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패리시

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네이트 서몬드네이트 아치볼트데이브 빙데이비드 로빈슨데이브 코웬스돌프 세이즈레니 윌킨스
래리 버드로버트 패리시릭 베리마이클 조던매직 존슨모제스 말론밥 페팃
빌 러셀빌 셔먼빌 커닝햄빌 월튼샤킬 오닐샘 존스스카티 피펜
아이재아 토마스얼 먼로엘빈 헤이즈엘진 베일러오스카 로버트슨웨스 언셀드윌리스 리드
윌트 체임벌린월트 프레이저제리 루카스제리 웨스트제임스 워디조지 거빈조지 마이칸
존 스탁턴존 하블리첵줄리어스 어빙카림 압둘 자바칼 말론케빈 맥헤일클라이드 드렉슬러
폴 아리진패트릭 유잉피트 마라비치하킴 올라주원할 그리어찰스 바클리밥 쿠지


0902-parish-526-history.jpg

이름Robert Lee Parish
생년월일1953년 8월 30일
213cm
체중104kg
출신학교센테너리 칼리지
포지션센터
드래프트1976년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
역대 소속팀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1976~1980)
보스턴 셀틱스(1980~1994)
샬럿 호네츠(1994~1996)
시카고 불스(1996~1997)
등번호00번
보스턴 셀틱스 영구결번
No. 00

1 개요

前 NBA 선수. 별명은 The Chief(추장). NBA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를 뛴 선수이자 NBA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던 현역 선수였다.[1]

2 일생

2.1 현역 이전

패리시는 1953년에 루이지애나 주 슈레프트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우드 고등학교 때 뛰어난 실력을 보인 덕에 수많은 대학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그는 이런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고향에 있는 대학인 센테너리 칼리지라는 무명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센테너리가 패리시의 학점을 조작한 사실이 발견되면서 그는 NCAA 토너먼트 출전 자체를 거절하고 팀에 남기로 결심, 래리 리틀 감독의 조련 아래 그는 실력을 쌓아서 올 아메리칸 선정, 1975년 팬아메리칸 농구 대회 국가대표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단, NCAA 포스트 시즌 출전은 상술한 대로 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학농구는 덩크를 금지했기 때문에 정통 기술인 슛을 해야만 했고, 이 때문에 점프 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대학 시절 마지막 시즌에서 평균 24점, 18리바운드라는 기록을 남기고 1976년에 NBA 드래프트에 신청하게 된다.

2.2 기나긴 현역 시절

1976년에 1라운드 8번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입단했지만, 팀의 부진으로 제대로 활약을 못 함에 따라 농구에 흥미를 잃었고, 결국 방탕한 생활에 빠짐과 동시에 세간의 악소문으로 인해 은퇴를 결심하다가 1980년에 보스턴 셀틱스로 입단, 그의 방황은 여기서 끝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패리시는 골든스테이트에서의 부상 병력 때문에 별로 오래 뛰지 못할 거라고 평가받은 바가 있다. 이로 인해 1980년 드래프트 당시 워리어스가 갖고 있던 3번픽+패리시<->보스턴 셀틱스가 갖고 있던 1번픽 트래이드가 이뤄진 적이 있다. 패리시 입장에서는 덤 취급을 받은 셈. 그런데 정작 오래 못 뛸 거라던 패리시는 역사상 어떤 선수보다도 오래 뛰며 명예의 전당까지 올랐다. 참고로 이때 1번픽으로 뽑힌 선수는 올스타에 딱 한번 뽑힌 조 베리 캐롤, 3번픽으로 뽑힌 선수는 역대 최고의 파워포워드 중 하나인 케빈 맥헤일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골든스테이트는 올스타 1회짜리 평범한 선수를 받고 명예의 전당급 선수를 두 명이나 넘긴 천하의 뻘짓을 한 셈이다.

보스턴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인 래리 버드, 케빈 맥헤일과 '빅 3'를 이루어 1981. 84, 86년 3번에 걸쳐 우승시키고 1985년, 87년 2번 준우승 시킴으로써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1991년에 38세의 나이로 8번째 NBA 올스타에 오르는 등 기량은 대단했다.

셀틱스가 악화 일로를 걷게 된 1994년에는 다시 한 번 우승의 꿈을 갖고 샬럿 호네츠에 입단, 이곳에서 후배들의 성장을 위한 멘토로 활동하다가 1996년에 시카고 불스에서 1시즌을 뛰고 1997년, 43세의 나이로 은퇴하게 되었다.

2.3 은퇴 이후

2003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1980년대 초중반 팀의 에이스인 래리 버드에 이은 2인자[2]여서 살짝 가리는 감이 있고, 1970년대말~80년대 초의 카림 압둘 자바, 모제스 말론과 80년대 후반의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에 끼인 세대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를 풍미했던 센터.

명예의 전당 센터이자 한때 보스턴 셀틱스에서 같이 뛰었던 빌 월튼(당시 패리시의 백업)은 그를 리그 최고의 슈팅 빅맨이라고 불렀다. 앞서 NCAA의 덩크 금지룰로 인해 카림 압둘 자바가 스카이훅슛을 익혔듯 로버트 패리시는 정확한 중거리 슛을 연마해 센터로써 미들 레인지를 포함해 어디서나 득점이 가능한 우수한 득점원이었다.

여기에 7피트의 신장과 긴 팔을 살린 수비능력도 일품이었고 스피드가 출중하여 속공수비나 1대1 수비등 다방면에서 좋은 수비로 팀의 골밑을 책임지기도 했다. 특히 그의 성실성과 도전정신, 그리고 자기관리 덕에 NBA 최고 기록인 무려 21시즌 동안 NBA 선수로써 활약했다는 측면만 봐도 패리시가 얼마나 뛰어난 빅맨인지를 알려주는 덕목.
  1. 최고령 1위는 애틀랜타 호크스여러 팀에서 총 21시즌을 뛴 센터 케빈 윌리스(2007년 현역 은퇴 당시 44세) 여담이지만, 윌리스는 마이클 조던과 드래프트 동기로 나이가 많기도 하지만 외모 탓인지 "할아버지" 이미지가 유독 강했다. 윌리스가 40세이던 03년에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그와 같이 뛰었던 스티브 커(윌리스보다 두 살 어리다)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 때 원정경기에 나섰는데 한 팬이 "이봐 윌리스! 당신 결혼했나? 우리 할머니가 댁 좀 맘에 든대!"라고 트래쉬 토킹을 시도해 스퍼스 벤치가 단체로 빵 터진 적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 시즌 스퍼스에서 우승반지를 차지했다.
  2. 80년대 초중반까지는 팀의 2옵션이었고, 80년대 중반부터는 케빈 맥헤일에 이은 3옵션이었다.