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역대 황제 | |||||
7대 숙종 무황제 이형 | ← | 8대 대종 예황제 이예 | → | 9대 덕종 소황제 이괄 | |
임시황제 광무군왕 이승굉 |
묘호 | 대종(代宗) |
시호 | 예문효무황제(睿文孝武皇帝) |
연호 | 광덕(廣德, 763년 7월 ~ 764년) 영태(永泰, 765년 ~ 766년 11월) 대력(大歷, 766년 11월 ~ 779년) |
성 | 이(李) |
휘 | 예(豫) |
생몰기간 | 726년 11월 11일 ~ 779년 6월 10일 |
재위기간 | 762년 5월 18일 ~ 779년 6월 10일 |
- 생몰년 : 726년 개원(開元) 14년 ~ 779년 5월 23일 대력(大歷) 14년 (54세)
- 재위기간 : 762년 5월 18일 보응(寶應) 원년 ~ 779년 5월 23일 대력(大歷) 14년 (17년 5일)
당 제국 태위 | ||||
전임 이성기 | ← | 이예 757년~758년 | → | 후임 이광필 |
목차
1 개요
중국 당나라의 제8대 황제. 당숙종 이형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추존된 장경황후 오씨이다. 휘는 예(豫). 초명은 이숙(李俶).
묘호는 대종(代宗). 시호는 예문효무황제(睿文孝武皇帝)로 줄여서 예황제(叡皇帝),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2 생애 - 내우외환
2.1 황제 이전의 삶
황태손의 지위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광평왕 이숙廣平王 李俶으로 살았다. 안사의 난으로 아버지가 분조를 이끌고 영무에서 즉위할 때 동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천하병마(天下兵馬) 원수로 임명되었고, 757년 9월 장안, 낙양 양경을 함락할 때 초왕楚王에 봉해졌다가, 758년 성왕成王을 거쳐 그해 5월 황태자가 되었다. 이때 이름을 이계로 고쳤다.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을 공략할 때 회흘(위구르 제국)의 친왕 엽호가 파견되자 그와 의형제를 맺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당숙종은 원군을 하루빨리 얻어내기 위해 장안을 수복하면 "황금, 비단, 자녀"의 약탈을 허용한다고 했는데, 이때 이숙이 절을 하며
"지금 처음으로 서경(장안)을 얻었는데 만약 갑자기 포로로 잡고 약탈하면 동경(낙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역적(=안경서)을 위하여 굳게 지켜서 다시 차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바라건데, 동경에 도착하면 마침내 약속대로 하시지요"
라고 엽호를 달래어 맞절을 받고 장안의 약탈을 막아 칭송을 받았다. 후일 낙양을 수복한 후에는 부호들에게서 비단 1만필을 거둔 후, 그걸 줘서 약탈을 막았다.
하지만 사사명의 난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숙종의 말년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의붓어머니 장황후는 환관 이보국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군재가 있던 친동생 건녕왕 이담建寧王 李倓이 모함으로 죽자 그는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얼마 뒤 장황후와 그녀의 맏아들 셋째 이계는 이보국과 이예를 함께 죽이려고 하였고, 이들은 이보국에 의해 발각되어 유폐되었으나 숙종이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할아버지 당현종과 아버지 숙종이 급서한 상황에서 그는 황제로 올랐다. 762년 5월 23일의 일이었다.[1] 최초로 환관에 의해 제위에 오른 황제가 된 것이다.
2.2 이보국을 제거하다
당대종은 이보국을 처음부터 위험인물로 적대시하고 있었으나 이보국이 금군(친위대)의 지휘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일단 이보국을 상보[2]라 칭하며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모든 업무에 있어 자문을 듣는 등 그를 추켜세우는 모습을 보여 안심시킨다.
또한 이보국이 꿈에 바라마지 않던 삼공의 지위(사공)과 재상직(중서령)까지 주기도 했다(6월 4일) 이보국은 정말 재상이 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숙종이 죽기 전인 3월에는 전해에 자신이 재상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소화를 파직시켜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보국의 세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칠일만에 정원진이 정변을 일으켜 행군사마와 병부상서직에서 파직되어 군권을 상실했고, 정원진을 대판원수 행군사마로 삼음과 동시에 이보국을 황궁에서 내보내 밖에 있는 집에 살게 만들었으며, 13일에는 중서령에서도 파직시켰다. 7일 천하 대종은 그에게 박육왕을 내려 달랬고, 이보국도 자신의 실각을 인정했다. 이보국은 벽지로 유배되었으나, 결국 그 해 10월 암살되고 만다. 그는 이상하게도 머리와 오른팔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대종은 그에게 후한 장례를 내려주었다.
2.3 정원진의 세도
늑대가 가면 호랑이가 오는 법이다. 환관 정원진의 세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회남의 절도사였던 내진이 숙종의 부름에도 오지 않자 오랜 의심을 사고 있었는데, 결국 당조정이 그의 권한을 줄이려고 하자 조현하고 용서를 빌었다(762년 8월). 당대종은 그를 후대했으나, 정원진은 내진이 사조의측과 짜고 왕중승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참소했으며, 결국 다음해 내진은 관직이 깎이고(1월 28일) 파주로 유배가다가 도중에 처형당한다. 이를 통해 당 조정은 절도사들의 원한과 의심을 사게 되었고, 결국 대종이 절도사 직을 뿌려야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런 정원진의 세도, 횡포는 토번의 침공으로 그가 실각할 때까지 계속된다.
2.4 회흘의 성장과 안사난의 진압
한편 이 5년사이 회흘은 북방의 최강자로 거듭나게 된다. 연황제를 자칭하는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와의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사조의는 당의 국력이 쇠약해진것을 틈타 회흘과 손을 잡으려고 하였다. 중사 유청담이 "(대종 황제는) 바로 예전의 광평왕이었으며 엽호와 함께 양경을 수복한 분입니다."라고 회흘을 설득해도 별로 먹히지 않았던 상황.
그러나 회흘이 사조의를 지원하려 군대를 파견하자, 전중감 약자양을 파견해 회흘측을 접대하게 하였고, 약자양의 접대를 받은 회흘측은 선대 비가월 가한(카를륵 카간)의 국구(장인)인 삭방절도사 복고회은을 만나보기를 요청했다. 복고회은은 손쉽게 회흘을 설득하였고, 재물을 미끼로 회흘의 진군을 얻어내게 된다.
당대종은 옹왕 이괄(후의 당덕종)을 숙종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천하병마원수로 삼고, 복고회은을 보좌역(실질적 총사령관)으로 돕게하였다. 그러나 이때 옹왕은 숙부인 가한에게 춤을 추라라는 모욕을 당했고, 반대하던 당의 신하들이 채찍 100대를 맞다가 죽어나가는 수모를 당한다.
그리고 소각사 전투의 승리로 복고회은에 의해 빼앗겼던 낙양이 재수복되자, 5년전 대종이 말했던 대로 회흘의 대약탈극이 벌어진다. 또한 백당사로 몰려든 백성들에게 불을 질러 1만이 죽었다. 역적처형을 빙자한 당 본군의 약탈도 만만치 않았으되, 옹왕(덕종)에게는 이것이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여하간 난은 763년 1월 사조의가 자결하면서 끝이 난다.
당대종은 사사명과 같은 사례를 막기 위해 투항한 모든 군웅에게 하북의 모든 지역을 나눠주어 절도사로 봉했다. 멋대로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사칭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번진 난립의 시작이 되었다. 또 대종은 763년 7월에는 연호를 광덕으로 고첬으며, 보응원성문무효라는 존호를 받았다. [3]
2.5 토번의 장안 함락과 정원진의 실각
가르친링 사후 약해졌던 토번은, 안사의 난 사이 당에 열세였던 국력을 회복하였고 장안 서쪽 100리까지 영역이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원래 당숙종은 침략을 막기위해 매해 5만필의 비단을 바치고 있었다. 북송이냐 그런데 당대종은 즉위하면서 이를 그만두었다. 새로 즉위한 열세살(!)의 티벳왕 적송덕찬(치쏭데찬(赤松德贊))은 격노하였고, 토번은 이를 빌미로 당의 영토를 넘보기 시작한다.
이때 763년 대진관으로 들어와 하서와 농우의 모든 당의 영토를 점령하고 만것은, 당의 서역으로 가는 목구멍이 막힌 것으로, 사실상 전역이 상실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토번은 진군을 멈추지 않고, 그해 10월 다짜뤼공이 무려 20만 병력을 동원해 검남(쓰촨성 일부)과 관중으로 밀고 들어왔다.
결국 10월 7일 대종은 섬주(陝州)로 피란했고, 10월 9일 토번은 빈 장안에 입성했으며, 허수아비 황족 이승굉을 당황제로 세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하지만 돌아온 부원수 곽자의의 활약으로 12일(혹은 15일)만에 성을 비운다. 이 엄청난 활약은 곽자의 항목 참조. 참고로 그가 초기에 움직일 수 있었던 병사는 고작 수십, 수백이었고, 토번을 원군소문으로 도망하게 할 때 그가 모은 병사는 고작 수천이었다는걸 상기하자. (토번에 풍토 전염병이 돌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미 약탈이 끝난 상황이기도 했다.)
한편 토번의 침공이 저지되자 그동안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린 당나라판 김자점 정원진은 11월 2일 삭탈 관직되어 낙향을 명받았는데, 계속 복권의 기회를 노리고 장안을 떠나지 않자 귀양에 보내졌다. 올레!
하지만 여전히 전란은 끝나지 않았다(...)
2.6 복고회은의 난과 곽자의의 대활약
토사구팽을 두려워하던 대녕군왕/삭방절도사/중서령 복고회은은 태원의 하동절도사 신운경과 갈등하다가 조정의 알현을 거절하고 764년 1월 기어이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곽자의의 명성에 사기가 떨어진 삭방군을 이끌고 태원와 유차를 공격하나 실패하니 영무로 들어가 토번과 회흘의 12만 대군을 불러버린다.(764년 8월) 이런 상황에서 7월 이광필이 사망하였지만, 곽자의를 다시 파견한 당은 한번의 기습으로 12만 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10월 8일).
하지만 복고회은은 포기하지 않는다. 765년 9월 다시 회흘·토번(10만)·토욕혼·당항족·노랄으로 이루어진 5국 연합군(...)을 불러온 것.. 근데 정작 복고회은은 남하중 병사하고, 그저 약탈집단으로 변신한 5국 연합군이 그나마 맛이가버린 복고회은 잔당을 무시하고 그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곽자의는 하중에 있어 봉천을 비웠고, 당대종도 금군을 거느리고 나서야했다. 선봉의 토번군으로 수천병사만 남은 장안이 함락 직전에 몰리자 금군을 장악한 환관 어조은 등이 하중으로의 파천을 건의(반 협박반)했으나, 곽자의가 상소로 이를 물리쳤는데, 과연 9월 하순에 큰비가 내려 토번군은 후방으로 물러났다.
다시 토번이 10월 회흘과 연합하여 다시 곽자의가 있는 경양까지 진군해 포위하자(10월 8일), 곽자의가 단기필마[4]로 회흘 진영으로 찾아가 설득해 당나라와 손을 잡게 했다. 당과 연합한 회흘은 10월 15일 토번군을 격파하고 토번의 약탈물을 약탈했으며, 당대종은 회흘에게 비단 10만필을 내리고, 약속대로 회흘의 국구 복고회은의 잔당을 관대하게 용서함으로서 난을 진압했다.
이때 곽자의의 나이가 일흔, 대종은 마흔이었다. 뭔가 점점 곽자의 항목처럼 되고 있다
2.7 끝나지 않는 전란
하지만 여전히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사천에서는 절도사를 자칭하는 이들의 분란이 끊이지 않았고, 동화주지사 주지광이 767년 난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2월 6일, 곽자의는 주지광 진압과 뒷처리를 마무리짓고 장안으로 돌아와 조현하였다. 하지만 당대종은 당대의 권신인 원재, 왕진, 환관 어조은 등에게 명하여 돌아가면서 집에서 술자리를 열었는데 한번 모일때마다 소모된 비용이 10만 민(당시 통화 단위)에 달했다고 한다. 이게 개념있는 군주의 행태인가?
또한 이렇게 장안에 있을 때에 유명한 에피소드가 고사성어 '장롱작아(裝聾作啞)'. 대종은 딸 승평공주(昇平公主)를 곽자의의 아들 곽애(郭曖)와 결혼시켰는데, 곽애와 승평공주가 부부싸움을 하다 화가 난 곽애가 승평공주에게 "네가 의지하는 건 네 아버지가 천자이기 때문이냐? 나의 아버지는 천자를 가볍게 보아 천자를 안하는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승평이 이를 대종에게 고하니 대종은 "그말이 맞잖아. ㅇㅇ"[5](..)라며 딸을 타일러 보냈고 곽자의가 후에 사죄하고 곽애에게 곤장을 쳤다. 이때 대종이
'바보가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니면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소(鄙諺有之, 不癡不聾, 不作家翁)'
라며 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곽자의를 달랬으니, 귀머거리로 꾸미고 벙어리인척 한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
768년 토번이 3년만에 다시 10만을 이끌고 노략을 하러 왔으나, 곽자의는 봉천에서 출진해 또 토번을 연파했다. 이 와중에 곽자의를 참소하던 환관 어조은은 재상 원재와 갈등하다가 살해당했으며(770년 3월), 원재 역시 크게 부패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원재와 그에 빌붙은 왕진은 777년에야 대종에게 숙청당한다.
773년 8월, 토번은 16만 대병으로 또 쳐들어왔는데, 나이어린 삭방병마사 혼감이 장수들과의 불화로 1차 저지에 실패했으나 곽자의가 혼감을 다시 믿고 경원절도사(경주) 마린과 함께 다시 공격하게 하여 물리쳤다. 775년 9월 토번이 또 침공했는데, 봉상절도사 이포옥과 마린에게 패해 물러갔으며, 776년에도 또 침공했으나 증병에 성공한 곽자의는 쉽게 이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기어이 서역과 당나라를 이어주던 실날같던 난주가 함락당했다. 778년 회흘이 다시 적대적으로 돌아서 당을 약탈했으나, 5년만에 돌아온 혼감이 이들을 막아냈다.
775년(대력 10년)에는 절도사 진압 문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지만, 여기서도 굴욕을 당한다. 당시 하북의 절도사 중 최강의 힘을 자랑하던 것은 천웅군절도사 전승사였는데, 전승사는 자신의 힘을 믿고 주변 절도사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여 여러 절도사과 갈등을 빚었다. 그 결과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와 성덕절도사 이보신을 축으로 하여 전승사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달라고 조정에 청원하자 당대종은 이를 절도사 진압의 기회로 여기고 주변 9개 절도사들에게 전승사에 대한 토벌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잘 되는 듯 했다. 이정기, 이보신은 둘 다 천웅군번진에 못지 않는 거대 번진의 절도사였고, 따라서 사방에서 공격받은 전승사는 얼마 못가 많은 영토를 상실한다. 그런데, 전승사를 적당히 두들기고 영토도 뺐었다 싶자, 저 둘이 전승사와 사돈 관계를 맺고는 조정에 전승사를 용서해 달라고 청원한다. 그리고, 토벌에 참가했던 다른 절도사들도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의사를 보이면서 전승사와 동맹을 맺고는 역으로 조정을 압박, 결국 그 다음해인 776년에 사면령을 받아내고야 만다. 이는 당 조정의 입장에선 큰 굴욕이였다. 대부분의 군사력이 토번의 침공 저지에 돌려져 있었던 당의 입장에선 절도사들의 반기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 대종은 779년 5월 21일(혹은 23일) 사망했다. 향년 54세. 죽기 직전에 곽자의를 섭총재로 삼아 당덕종을 보좌해 줄 것을 명하며 후사를 부탁했으니, 곽자의는 2년 뒤 최고의 자리에서 영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태자 시절에는 군재를 제법 보였지만, 왕위에 오르고나서는 호구같은 면모들을 피할 수 없었던 황제. 가히 곽자의가 아니었으면 사직이 지탱되지 않았다고 할 정도[6]. 나중에는 거의 "곽자의님이 다 해주실거야" 수준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곽자의님은 다해주셨다(...)) 그래도 어려운 처지에서 외적들을 스스로 몰아낸 것,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 권신들을 차례로 숙청한 것 등에서는 아버지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였다. 곽자의의 등뒤에 칼을 꽂지 않는 등 사직을 말아먹지 않은게 어디냐라는 평도 상당하다.
이런 전란의 와중에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 사찰에 많은 토지와 면세 혜택을 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의 재정이 한층 더 악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