는데, 612년에 장형의 첩이 장형이 원망하면서 조정의 정사를 비방했다고 하자 조서를 내려 자살하게 했다. 이로 인해 장형은 자살했다.
  1. 스팽킹 중에도 비슷한게 있긴 있다. 패들이라고 하는 노를 닮은 널찍한 나무판을 이용하는 것으로 패들링(Paddling)이라고 부른다.
  2. <만청십대혹형>이라는 영화로서 위에서 맞는 사람은 소백채 역을 맡은 배우 옹홍이다. 성인 영화에서조차 여자가 맨엉덩이로 장형을 당하는 모습이 잘 안나오는 만큼 굉장히 귀중한 영상이다.
  3. '승'은 베의 굵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5승이면 중등품의 베였다.
  4. 징역형 대신에 창고에 범죄자를 가두는 것을 집어넣는 꼴이다. 사사로이 매질하는 행위라 하여 사매질이라고 한다.
  5. Crush syndrome. 근육 압괴 증후군 이라고 불린다. 사고시에 장시간 끼어있던 다리를 빼내지 않고 절단하는 것은 이로인한 사망을 막기 위함이다. 한두시간의 경미한 경우도 만약을 대비해 링거를 통해 약액으로 유해물질을 해독하기도 한다. 태양의 후예에서 강모연이 작업반장을 구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6. 싱가포르의 경우 오늘날까지 태형을 집행하는데 그 양상이 위의 설명 등과 유사하다. 실제로 싱가포르에서 강도살인을 한 한 인도인이 징역형과 태형 60대를 선고 받은적이 있는데 현지인들의 반응은 한결 같이 이건 그냥 죄인을 때려 죽이라는 얘기임ㅋ였다(....) 물론 이럴 경우에 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태형은 할부로 집행한다. 의사 참관하에 울며불며 매맞다 죽겠다 싶으면 치료하고 몇달후 상처가 아물면 나머지를 집행한다.
  7. 역모 사건의 경우에도 하루에 1차례만 하고 다음날에 다시 1차례를 하는게 상례였지만 이것 또한 왕 마음이라 인조가 궁중에서 발생한 저주 사건에 연루된 궁녀들을 추국할 때 신장을 30대 치고 바로 압슬을 가하고 다시 신장 30대를 치는 식으로 하루에 3차례의 고문을 가한 적도 있다.
  8. 때문에 진서 형법지에는 위 명제 조예가 여성의 볼기를 노출시키는게 좀 그랬는지 당시 사회관념상 그나마 좀 노출시켜도 괜찮을 듯한 상체를 벗겨서 채찍질을 하라는 규정을 만들라는 기록도 나온다.
  9. 당시 형조참의였던 민효증이란 사람이 혹시 옷에 뭐 숨겨놨나 의심하고 옷을 찢어서 딱 잡아내고 왕에게 직접 일러바쳤다.
  10. 삼국시대에도 하의를 부풀리기 위해 많은 속옷을 겹쳐 입었다. 한복의 풍성한 모습을 연출하려면 갖가지 속옷을 많이 껴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푸와 유사한 모습이 연출되어야 맞다.
  11. 조선시대 기준으로 다리속곳 포함 하의 네 겹(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에서 일곱 겹(+너른바지, 무지기치마, 대슘치마), 상의 세 겹(가슴가리개, 속적삼, 속저고리)을 껴입었다.
  12. '능지할' 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것은 꼼작도 못할 정도가 되다. 라는 의미이다.
  13. 원래는 죄인을 묶은 밧줄인 오라를 질에서 파생된 표현이다. 그래서 속담중에는 '오라는 네가 지고 도적질은 내가 하마' 같은 것이 있다.
  14. 도홍경의 진고 4권에는 몰년이 177년 2월 27일, 태평광기에는 몰년이 179년 1월 23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