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맥네어

파일:Attachment/Lesley McNair.jpg
한 고집하게 생기신 분.
Lesley J. McNair, 1883.5.25~1944.7.25

1 개요

미국군인. 최종 계급은 육군 포병중장이었으며 전사 후 대장으로 추서되었고, 1942년부터 44년까지 미 육군 지상군 총사령관 자리를 맡았다. 해외주둔 미군을 위한 조직, 훈련, 보충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1차 세계대전소령 계급이었으나 35세의 나이로 임시 준장이 되어 당시 미군의 최연소 장군이 되기도 했다.[1]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전사자 중 최고 계급이며[2], 미 육군항공대의 오폭으로 전사했다.

2 졸병도 아는 미군의 주적

사실 그다지 유명한 장군은 아니나, 당시 연합군 전차병들의 숨은 원수다. 그들이 죽을 고생을 한 이유가 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바보짓을 했는가는 아래를 보면 확실하게 알수 있다.

2.1 견인식 대전차포가 좋다!

이 사람은 대전차 자주포보다 견인식 대전차포를 선호했기에 M10 울버린의 배치를 줄이고 M5 대전차포의 배치를 늘리려고 했다.

여기까지만 써놓으면 별 무리가 없다견인하는 사수들이 무리다. M10 울버린이 장비한 3인치 포[3]판터티거를 상대로 하기에는 좀 부족했던 게 현실이니, 더 강력한 대전차포가 미군에 있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M5 대전차포는 다름아닌 M10이 장비한 3인치 포를 M2 105mm 견인곡사포 포가에 얹어 만든 물건이었다. 독일군의 88mm 대공포나 영국군의 17파운더에 맞먹는 물건을 원했던 일선 장병들에게 다운그레이드된 대전차병기를 건네준 것이다! 그런 대전차포로 충분한가? 물론 17파운더도 초기형은 25파운더 야포의 포가를 이용했지만 그건 아직 포가가 개발되지 않아서 임시로 야포 포가와 결합한 것이며, 곧 전용포가가 개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장 M5 대전차포는 1문당 견인차량과 그 운전병을 포함해서 10명 가까운 필수인원이 필요했다. M10 울버린이 5명의 승무원으로 운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더 불편해진 셈이고, 이 때문에 일선부대는 M5 대전차포의 배치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플래툰 2011년 7월호와 8월호에 이 이야기가 언급되며, 맥네어를 가리켜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상관"이라며 마구 깠다. 게다가 M5는 원래 포가가 105mm 야포인 만큼 대전차포로서는 지나치게 자세가 높고 크며 무거워서 매복 및 위장도 힘들고, 유사시 접근하는 적에게 포신을 돌리기도 힘겨웠다.

게다가 견인식 대전차포 자체는 이미 2차대전 초기부터 2선급에서나 기용하는 무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위력은 좋으나 무겁고 방열하는데 시간이 걸리며, 방어력은 0에 가깝기 때문에 적 전차가 보병과 같이 합동작전을 펼치면 추풍낙엽처럼 일방적으로 당하는 일이 많았던 것. 독일이나 소련이 견인식 대전차포도 많이 쓴 이유는 돈과 물자가 딸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대가는 현장에서 병사들의 시산혈해로 돌아왔다.

물론 소련군은 참호를 파서 대전차포만 노출시키고 대전차포 운용병을 숨겨 안전하게 장전하고 사격하는 포진지를 건설하고 주변에 호위용 보병참호를 꾸미는 팍 프론트(Pak Front)전술로 사상자를 줄였다. 거기에 지원용으로 쏟아지는 스탈린의 오르간과 122mm, 152mm, 203mm야포들은 덤이었다. 이건 독일군도 비슷하게 실행했으므로 제대로 진지를 건축하고 매복한다면 그렇게까지 불리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견인식 대전차포가 이동중이나 사격후에 적의 반격을 피하려고 진지변환을 하는 도중에 적 전차와 대면하는 경우가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전차에 의해 대전차포와 조작요원이 통째로 그냥 갈려버린다.

사실 1940년 맥네어는 프랑스 전역의 전훈을 바탕으로 견인식 대전차포를 퇴출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튀니지 메드닌 전투에서 6파운드 대전차포가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는 영국군 보고서에 주목하여 견인식 대전차포의 재도입을 주장했다. 이에 일부 일선 지휘관들을 비롯한 반대파는 견인식이 공간(포외에 견인차량까지 포함하면 수송선내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훨씬 커진다)을 더 많이 차지하고 필요인원도 훨씬 많아진다고 반대했지만, 맥네어 장군이 높으신 분이었기에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미군은 어쩔 수 없이 견인식 대전차포를 배치해야 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아르덴 대공세에 이르기까지 미군 대전차포 부대는 그냥 시체가 되었다. 예를 들어 아르덴 대공세때는 독일군의 공격을 한번만 받은 경우라도 대전차포 부대가 모든 견인식 대전차포를 방기 및 망실하여 그냥 보병부대로 전락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운이 좋은 경우이고, 구축전차를 장비한 부대의 몇 배나 되는 사상자를 내는 게 일상이었다. 참다 못한 지휘관들은 대전차포를 그냥 야포로 취급해서 보병지원용으로 써먹을 정도이니 설명이 필요한가?

그래도 설명을 요구하는 나무위키러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미군 대전차포를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야포밖에 없었다. 대전차 용도로는 쓸 수가 없고, 그렇다고 포를 내버릴 수도 없으니 그렇게라도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대전차 임무는 누가 맡았냐고? 당연히 바주카가 맡았다. 그게 아니면 구축전차공군.

나중에 90mm 대전차포가 개발되긴 하지만, 대공포인 물건을 만능포화해서 배치한데다가 확실하게 연합군이 제공권을 잡는 바람에 대공포 부대가 할 일이 없어서 대전차전도 할 때 주로 사용한 경우며, 성능은 좋았지만 대전차포 부대가 주력으로 쓰기에는 무겁고 복잡해서 제대로 보급되지도 않았다. 아 망했어요.

2.2 셔먼으로 충분하다!

이 사람은 "우리 미군은 M4 셔먼의 생산에 집중해야 하며, M26 퍼싱 같은 전차는 필요없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는 높으신 분이었기에 그 주장을 실행할 권력을 갖고 있었다. 1943년 9월 13일에 M26 퍼싱 10대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맥네어 때문에 퍼싱을 500대 생산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던져진 말이 가관이다.

"호랑이는 별로 많지도 않을 것이고, 뭐 나머지 독일 전차들 따위는 셔먼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 적군의 전차는 대전차 자주포가 상대하면 된다."

문제는 '나머지 독일전차들' 중에 표범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통상적인 밀덕 위키러라면 잘 숙지하고 있듯이, 이 녀석은 독일군의 차기 주력전차였다! 덤으로 호랑이의 수는 미군의 예상보다 많았지만, 미군이 만난 티거는 3대 뿐이었다 문제는 그 호랑이를 능가하는 더 강력한 호랑이나 다른 맹수들을 만나버려서..... 재수 없는 몇몇 미군들은 레어 몬스터(?)인 4호 돌격전차 브룸베어나 슈투름티거같은 시가전용 돌격전차들을 만나서 무진장 고생하기도 했다. 슈투름티거든 브룸베어든 공통적으로 '포 한 번 쐈는데 셔먼 둘이 터져나갔다' 같은 무용담이 있는 것을 보면... 안습한 건 셔먼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전차들(판터, 티거, 티거2, 브룸베어, 슈투름티거)을 잡는 게 매우 힘들었다는 점. 하다못해 레슬리 맥네어가 치하 같은 고물덩어리가 굴러다니는 태평양 방면의 지휘관이었더라면 종전까지 셔먼으로 밀고나갈 수 있었겠지만, 유럽방면에서 셔먼으로 밀고나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졌고, 그 이후에 벌어진 참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3 모의전 조작

이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조작질하는 것은 기본으로 하는 막장행위도 저질렀다.

일단 초기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전차자주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대전차부대 vs 전차부대의 대결을 통해 대전차자주포가 전차보다 우수한 무기임을 증명했다. 근데 조작경기. 맥네어가 지지하는 청군은 사실상 한등급 높은 편제의 제병협동군. 항공기와 전차와 포병까지 있을건 다 있었다. 전차부대는 오직 전차뿐이었는데.

그의 조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청군 보급차량에 무적 판정을 내린 것. 밥차가 Power Overwhelming인 것이다! 덕분에 청군은 무적 밥차로 정찰을 아주 쉽고 편하게 했을 뿐 아니라 덤으로 무적 밥차를 방패로 써서 적군 방어선을 몰아쳤다.

더 웃긴건 이렇게 조작으로 떡칠해놨음에도 청군의 주요 성과는 매복에 기인한 것이다. 조작을 했는데도 컨트롤을 해야 대전차포는 전차를 이길 수 있었다. 이뭐……. 그야말로 일본군의 도상연습(워게임)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해서 대전차 자주포를 억지로 킹왕짱이라고 해놓은 나중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보다 견인식 대전차포가 더 낫다고 생각을 바꿔 버린다(...)

3 간접 팀킬의 대가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그의 업적 덕분에 병사들이 무거운 대전차포를 방열시키느라고 끙끙거리거나 셔먼 전차가 밥솥 터지듯이 터지는 광경을 직접 현장에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소고집이 있는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다 했다.

1944년 7월 25일, 노르망디 교두보를 돌파하기 위한 코브라 작전에 앞서 미군은 전선의 독일군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융단폭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융단폭격을 하기 위해서는 중폭격기를 다수 동원해야 하는데, 이런 종류의 폭격기는 대부분 독일 도시나 공업시설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폭격에 익숙해져서 경폭격기처럼 좁은 지역에 핀포인트 폭격을 하기에는 상당히 부적합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연합군과 독일군은 상당히 근접거리에 있어서 조금만 실수하면 오폭당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융단폭격이 없으면 돌격하는 셔먼 전차는 다 불덩어리가 될 판이므로 예정대로 폭격은 감행되었으며, 결국 예상했던 대로 오폭이 발생하고 말았다. 더욱 사태가 악화된 것은, 일단 융단폭격에서는 선도기나 선두의 폭격기가 폭격을 하면 거기서 발생되는 연기를 따라서 다른 비행기들도 폭격의 목표를 삼는 버릇이 있는데, 때마침 풍향이 연합군 진지쪽으로 바람이 흘러가는 상태라서 폭발연기가 연합군 진지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결국 사태를 파악한 연합군이 황급히 폭격정지명령을 내렸지만, 때마침 전장시찰을 나온 맥네어 장군 이하 130여명의 사상자가 나고 말았다. 이 때 얼마나 폭발이 심했는지 폭격이 끝난 후에 맥네어 장군을 식별할 수 있는 단서는 계급장뿐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2주 후에 맥네어 장군의 아들인 더글러스 맥네어 육군 대령[4]에서 일본 육군저격을 당해 전사했다. 한마디로 말해 대가 끊어진 것이다.

4 사후

비록 오폭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다음날 다시 융단폭격을 재개하기로 결정이 난데다, 전날의 폭격이 조금 하다 만 수준이라 독일군이 잠시동안은 폭격이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 낚인 것까지 합쳐진 덕에 다음날의 융단폭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걸림돌이었던 맥네어 장군이 죽자마자 그가 무리하게 추진해왔던 조치들은 빠른 속도로 바뀔 수 있었지만, 이미 생산해놓은 장비와 이를 수령한 부대가 있었고, 맥네어 정도는 아니지만 생각이 고루한 높으신 분들도 많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해당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아르덴 대공세를 맞아서 엄청난 피를 흘린 다음이었다.

5 평가

웃기는 것은 이렇게 콱막힌 사람이 1차 대전에서 훌륭한 전공을 올린 사람[5]이며, 앞서 말했듯이 최연소 장군직에 올랐고, 2차 대전시에도 데스크 업무의 달인이기도 했으며, 장병의 교육과 훈련, 주기적인 교체같은 방면에서는 훌륭한 계획을 세우고 성실한 실천을 통해 확실한 성과를 올린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실 애초에 이 사람은 전공과 능력을 나름대로 인정 받아서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니...

신문에서는 "만약 당신의 아들이나 남편이 육군복을 입고 있으면, 당신은 그의 복지나 그의 생존이 '휘트니' 맥네어에게 달리길 빌 겁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군은 해당 없다는 소린가?[6] 맥네어가 아니라면 미 육군 신병들은 기초 훈련은 대강대강 마쳤을 테고, 결과적으로 더욱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조지 C. 마셜 장군이 계획한 보충 계획을 현실화시킨 사람도 맥네어이다. 당시 미 육군에서는 신병이 들어오면 보충대로 들어갔다가 손실을 입은 부대에 바로바로 충원되었다. 원래 전통적인 유럽식 군 부대 편성은 병사를 모집한 지역 별로 부대를 편성하는게 일반적이었고, 보충병도 그 병사의 출신지 부대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해당 부대의 손실이 클 경우 해당 지역 남자의 씨가 말라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부대에 보충인원을 마련해 주는 것도 힘들다. 미군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었던 것.

또한 그는 당시 만연하던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력수급 정책을 조망하여, 흑인 장병들의 보병 및 기갑부대 복무에 적극적이었다. 유색 인종으로부터도 병력을 확보하고 훈련시켜 미국이 보유한 인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흑인 사회와 정치권의 진행 방향과도 일치하였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 대단한 것이, 당시 미국은 흑인이 원래 덜떨어진 인종이라는 편견이 전반적으로 심해서 흑인들을 전투 임무 같은 '중요한'임무에 맡길 수 없어서 흑인들 만으로 부대를 편성해 후방에 배치했다. 예외로는 제3군 소속 제761 중(中)전차대대와 육군 항공대의 터스키기 에어맨 부대가 있다. 터스키기 에어맨 부대는 흑인이 전투기 조종사 같은 복잡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나 없나를 보려고 만든 부대였다. 따라서 편견 없이 전투부대에 흑인을 마구 집어넣으려 했던 맥네어는 당시 기준으로 굉장한 진보인사였던 셈. 제761 중전차대대를 직접 찾아가 격려한 조지 S. 패튼 장군과 같이 흑인들을 밀어준 현장 지휘관들은 몇 있으나, 아예 정책 단계에서 유색 인종을 투입하려 애쓴 고위 간부는 오직 맥네어뿐이다.

덤으로 대전 초기에 중구난방에 실험정신만 가득하던 미국의 무기 개발 관련 부서 및 업체들에게 현실성이 있고 즉시 내놓을 수 있는 물건을 강압적으로 요구해서 질서를 잡은 것도 공적으로 들 수 있다. 이것이 제대로 먹힌 것이 야포 및 각종 대포. 그래서 미국 포병은 적 포병보다 강력하고 정확하며 신뢰성이 높은 대포를 충분하게 보유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군을 강군으로 만든 사람은 맞다. 아무리 사람많고 무기가 적보다 우수해도 훈련과 보급이 개판이면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의 소련군 꼴이 날게 확실하니. 위에 언급한 몇 개 분야에서 쓸데없는 고집만 없었다면 영웅으로 기록되었을 사람이라는 것. 혹은 무기 분야 자체에서 손 떼고 훈련 및 보급 분야에만 열중했다면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물론 전사할 때 나이가 61세라 노인의 고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정작 다른 나이 많은 장군들 중에도 융통성 있게 일 한 사람들이 많은게 미군이라... 굳이 따지면 3살 더 많은 맥아더 같은 경우도 유아독존급으로 자기 스타일대로 사는 사람이었지만[7] 전략 전술이나 신 장비에 관해서는 아주 유용하게 잘 써먹었다.

6 쉴드

6.1 대전차 자주포 못 써먹겠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맥네어 준장과 브루스 중령은 대전차 부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각 군종별로 상이한 요구가 나왔다는 것. 보병부대는 방어적 용도로, 기병부대는 기동부대로, 포병은 중포로. 맥네어와 브루스는 나름대로의 교리 연구를 통해 대전차 부대는 "적대적 전차의 격멸"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교리를 세웠다. 그를 위해서 대전차 부대는 군단이나 군 사령부 직할의 독립 대대로 편성되어 사령관의 결단에 따라 적 전차부대를 공격해야 했다. 그를 위하여 강력한 기동성을 갖춰야 했다. 위의 모의전 조작에서 보여지듯 맥네어도 처음에는 대전차 자주포 지지자였다. 그래서 나온 게 M3 하프트랙에 프랑스제 75mm 야포를 얹은 초기형 대전차 자주포였다. 이후 1942년 9월 본격적으로 M10 울버린이 양산되기 시작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미군의 졸전으로 유명한 카세린 협로 전투에서 제2군단장 로이드 프레덴덜 소장은 위와 같은 대전차 자주포 운용 교리를 전혀 지키지 않고 대전차 자주포 대대들을 중대 단위로 쪼개어 분산하여 매복시켜 버렸다. 이에 노련한 독일군 지휘관들은 대전차 자주포의 사거리 밖에서 관측경으로 매복한 대전차 자주포들을 발견하면 포격 지원을 요청했고, 장갑이 빈약한 M3 하프트랙이나 장갑이 아예 없는 M6 닷지 트럭을 바탕으로 제작한 초기형 대전차 자주포들은 큰 피해를 입고 만다. 게다가 돌격포 비스무리한 미국의 대전차 자주포로 공격적으로 나서기에도 무리였다. 회전포탑이 달려서 독일의 비슷한 차량보다는 전술적 유연성이 좋았지만, 종이장갑과 상부가 오픈된 포탑은 사실상 매복작전 외에는 해당 차량을 사용하기 힘들게 하는 주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차라리 독일의 구축전차는 장갑이라도 두껍기 때문에 매복에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반격타를 날릴 정도까지는 버티기 때문에 밥값을 했다.

그런데 미 육군 지휘관들은 이런 잘못된 운용과 기존 대전차 자주포들의 성능상의 문제에 의한 사태를 대전차 자주포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로 여기고 대전차 자주포에 대한 심한 악평을 해버렸다. 이탈리아 전역의 제6군단장 존 포터 루카스 소장은 대전차 자주포는 공세적 병기로 실패작이니 퇴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고 오마 브래들리도 이에 동의했으며 조지 S. 패튼까지 대전차 자주포에 불만을 표한데다, 본래 전차는 전차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기갑 병과장 제이콥 데버스는 대전차 자주포를 전차와 견인식 대전차포 조합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견인식 대전차포의 재도입은 맥네어 혼자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막대한 전비부담으로 인한 국방부의 압력을 수시로 받고 있던 맥네어로선 일선 야전 지휘관들 부터 싫어하고 전차와 비교해 가격도 큰 차이 없는[8] 대전차 자주포 배치를 줄이고 견인식 대전차포를 재도입하는게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견인식 대전차포 배치에 대한 오판은 맥네어 혼자만의 책임이 아닌 당시 미 육군 전반의 잘못된 인식과 한계에 의한 것이다.

6.2 퍼싱이 필요할까?

"호랑이는 별로 많지도 않을 것이고, 뭐 나머지 독일 전차들 따위는 셔먼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 적 전차는 대전차 자주포가 상대하면 된다."

맥네어가 이런 오판을 하게 만든 건 연합군 정보부였다. 1943년 당시 정보부가 판단한 바로는 75mm 셔먼 정도면 독일군 中전차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고, 극소수만 나온 重전차는 자주식 대전차포로 처리할 수 있었다. 일단 사실 자체는 맞았지만,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장비부족에 시달리며 제대로 보급도 못받은 소수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을 상대한 것을 추축군 전체가 그렇다는 것으로 확대한다는 것 자체가 에러였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독일 신형전차의 성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정보부를 멀리하고 현장조사를 하는게 낫습니다

또한 독소전쟁에서 쿠르스크 전투에서 투입된 5호 전차 판터가 고장을 많이 일으켰다는 소식이 정보부의 오판을 더욱 확신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당장 연합군은 독일군이 신뢰성 떨어지는 전차를 대량 투입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후에 연합군 정보부가 독일군 기갑사단이 판터를 1개 대대씩 보유하고 있다고 보고했지만, 브래들리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이를 무시했다. 문제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판터가 말썽을 일으키자 독일군은 판터를 개량, 신뢰성을 끌어올렸고, 판터의 주포는 툭하면 주저앉던 쿠르스크에서도 뛰어난 성능을 과시했다는 점이다. 언제나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그리고 커다란 전차가 은폐된 대전차포에 취약하다는 전차 무용론도 있었다. 군사 잡지 Military Affairs 1944년 여름호에 실린 빅맨(Fred K. Vigman)의 "Eclipse of the Tank"(전차의 황혼기)라는 글에는 이런 주장까지 실려있었다.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분쇄한 몽고메리의 대규모 반격은 (1차대전 당시의 전투방식과 같은) 유례 없는 중포의 대량 운용과 전차를 돌파 수단으로 사용하는 대신 지원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차는 기동력을 갖추고 있지만 대전차 병기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전장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표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차와 야포의 대결에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야포가 우세하다."

그래서 미군은 별도의 부품, 훈련, 포탄을 요구하는 퍼싱을 4,800km 떨어진 프랑스까지 실어 나를 필요를 못 느꼈다.

하지만 이건 일부 높으신 분의 기준이었고, 본문에 언급된 버나드 로 몽고메리 본인 부터가 파이어플라이를 애타게 찾았다는 점에서 이미 에러다. 패튼도 실제상황을 알고 있었고 퍼싱의 화력과 방어력에 대해서는 대만족인 상태였으므로 사실 그렇게까지 M26 퍼싱의 도입을 반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보부의 말만 100% 믿은 맥네어가 나쁜 놈이 된 것이다. 실전에서 유능한 활약을 펼친 장군들은 대부분 정보부의 말만 믿지 않고 현장을 조사하는 등 스스로 정보수집도 해서 둘을 비교한 후 종합적인 평가를 내린다는 것을 볼 때 레슬리 맥네어의 안목이 이런 면에서는 매우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저 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절대 전쟁에서 전차와 야포의 모든 조건이 동일한 경우란 게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장 야포를 들고 다니는 인간들과, 전차를 몰고 다니는 녀석들의 상황을 비교해보자. 야포 갖고 다니는 애들은 전차가 포 한 발 쏘면 설령 직격은 피하더라도 파편을 얻어맞고는 억~! 소리를 내며 죽어야 한다. 반면에 전차를 탄 놈들은? 그 두꺼운 장갑 달린 전차 덕에 아주 안전하게 한 발 한 발 조준하며 다음 발을 쏴댕길 수 있다.
거기다 당시 미국 야포 부대의 화력으로는 티거 같은 전차를 한 방에 박살내는 게 불가능했다(...) 물론 맞으면 타격이야 줄 수 있겠지만, 티거나 판터 같은 전차가 대포 한 발 맞고 박살났다는 사례는 거의 없다. 즉, 전차 한 대를 박살내려면 최소 두 세 발을 날려야 한다는 소린데, 이 때는 이미 한 발 맞고 위치가 발각되어 전차가 야포 부대를 겨눈 뒤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이하생략
이걸 굳이 동일한 조건으로 만들려면, 야포 부대를 엄청나게 두꺼운 벙커 같은 데다 집어넣고 다가오는 적 전차를 한 발 한 발 쏴재끼는 식으로 운용해야 한다. 헌데 이러면 당장 본인이 말한 야포 부대의 장점이랍시고 튀어나온 은밀성이 없는 거나 다름없어지는 데다가, 제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개입했을 때 그들이 한 일은 점령전이었지, 방어전이 아니었다. 즉, 독일군을 쫓아가며 쏘면 쐈지, 벙커 차려놓고 독일군이 오기를 기다리지는 않았다는 말(...) 당연히 이 장군님께서 말하는 저 조건이 실현될 일은 절대 없었다.

6.3 맥네어 혼자만 바보였나?

미군에 높으신 분이 맥네어 혼자만 있는 게 아닌 이상, 그 혼자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것은 부당할 수밖에 없다. 당장 이 문서에 언급되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오마 브래들리도 판터의 존재를 무시했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맥네어가 바보라도, 그의 주장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꼬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맥네어는 미군의 멍청한 대전차전 교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대표로 까이고 있다. 미 육군 지상군 총사령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 중에 죽었기에 변명을 할 기회가 없었던 탓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멕네어는 본문에도 나와있듯 자신의 잘못된 아집(본인은 그게 잘못되었다 생각하지 않았고 또 잘못된 것임을 몰랐다 해도)을 실제로 관철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 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른 최종적인 책임은 그에게 있다.
그리고 이건 일본에서도 삼대오물만 바보였나? 하는 소리나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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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령에서 장군으로 진급이라니 이상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미군은 전시진급으로 원래 자기 계급이 뭐든간에 필요한 직책에 맞는 계급을 받는게 가능하다. 다만 월급은 원래 계급의 월급을 받고, 전쟁이 끝나면 원래 계급으로 복귀.
  2.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사이먼 버크너 육군중장과 함께 미군내 유이한 중장 전사자. 포스타도 픽픽 죽어나가는 동부전선이 역시 진짜 시궁창
  3. 셔먼에 달린 76.2mm포와는 조금 다른 포
  4. 당시 맥네어 2세는 괌 전투에 신규 투입된 미 육군 77보병사단의 참모장으로 있었다.
  5. 그런데 맥네어 뿐만 아니라 1차 대전 당시 일선에서 장교로 뛴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아집이 심한 편이라고... 그런데 과거 전쟁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전장의 시간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똥별로 주화입마하는 경우는 상당히 흔하다. 당장에 그 1차대전기의 막장 똥별들조차 보불전쟁의 전훈에 집착했고 냉전기에 F-16의 개발에 이론적 공헌을 한 '전투기 마피아'들이 미사일은 사도이며 멀티롤은 공군의 주적이고 공중전은 기동성을 살린 건파이트만이 진리라는 소리를 21세기에도 주장하다가 노망났다고 욕먹고 있는것도 일맥상통.
  6. 당시 미군에 공식적인 여성 전투병 편제는 없었고, 여성 보조 편제(WAAC)만 존재했다.
  7. 우리나라에서야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좋은 점만 부각하려 하지, 맥아더는 개인적으로는 어지간히 똘끼 넘치는 에피소드가 많은 인간이다. 여차하면 대통령한테도 하극상 벌인 것을 생각 해 보면...
  8. M10 울버린의 가격이 40906달러인데 M4A4 셔먼의 가격은 46467달러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