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 친위대

대한제국군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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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진위대대한제국군 상무영


大韓帝國 親衛隊

1 개요

1895년 9월 김홍집 내각이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육군편제강령을 통해 군제를 개혁하면서 창설된 중앙군이다. 시위대훈련대를 합쳐 친위대를 편성했다. 2개 대대로 편성되었고 1700명 규모였다.

이전의 제2차 갑오개혁때 창설되었으며 일본군에게 훈련을 받은 대한제국군 훈련대을미사변때 일본공사 미우라에 포섭된 훈련대 간부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같이 창설된 대한제국군 시위대(侍衛隊)를 박살내고 훈련대장 홍계훈까지 죽이는 쿠테타가 일어난 사건 때문에 폐지되었다. 이후 훈련대와 시위대를 합쳐 지방수비를 맡은 대한제국군 진위대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친위대로 나뉘었다. 이후 광무개혁때 친위대 병력 중에서 선발하여 다시 시위대를 부활시켜 황궁 수비에 쓰기도 했다.

2 편제, 훈련 및 장비

처음에는 2개 대대로 시작했다. 1개 대대에 4개 중대를, 1개 중대에 3개 소대를 편제했는데, 1개 중대는 220명으로 총병력은 약 1,700명이었다. 1896년 1월 공병으로 편제된 3대대를 창설했고, 3월에 제4,5대대를 추가로 배치하였다. 그 후 4월 22일자의 칙령 21호로 공병대를 폐지하고 연대로 편성하여 연대본부와 휘하에 3개 대대를 두고 4,5대는 이를 독립 대대로 두었으며 기병대를 독립시켰다.

아관파천 이후에 상당 병력이 다시 시위대로 독립하면서 친위대는 1개 대대로 감축되었다가, 1900년에는 공병 1개 중대와 보급중대 1개 중대를 증강했고, 1902년에는 2개 연대로 증편되었다. 당시 제국신문의 기사를 보면 친위대는 3,000명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연대에는 연대장, 부관(副官) 1명, 무기주관(武器主管) 1명, 기관(旗官) 1명이 있었고 각 대대에는 대대장, 향관(餉官) 2명, 부관과 정교(正校) 각 1명, 부교(副校) 3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대에는 중대장, 소대장 4명, 정교·부교·참교(參校) 각 1명, 곡호대(曲號隊)[1] 부교 1명이었다.

처음에는 러시아인 푸티아타(Putiata)대령과 장교 3명을 포함한 10명의 교관단이 지도했고 무기도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으로 훈련했으나, 이후 교관은 일본인으로 바뀌었고 총도 독일마우저 소총으로 교체되었다. 이 외에 독일 크루프사의 7㎝ 야포와 맥심 중기관총도 운용했다.

3 몰락과 해산

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을미개혁과 함께 의욕적으로 창설된 군대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만족할만한 전력은 갖추지 못했다. 맥심 기관총을 사들이는 과정에서도 방해가 있었으며, 그 이후로도 일본의 방해와 예산부족으로 탄약 재고량이 넉넉치 못하였다고 한다.

이후 1905년 일제의 군제개혁으로 인해 해산되었으나, 이곳의 병력과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불리는 한일 신 협약 때 군권을 빼앗기면서 해산된 시위대, 진위대의 병력과 함께 이후 의병에 합류하여 정미의병의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게 되는데 큰 전력이 되었다.

4 관련 항목

  1. 나팔수로 이루어진 부대로 현대의 군악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