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터 헤킹

2016-17 독일 1. 분데스리가 클럽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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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바움
(아우크스부르크)
카를로 안첼로티
(바이에른)
알렉산더 누리
(브레멘)
토르스텐 프링스
(다름슈타트)
토마스 투헬
(도르트문트)
니코 코바치
(E. 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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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슈트라이히
(프라이부르크)
팔 다르다이
(헤르타 BSC)
율리안 나겔스만
(호펜하임)
마르쿠스 기스돌
(함부르크)
마이크 발푸르기스
(잉골슈타트)
페터 슈퇴거
(쾰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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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하젠휘틀
(라이프치히)
타이푼 코르쿠트
(레버쿠젠)
마르틴 슈미트
(마인츠)
디터 헤킹
(묀헨글라트바흐)
마르쿠스 바인치를
(FC 샬케 04)
안드리스 욘커
(볼프스부르크)
VfL 볼프스부르크 감독
디터 헤킹
(Dieter Hecking)
생년월일1964년 9월 12일
국적독일 (Germany)
출신지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카스트로프-라우셀
신체 조건177cm
유소년 클럽베스트팔렌 죄스트
죄스터
리프슈타트
SC 파더보른 07[1]
소속 클럽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83~1985)
헤센 카셀 (1985~1990 )
발트호프 만하임 (1990~1992)
FC 로코모티브 라이프치히 (1992~1994)
SC 파더보른 07 (1994~1996)
하노버 96 (1996~1999)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1999~2000)
국가 대표 U-21
(1985~1986)
12경기, 8골[2]
지도자
(2000-)
페를 (2000~2001)
뤼베크 (2001~2004)
알레마니아 아헨 (2004~2006)
하노버 96 (2006~2009)
1.FC 뉘른베르크 (2009~2012)
VfL 볼프스부르크 (2012~)
리빌딩의 대가이자 치밀하고 노련한 전술가

그러나 위기관리 능력이 떨어지는 감독[3]

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선수, 現축구 감독이다. 현재는 VfL 볼프스부르크에서 감독직을 역임하고 있다.

2 풀리지 않았던 선수 시절

그의 축구 경력은 베스트팔렌 죄스트의 유소년 팀에서 시작하였고, 이후 죄스터, 리프슈타트, SC 파더보른 07을 차례로 거쳐 1983년에 묀헨글라트바흐에 입단하였다. 그는 묀헨글라트바흐에서의 2년간 6경기만을 출전하며 그리 많은 출장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고, 1부 리그 클럽을 떠나 2. 분데스리가의 헤센 카셀로 1985년에 이적하였다. 이곳에서 헤킹은 외어흐 베어거 팀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팀은 상위 5위 안에 들었으며 최종일에 분데스리가 승격을 앞두고 주저앉았다.

비록 클럽은 1987년에 오버리가 헤센으로 강등되었으나 헤킹의 기량은 하락하지 않았는데, 그는 미드필더로 2시즌간 45골에 공헌하였으며, 첫해에는 2위, 2년차에는 1위로 2. 분데스리가에 승격 플레이오프를 거쳐 승격하였고, 1989년에 헤킹은 29골로 득점왕에 등극하였다.

헤센 카셀이 한 시즌도 생존하지 못함에 따라, 헤킹은 혼자 빠져나와 1990년 7월에 또다른 2. 분데스리가 클럽인 발트호프 만하임으로 이적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 시즌을 머물렀으며 2년차에는 딱 1순위차로 승격에 실패하였고, 이후 라이프치히로 이적하였다. 1992-93 시즌 라이프치히에서 그는 30경기에 출전하여 1득점을 올리는데 그쳤으나, 결정적으로 팀은 분데스리가 승격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의 분데스리가 도전기는 짧은 시일 내에 끝나버렸고, 팀은 한 시즌만에 강등되었고 이후에도 분데스리가에 복귀하지 못하였다.

강등 후 헤킹은 팀은 떠나 3부 리그 레기오날리가 쥐트베스트에 속한 클럽인 파더보른-노이하우스에 이적하였고, 이 곳에서 2시즌을 머물다가 1996년 10월 16일에 레기오날리가 노어트로 추락한지 얼마 안된 하노버 96으로 이적하였다. 헤킹의 합류는 클럽의 재기로 이어졌고 팀은 리그를 2시즌간 지배하였고 각 시즌당 100골씩 득점하며 테이블 맨 위를 차지하였다. 비록 첫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패하였으나, 그 다음 해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한 하노버는 2. 분데스리가로 승격되었고, 훌륭한 성과를 이어나가 다음 시즌을 4위로 마감하였다.

하노버 96이 2부 리그로 복귀한 뒤 헤킹은 브라운슈바이크로 이적하여 1999-2000 시즌 딱 한 시즌을 보냈고 시즌 말에 팀이 새로 개편된 레기오날리가로 다음 시즌에 속하게 하였다. 헤킹은 그러나, 이 새로 개편된 리그에 출전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는 시즌 후 35세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3 국가 대표팀 경력

디터 헤킹은 독일 U-21 국가대표로 12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득점하였다.

4 감독 경력

4.1 페를

2000년 7월 1일, 헤킹은 감독직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레기오날리가 노어트의 페를을 맡았다.그의 데뷔 시즌에 팀은 충분히 경쟁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페를은 겨울 휴식기를 앞두고 7위에 랭크되었다. 그러나, 헤킹이 새 클럽을 물색한다고 선언하면서 클럽은 불쾌함을 나타냈고, 그는 감독을 맡은지 20경기만인 2001년 1월 31일에 해임되었다.

4.2 뤼베크

헤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레기오날리가 노어트의 또다른 클럽인 뤼베크의 감독으로 2001년 3월 27일에 취임하였다. 또다시 헤킹은 잔여 기간동안 훌륭한 활약을 펼쳤으나, 리그를 3위로 마치면서 1순위 차이로 승격에 실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다음 시즌에 팀은 타이틀을 획득하고 2. 분데스리가로 올라갔다. 헤킹은 이어지는 2002-03 시즌에 뤼베크를 리그 중위권에 올려놓았다. 그 다음 시즌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였는데, 팀은 다시 맨 위의 강등 순위를 차지하며 레기오날리가 노어트로 미끌어졌다. 이는 뤼베크가 헤킹과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그는 2004년 5월 25일에 클럽을 떠났다

4.3 알레마니아 아헨

또다시 헤킹은 1주일 만에 2. 분데스리가 클럽 알레마니아 아헨과 계약을 체결하였고, 2004년 7월부터 팀은 떠나는 외어흐 베어거를 대신하여 클럽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전 시즌에 아헨은 DFB-포칼 결승전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고, 경기에서 패함에도 불구하고, 팀은 UEFA컵 진출에 성공하여, 헤킹에게 유럽대항전을 맛볼 기회를 주었다. 이 곳에서, 그는 클럽을 조별 리그에 진출시켰으나, 골득실 1점 차이로 아깝게 토너먼트전 진출이 무산되었다. 유럽대항전 참가로 인한 빡빡한 경기 스케줄은 클럽을 과부하시켰으나, 팀은 리그에서 무난한 6위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 시즌 일정 방해가 없는 아헨은 분데스리가로 승격하며 36년만에 1부 리그 복귀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헤킹의 알레마니아 아헨에서의 1부 리그 경험을 짧게 되었는데, 3경기 만에 그는 2006년 9월 7일에 페터 노이루러를 경질한 분데스리가의 하노버 96으로 떠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페터 노이루러가 막판에 맡은 경기 중에는 헤킹이 이끄는 알레마니아 아헨에게 홈에서 0-3으로 패한 경기도 있었다.

4.4 하노버 96

헤킹은 2006년 9월 7일에 팀의 감독이 되었다.헤킹은 참사에 가까운 스타트를 끊고 리그 하위권에 앉은 하노버 96을 수습하였다. 팀은 DFB-포칼 8강에 진출하는 등의 선전을 거두기도 하였고, 팀은 분데스리가를 11위로 마감하며 안정적으로 잔류하였다. 2009년 8월 19일, 헤킹은 2009-10 시즌을 형편 없이 시작한 후 자진 사퇴하였다.

4.5 뉘른베르크

2009년 12월 22일, 그는 미하엘 외닝을 대신하여 뉘른베르크의 신임 감독이 되었다. 뉘른베르크 감독을 역임했을때 그 당시 뉘른베르크 선수였던 일카이 귄도간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중용하면서 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겼다.[4] DFB 포칼 이후 헤킹은 이후 볼프스부르크의 감독을 맡기 위해 클럽을 떠났다.

4.6 VfL 볼프스부르크

2012년 12월 22일, 헤킹은 볼프스부르크의 감독이 되었다.
2013/14 시즌 아쉽게 5위로 마감하여 UEFA 유로파 리그로 진출하였다. 14/15시즌 첫 개막 경기에서 바이언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그러나 후반기 개막 경기에서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주니오르 말란다를 위한 추모 경기에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전의를 불태워 4:1로 바이언에게 확실하게 되갚아줬다. 헤킹 감독의 치밀하고 노련한 점을 엿볼 수 있는 부분[5] 그 이후 레버쿠젠의 원정에서 펼쳐진 명경기는 두고 두고 회자될 경기이다. 전반까지만해도 3:0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손흥민의 헤트트릭에 힘입어 3:3으로 따라잡더니 도스트가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았지만 역습에서의 완벽한 카운터로 벨라라비에게 결국 골을 헌납하면서 4:4 90분 추가시간 그대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비에이리냐의 크로스를 받은 도스트가 레노의 문전 앞에서의 짤라먹기로 버지비터를 만들어 내면서 5:4로 이겼다. 유로파는 나폴리에게 충격적인 홈패배로 인하여 탈락이 유력하였고 원정에서는 무승부로 비기는 바람에 디터 헤킹 사단의 볼프스부르크는 유로파 8강에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DFB-포칼에서 도르트문트를 3:1로 꺾고 역전승으로 포칼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헤킹 감독의 첫번째 우승 커리어 기록이다.

그러나 다음 시즌은 참담하였다. 작년 분데스 2위의 위엄과 포칼 우승에 빛나는 시즌은 어디간데도 없고 성적이라던가 분위기가 첼시FC와 비슷하다. 자세한 항목은 VfL 볼프스부르크/2015-2016 시즌 참조

하지만 새롭게 시작되던 시즌인 2016/2017시즌 1승 3무 3패라는 부진한 성적을 마지막으로 경질되었다. 이로써 임시감독으로 볼프스부르크 2군의
감독을 맡고 있던 이스마엘이 임시 감독이 되었으며 헤킹은 볼프스부르크의 감독생활을 끝냈다.

5 여담

귄도간과의 인연도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율리안 드락슬러의 첫 프로 데뷔골을 본게 헤킹 감독이다. 헤킹 감독은 그당시 귄도간과 함께 뉘른베르크를 이끌었었고 볼프스부르크의 전임 감독이자 샬케04의 감독인 펠릭스 마가트와의 DFB 포칼에서의 대결이였는데 2:2의 접전끝에 연장전 118분경에 터진 율리안 드락슬러의 프로 데뷔 골이자 멋진 중거리 골을 본 헤킹 감독은 드락슬러가 골을 넣는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드락슬러의 팬이라고한다.드락슬러의 사생팬
  1. 연도를 아시는분은 기입해주시길 바랍니다.
  2. 서독에서의 국가대표를 말한다.
  3. 동독의 전설적인 공격수 요아힘 슈트라이히는 볼프스부르크를 두고 알로프스가 스쿼드를 잘못 꾸렸지만, 헤킹도 본인의 위기관리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뭐 그런 식으로 비평을 할정도였다. 결론은 둘다 삽질했다는거다.
  4. 자세한 내용은 일카이 귄도간항목 참조
  5. 이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주로 수비까지 위로 올라서 뒷공간이 비어 있을 것이다라는걸 알고 점유율을 버리고 역습축구로 되갚아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