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비노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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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habinod Pal
1886년 1월 27일~1967년 1월 10일

1 개요

인도 제국의 법률가. 대영제국 부역자.

법률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 일본 제국 전범들에겐 최고의 호갱님.
도쿄 전범 재판에서 일본 전범 전원의 무죄를 주장한 법률가의 수치
사적인 감정으로 잘못된 판결을 내린 최악의 인간 말종, 위선자

2 이력

1886년에 인도 벵골 주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의 길을 지망하여 캘커타 대학을 졸업하고, 1920년에 법학 석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등록했다. 1924년에 캘커타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캘커타 대학 법학부 교수를 지내면서, 1941년에는 캘커타 고등 법원의 판사로 취임했다. 1944년에는 캘커타 대학 총장에 취함하여 1946년 까지 재작했다.

1946년 5월에 도쿄 전범 재판에 인도 대표 판사로 파견되어 악명을 쌓았다.

1950년, 1952년, 1953년에 각각 일본을 방문했다.

3 도쿄 재판에서의 만행

  • 평화에 대한 죄, 반인륜범죄는 사후법이며, 죄형법정주의 입장에서 피고인들을 유죄로 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모든 피고인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할 것을 주장했다. 판사는 뉘른베르크 재판도 똑같이 갖고 있는 근본적 문제인 법의 불소급 원칙을 들어 지금 만든 법으로 이전에 저지른 전쟁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단순한 보복행위다라고 주장했다.
  • 난징 대학살 부정 : 검찰의 주장에 대해서 "선전과 과장을 참착하여야 한다.", 변호인 측 주장에 동조하여 "퇴각중인 중국병이 상당수 잔학행위를 범했다."고 판결문에 명시하였다. 사실 자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인정했지만, 책임자들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 원폭 투하와 홀로코스트 동일시 : 재판과는 전혀 상관 없는 원폭 투하와 홀로코스트를 동일시 하며 미국을 비판하였다. 전형적인 물타기 주장이다.
  • 전쟁의 정당화 헐 노트 같은 것이 제기되면 모나코룩셈부르크 조차 전쟁을 제기했을 것이라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 하였다.

4 평가

팔 판사의 경우, 단순히 이런 법리적인 문제만으로 이런 의견을 낸 것으론 보이지 않는다. 덮어놓고 '일본인을 살립시다. 일본이 옳습니다'라고나 안 했다 뿐이지, 본인의 국가나 본인 스스로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일본 편을 들어 줬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전범 재판이라는 게 그렇게 법리적으로 꿀리는 일, 단순히 연합국의 부당한 보복 조치 정도에 불과한 일이었다면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씩이나 열릴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그 법리적인 명분을 들고카와베 마사카즈[1]를 제외하고는 A급 전범 전원 사형을 주장한 델핀 판사 등도 있었고 팔 판사와 같은 견해야말로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구태여 저런 짓을 한 것이다.

일부 인도인들은 인도가 물론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일본 제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찬드라 보세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병크 중의 병크.

도쿄 전범 재판 당시 일본의 전범들을 강력히 처벌해서 모두 사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중국 판사들을 강력하게 비난하였고 심지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판사들에게도 비난을 서슴지 않으며 일본의 전범들을 한 번만 용서해주자는 의견을 확고히 했다. 당연히 중국에서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역시 마찬가지로 이 녀석을 결코 곱게 보지 않는다. 반대로 일본 극우에게는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극우들의 위인으로 극찬받고 있다. 일본의 극우들은 이 판사를 귀축영미의 비열한 보복행위에 맞서 유일하게 양심을 지킨 아시아의 의인으로 추앙하는 송덕비를 세우는가 하면 이 판사를 틈만 나면 찾아가서 감사하다고 싹싹 빌었다.

나중인 1966년에 팔 판사는 당시 일본 총리이자 이 재판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죽을 뻔했던 기시 노부스케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가는데, 이때 기시 총리로부터 일본 최고의 훈장을 수여 받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 팔 판사는 “일본이 전쟁범죄를 일으켰다고 어린이들에게 뒤틀린 죄의식을 심어줘서는 안된다”며 일본을 재차 두둔했다. 그 말 한 마디만 떼어 놓고 본다면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저 말을 하던 당시 팔 판사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일본 편들어준 거 맞다. 국제법 판사씩이나 한 것도 모자라, 전범 재판이라는 실로 역사적인 국제 법정에까지 가서 판사로 일하고 전범들의 목줄을 쥐락펴락하던 양반이, 설마 자기를 초청한 사람들이 누구이고 자신이 일본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일본 정부가 어째서 자신을 초청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전혀 없는데도 저런 소리를 한 것이다.

펄 판사는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일본인을 같은 아시아 인이랍시고 편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인에게 학살과 침략을 당한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인도차이나 등의 수많은 피해자는 깡그리 무시하고 침략 전쟁을 정당화 하는 병크를 수십 차례 꾸준히 터트렸다.

반면에 딱히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일본의 문제를 지적하는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재판 당시의 상황이나 이후 이와 같은 팔 판사의 행보를 보면, 팔 판사 본인의 친일 성향과 관계 없이 단순히 법리적인 문제만으로 전범 재판에 반대했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그렇지만 이런 라다비노드 팔 판사마저 "살면서 이런 또라이들은 처음 본다."며 경악해 하면서 "아무리 지금 만든 법으로 이전에 저지른 전쟁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단순한 보복행위일지라도 이 미친놈들은 아니다."라고 사형 판결을 내리게 만든 작자들이 있었으니...... 치치지마 식인 사건 참조. 물론 그렇다 해도 이게 딱히 대단한 건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짐승만도 못한 것들의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마주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반응일 뿐이지... 인간의 선을 아주 넘어가지는 않았다고 하겠다.

여담으로 판결문이나 강연 등에서는 서양 열강이니 백인이니 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비판하는 척 양심적이고 자주적인 지식인 코스프레하고 있지만 정작 펄 자신의 행적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한심한 수준이다. 팔은 인도 독립 운동에 거의 아무런 공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대영제국 아래 인도 제국에서 판사로서 부역했으며 도쿄 재판도 영국의 추천으로 나간 것이다. 전형적인 부역자 식민지 엘리트로서 식민지 체계에서 잘만 꿀 빨고 살던 종류의 인간인데, 그런 사람이 하는 이런 발언에 대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애초에 국제법 전문가도 아니다. 원래 세법 전문가였으며 국제법에 대한 공부도 도쿄 전범재판 직전에 시작했다.

이 사람 때문에 일본에서 인도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인도 역시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모한 싱,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라다비노드 팔을 찬드라 보세와 함께 인도와 일본 우호의 상징으로 언급하기도 했고. 기사

야스쿠니 신사에 라다비노드 팔 송덕비가 있다.

참고로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일본의 전쟁범죄 항목 등에서 승전국들의 일방적인 결정에 라다비노드 팔이 승자의 보복 운운하며 일본 전범들을 두둔했지만 그 자신도 일본의 전쟁범죄를 비난했다던가, 일본 극우들이 인도까지 가서 라다비노드 팔을 칭찬하며 감사를 표하자 라다비노드 팔의 가족들이 일본 극우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등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식의 황당한 서술이 적혀 있었다. 라다비노드 팔의 가족들이 일본에 항의한 적은 전혀 없으며 그의 아들인 프라샨토 팔은 아베 신조와의 면담 당시 “아버지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니 자랑스럽다. 아버지의 공적은 당연한 것이었고 정당했다.”, '“어떻게 전쟁 범죄에서 한쪽만을 비난하고 다른 편은 옹호할 수 있겠는가.”라는 발언을 하며 자랑스러워 했다.
  1. 카와베는 왜 무죄를 내렸나고? 임팔 작전(...) 참고 무죄를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