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전범 재판

일본어 : 東京裁判とうきょうさいばん
영어 : Tokyo T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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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열린 국제군사재판.
정식 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極東国際軍事裁判きょくとうこくさいぐんじさいばん/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이 재판은 역사상 최악의 위선이다."

-찰스 월로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부 장군

1 내용

포츠담 선언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주요 전쟁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국제적으로 행한 군사 재판소의 재판. 1946년에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명령으로 도쿄에 설치하여 미국, 영국, 중국, 소련,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프랑스, 인도, 필리핀, 네덜란드에서 11명의 재판관이 나와 일본 전범자 도조 히데키 외 28명을 재판하였다. 재판이 열린 장소는 일본육군사관학교였던 건물의 2층 대강당이었다.[1] 본격 일본군 전범 능욕1

2 재판관

국가이름이력기타

오스트레일리아
제임스 웹 경 (Sir)오스트레일리아 연방대법원장재판소관장

캐나다
에드워드 스튜던트 맥도널퀘벡 항소 법원장

중화민국
메이루아오(梅汝璈, 매여오)중화민국 입법의원 및 변호사

3 결과

1946년 5월에 개정하여 1948[2]년에 판결을 내렸는데, 7명이 사형, 16명이 종신형, 2명이 유기금고형을 선고받았으며, 2명은 판결전 사망, 1명은 매독에 의한 정신이상으로 소추면제되었다. 쇼와 덴노도 기소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일본 민심을 돌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실질적인 권한을 박탈하고 인간선언을 하게 한 대신 왕 자리에는 남겨두었다.

천황을 기소하지 않은 또다른 이유는, 천황의 유죄를 입증할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의 28명의 재판 결과로 알 수 있듯이 사형보다 종신형이 많다. 전쟁 범죄로 천황을 기소하여 만약 범죄를 입증하지 못하거나 사형까지 이끌어내지 못하면, 오히려 이를 근거로 재판의 애매모호함이 드러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과 다르게 관련자들의 처벌과 색출이 철저하지 않은 편이었고, 몇몇 천하의 개쌍놈들이 법의 심판을 피해간 일과 반대로 다소 억울한 전범이 처형당하는 일이 생기는 등 뜨뜻미지근한 전범 재판이었다. 인도 출신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가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

이 때의 부실한 전범 숙청이 아직도 일본의 극우들로 하여금 우리는 독일 같은 전범국가랑은 달라!라고 주장하며 정신승리를 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구제불능

냉전 체제가 격화되면서 졸속 재판으로 마무리 된 측면도 적지 않다. 철의 장막으로 상징되는 냉전 체제와 중국의 공산화로 인한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위협은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를 동아시아 반공 보루로 격상시켰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미국의 일본 점렴 정책 노선도 급변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은 일본에게 더 이상 짐을 지우지 않고 정상국가로 되돌리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한 가지 재밌는 건 이 재판에 무타구치 렌야가 피고석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적을 하나하나 깔 때마다 검사 측과 판사 측은 엄청나게 비웃었고,하긴 한국 광복군의 비밀공작원 행동이니 그와 반대로 피고석에 있던 전범들의 얼굴은 굳어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연하지만 무다구치 렌야는 바로 불기소 처분하고 대신 싱가폴 군사법원으로 송치되서 2년(...)을 살게된다.[4]본격 일본군 전범 능욕2

이 재판을 다룬 매체로는 중국에서 2006년에 제작한 <동경심판(東京審判)>이 있다. 당시 중국 측 재판관을 맡은 매여오(梅汝璈)가 주인공인 영화이다.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징용, 징병된 조선인들이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형당한 일도 있었다. 전범이 된 포로 감시원들. 냉정하게 원리적, 법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과, 시대배경, 민족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에 따라 다른 의견이 나올수도 있으니 자세한 내용을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자. 다만 아무래도 우리 일이다 보니 대담 자체도 후자에 편향된 경향이 있다. 대담의 논리대로라면 추축국의 국민이나 군인들한테까지 적용되어버리는 데다가,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시점으로 연합국 포로 수만 명의 죽음을 단순히 수치로 취급하는 경향이나 포로수용소 생존자의 분노나 행동은 이성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건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게 보인다.

아시아주의에 경도된 인도 판사 라다비노드 팔이 승전국들의 일방적인 복수 운운하며 전범 전원 무죄를 주장해 논란이 많았다. 이것 때문에 일본에서는 인도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

4 판결

교수형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전시총리, 진주만 불법공격과 태평양전쟁의 총책임자로 사형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征四郞)관동군 참모장, 중국전선에서의 전쟁책임자로 사형
도이하라 겐지 (土肥原賢二)제 12방면군 사령관, 봉천습격 및 중국대륙에서의 학살죄로 사형
기무라 헤이타로 (木村兵太郞)버마방면군 사령관, 육군차관으로 영국에 대한 전쟁침략죄와 버마대학살의 책임자로 사형[5]
무토 아키라 (武藤章)제 14방면군 총참모장, 필리핀에서의 포로학살의 죄로 사형
마쓰이 이와네 (松井石根)중지나방면군 사령관, 난징 대학살의 책임자로 사형[6]
히로타 고키 (廣田弘毅)제 32대 총리, 태평양전쟁당시 침략전쟁의 정책입안자로 사형
종신형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헌병사령관 육군대신, 1955년 가석방 후 1966년 사망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7]전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 1950년 11월 3일 수감중 식도암으로 사망
하시모토 킨고로(橋本欣五郞)야전중포 제 13연대장, 중일전쟁 관련자, 1957년 폐암으로 사망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총참모부 참모총장, 1949년 1월 8일 투옥 중 직장암으로 사망
사토 겐료(佐藤賢了)육군성 군무국장, 1956년 석방, 미국을 싫어해 베트남전 반전운동에 앞장서다 1975년 2월 6일 사망
하타 슌로쿠(畑俊六)제 2총군사령관 육군원수, 1954년 가석방 후 1962년 5월 10일 사망
오오시마 히로시(大島浩)독일주재무관, 독일과의 협정가로 종신형, 1955년 감형으로 출소 후 1975년 6월 6일 사망
시마다 시게타로(嶋田繁太郞)해군 군령부총장, 1955년 석방 후 1976년 6월 7일 사망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郞)제 35대 총리, 우익선두, 1952년 병으로 가석방 후 그 해 8월 22일 사망
오카 다카즈미(岡敬純)해군 진해사령관, 1954년 석방 후 1973년 12월 4일 사망
시라토리 도시오(白鳥敏夫)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외교책임자, 1949년 6월 3일 투옥중 후두암으로 사망
호시노 나오키(星野直樹)만주국 총무장관, 1958년 석방 후 1978년 1월 26일 사망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대동아공영을 주장한 재무대신, 1955년 석방 후 1977년 4월 28일 사망
스즈키 데이이치(鈴木貞一)제 3군 참모장, 1958년 석방 후 1989년 7월 15일 사망
키도 고이치(木戶幸一)내무대신, 1955년 석방 후 1977년 4월 6일 사망
미나미 지로조선총독, 1955년 12월 5일 투옥중 사망
금고형
도고 시게노리(重光葵)외무대신, 20년형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 대신 (重光葵)외무대신, 7년형
판결 전에 병사한 자
나가노 오사미 (永野修身)해군원수, 군령부총장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제 63대 총리
불기소로 석방된 전범
가와베 마사카스무타구치 렌야아오키 가즈오아베 겐키아베 노부유키
아모 에이지안도 기사부로이사하라 히로이치로이와무라 미치요기시 노부스케
구즈 요시히사고다마 요시오고토 후미오사사카와 료이치쇼리키 마쓰타로
스마 야키치로다카하시 산키치다다 하야오다니 마사유키데라시마 겐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니시오 도시조혼다 구마타로마사키 진자부로사토미 하지메
자살한 전범들
고이즈미 지카히코고노에 후미마로하시다 구니히코혼조 시게루
병으로 석방불기소로 자택 구금 해제도주한 전범기소면제
아카기 고헤이도쿠토미 소호오타니 게이지로오카와 슈메이

5 관련 항목

  1. 구 육군사관학교가 있었던 이치가야 일대는 현재까지도 방위성의 주요 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당시 방위청의 이전계획을 이유로 구 육사건물을 철거하려는 계획이 세워졌는데, 좌익은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려는 의미에서, 우익은 당연히 뻔한이유로 모두 해당 건물의 보존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해당 건물을 해체하고 몇가지 역사적 주요 시설만 추려서 주둔지 내에 축소 이전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현재는 이치가야 방위성 주둔지 내 '1호관'으로 명명되어 있다. 당시 전범재판이 있었던 대강당 역시 그대로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방위성 견학 시 이곳 역시 돌아볼 수 있다.
  2. 2년 6개월이 넘었다. 정확히는 2년 6개월 15일.
  3. 그런데 그 라다비노드 팔 판사마저 학을 떼고 사형을 선고한 천하의 개쌍놈이 하나 있다. 치치지마의 식인귀 다치바나 요시오.
  4. 참고로 불기소 처분되어서 다른 군사법원으로 송치된 사례는 이 사람이 유일하다. 덤으로, 이 기간동안 대접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대단하다.
  5. 참고로 이놈은 인간이 아니다. 이놈은 다른 전범들과 달리 학살을 직접 지휘했다. 게다가 거부하는 부하들을 구타와 처형으로 응대했다. 아래의 마쓰이랑 달리 빼도 박도 못했다.
  6. 그런데 이쪽은 좀 억울할 수도 있다. 난징대학살 당시 마쓰이는 결핵으로 병석에 드러누워 있던 중이었고 학살 자체는 그의 부하들이 멋대로 저지른 거다.
  7. 전범재판 당시 이 자의 변호인이 야스쿠니 신사조차 능가하는 전범무덤, 이른바 순국7사묘의 근원을 제공한 산몬지쇼헤이다. 자세한 건 순국7사묘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