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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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Cordell Hull. Hull note는 이 양반 이름에서 따왔다.

1 개요

Hull Note/Outline of Proposed Basis for Agreement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ハル・ノート
헐 노트
1941년 11월 26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일본 주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와 미일교섭 대사 구루스 사부로에게 전달한 문서. 당시 미-일 갈등에서 사실상의 대일 최후통첩이었다.

문서는 머릿말, 일반적인 내용을 규정한 섹션 1, 그리고 좀더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규정된 섹션 2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섹션 2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은 10개항이다.

1. 미일 두 나라는 영국, 중국, 일본, 네덜란드, 소련, 태국, 미국 간의 다자간 불가침 조약을 체결을 위해 노력할 것.

2. 두 나라는 프랑스 령 인도차이나에 대해 프랑스의 영토 주권을 존중. 인도차이나와의 무역이나 통상에서 있어서 차별적 대우를 하지 않을 것.
3. 중화민국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 및 경찰력의 전면 철수.
4. 두 나라는 장개석 정부 외에게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을 것.
5. 영국과 기타 열강들이 중국에서의 치외 법권을 포기하게끔 미일이 노력할 것. 치외 법권 외에도 1901년 베이징 조약에서 보장한 외국인 거주지와 관련 권익도 포함한다.
6. 최혜국 대우를 기초로 하는 통상 조약 재 체결을 위한 협상 시작.
7. 미일 상호간의 자산 동결 해제.
8. -달러 환율 안정에 관한 협정 체결 및 통화 기금의 설립. 기금은 양국이 절반씩 부담.
9. 미일 두 나라가 제3국과 체결해 놓은 협정들이 이 합의의 참뜻과 태평양의 평화 유지를 침해하게 해석되지 않도록 미일 양국이 노력할 것.
10. 이 협약의 기본 원칙을 다른 나라들도 따르도록 미일 두 나라가 함께 영향력을 행사할 것.

2 배경

1941년 11월 5일 히로히토 덴노는 제국회의에서 승인한 진주만 공습 계획을 실행하기 앞서 미국과 마지막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주미 일본 대사 노무라는 미합중국 정부에 두가지를 제안하였다.

첫 제안은 1941년 11월 6일에 발표되었는데 일본군의 제한적 철수와 중일전쟁의 종료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일본 외교문의 암호코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일본이 이 제안이 받아지지 않을 경우 두 번째 제안을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41년 11월 20일 노무라 일본 대사는 두 번째 제안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의 재개, 동남아시아에서의 군사 철수, 중국에서의 군 철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일본의 이러한 태도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여 비판적 입지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 국무장관을 필두로 하는 국무부는 일본의 두번째 제안과 유사한 잠정협정안을 추진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서도 일본의 군사행동 계획이 변경되거나 철수하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다는 사실은 미국이 이러한 판단을 굳히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에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마지막으로 자국의 입장을 총 정리하고, 중국 및 대영제국, 특히 윈스턴 처칠의 입장을 수용한 헐 노트를 일본측에 제시하게 된다.

3 헐 노트에 대한 양국의 반응

미국은 헐 노트를 제안하긴 하였으나 스스로 이것을 일본 제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말레이 반도로 항해하는 일본군 수송선단이 발견되었다는 첩보가 국무장관에게 문서를 일본에게 전달하기로 한 당일에 통지되고 있었다.

타임지에 따르면, 미국의 육군장관이었던 Henry L. Stimson은 그의 일기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미 일본군의 기습공격 가능성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어놓고 있었다.

미국은 헐 노트에 공식적으로 만주를 기재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일본은 문서에 언급한 China에 만주국이 해당한다고 해석하였고, 이에 일본 수상인 도죠 히데키는 "This is an ultimatum(최후통첩)"이라 발언하여 일본은 헐 노트가 미국측의 최후통첩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헐 노트가 일본측의 제안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상당히 빠른 시간내에 통보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측의 요구사항이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 인하여 미국의 대 일본 정책은 이미 확고하여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본의 해석에 따르면 미국측의 제안을 해석하면 미국은 명시적으로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의미도 보이지 않고 무역 협정도 교섭을 시작하자는 두리뭉실한 입장인 반면에 일본측에게는 중국 및 인도차이나에서의 전면 철수와 해외 이권의 포기를 즉시 실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즉시"라는 표현은 일본측의 선입견이며 영어 원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결국 일본의 외상(외교부장관)이었던 도고 시게노리는 외교적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일본측 최후통첩보다 온건한 제안이 미국 국무성내에서 작성중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던 도고에게는 이 헐 노트는 "수십 년 동안의 교섭이 헛수고가 되었다", "일본이 그동안 쌓아 올린 국제적 지위를 모두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자포자기적 심리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도고 시게노리는 외교적 해결을 단념하고 외교교섭의 중지를 일본 대본영에 통고함으로써 평화적 해결 가능성은 사라지고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4 현대 일본에서의 해석

일본 일부에서는 이 노트가 일본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려고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의 침략국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려스럽게도 정부 관료 중에서도 암암리에 팽배해있는 주장으로 일본 우익사관의 뼈대를 이루는 문서이며, 일본 제국 옹호를 대표하는 주장이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항공자위대 막료장(참모총장)이었던 다모가미 도시오. 다행히 2008년에 항자대에서 짤렸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헐 노트로 일본은 대미 개전을 강요당한 것이며 헐 노트는 최후 통첩이다"라는 의식이 많다고 한다. 일본인이 쓴 많은 역사서에서 헐 노트 존재를 강조하고 NHK의 프로그램에서도 헐 노트를 역사의 전환점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 이정도니, 격식을 차리지 않는 경우, 즉 일본의 우익과 밀덕후들은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이야기만 하면 주문처럼 외우고 다닌다.

결론적으로,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전쟁을 개시한 일종의 피해국이라는 합리화에 오용되곤 하는 문서다.

5 평가

헐 노트에는 "극비, 시안으로서 구속력 없음(Strictly Confidential, tentative and without commitment)"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었으나, 일본측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유 없이 이 문구를 삭제하고 추밀원 및 천황에게 보냈다고 한다.[1] 이 때문에 당시 외무대신이던 도고 시게노리는 협상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해 버렸다는 이유로 당대의 거물급 외교관들이던 사토 나오다케(주소련 일본대사) 및 요시다 시게루(주영 일본대사. 후의 일본 총리)등에게 비판받기도 했다.[2]

헐 장관 본인은 헐 노트의 내용이 지나치게 강경했다고 생각했다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는 FDR은 더 유화적인 제안을 원했으나 주요 각료들은 물론 해당 제안에 대한 영국, 중국 등 동맹국들의 반발로 훨씬 강경한 내용의 헐 노트를 제시하게 되었다는 쪽이 사실에 가깝다. 실제로 헐 노트의 초안 작성을 주도한 것은 헐 장관의 국무성이었다. 단, "협상 초반에 터무니없이 강경한 요구를 내어 상대방의 양보를 끌어내는 것은 미국적인 협상 문화"라고 말해, 당시 미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는 회고담도 있다.

영국이라기보다 처칠은 미국이 일본에 유화적인 제안을 하는 것에 크게 반발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의 팽창주의가 영국이 아시아에 갖고 있던 이권(홍콩, 말레이 반도)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일 개전이야말로 미국을 독일과의 유럽전선에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일은 정작 삼국동맹의 조약 내용에 따르면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했다고 해서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해야 하는 의무는 없었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역사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점. 아무튼 히틀러도조무솔리니고 다들 또라이도 보통 또라이들이 아니다

헐 노트는 선전포고가 아니었고, 엄밀한 의미에서 최후통첩도 아니었다. 물론 미국은 일본이 헐 노트를 수용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협상 결렬이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협상의 결렬을 사유로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물론 일본도 계획상으로는 선전포고하자마자 기습적인 선빵을 날리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서 적어도 국제법을 준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달시기도 늦은데다가 그 내용도 명확한 개전의사 표시 등 국제법 상 선전포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요소를 빼먹은 불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계획대로 공습 30분 전에 선전포고가 전달되었더라도 국제법상 불법성에는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진주만과 말레이 반도 공격부대가 헐 노트가 제시되기 전 이미 출항을 완료했다는 점만 봐도, 일본이 협상 테이블 밑으로는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헐 노트로 인해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극우 내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일본이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주저없이 전쟁이라는 카드를 꺼낸 것은 불합리한 선택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며, 적어도 1941년 기준으로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패망시키고 소련의 유럽영토 대부분을 석권하는 등 유럽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물론 19세기 후반부터 미국과 일본은 민간 차원에서나 군 차원에서나 많은 교류를 가져 왔고, 일본 내에서 미국의 잠재력을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지도층 주류는 독일이 최종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고, 따라서 독일의 승리에 숟가락이라도 얹어야 한다는 견해가 미국을 두려워하는 견해를 압도하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일본이 서슴치 않고 전쟁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은 불합리하게 보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일본은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적어도 당시까지 나치 독일은 유럽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고, 일본의 지도층 역시 이번 전쟁에서 독일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만일 당시 일본이 독일이 궁극적으로 패망할 것이라는 미래를 예상했다면 독일과 동맹을 계속하는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다. 미국과의 대결에 소수의 회의적인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으나, 일본에서는 대체로 독일의 승리에 '숟가락 얹기'를 하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6 일본이 헐 노트를 승락하였을 경우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 역시 존재한다. 당초 일본측에서는 소련을 주축국으로 끌어들여 연합군에 대항한다는 구상 역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상은 일본이 소련과 중립 조약을 체결(1941년 4월 13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독소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물거품이 되었고 이에 고노에 내각에서는 차라리 이것을 구실삼아 삼국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정책을 취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으나 도조 히데키의 반대에 의하여 무산되었다. 삼국동맹은 애초부터 시작부터 반대가 많은 정책이었고 그후에도 삼국 동맹의 파기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수견해로, 당시 미일협상이 타결되고 미국이 중일전쟁에서 발을 뺐다면 일본이 중일전쟁에 전념, 중국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확실한 것은 만일 일본이 '정상적인 판단'을 하여 추축동맹 탈퇴 혹은 사보타주의 모양새를 보이고 연합군이 실효지배를 했던 동남아를 완전히 포기, 일본군을 철군하는 대신 조선, 중국에 대한 권리와 전리품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했다면 전통적으로 고립주의자들이 득세하고 무기대여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합군을 지원했던 미국이 일본과 결전을 굳이 주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역사상에서 독소전쟁은 1941년 6월, 진주만 공습은 독소전쟁 이후 1941년 12월 벌어졌다. 독일의 위협이 극대화된 시점에서 미국이 일본이 선빵을 때리지 않는 한 세계 해군력 3위를 차지하는 일본 제국과 굳이 척을 질 이유는 없는 셈이다.

기실 연합군쪽에서 중화민국이 큰 역할을 했던 것도 일본군이 추축동맹측으로 참전한 상황이었기에 실상은 어찌되었든 물량만으로 100만에 육박하는 관동군이 그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독소전쟁의 혼란상을 겪던 소련의 뒷치기를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고 때문에 백만에 달하는 일본 육군을 묶어둘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일본은 실제 적백내전 당시 시베리아를 침략한 전적이 있다.) 실제 진주만 공습 직후에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연합국에 가입한 것에서 이를 미루어 볼 수 있다. 즉 애초에 일본이 세계대전에 참전을 안했거나 연합국쪽에 확실히 붙어 중국만 공격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미국이 일본에 대해 ABCD포위망을 유지하고 압박했을지는 미지수이다.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독일식 군제 개혁을 추구하는 등 나치 독일과의 밀월관계를 유지한 전적이 있어 중일전쟁 이전에는 연합국도 중화민국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일전쟁 문서 '역사에서의 비중' 항목 참조.)

오히려 일본은 동남아에서 중화민국 군과 비교도 안되는 상대와 싸우며 군사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 중일전쟁에 더 역량을 쏟아부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는 결코 중국에 좋게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중국 침공에선 카가를 비롯한 일본군 해군도 큰 역할을 했는데 태평양 전쟁이 없었다면 당장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도 없을 것이다. 단 이 세개의 전투에서 일본은 정규항공모함만 7척[3], 전함만 3척[4]을 잃었다. 중, 경순양함, 구축함 등을 포함하면 셀 수가 없을 정도.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군 해군은 적게 봐서 90%이상의 전력을 손실했고[5] 이 전력들이 태평양 전쟁에서 소진되지 않고 중국침공에 투입되었다면 황해남중국해는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만일 일본이 정상적인 판단력을 갖추었다면 한반도와 중국 북부, 동부는 확실히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이 열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려운 것이, 중일전쟁 개전 초라면 모를까 1941년의 미-일 협상 시점에서 미국이 만주를 제외한 중국 본토에서 일본의 점령지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삼국동맹이 성립된 시점에서 중국과 독일 사이의 군사교류는 전면 중단되었고, 독일과 소련 모두에게 바람맞은 장개석은 대미외교에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중일전쟁 탓에 미국내의 반일, 혐일 여론 또한 (전쟁까지 각오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무섭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애시당초 1941년의 미-일 협상 자체가 미국의 대일 경제 제재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것이었고, 이 제재조치는 중일전쟁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항의 차원에서 시행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 내 일본의 점령지를 인정하고, 중일전쟁을 계속하는 조건으로 미-일이 합의에 이른다는 것은 정말 의미없는 가정일 뿐이다.

일본이 미국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중국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완전 철군, 중일전쟁 개점 시점으로의 원상회복 뿐이었을 것이다. 이 경우 미국도 더 이상 경제 제재를 시행할 명분을 잃었을 것이고, 일본도 만주와 조선에 대한 권리는 인정받을수 있었을 것이다. 큰일 날 뻔 했군!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적잖은 피해를 보며 얻은 거대한 점령지를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거저 내준다는 것은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만약 내각이 단독으로 이런 협상에 합의했다면 군부가 그날로 쿠데타를 일으켰을 것이다 (...) 결국 일본은 더 이상의 협상 대신 영미와의 전면적인 개전을 선택했다. 그것도 미국의 개입을 최대한 늦추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두 배제하고 미국의 뒷통수를 맛깔나게 후드려패는 방법으로(...). 예를 들어 일본이 미국을 제외하고 네덜란드와 영국에게만 선전포고를 했다면, 미국도 어떻게든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대체로 고립주의에 익숙했던 미국민의 전쟁 의지는 진주만 기습 때 만큼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미국과 개전하더라도 하와이를 제외한 필리핀, 괌, 웨이크 섬 정도로 공격 대상을 한정했다면 마찬가지로 미국민들이 받는 충격과 분노의 정도는 덜했을 것이다. 일본군이 그렇게 아끼던 점감요격작전도 실전 데뷔할 기회를 얻었을테고 이후 동남아시아의 자원지대를 확보하고 중부 태평양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벌였다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종전협상을 벌이거나, 그게 안되었더라도 실제의 전황보다는 더 나았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을 돈벌이밖에 모르는 약체 민족이라고 무시하는 견해미국의 잠재력을 제대로 높이 평가하는 견해가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켜 기왕 개전이 불가피하다면 초전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자!는 방침을 골랐고, 결국 미국과 어떠한 협상도 불가능하도록 퇴로를 막아버린 것은 결국 일본 자신이었다.

어쨋건 2차세계대전이 개전으로 치닫던 20세기 중반은 이미 19세기의 팽창적 제국주의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지 오래로, 영국, 프랑스 등 전통의 식민제국도 기존 식민지 유지하기도 벅차 쩔쩔매던 시기였다. 이런 시점에 시대착오적으로 식민지 확보로 전쟁을 일으켰던 군국주의 일본 제국을 손짓하며 기다리는 결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1. 사실 예나 지금이나 상업문서나 외교문서를 막론하고 이런 문구는 관례적으로 넣는게 맞긴 하다. 나중에 책임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발뺌할 수 있는 근거 정도(...) 다만 개전이 임박한 상황, 촉급을 다투는 외교문서에서 이 문구를 관례로 생각하고 빼버렸다는 건 정말 미친 짓이 맞다. 사실 이 담당자가 진정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일지도
  2. 요시다는 "문서를 받았을 때 절망감을 느꼈다면 바로 사직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군부도 약간은 정신을 차렸을지 모른다. 그게 남자의 도리다"라고 말했다고. 사토는 좌절상태이던 도고에게 "실망하지 말고 교섭을 끈기있게 추진하라.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설득했으나 교섭을 포기한 도고에게 실망하고 외무성 고문직을 사퇴했다고 한다.
  3.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카쿠, 즈이카쿠, 다이호
  4. 무사시, 후소, 야마시로
  5. 일본 해군이 실질적으로 가진(슈퍼 드레드노트) 전함 12척(공고급 4척, 나가토급 전함 2척, 이세급 전함 2척, 후소급 전함 2척, 야마토급 전함 2척) 중 나가토 단 한척만 반신불수 상태로 살아남았다. 정규항공모함 10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카쿠급 2척, 운류급 2척(아마기, 카츠라기), 다이호, 시나노)은 전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